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앞 잔디밭은 거의 농구장 절반 정도 크기로 매우 넓었고 정원사에 의해 정연하게 가꾸어졌다.다양한 계절의 꽃이 심겨 있는 것 외에도, 키 낮게 자란 관목숲이 우거져있었다. 여기서 작디작은 반지를 찾으려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임재욱은 위층에 서서 청회색 옷을 입은 유시아가 파란 잔디밭에서 천천히 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마치 파충류 같았다.그녀는 처참한 모습으로 잔디밭에 꿇어앉아 있었다. 세심하게 한 포기의 풀마다 심지어 덤불 사이의 가지마저도 놓치지 않았다. 대개는 땅을 석 자 파려는 태도로 그 어느 구석도 놓치지 않고 찾았다.임재욱은 다소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그 불빛에 어둑하던 하늘은 쫙 갈라졌다.오후부터 날씨는 계속 흐려있었다. 심한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임재욱의 발걸음은 느려졌다. 그는 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그런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다봤다.허 씨 아주머니는 이미 나가 있었다.“유 아가씨,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비가 그치면 다시 찾으세요.”유시아는 듣지 못한 듯 전혀 풀이 죽지 않았고 여전히 잔디밭에서 더듬으면서 찾고 있었다.그것은 현우가 선물해 준 프러포즈 반지다. 평생 기념으로 간직해야 할 정도였다.설령 그녀가 원하는 대로 소현우에게 시집가지 못할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미소를 가진 한 남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대했었다는 것을, 아무리 그녀가 무뚝뚝하고, 감옥살이를 했었을지라도 전혀 싫어하지 않았었다는것을, 게다가 기회를 노려가며 그녀를 소유할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었다는것을, 그녀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그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 남자였다.그녀는 그에게 미치도록 노력해 갔다. 비록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차버렸지만, 이 반지를 남기고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하나의 기념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또 천둥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굵은 빗
임재욱은 눈을 내리깔고 아래층 잔디밭의 모습을 보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제 밑에 있습니다.”말을 마치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이 별장은 깊숙이 숨겨져 있는데다 평소에도 자주 오지 않았다. 소현우가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마저도 금방 여기로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필경 누가 그리 미련해서 억대의 별장을 자기와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사람의 이름으로 등기하겠는가?소현우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을 때는 전화가 이미 꺼져 있었다. 그는 초조하게 발만 구르며 오래도록 어머니의 병실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여사는 언제나 굽 높은 구두만 신었는데 이번에 소현우가 밀어놓음으로써 뼈를 심하게 상해 아마도 꽤 긴 시간 더는 걷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이 여사는 이내 썰렁한 병실에서 그 누구도 문안하러 오지 않음을 원망했다. 예전에는 병이 났을 때마다 심하윤이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 가지고 와서 껍질을 깎아주고 먹기 좋게 잘라서는 입에까지 넣어주며 그녀가 심심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웃곤 했다. 하지만 이제 심하윤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 역시 자신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소현우가 그녀의 재결합 요구를 거절하고 그녀의 절친과 함께 있기로 한 이상 더는 이 여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속물이 아니라, 다만 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을 따름이다. 게다가 그녀도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으니 전 남자 친구의 어머니를 보살필 필요가 없었다. 소현우는 출근도 해야 했고, 어머니한테만 집중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여사는 집에서 밥을 가져다주는 아주머니와 몇 마디 주고받을 뿐 티비를 보거나 잡지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께서도 모든 검사는 다 마쳤으니, 집에 가서 요양해도 된다고 하셨다. 뼈가 갈라진 것은 수술할 필요도 없고 또 다른 특별한 치료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뼈가 스스로 자라 잘 봉합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으며 정기적으로 재진료를 받으러 오면 된다고 했다. 이 여사는 이 소
