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아는 임재욱이 그녀를 데리고 홍콩행 비행기에 오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밤 비행기는 에어컨을 너무 틀어서 유시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임재욱은 스튜어디스를 불러 얇은 담요를 가져와서는 그녀의 몸에 덮어주며 말했다. “시아야, 우리 한 번도 같이 여행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번이 처음이지?”유시아는 그를 보며 담담히 웃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찌 여행만 함께 떠나지 않았겠는가?그들은 함께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너무 많아서 유시아가 절망에 이른 게 아닌가!비행기가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임재욱은 예전에 함께 들었던 호텔에 예약했다. 다만 이번에는 유시아 혼자 방을 썼다. 처음으로 밤 비행기를 탄 유시아는 몹시 피곤해서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막 잠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임재욱의 노크 소리에 잠을 깼다. “시아야, 오늘 일이 있으니 늦잠 자면 안 돼.”유시아는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어요. 바로 갈게요.”임재욱은 차에 그를 태운 뒤 또 석 선생님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갔다. “석 선생님, 안녕하세요.”임재욱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진작에 와서 재검사를 했어야 했는데, 그동안 일이 좀 늦어졌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시아에게 다시 한번 검사해 주세요...”유시아는 자기의 작은 손을 내밀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석 선생님은 그의 맥을 짚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회복이 잘 되고 있어요, 나중에 약 몇 첩 더 처방해 드릴게요. 평소에도 자양분 섭취에 신경 쓰고 철분 보충제를 많이 먹어야 합니다. 여자가 빈혈이 생기면 안색도 안 좋아져요.”유시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석 선생님은 그녀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밖으로 나가 제자들에게 약을 달이도록 분부했다. 진찰실에 단둘이 남자 임재욱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다음에 너 혼자 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데려오든지
“당연히 마셨죠...”유시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꼬박꼬박 제때 챙겨먹었다. 그녀가 마시기 싫으면 집에 가져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도 몸은 자신의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끼지 않는다면 누가 대신 아껴주겠는가!임재욱은 그녀의 말을 일단 믿으면서 손을 뻗어 트렁크를 닫고는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고 싶어? 전시회 보러 갈래?”그녀는 미술생이라 아마 매우 좋아할 것이었다. 임재욱이 남운대에서 공부할 때, 그녀는 친구들과 전시회에 자주 갔었고 한때 그와 함께 가자고 초대했던 적도 있었다. 유시아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한가롭게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여기로 오자고 한 것은 당신이 제기했어요.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당신이 정하세요. 저도 약속한 이상 따르겠어요.”그녀의 말투는 조금 쌀쌀맞기도 하고 무심한 듯하기도 했으며,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임재욱은 손을 들어 양미간을 집더니 웃으며 말했다.“내 말에 따르겠다면 일단 차에 타자. 먼저 전시회를 보고 빅토리아항의 야경을 보러 가자.”유시아는 더 말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며 임재욱의 차에 올랐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막상 전시장에 들어서자 몹시 기뻐했다. 여기에 관심도 있었던데다가 이처럼 규모가 큰 전시회는 정운에서는 보기 드물었다. 그녀는 한편으로 그림을 감상하면서 한편으로는 스태프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마치 오로지 미술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이 그녀의 몸에서는 아련히 남아있는 예전의 활발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임재욱은 휴식 구역에서 멀리 그녀를 바라보다가 큰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사줄게.”“됐어요.”유시아가 말했다. “여기 그림들은 모두 값도 엄청날 텐데...”임재욱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난 그럴만한 능력이 있어.”“전 아직 그렇게 귀중한 선물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이건 사실이었다. 예전에 임재욱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을 때도 그녀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 나온 뒤 임재욱은 그녀와 함께 부드러운 야채죽을 먹었고 이후엔 특색 있는 작은 술집에 갔다.