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승이가 외도를 한 사실을 알아차린 그날, 난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부숴버렸다.가정부는 안절부절못하며 계속해서 택승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심 대표님, 사모님이 또 집에서 난리를 치고 계세요.”난 순간 멍해졌고 이내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택승이가 돌아왔을 때는 얼굴에 깊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연서야, 또 왜 그래?”택승이는 나에게 말하면서 목에 걸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택승이가 풀고 있던 넥타이를 보자, 난 잠시 혼란에 빠졌다.아침에 출근할 때 내가 직접 묶어준 넥타이는 윈저 노트였다.그런데 지금 택승이가 풀고 있는 것은 복잡한 소나무 매듭이었다.이 매듭은 택승이의 전 비서, 청아만이 할 줄 아는 방식이었다.청아는 비서였을 때도 일 처리가 서툴렀다.하지만 택승이는 청아에게 아주 관대했다.난 택승이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택승이는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연서야, 청아는 너랑 비슷하게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그 당시 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저 신입에게 기회를 더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택승이가 청아를 언급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비록 청아가 자주 실수를 한다며 불평했지만 얼굴에는 은근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난 택승이와 크게 다퉜고, 청아를 해고하라고 요구했다.택승이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연서, 넌 언제나 이렇게 막무가내야.”결국 택승이는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그 순간 난 승리감에 도취하였다.하지만 난 남자가 마음을 바꾸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택승이는 회사에서 청아를 내보냈지만 침대로 데려가 현재까지 몰래 아끼고 키우고 있었다.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꼭 바보처럼 말이다.난 카펫 위에 앉아 고개를 들어 택승이를 바라보았다.“청아가 퇴사한 후, 어디로 갔지?”순간 택승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오늘 또 난리 치는 이유가 그딴 헛소리 때문이야?”난 택승이를 너무 잘 알고
창밖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택승이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연기가 택승이의 얼굴을 감싸며 감정을 알아보기 힘들게 했다.택승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애는 햇빛이처럼 항상 활기차고 밝게 웃지.”“너랑 달라. 넌 조금만 건드려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미쳐버리니까.”“일 때문에도 골치 아픈데, 집에 와서 또 너를 감당해야 한다니.”택승이는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연서야, 나 정말 좀 지쳤어.”난 멍하니 택승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럼 왜 이혼 얘긴 안 꺼내?”택승이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연서야, 내가 지쳤다고 해서 너를 떠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난 그저 숨 돌릴 곳이 필요할 뿐이야.”“그래야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널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그러니까 청아가 택승이가 찾은 쉼터였고 따스한 안식처였다는 거지.정말로 우스꽝스럽고 어이없었다.난 믿을 수 없다는 듯 택승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비열하네.”택승이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약간의 불만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처음에는 나도 계속 너를 참아보려 했어.”“근데 연서야, 네가 미쳐가는 모습은...”“너무 추해. 솔직히 말해 약간 역겹기도 했어.”마치 가슴을 도려내는 칼 같았다.난 겨우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비참했다.“그런 나를 몇 년이나 참아주느라 참 힘들었겠어.”택승이는 깊이 한숨을 쉬며 몸을 숙여 나를 일으켰다.“연서야, 난 너랑 헤어질 생각이 없어...”귀를 찢는 듯한 벨 소리가 택승이의 말을 끊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청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택승아, 아이가 열이 많이 나고 있어.”택승이는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아이가 누구야?”나는 본능적으로 택승이의 팔을 잡았다.택승이는 내 손을 휙 뿌리치고는 큰 걸음으로 나가버렸다.나는 이를 악물고 택승이의 뒤를 따라나갔다.병원까지 쫓
택승이는 나를 계단 쪽으로 끌고 가며 여전히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고 말했다.“아이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난 택승이가 세게 잡아 빨개진 손목을 문지르며 되물었다.“내 말 중에 틀린 게 있어?”“네 와이프라는 말이 틀렸어? 아니면 내 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틀렸어?”택승이의 잔뜩 독이 서린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그건 사고였어...”난 병원 벽에 기대어 조용히 택승이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네가 믿는다고 생각해?”1년 전, 택승이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려고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왔다.하지만 집에 들어섰을 때, 집 안은 엉망이었다.계단 입구에는 우리 결혼사진이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려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계단에 미끄러운 샤워젤이 흘러 있었다.난 그 위를 밟고 미끄러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그렇게 내 뱃속 아이를 잃고 말았다.“그때 네가 말했지. 친척 아이가 와서 집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런 사고가 났다고.”“택승아, 넌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해?”택승이는 입을 열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똑바로 서 있던 내 등이 서서히 주저앉았다.“택승아,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아이를 잃은 후, 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내가 지켜주지 못한 거라며 나를 탓하는 꿈만 꿨다.결국 병이 생기고 말았다.내 감정도 점점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내가 부주의했던 자신을 탓하고 택승이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던 것을 탓하고 친척 아이까지도 원망했다.처음에는 나를 위로하며 미안해하던 택승이도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택승이는 나를 향해 미친 사람 같다며 소리쳤다.아이는 아직 어려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 리가 없다고.하지만 알고 보니, 그 아이가 바로 택승이의 아이였다.가슴 한가운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난 혀끝을 살짝 깨물어 고통을 참으려 했다.“택승아, 인제 어쩌지? 나
