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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병실에서.

라예는 팔짱을 낀 채 한쪽 다리를 살짝 굽혀 나른하게 복도 벽에 기대있었다. 눈앞에 훤칠한 그림자가 다가오자 라예는 똑바로 세웠다. 몸을 바로 하자마자 귓가에 은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라예, 이번에 정말 날 제대로 실망시켰어! 너 언제 이렇게 냉정하고 매정해진 거야? 이제 좀 컸다고 언니를 물에 던져? 슬미는 수영도 할 줄 모르는데, 너 도대체 왜 자꾸 슬미를 죽이려 드는 거야?”

라예는 고운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얼음으로 뒤덮인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은환은 라예의 차가운 눈빛을 보곤 놀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안개가 걷힌 것처럼 맑았지만 차갑고 담담했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 불쾌함을 느꼈다.

“정말 고집불통이군. 슬미는 줄곧 널 감싸줬어.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도 널 보호했고. 양심이 찔리지도 않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은환은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점차 듣기 거북한 말도 내뱉었다. 실망을 느낀 말투로 말했지만 라예를 경멸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은환,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날 가르치려는 거야? 약혼자? 아니면 내연녀의 남자?”

라예는 비웃음 담긴 미소를 지었다. 맑은 목소리는 무척 싸늘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변했는지 네가 애지중지하는 여자한테 가서 물어봐. 나한테 뭔 짓을 했는지 직접 물어보라고!”

은환은 이 말을 듣고 슬미를 위해 변명했다.

“슬미처럼 연약한 사람이 너에게 뭘 할 수 있겠어? 네가 슬미를 다치게 할 때마다 슬미는 가장 먼저 널 보호했잖아!”

라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내가 언제 구슬미의 보호가 필요다고 했지?”

은환은 라예의 차갑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고,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

“너 정말 뻔뻔하구나. 슬미가 너를 감싸지 않았으면 네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구슬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라예가 웃으며 침착하게 되묻자, 은환은 답답함이 가득했다.

“그래, 맞아. 넌 확실히 슬미에게 고마워해야 해.”

라예는 눈을 번뜩이며 은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냉랭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구슬미가 죽으면 무덤 앞에 가서 고맙다고 제사 치러줄게.”

은환은 순간 눈을 부릅떴다. 라예가 자신의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슬미가 날 빼앗은 일로 정말 한을 품은 것 같군.’

은환은 참을성 있게 말했다.

“라예야, 내가 말했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슬미라고.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집착하지 마. 이렇게 나오면 나도 네가 점점 싫어질 뿐이야.”

라예는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네가 누굴 사랑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널 사랑하지도 않는데. 바람난 남자 주제에 날 싫어한다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

라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은환은 멍해지더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그 감정은 바로 사라졌다.

“그게 무슨 뜻이야?”

은환이 물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기에 라예는 은환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결혼 취소해줄게. 대신 이건 확실히 하자. 진은환이 날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나 구라예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거라고!”

라예는 차가운 눈빛으로 은환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라예는 검지를 내밀어 은환을 가리키며 차가운 말투로 경고했다.

“구슬미가 다시는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않게 잘 단속해.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구라예, 너 어떻게 이런 태도로 나한테 말할 수 있지?”

은환이 물었다. 그러나 라예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말했다.

“잘 기억해, 진 대표님. 연약한 여자친구를 지키고 싶다면, 그 여자더러 날 건드리지 말라고 해!”

말을 마치고 라예는 몸을 돌려 떠났다.

이튿날 아침, 구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구라예가 진씨 가문의 큰 도련님 진은환과 파혼했다는 기사가 터져 나왔다.

세상 사람들 모두 라예가 독한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진씨 가문이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파혼을 제기한 사람이 은환이 아니라 라예인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중들은 잇달아 댓글을 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쯧쯧, 이런 양심도 없고 자기 언니만 모함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씨 가문의 도련님과 어울리겠어?]

[그래, 몰래 언니의 남자친구까지 빼앗았다고 하던데. 정말 뻔뻔해!]

[난 오히려 진은환이랑 구라예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선남선녀잖아.] //구라예랑 잘 어울린다는 뜻 맞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는 게 이해가 수월합니다.

[저기요, 님 뭐 잘못 드신 거 아님?]

[그러게, 안티야 뭐야.]

[구씨 가문의 다재다능한 아가씨가 지금 바로 진은환 도련님과 사귄다면, 아마 악플이...]

