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승이의 시선은 이혼 협의서에 고정되어 있었다.난 펜을 택승이의 손에 건넸다.“서명해.” 펜을 받는 택승이의 손이 떨렸고 목소리는 몹시 거칠었다.“이연서, 넌 너무 잔인해.”‘잔인하다고? 어쩌면 그렇겠지.’하지만 내가 비겁하게 용서한다면 내가 겪은 모든 고통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 될 뿐이다.택승이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서명 펜을 꽉 쥐었다.“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거야?”택승이는 마치 우리 안에 갇힌 맹수 같았다.난 옆에서 여유롭게 택승의 초조함을 감상했다.“택승아, 지금 네 모습은 정말 추악해.”내 말이 끝나자마자 택승이의 얼굴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핏기마저 깨끗이 사라졌다.“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택승이는 내 손을 잡았다.뜨거운 눈물이 내 차가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택승이의 눈에는 간절한 애원이 가득했다.“나를 미워하지 마, 연서야.”난 웃으며 손을 뺐고 종이에 손을 닦았다.“누가 상관도 없는 사람을 미워하겠어?”법원에서 나오는 날, 택승이는 완전히 기가 꺾인 모습이었다.“연서야, 정말 후회하고 있어...”난 고개를 저으며 택승이에게 마지막 충고를 했다.“택승아, 청아랑 잘 살아.”청아는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엄마다.청아가 나에게 순순히 응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그녀의 아들인 사랑이를 빌미로 협박했기 때문이다.내가 남긴 최소한의 선의는 그 아이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런 부모를 둔 건 사랑이의 불행이지만 아이의 잘못은 아니다.이혼 후, 택승이는 잠깐 세상에서 사라진 듯했다.택승이는 이미 몰락했고 회사의 이사라는 명목만 남았다.분배금을 제외하면 택승이의 직위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그나마 택승이가 가진 분배금도 이전에 손실이 컸던 프로젝트 때문에 팔아야 했다.택승이가 다시 나타났을 때 매일같이 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 시작했다.난 옷을 걸치고 아래로 내려가 택승이를 만났다.눈이 마주치자, 택승이는 입술을 달싹이며 씁쓸하게 웃었다.“내가 지금 이 꼴이 되
택승의 입술이 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택승의 목소리는 간절했다.“연서야, 우리 다시 결혼하자, 응?”“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제발 한 번만 나를 구해줘, 제발 나를 살려줘.”택승의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했다.택승이 느끼는 고통이 이혼 탓인 손실 때문인지, 아니면 나와의 14년을 끊어내지 못해 느끼는 고통 때문인지 모르겠다.택승은 허둥지둥하며 비참하게도 나에게 한 번 더 애원했다.난 조용히 택승을 바라보았다.“네가 왜 내가 두 번째로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택승의 입술에서 피기가 사라졌다.“근데 우리가 함께한 14년의 감정은...”“네가 먼저 버린 거 아니었어?”택승은 쓰라린 표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천천히 말했다.“연서야, 넌 나를 더는 용서하지 않을 거지?”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이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마.”나중에 들은 소식에 따르면 택승은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택승은 마지막 남은 재산을 털어 투자했지만 결국 다 날리고 말았다.집과 차는 은행에 빼앗겼고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택승은 배달원 일을 시작했고 어두컴컴하고 습기 찬 지하실로 다시 돌아갔다.우연히 택승을 다시 만난 건 어느 길가였다.택승은 2000원짜리 야채 밥과 뼈국을 먹고 있었다.택승은 대나무처럼 말라 보였고 구부정한 자세에 피부는 검게 타 있었다.눈가엔 주름이 가득해, 마치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택승은 허겁지겁 밥을 먹고 나서 입을 닦으며 나를 보았다.그 순간, 택승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못 본 척하려 했다.하지만 곧 택승은 일어나 주름진 옷을 정리하고 나에게 다가왔다.“오랜만이야.”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랜만이야.”택승은 내가 새로 바꾼 차를 보자 등이 다시 조금 더 구부정해졌다.택승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넌 점점 더 잘 지내고 있네.”난 택승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강청아는? 같이 있지 않아?”택승은 화가 난 듯 주
청아를 다시 만난 건 반년 후였다.눈이 벌게진 채로 찾아온 청아는 절뚝거리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에게 이유를 따지며 소리쳤다.“왜,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했잖아!”“근데 왜 아직도 날 가만두지 않는 거야?”그렇게 격앙된 모습이 묘하게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난 청아를 힐끗 올려다보며 무심하게 반문했다.“강청아, 내가 뭘 했는데?”내가 뭘 했다는 걸까?그저 청아가 새 남자를 꼬셨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손을 쓴 것뿐인데.청아도 나름의 재주가 있는 여자였다.청아는 그럴듯한 거짓말로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남자를 속였다.그렇지만 나도 마음이 약한 편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 남자의 연락처를 찾아냈고청아와 택승 사이의 진실을 알려줬을 뿐이었다.청아는 분을 못 이겨 온몸을 떨며 말했다.“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난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근데 잘 생각해봐.”“난 네 아들만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너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잖아.”긴 침묵 끝에, 청아는 결국 무너져내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이연서, 제발 부탁이야, 나 좀 살려줘.”“내 아들 몸이 안 좋아서 내가 돌봐야 해.”“그건 나랑 상관없어.”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아들이 아닌데, 죽든 살든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택승과 청아의 일이 그 남자에게 폭로되면서 다시 한 번 큰 파문이 일었고 청아의 평판은 완전히 바닥을 쳤다.결국 청아는 길이 막혔는지 폭력 성향이 있는 한 노인과 결혼했다.어느 날, 외식하러 나갔다가 난 청아를 마주쳤다.청아의 얼굴에는 큰 멍이 가득했다.청아는 서양 음식점의 통유리 앞에 서서 안을 갈망하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노인은 청아의 등에 손을 세게 내리쳤다.“뭘 봐? 네 주제에 그런 데서 밥을 먹을 자격이나 있어?”청아는 눈길을 거두어들였고 마침 나와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청아의 얼굴에 수치와 분노가 잔뜩 스쳐 지나갔다.