난 바닥에 비친 한 줄기 빛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넌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지?”택승이는 담배를 피워 물고 한 모금 빨았다.“연서야,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야.”택승이는 연기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알 수 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네 생각을 언제나 나한테 강요하지 말았으면 해.”결혼 생활에서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한다.속이 불안할 때마다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걸 좋아하는 거다.“근데 네가 정말 이 아이를 원했더라면 말이야.”나는 택승이를 향해 억지로 웃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내 앞에서 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겠지.”이번엔, 택승이는 오랫동안 침묵했다.오렌지빛 담배 끝이 택승이의 손을 태울 때가 돼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택승이의 시선은 내 배에 잠시 머물렀다.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연서야, 넌 이 아이를 원해?”그 순간 공기는 마치 희박해진 듯했다.한참 후, 난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택승아,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 돼?”택승이는 나를 한참 동안 응시하며 눈빛이 어두워졌다.“미안해, 연서야. 사랑은 엄청 질투심이 많아.”“그 애는 자기 엄마 외에 다른 사람한테서 태어난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그래서? 넌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택승이는 고개를 돌리며 마치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 아이, 지우자.”택승이의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찢어 놓았다.내 마음을 천천히 잘게 갈가리 찢으며 그 말들은 나를 철저히 무너뜨렸다.귀가 먹먹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난 몸을 떨며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원하지 않으면?”약 30초 후, 택승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서야, 착하게 굴어.”“넌 부모도 없잖아. 나도 너와 적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계단실을 나서자, 청아가 그 앞에 서 있었다.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청아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토끼처럼 겁먹은 두 눈이 금세 붉어졌다.“연서 씨, 제발 내 아이를 다치지 마세요.” 청아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사랑이를 데리고 떠날게요. 제발 그 아이를 다치지 마세요.”“헛소리하지 마. 너희가 어디로 가겠어?”택승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청아를 품에 감쌌다.“내가 있는데 누가 너희를 다치게 하겠어.”이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내 마음속에 갑작스레 커다란 슬픔이 차올랐다.눈이 매워지고 시야가 흐려졌다.“두 분, 방해해서 죄송해요.”“사랑이는 자기 엄마가 남의 가정을 깨뜨린 여자라는 사실을 아나요? 그리고 자신이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어요?”청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청아는 택승이의 소매를 꼭 잡고 애처롭게 쳐다보았다.“사랑이는... 사랑이는...”청아는 입술을 깨물며 무력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정말 누구라도 연민을 느낄 만한 표정이었다.택승이는 청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나를 향해 냉담하고 혐오스러운 눈빛을 던졌다.“이연서,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알겠어?”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택승이가 비웃듯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너 같은 악독하고 정신 나간 엄마한테서 태어날 아이가 뭘 잘하겠어?”그 말이 나를 깊게 찌르며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눈앞이 점점 어두워지며 마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얼른 그 아이 지워.”그 말을 남기고 택승은 청아를 보호하듯 감싸며 병실로 향했다.택승이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날 밤늦게, 청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손끝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난 깊게 숨을 들이쉬며 메시지를 열었다.딱