[다들 빨리 구라예 SNS 확인하러 가봐요.]

누군가가 댓글을 달자 사람들은 재빨리 라예가 올린 최신 게시물을 보러 갔다. 세 개의 마침표, 그리고‘아내의 유혹’에 나오는 정교빈과 신애리의 고화질 사진이었다.

[어머, 지금 남자가 바람 핀 건가?]

[파혼한 이유가 진은환이 바람 피워서네...]

[와! 이거 정말 센스 있는데?]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해도 다 알 수 있게 하다니. 똑똑하네.]

[이거 노골적이네요.]

[그나저나 이번 일 정말 대박. 남자가 대체 바람을 얼마나 피웠길래.]

...

은환이 이 기사를 봤을 땐 이미 실시간 검색어 3위에 올라 있었다.

라예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은환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되면 은환과 슬미는 두 사람의 관계를 공개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은환은 회사로 가는 길에 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은환아 구라예에게 연락해서 SNS 당장 지우라고 해라. 이게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는 구나.”

상대방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은환의 표정도 어두워졌고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조수석에 있던 비서 성민은 고개를 돌려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대표님, 회사 주가가 2% 하락했습니다.”

성민은 라예의 SNS가 TL그룹의 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도련님과 슬미 아가씨의 일이 폭로된다면 주가는 더욱 하락되겠지?’

“즉시 PR팀에 연락해서 실시간 검색을 내리라고 해!”

“네.”

...

제일병원

슬미는 아침에 깨어나자마자 친구인 정미진이 보낸 문자를 받았다.

라예가 파혼을 허락한 것을 보고 슬미는 매우 기뻤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라예가 파혼 소식을 공개한 후 게시물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슬미는 화가 나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문에 던졌다. 마침 백선희가 그녀에게 아침을 가져다주러 병실에 들어왔다.

“슬미야, 왜 그래? 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백선희는 걱정을 하며 물었고, 슬미는 험악한 표정으로 백선희에게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대해 말했다.

백선희는 이야기를 들은 후 안색이 보기 흉해졌고, 모녀는 당장이라도 라예를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감히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백선희는 이를 갈며 말했다.

슬미는 다시 한 번 억울함을 느꼈는지 백선희의 손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엄마, 이제 어떡해요? 구라예가 오빠와 파혼을 했지만, 나와의 사이는 여전히 공개할 수가 없잖아요.”

백선희는 슬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슬미야, 엄마가 너 어릴 때부터 어떻게 가르쳤지? 어떤 일에 부딪히더라도 당황하지 마.”

“그런데 그 미친...”

백선희는 단호한 표정으로 슬미의 말을 끊었다.

“그게 뭐가 어때서? 은환이랑 네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네 편을 들어주면 충분해.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구씨 가문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될 거야. 진씨 가문의 사모님이 자리도 네 자리가 될 거야.”

백선희의 눈에 독한 기운이 스쳤다.

“이제 시간 문제야. 인내심을 가져야 해. 여자가 연약하게 나와야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단 거 몰라?”

백선희는 참을성 있게 타일렀고, 슬미는 그제야 안정을 찾았다.

‘엄마 말이 맞아. 남자는 모두 이해심 넘치고 연약한 여자를 좋아해. 은환 오빠처럼 말이야. 내가 연약한 척하기만 하면 은환 오빠도 내 편을 들어줬지.’

슬미의 목표는 라예를 발밑에 두고 세게 짓밟으며 그녀가 영원히 고개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젯밤 라예가 자신을 그 탁하고 더러운 연못에 던진 생각을 하자 슬미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수영을 할 줄 알아서 다행이야. 은환 오빠도 제때에 나타났지.’

그녀는 어젯밤 고의로 핸드폰을 병실에 남겨두었다. 라예를 만나러 가기 전 불편하다고 핑계를 대 은환더러 병원에 오라고 했다.

‘비록 초라하게 당했지만, 그래도 은환 오빠는 구라예에게 실망을 느꼈기에 나름 보람이 있었어.’

...

한편, 성예 그룹

라예는 9시 15분에 회사에 도착했다.

대표실

“대표님, 오늘 아침에 올리신 SNS가 이미 실시간 검색어 3위에 올랐습니다.”

비서 송민효는 줄곧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라예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가방도 대충 그 위에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의자를 끌어와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민효가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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