“안 나가는 게 좋아요, 사고 나기 쉽습니다. 부득이하게 외출해야 한다면 불과 관련된 곳은 피하는 게 좋아요.”염무현은 전화기 너머 분명하게 말했다.“임기욱 씨 사주가 금이라서, 불과 상극입니다. 불이 있는 곳에 가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어요.”공혜리는 정중하게 답했다.“알겠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고 대인님께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그냥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지난번에 신세 진 것도 있고요.”염무현이 진지하게 말했다.고진성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임 이사님께서 외출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호텔에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특별히 말씀드리러 왔습니다.”그러자 도우순은 웃으며 말했다.“고진성 씨가 괜한 걱정하시는 겁니다. 시내를 벗어나 칠성각에 잠깐 놀러 가는 것뿐이에요. 게다가 경호원도 대동하고 가는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맞아요, 고진성 씨 경호팀도 따라오니까 문제 될 일은 더더욱 없을 거예요.”여정연은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고진성의 경호팀이 성가실 것도 개의치 않았다.애초에 임기욱을 경호하는 것은 수비대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고진성은 염무현의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래도 안 가는 게 낫습니다!”“아니, 대체 왜 이러세요? 왜 이렇게 반대하시는 건데요!”여정연은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거칠게 쏘아붙였다.“우리는 여기 투자하러 온 거지 갇혀 있으려고 온 게 아니에요.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자유를 억압해요?”임기욱도 다소 화가 난 모습이었다.“고진성 씨는 그냥 본인 할 일을 하시면 됩니다. 불편하면 대원들 데리고 가시면 돼요.”여정연도 콧방귀를 뀌며 거들었다.“그래요, 우리 남편이 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고진성은 다소 표정이 굳어지며 에둘러 말했다.“제가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얼마 전에 비가 많이 와서 칠성각 가는 길이 망가졌어요. 지금 도로공사 중이라 차로 가지 못하는데 헛걸음할 순
게다가 본인이 직접 따라가고 헬기로 이동하니 최대한 조심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염무현이 말한 기간은 사흘이었고, 오늘이 마침 사흘째니 내일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30분 후 날아오른 헬기는 빠르게 도시 외곽에 도착했다.밑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남아있던 임기욱도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도우순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봐요, 진짜 공사 중이네요!”여정연이 아래를 가리키자 산을 오르는 유일한 길 위에 대형 공사 차량 여러 대가 있고 인부들이 펜스를 설치하는 모습이 보였다.고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도로 공사는 그가 아무렇게나 생각해 낸 핑계인데, 정말로 하고 있을 줄이야.그는 휴대폰을 꺼내 차를 타고 따라오는 대원들에게 자리에서 대기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도시 외곽 도로변에는 10여 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베테랑 팀원 중 한 명이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에 뜬 헬기가 작은 점으로 보였다.“불신 사당이 뭐 볼 게 있다고. 기껏해야 인위적으로 건축해서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는 곳일 뿐인데.”그 옆에서 젊은 대원이 물었다.“칠성각에 간다고 했잖아요, 불신 사당은 뭡니까?”그러자 나이 많은 대원이 한껏 비웃었다.“원래 이름이 불신 사당이야! 마당이 두 개에, 낡은 집만 열댓 채라, 동네 주민들도 향을 피우러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어. 나중에 여행객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서해시 주변에 마땅한 볼거리도 없고 막대한 자금을 쓸 곳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불신 사당을 재건한 거지. 그런데 불신 사당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주변의 넓은 공터까지 규모를 넓힌 다음, 나무도 심고, 건물도 세우니까 지금의 칠성각이 된 거야. 너희들은 나이도 어리고, 또 이곳이 워낙 외진 곳에 유명하지도 않아 불신 사당이라는 이름은 나이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어.”한편, 공사장 차량 옆에선, 위협적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차들을 멈춰 세웠다.맨 앞에 있던 남자는 헬기가 산