창가에 앉으니 빅토리아 항구의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임재욱은 전에도 홍콩에 온 적이 있었지만 매번 일 때문이었다. 늘 각종 문서에 사인하고 각종 사람을 만나느라 스케줄도 늘 꽉 차있어 따로 여가를 내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그런 시간이 오래다 보니 그는 자신이 감정이 없는 일만 하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그러니 일의 속박 없이 여자와 함께 온전히 즐기기 위해 놀러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기쁘게 웨이터가 건네주는 메뉴를 받고 또 맞은편에 앉은 유시아를 보고 말했다.“뭐 마실래? 도수 낮은 과실주?”유시아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그... 그냥 오렌지 주스요. 술은 딱히 마시고 싶지 않아서...”마시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시고 취할까 봐. 그때처럼 그의 앞에서 본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봐.3일은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3일만 지나면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므로 마지막 순간에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자신에겐 칵테일을, 그녀에겐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밖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불빛이 화려하고 찬란했고 물결이 반짝이며 이 번화한 도시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그녀는 밖의 풍경을 감상했고,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호기심이 들어 입을 열었다.“유시아. 전부터 계속 궁금했었는데, 도대체 넌 내 어디가 좋았던 거야?”그는 직설적이었고 립스틱의 색도 구별할 줄 몰랐으며 더군다나 여자애를 달랠 줄도 환심을 살 줄도 몰랐다.다정하고 착한 소현우를 제외하고, 당시의 남운대에서만 해도 그보다 잘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보다 돈이 많은 사람, 그보다 잘생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녔다.그는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건지 몰랐다.유시아가 놀라더니 곧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주스가
동시에 그와 자신은 상관없는 두 사람이므로 더 이상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그때가 되어 대우 그룹과 유시아, 사업과 사랑을 모두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아쉽게도 상상뿐이지만.이튿날 유시아는 여전히 그에게 이리저리 끌려 놀러 다녔다.홍콩에 오기 전 임재욱은 여행 일정을 짜놓았었다.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놀 것까지 모두 계획했다. 그리고 유시아를 데리고 홍콩 디즈니랜드에 가서 미키마우스 머리핀을 사주고 성 앞에서 사진도 찍어주었다.유시아는 사실 그가 사진을 찍어주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떠한 영상도 그에게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임재욱은 어쨌든 조만간 결혼할 것이고, 게다가 그녀가 신부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므로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그에게서 철저히 잊히기를 바랐다.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그도 눈치채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후 빠르게 전화를 끄고 그녀를 데리고 사방으로 놀러 다녔다.노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어느덧 3일이 지났다.나흘째 되는 날 아침, 임재욱이 그녀의 방문을 노크하러 갔을 때 잡이를에 오랫동안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손잡이를 잡고 열어서야 그는 문이 잠겨있지 않고, 안에 사람도 사라졌음을 발견했다.유시아는 아침 일찍 새벽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12시가 지나자 바로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떠났다.전화를 끊고 임재욱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함께 하기가 싫었으면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떠났겠는가. 그와 함께 돌아가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방안에 유시아의 이불이 간단히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반쯤 마시다 만 물이 놓여 있었고 쓰레기통에는 각종 생활 쓰레기와 종이 뭉치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임재욱이 그 종이 뭉치를 주워 평평하게 펴놓았다. 그리고 묵묵히 유시아가 버린 그림을 바라보았다.그림 속에는 사람 한 명 없는 텅 빈 농구장이 그려져 있었다. 주변에는 강의실 건물 두 채가 있고 잔디밭이 있었다.임재욱이 그 그림을 어루만졌다. 마음이 무언가에