비를 무릅쓰고 대우 그룹에 도착하고 보니 소현우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카운터 아가씨는 오늘 임 대표님께서 오전에 떠나가신 뒤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말해주었다. 소현우는 이를 악물며 대우 그룹을 나왔다. 비서에게 전화하여 부동산관리업체에 가서 임재욱의 이름으로 된 모든 부동산자료를 알아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임재욱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리라고는 바라지 말아야 했다. 소현우는 그의 아지트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방법을 대여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한차례의 폭우가 지난 뒤 이튿날 아침부터 개이기 시작했다. 햇살은 밝게 대지를 비추었고 공기는 한결 맑아졌다. 임재욱은 두 명의 비서와 함께 공교도관이 가르쳐주는 대로 정운 여자감옥의 곳곳을 참관했다. 아침에 공 교도관의 전화를 받았을 때에야 임재욱은 몇 달 전 대우 그룹이 책걸상과 책들을 주문 제작하여 정운 여자감옥에 기부했는데 마침 오늘에 도착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임재욱은 원래 다녀올 마음이 없었지만 결국 오고야 말았다. 감옥의 홀에 들어서니 회청색 죄수복을 입은 여수감자들이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쪽걸상에 일렬로 줄지어 앉아서 사람마다 책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끔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데 모두 무뚝뚝하고 겁먹은 듯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몸집이 크고 귀티가 흐르는 남자는 여기에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임 대표님께서 기부한 책과 책걸상 덕에 무미건조한 감옥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공 교도관은 뜨겁게 소개를 이어가면서 먼 곳을 가리키더니 말을 이었다. “저기는 여자감옥 구역인데 열 명이 한 칸에 갇혀있습니다. 여름에는 아침 5시에 일어나고 겨울에는 여섯 시에 일어나는데 내무정리를 하고 아침밥을 먹끼까지 한 시간 걸리며 그 뒤에 줄지어 일하러 나갑니다...”임재욱은 마당에 들어서서 쇠창살에 의해 무수하게 조각난 하늘을 바라보며 멍때리더니 천천히 물어보았다.“그녀들은 오후엔 또 무엇을 하는 거지?”“뜨개질을 합니다.”곽 경찰관은
임재욱은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차를 향해 걸어갔다.그린 레이크에 돌아왔을 때, 유시아는 한창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그녀는 순순히 임재욱이 그녀에게 준비해 준 순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도우미가 만들어준 영양죽을 먹고 있었다. 이마에 해열패치를 붙이고 손등에는 링거를 맞고 남은 테이프가 붙어있었다.허 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반지가 임재욱의 손에 있으며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임재욱은 그녀에게로 걸어가서 자신의 큰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았다.아직도 미열은 남아있었으나 이미 거의 열이 내린 상태였다. 이제 김 닥터를 불러 링거 하나쯤 더 맞으면 다 나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곁에 털썩 주저앉은 대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죽 먹고 있네?”유시아는 흰 사기 숟가락을 손에 든 채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제 반지는요?”집아래 잔디밭에서 온 오후를 더듬거려도 끝내 반지를 찾을 수 없었고 저녁이 될 떄쯤에는 이미 온몸이 얼어들어있었다. 허 씨 아주머니는 반지가 그에게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유시아는 그 반지는 사실 그가 던진 적도 없으며 줄곧 그의 손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재욱도 매우 대범하게 호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내밀더니 말했다. “돌려줄게.”유시아는 급급히 손을 뻗어 반지를 받아서 자신의 상처투성이인 손가락에 끼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죽을 먹기를 거부했다. “배가 불렀어요.”말을 마치고 이내 몸을 돌려 밖을 향해 걸어갔다. 임재욱의 곁을 지나갈 때 그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꽉 잡더니 뒤로 확 잡아당겼다. 유시아는 얼떨결에 그의 다리에 걸터앉아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어디서 얻어왔는지 모를 연고를 꺼내며 말했다. “손이 상했잖아. 약 발라야지.”그러면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에 조금씩 발라주었다. 유시아는 흠칫했다. “앗...”손은 아직도 아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임재욱은 두 손을 작게 떨더니 최대한 자