“자진 스님을 뵙습니다. 저는 줄곧 도를 믿었어요.” 여정연도 짐짓 그럴듯하게 인사를 건넸다.사실 그녀는 종교에 대한 경외심은 조금도 없었고, 오직 돈만 숭배했다.그녀가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돈을 빨리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재벌과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기 때문이었다.사람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도우순이 웃으며 말했다. “도의 높은 경지에 오르신 자진 스님께선 저희 지역에서 무척 유명하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만나 뵙기 어려운 분이죠.”그가 이렇듯 자진 도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주요하게 덩달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본인이 얼마나 제대로 준비했는지 보라고!“과찬입니다.” 자진 도인이 겸손하게 말했다.임기욱은 마음속으로 오늘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 오랫동안 종교에 빠져 집착할 정도였고, 그렇지 않았다면 비싼 값을 주고 불골 사리까지 사서 몸에 걸지 않았을 것이다.“칠성각과 인연이 닿은 귀인이시여, 서둘러 오십시오.” 자진 도인이 말했다.“안내 부탁드립니다!”한편 고진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고진성 씨, 뭐 이상한 거라도 있습니까?” 도우순이 고개를 갸웃했다.고진성은 입고 있는 제복을 가리키며 말했다.“규정상 저 같은 사람은 종교시설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습니다.”“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서요!”도우순이 꼬드겼다.“우리만 입 다물면 돼요. 이렇게 열정적으로 맞아주는데, 그래도 들어는 가야죠.”고진성은 고개를 저었다.“정말 안 됩니다!”도우순은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임 이사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쪽은 도로도 막혀 있는 데다, 헬기를 띄울 사람도 얼마 없으니 제가 따라갈게요.”고진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도우순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며 계속해서 임기욱에게 아부했다.고진성은 심심해서 정문 주변을 서성거
말을 마치고 고진성은 계속 수색을 이어갔다.얼마 안 가 2소대로부터 보고 전화가 걸려 왔다.“대장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막은 공사 차량에 사람이 없고 차 문은 잠겼습니다. 큰 차량이라 움직이기도 힘들어 저희는 차를 포기하고 직접 올라야 할 것 같습니다.”고진성은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알겠다. 올라오는 길에 수상한 사람이라도 보이면 바로 제압하도록.”같은 시각, 뒷산에서는 두 대의 SUV가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려 주위가 황폐한 곳에 있는 한 민가에 도착했다.“나와!”임기욱 일행은 사람들에 의해 거칠게 차량 밖으로 내쳐졌다.임기욱과 도우순의 얼굴은 상처들로 가득했고 여정연 역시 옷가지가 찢기고 머리는 산발이 된 것이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이곳이 어디인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 머리에는 총구가 겨눠졌고 이에 도우순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당신들 누구야. 우리를 뭐 어쩌려는 거야?”“곧 알게 될 거야.”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은 바로 아까 봤던 자진이라 칭한 스님이었지만 지금 보니 누가 봐도 사칭범 같았다. 머리에 두른 것과 옷이 바뀌니 전과 같은 영험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흉악하고 잔인한 인상만이 남았다.게다가 그 옆에 있는 이들 몸에는 검은색 뱀 이레즈미가 새겨져 있어 분위기가 한층 더 험악했다.임기욱 일행은 그들에 의해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곧이어 바닥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우두머리 남자가 그들 앞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더니 칼을 꺼내 임기욱의 목에 갖다 댔다.“당신이 바로 그 임씨 가문 가주이자 화하 상업그룹 이사인 임기욱이지?”“그... 그래!”서늘한 칼날을 마주한 임기욱은 평소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잔뜩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혹시 우리가 누군지는 아나?”남자가 일부러 손목에 새겨진 이레즈미를 보이며 묻자 임기욱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이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되물었다.“설... 설마 흑사?”흑사는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활동하는 테러 조직으로 그들의