용재휘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야 집에 있기엔 너무 한가했으니까...”사실 그는 유시아를 걱정해서였다. 그녀는 소현우의 약혼녀이기도 했고. 그런 소현우마저 그녀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니까.그는 심지어 경찰에 신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시아가 성인이고 그와 혈연관계도 없었으므로 입건되지 않았다.용재휘는 어쩔 수 없이 교수님께 그녀를 대신해 병가를 내고 매일 학교에서 기다리기만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말 만나게 될 줄이야.그가 손에 든 필기 노트를 유시아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그럼 오늘의 필기는 유시아 씨한테 부탁할게요!”유시아가 고개를 들며 그의 말을 바로잡았다.“누나.”“네. 시아 누나.”“저리 꺼져요.”용재휘가 히죽거리며 저 멀리 달아났다.주변이 조용해지자 유시아 얼굴 위의 웃음도 서서히 사라졌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책을 꺼내 공부를 시작했다.저녁 무렵, 수업이 끝난 뒤 유시아는 책을 들고 교문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소현우의 차가 정차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용재휘가 그녀에게 귓속말했다.“이 며칠간 대표님이 매일 차를 몰고 와서 누군가를 기다렸어요. 사랑에 미친 게 분명해요!”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돌려 떠났다.소현우도 차에서 내려 그녀를 바라보며 다가왔다.“시아야...”겨우 며칠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소현우는 이전보다 훨씬 야위어 보였다. 볼이 핼쑥해 보였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두 눈은 여전히 이전처럼 맑고 생기 넘쳤다.유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그를 향해 걸어갔다.마침 그녀도 소현우에게 할 말이 많았다.식당에서 소현우는 메뉴판을 들고 익숙하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했다.“버섯크림스프 담백하게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해물죽 하나 주세요. 감사합니다!”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떠난 후에야 소현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 미안해하며 말했다.“이번 일 우리 엄마가 벌인 거라는 거 알아. 괜히 널 고생시켰어. 시아야, 용서해
“시아야!”소현우가 언성을 높이며 반지를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잘못 없는 네가 왜 벌을 받으려고 해."유시아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아뇨. 소현우 씨를 떠나는 건 저에게 벌이 아니라 해방이에요.”말을 마친 그녀가 애를 써 소현우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떠났다.-임재욱이 결근하고 홍콩으로 간 일로 임태훈은 몹시 화나 있는 상태였다.그러나 임재욱의 약혼에 응하겠다는 말에 한숨을 돌렸다.이 철없는 손자는 여태껏 순순히 그의 분부대로 행동에 옮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3일간 유시아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건지 궁금했지만, 정유라와의 약혼에 응하겠다니 임태훈은 마음의 짐이 덜어진 듯했고 그가 홍콩에 간 일도 추궁하기 귀찮아졌다.임재욱은 유시아보다 며칠 늦게 정운시로 돌아갔다. 금방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운전기사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아니나 다를까 정유라도 집에 있었다.이미 임태훈으로부터 약혼에 대한 일을 들은 그녀는 임재욱에게 각별히 친절해졌다.“재욱 씨 돌아왔네요. 밖에 더웠죠. 주스 마셔요. 방금 한건데...”임재욱은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손을 뻗어 주스를 받았다.“고마워요.”임청아는 한켠에서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한 명은 야비하고 한 명은 오만하기에 그지없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임태훈도 자연스레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흥이 나서 약혼에 대한 일을 상의하기 시작했다.“일생에 한 번뿐인 약혼이니 절대 경솔히 해서는 안 되지. 약혼에 대해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냐?”임재욱이 담담히 대답했다.“할아버지께서 바라는 대로 하죠.”임태훈이 웃으며 말했다. “둘 사이 일인데 내가 어떻게 감 놔라 배 놔라 하겠어? 그래도 너희들의 말은 들어봐야지. 젊은이들은 아이디어가 넘쳐나니.”날씨가 더운 탓인지 임재우은 괜히 짜증이 나 차갑게 할아버지를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약혼녀까지 다 준비해 놓으신 마당에 약혼식도 마저 준비해 주시죠. 좋은 일 할 거면 끝까