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몸을 돌려 안으며 한마디씩 뱉어냈다. “내가 어울린다면 어울리는 거야.”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받쳐 들며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반지를 가졌으니 이젠 도망이라도 가려고?”“이 반지는 원래 제 거예요...”“너도 원래는 나를 사랑했잖아.”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왜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 거지?”유시아는 침묵했다. 조금 뒤 그녀는 말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일 뿐이에요. 함께 논할 수 없어요.”“그럼, 왜 반지는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네 것인데?”유시아는 또다시 침묵했다. ‘이게 다 무슨 망나니 논리야?’임재욱은 입술을 오므리며 그녀의 왼쪽 손목을 꽉 잡고 다시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지켜보았다. 그 눈빛은 조금 음험했으며 또 약간의 불꽃이 일고 있었다. 이제 곧 불길로 번져 품에 안은 이 여자를 다 태워버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유시아는 그의 눈빛에서 일종의 위험을 읽으며 그가 또다시 자기의 반지를 빼앗아 갈까 봐 손을 빼려고 했다. 임재욱은 더더욱 움켜쥐며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좀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놔요. 임재욱 씨, 아프잖아요.”유시아는 급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눈물까지 흘러나오려 했다. “임재욱 씨, 이거 좀 놔요.”임재욱은 손목을 놓아주고는 되려 그를 안아 들더니 그녀의 몸부림에도 아랑곳없이 층계를 올랐다. 커다란 침대 위에 던져진 유시아는 공포에 떨면서 말했다. “싫어요. 임재욱 씨, 아파요...”그녀는 이 남자가 침대를 벗어나 옷차림이 단정할 때만이 사람다워 보일 뿐 침대 위에서 옷을 벗어 던지는 순간 이미 모든 수양과 자제를 벗어나 가장 원시적인 부름에만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재욱은 그녀의 두 손을 뒤로 잡아 쥐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유시아, 너 혹시 잊었을 수도 있는데 애초에 네가 먼저 나를 건드렸던 거야.”그녀가 시작했지만, 결말을 짓는 것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임재욱의 물건이라면 그는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키스 자국이든 물린 자국이든.소현우가 없어서 볼 수가 없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깨끗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다만 표면의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그를 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자기의 목을 온찜질하고 있었다. 임재욱은 그녀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 손을 뻗어 등 뒤로 껴안아 그녀의 등에 자신의 가슴을 바짝 붙이더니 장난스럽게 그녀의 목에 힘주어 키스했다. “아, 이것 봐, 또 빨개졌잖아...”그의 흔적을 지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가 흔적을 지워가는 속도는 그가 흔적을 만들어가는 속도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했다. 유시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임재욱 씨, 날 가만두지 않을 생각인 거죠? 평생 당신 곁에 둘 생각인 거죠?”임재욱은 그녀의 부드럽고 온순한 순종에 빠져들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결연한 기색을 보아내지 못한 채 말했다. “아니면? 소현우를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야?”포기하지 않더라도 이 여사가 살아있는 하나 그녀는 소 씨 집안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이 여사는 명성과 재물을 그렇게도 사랑하는데 유시아한테는 그 두 가지가 다 없었으니, 무엇으로 소현우한테 시집간단 말인가?유시아는 그의 말에 의외로 매우 평온해지더니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세수를 좀 하려고 하는데 제가 쓸 스킨케어가 있나요?"”“가져다줄게.”그에게는 마침 어느 화장품 회사의 큰 고객이 선물한 세트가 있었는데 여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비록 그다지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당분간 사용하는 데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유시아가 혼자 세수하도록 남겨두고 임재욱은 침대에 걸터앉아 유시아를 데리고 이틀쯤 나가 놀아줘야 하나를 생각했다. 아니면 영감탱이가 그의 아지트로 찾아올지도 모르니 남아있는다는 것은 방법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는데 욕실에서 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놀라