“뭐, 뭐라고?”임기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지금 장난해? 나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어!”2천억이라니, 그것도 달러로!너무나도 쉽게 큰돈을 요구하는 그들에 임기욱은 할 말을 잃었다.“화하 상업그룹 임원중 하나인 당신이 고작 2천억 달러도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지.”남자는 손에 든 칼을 연신 휘두르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지금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은데 여기서 죽으면 그 많은 돈도 결국은 휴지 조각 신세야.”그러자 임기욱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돈이 많다고는 해도 그건 대부분 고정 자산이야. 비즈니스 하는 사람 중 대체 누가 돈을 투자에 돌리지 않고 은행에 맡기겠어?”“그건 당신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고, 돈을 못 주겠다면 우리도 슬슬 움직일 수밖에 없어. 어디, 이 여자부터 시작해 볼까?”남자는 말을 마친 후 칼을 정확히 여정연에게로 향했다.“여보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난 죽기 싫단 말이에요. 빨리 돈 줘요, 빨리!”여정연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칼을 보며 울음을 터트렸다.“돈은 다시 벌면 되잖아요. 당신은 나보다 돈이 더 중요해요?!”임기욱은 이대로 쉽게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돈이 없다고 버티면 제아무리 테러 단체라도 어쩔 수 없을 테고, 돈이 목적이라고 확실히 밝힌 이상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지금은 최대한 버텨야 한다. 그릐고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그의 얄팍한 수는 진작 그들에게 간파당해 버렸다.남자는 칼을 움켜쥐더니 망설임 없이 여정연의 목을 향해 휘둘렀고 임기욱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잠깐...!”푸쉭!“꺅!”외마디 비명과 함께 여정연의 얼굴에 새빨간 피가 튀었다. 그리고 옆에서는 남자의 비명이 들려왔다."으악!"고개를 돌려보니 도우순의 어깨에는 칼이 박혀 있었고 새빨간 피가 이리저리 흩뿌려졌다.여정연은 다친 곳 하나 없이 그저 얼굴에 피가 튀어 놀란 것뿐이었다. 그녀는 잔뜩 겁에 질려 다리가 풀려버렸고 이내 바닥
“대신 우리 셋 안전은 꼭 보장해 준다고 약속해. 아니면 단 한 푼도 못 줘!”독사는 예상외로 거래가 쉽게 성사되자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그건 걱정하지 마. 우리도 약속은 지켜. 돈만 들어오면 바로 풀어주지.”임기욱은 그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됐는지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하지만 액수가 많아서 내 개인 노트북으로 거래해야 해. 일단 날 풀어주면 호텔에 돌아가는 즉시 돈을 보낼게.”그 말에 독사가 미소를 지우더니 미간을 무섭게 치켜세웠다.“널 풀어주면 과연 네가 그 돈을 보낼까? 아니, 아마 넌 풀려나는 즉시 수비대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쳐들어올 거야.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아까 대문 앞에서 들어오려 하지 않으려 했던 그 인간은 서해시 수비대 대장일 테고, 내 말이 틀려?”임기욱은 다급하게 변명했다.“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인질들이 두 명이나 잡혔는데 내가 어떻게 경거망동하겠어! 그렇게 못 믿겠으면 날 감시할 사람도 같이 보내면 되잖아!”독사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널 감시할 인원을 아무리 많이 보내봤자 수비대들이 진을 치고 있는 이상 너는 어떻게든 구조가 되겠지. 그리고 이 두 사람 목숨을 합해도 당신보다는 값지지 않아서 말이야. 네가 이 둘을 버리고 혼자만 살려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안 그래?”독사의 말은 임기욱의 생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거금을 들여 약혼녀의 목숨을 구하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고 도우순은 솔직히 어찌 되든 상관이 없다.“당신 약혼녀를 보낼 거야. 이 여자라면 수비대들 눈에 띄어도 도망쳐 나왔다는 핑계를 대면 다시 호텔로 돌아갈 수 있을 테지. 그렇게 돈만 보내면 모두가 사는 거야.”독사의 계획은 그럴싸했다. 임기욱이 죽으면 여정연은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물려받을 재산이고 뭐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되기에 어떻게 하든 그를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여정연도 물론 그걸 알고 있었고 이내 자신을 믿어달라는 듯 임기욱을 향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임기욱이 커프스단추를 뜯어 이리저리