이튿날 오후, 임재욱은 전과 같이 퇴근 시간에 카드를 찍고 회사를 나갔다.“재욱 씨, 퇴근했어요?”옅은 핑크색 Fendi 정장을 입은 정유라가 귀빈 구역의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어왔다.그가 퇴근하면 함께 반지를 고르고 웨딩플래너를 찾아가기로 했다.그녀는 다정하게 그와 팔짱을 끼고 따뜻한 말을 했다.“하루 종일 일해서 피곤하죠? 일 끝나면 재욱 씨가 좋아하는 화이양 요리 먹으러 가요. 제가 아는 유명한 곳이 있는데 아주 정통적인 맛이에요!”임재욱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그녀가 팔짱을 끼도록 내버려두고 함께 회사 밖의 주차장으로 갔다.그가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고 할 때 뒤편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여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금방 뒤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이미 그 사람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뒤였다.주먹이 생각보다 강했으므로 임재욱은 하마터면 땅에 엎어질 뻔했다.그는 차체를 짚고 가까스로 똑바로 선 뒤 똑같이 주먹을 들어 소현우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다 큰 두 성인 남자가 이렇게 주차장에서 몸싸움하기 시작했다.정유라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대우그룹 건물을 향해 크게 외쳤다.“경비 아저씨, 여기 사람이 싸워요...”“조용히 해요!”임재욱이 차갑게 그녀에게 호통치고 명령조로 소현우를 향해 말했다.“그쪽도 떨어져요!”소현우가 그를 때리는 것은 당연히 유시아 때문이었다.임재욱은 그들 셋 사이의 일에 누군가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나 정유라는 더더욱.소현우는 눈이 벌게진 채로 임재욱을 차 문 쪽으로 쿵 밀고는 이를 사리물었다.“임재욱. 도대체 유시아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왜 나랑 헤어지자고 하는 건데?”임재욱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헤어지자고 했다고?”임재욱은 당연하게도 그가 유시아의 일로 화풀이하러 온 줄 알았다.이미 유시아가 그의 청혼을 허락했고 그가 준 약혼반
말을 마친 소현우의 주먹이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 임재욱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마음속으로 이번 주먹은 그가 마땅히 맞아야 하는 것이라 어렴풋이 생각했다.한 대 맞는 게 뭐 어때서.그는 두 번이나 유시아가 손목을 긋게 했는데.꼴 좋다.정말 통쾌하구나.임재욱을 때린 후 소현우는 그를 제자리에 남긴 채 훌쩍 떠나버렸다.“재욱 씨...”정유라가 그에게 달려와 쪼그려 앉아 그를 부축했다.“재욱 씨, 괜찮아요?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이때 임재욱의 몸은 온통 흙투성이였고 발에 차인 곳은 여전히 얼얼하게 아팠다.30여 년을 살면서 이렇게 낭패하긴 처음이다.정유라가 그를 부축해 차에 올랐다. 그녀가 차를 몰고 병원에 가려고 하자 임재욱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내려요. 병원 안 갈 거니까.”의기소침한 듯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낯선 사람에게 절대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정유라가 무어라 말하고 싶은듯했지만 결국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임재욱이 그녀와의 약혼에 응했어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는걸. 그래서 그를 거역할 수도, 그에게 애교를 부릴 자격도 없다는걸.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아야만 그의 곁에 오래 있을 수 있다.차 내부가 드디어 고요함을 찾았다.임재욱은 연락처에서 유시아의 번호를 찾아 한참을 응시했다. 그러나 전화를 걸 용기는 없었다.아마 3년 전 그가 유시아를 감옥에 보낸 순간부터 그는 이미 그녀에게 있어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매번 그녀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 태도가 온화했든 포악했든. 그녀를 곁에 두고 괴롭히든, 혹은 아이 대하듯 그녀를 데리고 디즈니랜드로 놀러 가든. 그녀에게 있어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마다 마음속의 흉터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다시 찢는 것과 같았으니.그가 가까이 가지 않아야 그녀가 아프지 않을 것이다.임재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가의 피를 문질러 지웠다. 그리고 그린레이크를 향해 차를 몰았다.-벌써 기말
늦은 밤, 유시아의 카카오톡을 받았을 때 임재욱은 병원에 있었다.신시연은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진료실에서 여러 검사를 받았고 그동안에 임재욱은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늦은 밤의 사립 병원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당직을 서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외에 거의 사람이 없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임재욱은 복도를 한참이나 누비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유시아를 병원으로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길에 신시연의 전화를 받고서 오게 된 것이다.배가 아프다고.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아프다고.신시연은 며칠 전에 병원에서 여러 번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해외에서 그러한 몹쓸 짓을 당하며 우울증과 부인병이 있는 외에 다른 수치들은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그 말인즉슨,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재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신시연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임재욱 하나뿐이니 어찌 됐든 그녀를 잘 지켜야 하는 마음뿐이었다.