유시아는 이불속에서 몇 번을 뒤척거리더니 이내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임재욱은 그녀의 옆에서 신이 나서는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잠든 옆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자기 턱을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는 지극히 다정해 보이는 셀카를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야 핸드폰을 접고 침실을 나와 서재로 갔다. 그는 유시아를 데리고 홍콩에 이틀쯤 놀러 가려고 하다 보니 일부 일들을 미리 처리하여 떠난 뒤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도우미 아주머니가 올라와서 문을 두드렸다.“임 도련님, 저녁 준비가 다 되었으니 식사하세요.”그러자 임재욱은 컴퓨터를 끄고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아직도 자고 있어?”허 씨 아주머니는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방금 침실을 지나며 보니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열한 시 남짓 되어서야 일어났는데 너무 많이 자도 머리가 아프지 않을까요?”“내가 깨울게.”임재욱은 말을 하며 몸을 일으켜 침실쪽 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자, 그녀가 아까의 등 돌린 모습 그대로 옆으로 누워 잠들어있는 모습이 보여왔다. “시아야...”임재욱은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잠을 많이 자도 머리가 아파. 저녁 먹고 다시 재워줄게. 말 들어. 어서 일어나.”유시아는 아무 소리도 없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는 또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지만, 그녀의 얼굴이 너무 차가운 것을 느꼈다. 그는 뭔가 생각난 듯 동공이 갑자기 움츠러들더니 단번에 그녀가 덮은 이불을 제꼈다. 그때 유시아는 한 손은 주먹을 꽉 쥐고 다른 한 손에는 유리 조각이 들려있었는데 붉은 피가 그녀의 잠옷과 백색의 자수 침대 세트를 물들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녀가 더 이상 울지도 떠들지도 않은 것은 그녀가 정말로 그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뜻이 아니라 더는 그와 싸울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고 남아있기에는 내키지 않고, 그녀의 지친 마음은 죽음을 선택한 것이였다. 그녀는 깨뜨린 유리 한 조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순간적으로 절망의 빛이 짙어졌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염라대왕도 나를 원하지 않는 거지?”임재욱은 그녀의 붕대로 감긴 손목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랑 함께 있는 것이 죽기보다 더 힘들어? 그래?”“네.”유시아는 조금도 꺼리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과 함께 있는 매 순간, 저는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임 대표님, 제발 제가 훌쩍 떠나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그녀는 더는 견뎌낼 수 없었다. 소현우의 존재조차도 그가 임재욱의 곁에서 구차하게 살아가는 것을 지탱해 줄 수 없었다.그의 곁에서 그에게 날마다 짓밟히는 것은 1분 1초가 고통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유시아는 임재욱의 옆에 머물기보다 감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임재욱은 쓰게 웃으며 입가를 끌어당겨 조롱이 담긴 웃음을 짓더니 반지를 그녀의 침대맡에 놓아두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몇분 뒤 한 젊은 간병인이 들어와서 말했다. “유 아가씨, 저는 간병인 이 씨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제가 돌봐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요구가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유시아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고마워요. 임재욱 씨는요?”“금방 나가신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는 가시면서 아가씨를 잘 돌봐드리라고 부탁했어요.”유시아는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을 수가 없었다. 3일 뒤 그녀는 바닥에 내려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어 스스로 약을 바꿀 수 있게 되자 떠날 준비를 하였다. 간병인 이 씨는 그녀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유 아가씨, 아직 몸도 제대로 낫지 않으셨는데 잠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세요...”“전 이미 다 나았어요.”유시아는 그를 향해 웃으며 자기의 손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게다가 제가 상한 것은 왼손이지 오른손도 아니라서 별로 지장이 없어요. 약을 갈아붙이거나 하는 것도 얼마든지 저절로 할 수 있어요.”간병인은 그를 막을 수 없게 되자 가만히 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재욱은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