하지만 자신들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단 살인부터 하고 보는 집단인데 과연 독사가 하는 말을 이대로 믿어도 될까?문득 임기욱의 머릿속에 이와 같은 잠깐의 불신이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괜한 의심은 하지 말자며 여정연이 순조롭게 호텔에 도착해 돈을 보내주기만을 기다리기로 했다.기다리는 시간은 가혹하겠지만 지금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게다가 아까 칼에 찔린 곳 때문에 아직 피를 뚝뚝 흘리는 도우순에 비하면 자신은 꽤 괜찮은 상황이었다.도우순도 돈 나올 구멍을 파보면 상당히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을 테지만 2천억 달러나 요구하는 흑사에게 졸부의 푼돈 따위가 성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대로 도우순이 지혈을 못 해 죽게 돼도 그들은 신경도 안 쓸 것이다.SUV 차량의 문이 열리고 흑사 조직원들은 얼굴에 검은색 천을 두른 여정연을 길바닥에 버린 후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여정연이 낑낑거리며 몸이 일으켜 머리에 씌워진 천을 벗었을 때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마을은 물론이고 편의점 하나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여정연은 일단은 목숨이 붙어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옆에 놓인 자신의 가방을 들어 바닥에 탈탈 털었다. 거기에는 독사가 연락 수단으로 건네준 대포폰이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화장품 쿠션을 들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건 화장품이 아니라 마이크로컴퓨터 본체였고 옆에 있는 립스틱은 건전지였다. 게다가 아이섀도는 작은 모니터 화면이었고 아이라이너는 안테나였다.빠른 속도로 해당 부품들을 조립하니 금세 미니컴퓨터가 완성됐다.“역시 난 똑똑해. 돈은 이런 곳에 써야지.”여정연은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해당 미니컴퓨터는 그녀가 암거래로 임기욱의 개인 노트북을 몰래 복제한 물품이다.여정연은 욕심이 많고 돈이 전부인 여자라 배우 역시 고수입 직업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줄곧 만족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배우라는 직업은 겉모습만 화려할 뿐 촬영에 들어가면 힘든 일투성이였고 좋은 배역
하지만 이게 웬걸,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물론 돈을 이체하기 위해서는 김기욱의 개인 노트북과 비밀번호 외에 마이크로 칩까지 있어야 한다는 건 그녀도 오늘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삼중보안을 심어둔 임기욱은 역시 쉽게 볼 인물이 아닌 건 확실했다.임기욱에게 있어 오늘 납치는 재난과 다름없겠지만 여정연에게는 이보다 호재일 수 없었다.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로 칩을 본체에 꽂은 후 임기욱이 가르쳐 준 대로 이것저것 두드리자 모니터에 경악할 만한 숫자가 떴다.“8, 8천억, 그것도 달러!”생전 처음 보는 숫자에 여정연은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이 돈은 화하 상업그룹이 서해시 프로젝트에 투자하기 위해 임기욱의 계좌에 넘긴 것이었다. 사실 임기욱은 아직도 제일 상위 임원 층이 왜 이런 작은 서해시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토의해 온 것이 아닌 급작스럽게 결정 난 안건이었고 뭐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바로 8천억 원을 계좌에 보낸 것이었다.여정연은 가빠진 호흡을 애써 진정하며 탐욕스러운 눈으로 숫자를 바라봤다. 이 정도 액수면 이번 생은 돈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하나님, 드디어 저한테도 이런 기회를 주는군요!”그녀는 하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임기욱, 당신은 아마 꿈에도 생각 못 할 거야. 평생 끌어모은 자산이 마지막에는 나 여정연의 주머니에 들어갈 거라는 걸! 하하하!”그녀는 실성한 듯 웃으며 두 손을 끊임없이 놀리기 시작했다.그러자 임기욱 계좌에 있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곧 0이 되어버렸고 이내 그 돈은 모두 여정연의 비밀 계좌에 옮겨졌다.이제 그녀는 이 돈을 깨끗하게 세탁한 후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반 시간 후, 흥분을 가라앉힌 여정연은 대포폰을 들어 독사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너무나도 빨리 울린 벨소리에 독사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벌써?”“그만큼 내 약혼녀가 날 한시라도 빨리 살리고 싶다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