그 누구에게도 다시는 상처를 받지 않게끔.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여 임재욱은 그녀를 직접 병원까지 데리고 오고 의사 선생님 입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확답을 듣고 나야만 마음이 놓일 수 있다.애타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렸다.유시아가 보낸 카카오톡인데,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보고 싶어요.]임재욱은 고개를 숙인 채 카톡 내용을 거듭 곱씹으며 유시아 사진으로 되어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올라갔다.‘내가 보고 싶어? 별거한 지 하루 만에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우리 시아 이제 제법 솔직하네.’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고 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렸다.도우미 김향화가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신시연을 부축하고 걸어 나왔다.신시연은 디자인이 아주 심플한 데님 스커트를 입었고 윤기가 별로 없어 보이는 머리를 돌돌 말아 묶어 올렸다.무척이나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여운 느낌도 물씬 풍기고 있어 기고만장했던 그
유리 구두를 품속에 꼭 안고 있는 유시아를 보고서 임재욱은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참으로 달래기 쉬운 여자라는 것을.특히 결혼하고 나서 아주 살짝만 잘해주어도 유시아는 아주 오랫동안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유시아는 늘 임재욱 앞에만 서면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자기를 낮은 위치에 놓는 데 습관 되어 있다.임재욱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수리에 뽀뽀했다.“앞으로 매년 생일마다 예쁜 유리 구두 선물해 줄게. 어때?”“좋아요.”유시아는 말하면서 아주 유치하게 그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손가락 걸고 약속해요. 절대 어기지 않겠다고.”백화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화실로 향했다.새로 구매한 공예품을 적당한 자리에 올려놓고 유시아의 제안으로 이채련의 병원까지 바래다주었다.유시아는 자기가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타입이라 이채련과 이미 약속했으니 꼭 지켜야 했다.하물며 자식도 없는 이체련에게 마지막 이 시간들이 더더욱 외로울 것이다.외부인들이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로 외롭다.임재욱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고 이채련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보내주었다.차는 곧 사립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임재욱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유시아는 차창에 대고 거듭 강조했다.“유리 구두랑 드레스들 옷방에 고이 모셔두도록 해요. 마구 놓지 말고요.”“알았어.”임재욱은 말하고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목을 확 잡고서 찐한 키스를 남기고 나서야 순순히 놓아 주었다.“얼른 가 봐.”“조심해서 가요.”임재욱은 조수석에 앉아 한결 가벼워진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시선을 거두고 집으로 향하려고 했다.가는 길에 갑자기 신시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오빠, 배가 너무 아파요.”...병실로 돌아와 보니 이채련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침대에 멍하니 누워 재미가 일도 없는 예능 프로를 보고 있었다.유시아가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채련은 놀라고도 기뻤다.“시아야,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유시아
쇼핑은 늘 설레는 일이다.유시아는 자기 취향대로 화실 장식품으로 쓰일 공예품을 골랐다.이윽고 임재욱은 또 유시아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매점으로 향했다.지난번에 두 사람은 함께 쇼핑하면서 많은 옷을 샀었지만, 신서현 부모님께 갑작스러운 상황이 일어나면서 유시아는 그 모든 옷을 모조리 청소 아주머니에게 줘 버렸다.그때의 아쉬움을 채워주기 위해 임재욱은 또다시 쇼핑하려고 한 것이다.게다가 다음 주면 대우 그룹 상장 20주년이다.정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유시아를 자기 아내 신분으로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이브닝 파티에 어울릴만한 드레스와 신발을 살 예정이다.드레스는 그럭저럭 큰마음이 가지 않았는데, 유시아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었다.은백색의 하이힐로 예쁜 보석들로 가득 박혀 있어 매점 불빛 아래서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에 나올 법한 유리 구두 같았다.매점 직원은 유시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로 다가왔다.“손님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이 제품은 저희 디자이너 선생님의 최신 디자인으로 지금 딱 한 켤레만 있습니다. 만약 이 신발을 신고 나가신다면...”임재욱은 갑자기 직원의 말을 끊어버렸다.