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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빚을 갚다

묵묵히 하영을 쳐다보던 허시원은 곧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사무실 문이 다시 닫히자, 하영은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두 손을 이마에 괴고 의자에 앉았다.

정유준의 행동으로 봐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돌아왔으니,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윙윙-

책상 위 핸드폰의 진동 소리에 하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핸드폰 화면에 엄마의 주치의인 의사 부진석의 발신 표시가 떴다. 급히 전화를 받았다.

“부 선생님!”

하영은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엄마한테 무슨 일 있나요?”

부진석이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영 씨, 지금 바로 병원에 와 줄수 있어요?]

부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하영은 즉시 일어섰다.

“네, 지금 곧바로 갈게요!”

……

20분 뒤.

코트 없이 셔츠만 하나 입은 채로 하영이 병원 앞에 나타났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재채기가 나오더니 한기가 드는 듯했다. 하영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입원 병동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어머니의 병실 입구에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껌을 씹으면서 부 의사에게 껄렁껄렁하게 말하고 있다.

그를 본 하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발소리에 부 의사와 남자는 모두 고개를 돌렸다.

강하영을 본 남자가 하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는 말투로 얘기했다.

“어머, 강 비서님 오셨네!”

하영은 미안한 표정으로 부 의사와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가죽 재킷 남자에게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주 사장님, 제가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요. 빚 독촉하는 건 이해하는데 우리 어머니의 병실에는 안 왔으면 좋겠어요…….”

주 사장이라는 남자는 계속 껌을 질근질근 씹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또 도망갔어. 네 엄마 안 찾아오면 누구를 찾겠어?”

하영은 마음속에서 치솟는 화를 참으며 주 사장이라는 자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또 얼마인가요?”

“많지 않아, 이자까지 300!”

하영은 꼴도 보기 싫었다

“지난달에도 150만 원 드렸잖아요!”

남자는 냉소하며 하영을 훑어보았다.

“그건 네 아비한테 물어봐. 암튼 차용증은 여기에 있고…… 아빠 글씨체, 알아보지? 난 단지 내가 받아야 할 돈을 챙길 뿐이야.”

말을 마치고 차용증을 꺼내 하영에게 주었다.

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병원에서 싸울 수도 없었다.

도박을 좋아하는 아버지는 늘 돈을 빌려 노름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아버지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깨진 독에 물 붓기로, 묵은 빚을 갚는 족족 또 새 빚이 더해졌다.

돈을 갚지 않으면 빚쟁이들은 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와서 이렇게 어슬렁거렸다.

어머니가 또다시 충격 받을까 두려워 하영은 화를 참기로 했다.

“좋아요! 줄게요! 그런데 만약 다음에 또 병원에 이렇게 불쑥 나타난다면, 더 이상 나에게서 돈 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말이 끝나자, 하영은 휴대전화를 꺼내 남자의 계좌로 300만 원을 이체했다.

돈을 받은 남자는 멋있는 척 휴대전화를 흔들며 그곳을 떠났다.

부진석은 관심 어린 눈길로 하영을 바라보았다.

“하영 씨, 이건 아닌 것 같아요. 하영 씨가 너무 힘들겠네요.”

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제 아빠잖아요…….”

점점 창백해지는 하영의 안색을 보고 부진석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영 씨,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고개를 저었는데 갑자기 현기증 때문에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부진석은 급히 손을 뻗어 하영을 붙잡았다. 그녀의 피부가 닿은 손바닥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하영 씨, 지금 열이 심합니다.”

평소에 온화하고 겸손한 그의 잘생긴 얼굴에 약간의 질책 어린 기색이 나타났다.

하영은 부진석이 잡은 팔을 빼서 손으로 자신의 뜨거운 얼굴을 만졌다.

“지금은 일이 너무 바빠서 쉴 수가 없어요. 약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부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는 들어가서 엄마 좀 볼게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부진석을 지나쳐 병실로 들어갔다.

누렇게 뜬 얼굴에, 움푹 들어간 볼,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하영의 가슴이 시렸다.

그녀는 재빨리 두 눈을 깜빡이며 마음을 추슬렀다.

“엄마, 오늘 링거 다 맞았어요?”

침대 위의 양운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슴 아픈 표정으로 하영을 바라보았다.

“너희 아빠가 또 너에게 민폐를 끼쳤구나.”

하영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양운희의 물컵에 물을 한 잔 따라 드렸다.

“엄마, 우린 가족이잖아요. 한 식구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하영이 모든 걸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에 양운희는 딸이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영아, 이 집에서 나가거라.”

“엄마 이런 말 더 이상 하지 마세요. 나는 엄마랑 떨어질 생각 눈곱만큼도 없거든요…….”

“아버지 빚 때문에 네 삶까지 망치게 할 수 없어!”

양운희는 갑자기 흥분했다.

하영은 억지로 가볍게 웃어넘겼다.

“엄마, 저, 연봉 높아요. 아빠 엄마가 저를 지금껏 키웠는데, 지금은 역할 바꿔서 제가 엄마 아빠께 효도를 해야죠.”

양운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효도는 이만큼 했으면 됐어. 더 이상 네 인생을 망치는 건 안 돼! 내 몸이 어떤 상황인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어! 어서 내 말 듣고, 지금이라도 당장 집을 나가는 게 어떻겠니?”

“엄마!”

하영은 다급하게 양운희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자신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럼 안 되겠어요?”

양운희는 하영의 눈가에 슬픔이 깃든 것을 보고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엄마로서 딸이 혼자 그렇게 큰 빚을 갚아가는 걸 어찌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남편이 도박을 끊을 수 없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반평생 같이 사는 동안 도박만 주야장천 했다. 밑도 끝도 없는 구멍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양운희는 눈을 질끈 감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영아, 내가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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