택승이가 외도를 한 사실을 알아차린 그날, 난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모조리 부숴버렸다.가정부는 안절부절못하며 계속해서 택승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심 대표님, 사모님이 또 집에서 난리를 치고 계세요.”난 순간 멍해졌고 이내 카펫 위에 주저앉았다.택승이가 돌아왔을 때는 얼굴에 깊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연서야, 또 왜 그래?”택승이는 나에게 말하면서 목에 걸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택승이가 풀고 있던 넥타이를 보자, 난 잠시 혼란에 빠졌다.아침에 출근할 때 내가 직접 묶어준 넥타이는 윈저 노트였다.그런데 지금 택승이가 풀고 있는 것은 복잡한 소나무 매듭이었다.이 매듭은 택승이의 전 비서, 청아만이 할 줄 아는 방식이었다.청아는 비서였을 때도 일 처리가 서툴렀다.하지만 택승이는 청아에게 아주 관대했다.난 택승이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택승이는 나에게 이렇게 설명했다.“연서야, 청아는 너랑 비슷하게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그 당시 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저 신입에게 기회를 더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택승이가 청아를 언급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비록 청아가 자주 실수를 한다며 불평했지만 얼굴에는 은근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난 택승이와 크게 다퉜고, 청아를 해고하라고 요구했다.택승이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연서, 넌 언제나 이렇게 막무가내야.”결국 택승이는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그 순간 난 승리감에 도취하였다.하지만 난 남자가 마음을 바꾸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택승이는 회사에서 청아를 내보냈지만 침대로 데려가 현재까지 몰래 아끼고 키우고 있었다.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차갑게 지켜보고 있었다.꼭 바보처럼 말이다.난 카펫 위에 앉아 고개를 들어 택승이를 바라보았다.“청아가 퇴사한 후, 어디로 갔지?”순간 택승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오늘 또 난리 치는 이유가 그딴 헛소리 때문이야?”난 택승이를 너무 잘 알고
창밖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택승이는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연기가 택승이의 얼굴을 감싸며 감정을 알아보기 힘들게 했다.택승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그 애는 햇빛이처럼 항상 활기차고 밝게 웃지.”“너랑 달라. 넌 조금만 건드려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미쳐버리니까.”“일 때문에도 골치 아픈데, 집에 와서 또 너를 감당해야 한다니.”택승이는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연서야, 나 정말 좀 지쳤어.”난 멍하니 택승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그럼 왜 이혼 얘긴 안 꺼내?”택승이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연서야, 내가 지쳤다고 해서 너를 떠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난 그저 숨 돌릴 곳이 필요할 뿐이야.”“그래야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널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그러니까 청아가 택승이가 찾은 쉼터였고 따스한 안식처였다는 거지.정말로 우스꽝스럽고 어이없었다.난 믿을 수 없다는 듯 택승이를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비열하네.”택승이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약간의 불만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처음에는 나도 계속 너를 참아보려 했어.”“근데 연서야, 네가 미쳐가는 모습은...”“너무 추해. 솔직히 말해 약간 역겹기도 했어.”마치 가슴을 도려내는 칼 같았다.난 겨우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그 웃음은 울음보다도 더 비참했다.“그런 나를 몇 년이나 참아주느라 참 힘들었겠어.”택승이는 깊이 한숨을 쉬며 몸을 숙여 나를 일으켰다.“연서야, 난 너랑 헤어질 생각이 없어...”귀를 찢는 듯한 벨 소리가 택승이의 말을 끊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청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택승아, 아이가 열이 많이 나고 있어.”택승이는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급격히 변했다.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아이가 누구야?”나는 본능적으로 택승이의 팔을 잡았다.택승이는 내 손을 휙 뿌리치고는 큰 걸음으로 나가버렸다.나는 이를 악물고 택승이의 뒤를 따라나갔다.병원까지 쫓
택승이는 나를 계단 쪽으로 끌고 가며 여전히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고 말했다.“아이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난 택승이가 세게 잡아 빨개진 손목을 문지르며 되물었다.“내 말 중에 틀린 게 있어?”“네 와이프라는 말이 틀렸어? 아니면 내 아이를 죽였다는 말이 틀렸어?”택승이의 잔뜩 독이 서린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그건 사고였어...”난 병원 벽에 기대어 조용히 택승이를 바라보았다.“그 말을 네가 믿는다고 생각해?”1년 전, 택승이에게 임신 소식을 전하려고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집으로 왔다.하지만 집에 들어섰을 때, 집 안은 엉망이었다.계단 입구에는 우리 결혼사진이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려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계단에 미끄러운 샤워젤이 흘러 있었다.난 그 위를 밟고 미끄러져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그렇게 내 뱃속 아이를 잃고 말았다.“그때 네가 말했지. 친척 아이가 와서 집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런 사고가 났다고.”