“이미 결혼했고요. 이 사람은 제 아내예요.”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는데, 자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고서 따라서 웃었다.“맞아요. 이 사람이 제 남편이에요.”매점 직원은 멍하니 있다가 바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베스트 쇼핑 가이드다운 실력을 드러냈다.“어머, 어쩐지 너무 어울리신다 했어요...”직원의 칭찬에 두 사람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이윽고 매점 직원은 분위기를 파악하며 유리 구두에 대해 더욱 디테일한 설명을 첨부하기 시작했다.“이 제품의 새끼 양가죽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착용감이 엄청 좋으실 거예요. 하루 종일 신고 걸으셔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이 즉흥으로 만들어내신 작품이라 절대 똑같은 제품을 시중에서 보실 수 없을 거예요.”한 켤레일 뿐만 아니라 사이
한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뭐?”“한서준 씨는 당당해요?”유시아는 바로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임씨 가문에 접근한 그 의도를 다른 사람들이 모를 것 같아요? 할아버지, 재욱 씨 그리고 나까지 똑똑히 알고 있어요. 청아 씨만이 한서준 씨를 사랑해서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고요. 그렇게 쭉 모르는 척을 하며 모든 걸 감당하고 있었던 거라고요. 한서준 씨 역시 청아 씨를 이용한 게 아닌가요?”마지막 한 마디에 한서준은 침묵하고 말았다.그렇다. 임청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유시아가 ‘스파이’로 움직여 주지 않겠다고 거절했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임씨 가문 천금을 노리게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변하게 되어 있다.임청아 대한 마음은 모략에서 시작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마음이 점점 사랑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띠고 다가왔던 임청아가 어두운 자신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따라서 한서준은 임청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츰 생기게 된 것이다.임태훈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꼭 자기 곁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청아 씨 지금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에요.”“만약 청아 씨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게 좋을 거예요.” 말을 마치고 유시아는 차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려 병원 밖으로 걸어갔다.택시에 오른 유시아는 긴 망설임 끝에 끝내는 더 스케치 화실 주소를 운전 기사에게 알렸다.차는 화실 맞은 편에 세워졌고 유시아는 화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화실 안의 상황을 바로 체크할 수 있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수많은 경호원들이 임태훈을 사이에 두고 화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임태훈은 벤틀리에 올라 강한 기운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렸다.유시아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바로 화실로 향해 달려갔다.화실 안과 밖은 겉은
전화를 마치고 유시아는 혼자 밖에 없는 휴게실을 보고서 깊은 번뇌에 잠겼다.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임태훈처럼 막무가내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인이 있다는 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임태훈이 끔찍이 여기는 임청아를 유시아가 계단에서 밀어버린 것도 아닌데, 왜 애꿎은 자기 화실을 닫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집안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일단 남한테서 문제를 찾고 있으니,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다.유시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고 불안함도 점점 커졌다.지금 운영하고 있는 더 스케치 화실도 용재휘가 먼저 시작한 것인데, 그와 더불어 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넘겨주었는데, 만약 이대로 화실을 망쳐버린다면 용재휘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임재욱과 임태훈이 어느 정도로 얘기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화실이 그들 싸움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임재욱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용기가 없어 일단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그렇게 한참이나 심장을 조이고 있었지만, 걸려 오는 전화는 없었다.유시아는 일이 어느 정도 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 채팅방에 오늘 갑자기 일이 있다며 수업을 뒤로 미룬다고 알렸다.