난 창가에 앉아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화려한 불빛들이 번쩍일수록 집안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택승이와 함께 창업했을 때 삶은 정말 고달팠다.습하고 어두운 지하방, 벽엔 곰팡이가 가득했고 형편이 어려워 몸에 두드러기가 나도 병원에 가는 게 아까웠다.그때는 비록 힘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만족스러웠다.하지만 이제 고생 끝에 부유해졌건만 마음은 변해버렸다.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 속의 쓰라림을 꾹 참았다.문자를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 결국 보낸 한 마디는 이거였다.[택승아, 우리 이혼하자.]택승이가 집에 돌아온 건 해질녘이었다.택승이가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물었다.“문자 봤어?”택승이는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뭔가 떠오른 듯했다.택승이의 목소리가 단번에 엄숙해졌다.“이것도 네가 연구해낸 새로운 수법이야?”“이연서, 그만해. 이제는 이혼으로 날 협박하는 거야?”눈이 따갑게 아팠다.14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 너무나도 낯설었다.“장난치는 거 아니야.”내가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챈 듯, 택승이의 미소가 얼굴에 굳어졌다.“이연서, 진심이야?”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혼 서류는 변호사가 넘길 거야. 잊지 말고 사인해.”택승이는 얼굴을 굳힌 채 단호하게 말했다.“그만해, 이연서. 난 이혼 안 해.”난 차분히 마음속 깊은 곳의 의문을 꺼내 물었다.“네가 이혼 안 하면 청아랑 아이는 어쩔 건데?”택승이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었다.“청아가 네 신분을 위협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싫다면 앞으로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게 할게.”결국, 끊을 생각이 없는 거였다.택승이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난 무심하게 말했다.“네가 청아랑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너한테 도움되지 않아서겠지?”“외모는 좋지만, 결국 새장 속의 새일 뿐이니까.”“난 다르잖아. 사업에서는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되니까.”난 택승이에게 몇 발짝 다가가며 천천히 말했다.“이것도 저것도 다
회사가 상장되던 날, 택승이는 단상 위에 서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마무리할 즈음, 택승이가는 나를 언급했다.“이 자리를 빌려 특별히 제 와이프한테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연서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기쁜 소식을 하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내 시선이 사람들 너머로 택승이와 마주쳤다.그 순간, 난 택승이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역시나, 택승이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지며 말했다.“제 와이프가 임신을 했습니다.”“앞으로 부사장직을 내려놓고 집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입니다.”마지막으로 택승이는 나를 사랑한다며, 눈빛에 깊은 감정을 담았다.순식간에 주변은 박수갈채로 뒤덮였다.인사말이 끝나고 택승이는 청아를 데리고 내 앞에 다가왔다.얼굴엔 악의적인 미소가 서려 있었다.“이연서, 네가 말 잘 듣지 않으니 앞으로는 청아가 네 자리를 대신할 거야.”택승이는 회사를 내세워 나를 굴복시키려 했다.그동안 나 또한 회사 설립에 큰 공을 세웠기에 내가 회사를 얼마나 아끼는지 택승이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밤, 택승이는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난 택승이의 손을 뿌리치고 청아를 앞쪽으로 세차게 끌어당겼다.청아가 버둥거리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며 고개를 강제로 들게 했다.“자, 네가 도대체 누구의 여자인지 말해봐.”택승이는 순간 당황한 얼굴이었다.“그게 무슨 말이야?”단상 위에 갑자기 투사된 영상이 켜졌다.택승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걸 보며 난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하나둘씩, 모두 택승이와 청아가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객석에서는 놀란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택승이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꺼! 당장 꺼버려!”하지만 안됐다.뒤에서 영상 장비를 조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미리 준비해둔 사람들이었다.상장 발표회에서 이런 치명적인 스캔들이 터졌고 그 많은 눈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택승이는 끝장났다.택승이는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며 프로젝터를 내리쳤다.
기계에서 똑딱똑딱 소리가 나며 난 천천히 눈을 떴다.몸 구석구석이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손을 들어 이제 평평해진 배를 만져보며 가슴속에 커다란 공허함이 밀려들었다.차가운 바람이 계속해서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이 아이는 내 아이였다.내가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난 이 아이에게 행복을 줄 수 없었다.다음 생에는 꼭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길.사랑받고 아낌없이 소중히 여겨지며 평생 근심 걱정 없이 살길 바랄 뿐이다.택승이가 병원을 찾아왔을 때는 잔뜩 화가 나서 나를 찾아와 따지려 했다.그러나 그저 나를 흘낏 쳐다본 순간 택승이의 온몸에 가득했던 분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택승이는 이제 힘이 빠진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한동안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택승이는 계속 깊은숨을 들이쉬며 이내 턱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한참을 진정하고 나서야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 그렇게까지 나를 미워한 거야?”“차라리 이렇게 자신을 망치면서까지 날 대적하고 싶었어?”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택승이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손가락에 더는 결혼반지가 없었다.첫 번째로 큰돈을 벌었을 때 택승이는 나에게 금을 한가득 사 주었다.우리의 결혼반지조차 금반지였다.택승이는 가난에 지친 나머지, 금이 가장 안전한 자산이라며 이것이 나를 위한 최고의 보장이라 했다.서로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며 사랑할 때는 평생 함께하고 서로 지켜줄 것이라고 약속하곤 했다.하지만 한평생이 이렇게 짧을 줄은 몰랐다.청아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인생은 끝나버렸다.이런 것들을 떠올리니 눈가가 약간 매워졌지만 그저 그뿐이었다.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거짓말이 시작된 순간,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을.택승이와 나의 길은 여기서 끝났다.난 택승이에게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이혼 합의서를 확인하라고 말했다.“잊지 말고 서명해. 우리 깔끔하게 끝내자.”택승이는 믿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