“택승아, 넌 양심이라는 게 있긴 해?”택승이는 입을 열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똑바로 서 있던 내 등이 서서히 주저앉았다.“택승아, 네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아이를 잃은 후, 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내가 지켜주지 못한 거라며 나를 탓하는 꿈만 꿨다.결국 병이 생기고 말았다.내 감정도 점점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내가 부주의했던 자신을 탓하고 택승이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던 것을 탓하고 친척 아이까지도 원망했다.처음에는 나를 위로하며 미안해하던 택승이도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택승이는 나를 향해 미친 사람 같다며 소리쳤다.아이는 아직 어려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 리가 없다고.하지만 알고 보니, 그 아이가 바로 택승이의 아이였다.가슴 한가운데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난 혀끝을 살짝 깨물어 고통을 참으려 했다.“택승아, 인제 어쩌지? 나
난 바닥에 비친 한 줄기 빛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넌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지?”택승이는 담배를 피워 물고 한 모금 빨았다.“연서야,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봐. 내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야.”택승이는 연기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알 수 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네 생각을 언제나 나한테 강요하지 말았으면 해.”결혼 생활에서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한다.속이 불안할 때마다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걸 좋아하는 거다.“근데 네가 정말 이 아이를 원했더라면 말이야.”나는 택승이를 향해 억지로 웃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내 앞에서 이 담배를 피우지 않았겠지.”이번엔, 택승이는 오랫동안 침묵했다.오렌지빛 담배 끝이 택승이의 손을 태울 때가 돼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택승이의 시선은 내 배에 잠시 머물렀다.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연서야, 넌 이 아이를 원해?”그 순간 공기는 마치 희박해진 듯했다.한참 후, 난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택승아,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 돼?”택승이는 나를 한참 동안 응시하며 눈빛이 어두워졌다.“미안해, 연서야. 사랑은 엄청 질투심이 많아.”“그 애는 자기 엄마 외에 다른 사람한테서 태어난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그래서? 넌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택승이는 고개를 돌리며 마치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이 아이, 지우자.”택승이의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가슴을 찢어 놓았다.내 마음을 천천히 잘게 갈가리 찢으며 그 말들은 나를 철저히 무너뜨렸다.귀가 먹먹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난 몸을 떨며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원하지 않으면?”약 30초 후, 택승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연서야, 착하게 굴어.”“넌 부모도 없잖아. 나도 너와 적이 되고 싶지 않아.”
내가 계단실을 나서자, 청아가 그 앞에 서 있었다.내가 나오는 것을 보고 청아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토끼처럼 겁먹은 두 눈이 금세 붉어졌다.“연서 씨, 제발 내 아이를 다치지 마세요.” 청아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사랑이를 데리고 떠날게요. 제발 그 아이를 다치지 마세요.”“헛소리하지 마. 너희가 어디로 가겠어?”택승이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청아를 품에 감쌌다.“내가 있는데 누가 너희를 다치게 하겠어.”이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내 마음속에 갑작스레 커다란 슬픔이 차올랐다.눈이 매워지고 시야가 흐려졌다.“두 분, 방해해서 죄송해요.”“사랑이는 자기 엄마가 남의 가정을 깨뜨린 여자라는 사실을 아나요? 그리고 자신이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어요?”청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청아는 택승이의 소매를 꼭 잡고 애처롭게 쳐다보았다.“사랑이는... 사랑이는...”청아는 입술을 깨물며 무력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정말 누구라도 연민을 느낄 만한 표정이었다.택승이는 청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나를 향해 냉담하고 혐오스러운 눈빛을 던졌다.“이연서, 내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알겠어?”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택승이가 비웃듯이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너 같은 악독하고 정신 나간 엄마한테서 태어날 아이가 뭘 잘하겠어?”그 말이 나를 깊게 찌르며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눈앞이 점점 어두워지며 마치 진흙탕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얼른 그 아이 지워.”그 말을 남기고 택승은 청아를 보호하듯 감싸며 병실로 향했다.택승이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그날 밤늦게, 청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손끝이 미묘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난 깊게 숨을 들이쉬며 메시지를 열었다.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