언제 다시 수업을 시작할지는 소식을 기다리라며 덧붙이기까지 했다.톡을 보내고서 유시아는 더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바로 병원 밖으로 나갔다.그러나 병원 대문을 나오자마자 한서준이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유시아.”유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그를 보게 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 났다.직감이 알려주건대, 절대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화실의 생존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의 심기까지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한서준은 쉽사리 유시아를 놓아 주지 않았고 손을 내밀어 유시아의 손목을 꼭 잡았다.“물어볼 일이 있어.”말하면서 근처에 있는 지프차를 가리켰다.“차에 타서 얘기 하자.”“그쪽이랑 할 말
유시아는 그 말을 이어받지 않고 집사의 바람대로 타이르기 시작했다.“몸이 아직 많이 허약해요. 먹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라도 좀 먹어야 하거든요. 일이 어찌 됐든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 해요.”임청아 그 말을 듣고서 쓴웃음을 지었다.“건강 회복되면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서 집에 감금되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어찌 됐든 할아버지 마음은 한결같을 거예요. 청아 씨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요. 서로 대화가 필요한 거 같아요. 서로 터놓고 얘기하고 나면 오해가 풀리고 마음도 풀리면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임청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아이 낳고 나면 할아버지도 서준이도 원한을 내려놓고 행복만 할 수 있다고요.”“근데 이렇게 몸도 아끼지 않고 점점 더 막무가내로 나가면 두 사람 사이의 원한은 점점 더 짙어질 거예요.”유시아는 말하면서 도우미 손에서 보신탕을 가져와 천천히 불며 임청아의 입가로 가져갔다.임청아는 생각 밖으로 무척이나 순순하게 유시아의 말을 따랐고 그녀의 말에 이치가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보신탕을 받아 마셨다.도우미와 집사는 두 사람이 티키타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임청아가 뭐라도 먹기 시작하여 자기도 모르게 한시름을 놓으며 자리까지 비켜주려고 했다.두 사람이 마음 편히 말할 수 없을까 봐 눈치껏 일어서려는 것이다.“작은 사모님, 아가씨와 천천히 얘기하고 계세요. 밖에 나가 있을 테니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부르시고요.”“네, 가보세요.”도우미 일행이 나오고 나서야 유시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한서준 씨는 알고 있어요?”임청아는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그런다고 숨겨질 일도 아니잖아요.”요즘 임태훈뿐만 아니라 한서준도 눈을 부라리고 임청아를 찾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자 아파트도 호텔도 들어갈 수 없었고 버려진 강아지처럼 유시아 화실에 몸을 숨기고 지낸 것
임청아 이름 석 자가 임재욱의 입에서 나오자, 유시아는 순간 청천벽력을 맞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청아 씨가 왜 병원에 있는 거죠?”임청아는 임신한 것을 알고 매사에 조심하며 걸음 하나도 천천히 옮겼었다.게다가 해외에 있는 친구와 연락하여 해외로 떠날 준비까지 마쳤다고 했었다.그런데 관건이 되는 순간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고?“할아버지를 너무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임재욱은 말하면서 차갑게 웃었다.“네 화실에 청아 숨겨 놓았잖아. 할아버지께서 그걸 과연 모르고 있었을 것 같아? 오늘 화실로 청아 데리러 갔었는데, 가지 않겠다고 청아가 하도 우기는 바람에 억지로 묶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며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거야.”그렇다면 아이를 유산했을지도 모른다.임태훈의 습관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이 화살은 결국 유시아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임재욱이 그렇게 경고하였건만 유시아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다.약해지는 마음에 언젠가는 구렁이에 빠지게 될 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일 줄은 몰랐다. 임재욱은 한숨을 내쉬며 꾸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병원 주소 보내줄 테니 얼른 가 봐.”말을 마치고 임재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고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었다.같은 시각, 병원 안에서.임청아는 이미 수술을 마쳤고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있었다.이미 가문의 집사와 간호인이 옆에 있었고 병실 문 앞에는 임태훈이 보낸 경호원도 있었다.다만 경호원이 경계해야 할 상대는 유시아가 아니라 한서준이다.따라서 유시아는 별다른 막힘없이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상에 누워 있는 임청아는 얼굴에 핏기 하나 없었고 초점을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활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집사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주 공손하게 유시아에
조금 전까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던 임재욱은 멈칫거리고 말았다.이윽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별거하자는 뜻이야?”“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유시아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머리가 아픈 듯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그 시간으로 시연이한테 집중해도 되잖아요. 나도 마침 어머님 곁에 좀 있어드리고... 서로에게 지금 이게 최우선인 것 같아요.”임재욱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서 낙담한 모습으로 말했다.“그래. 네가 좋다고 하면 그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하자.”말을 마치고 그는 계속 밥을 먹었다.유시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고서 아련하게 웃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이튿날 아침, 유시아는 임재욱이 출근하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상복 몇 벌과 일상용품을 챙겨 작은 트렁크 안에 놓고 바로 이채련한테 가려고 했다.허씨 아주머니는 트렁크를 들고 내려오는 유시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사모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가출하려는 건 아니죠?”유시아는 허씨 아주머니를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친척분이 좀 위독하신데 제가 옆에서 좀 챙겨드리고 싶어서 가는 거예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고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트렁크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이채련이 지내고 있는 병실이 VIP 병실로 널찍한 객실까지 갖춰져 있다.유시아는 간호사에게 접이식 침대와 이불을 요구했고 간단히 정리하고 나니 잘 자리가 아늑하게 마련되었다.이채련은 더 이상 침대에서 내려올 수 없어 하루 24시간을 침대 위에서 보내고 있다.얼굴도 하도 여위어 본연의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그전에도 유시아는 이채련에게 이곳에서 며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지만 이채련은 행여나 자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흠이 생기게 될까 봐 동의하지 않았었다.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만으로도 갖은 풍
임재욱은 핸들을 꼭 움켜쥐고서 앞만 바라보았으나 두 눈에는 고통과 망연함이 가득했다.“시연이 해외에 있을 때, 몹쓸 짓을 당했어.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그래서 우울증에 걸리게 된 거야.”유시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볼륨까지 높아졌다.“어머, 어떡해요!”평소에 신시연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다.여자에게 있어서 그런 몹쓸 짓을 당한다는 건 치명적인 타격과 치욕이 아닐 수가 없다.게다가 부모님의 일까지 더해지니 조금 전 식당에서 봤던 신시연의 모습이 이해되었다.임재욱은 말하면서 후회와 자책하는 빛을 드러냈다.“그렇게 가고 싶지 않다는 시연이를 내가 억지로 보낸 거야.”그때는 모든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낯선 곳으로 가서 마음을 가다듬고 학업에만 집중하면 자연스레 모든 걸 잊고 새로운 삶을 그려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하지만 임재욱이 잊고 있었던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신시연이 이제 갓 20살을 넘은 꽃다운 여자아이라는 것이다.해외에는 불안정 요소도 많고 미처 생각지 못하는 위험도 많다.게다가 젊은 나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길로 들어서기도 아주 위험하고 말이다.신시연 곁에 사람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24시간 동안 찰싹 달라붙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유시아와 결혼하고 나서 신혼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신시연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지금 임재욱은 신서현에게 미안할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하지만 그가 말한 본의와 달리 듣고 있는 유시아는 또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유시아의 기억으로는 신시연이 해외로 보내진 이유는 이러하다.그때 신시연은 정운시 대학교 교내 사이트에 유시아를 먹칠하는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시아로 하여금 학업을 이어갈 수도 수업을 들을 수도 없게 악한 상황을 만들었었다.마침 그 일을 소현우가 알게 되면서 유시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