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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문준은 회사까지 운전을 하며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여태껏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으셨던 대표님인데, 오늘 이런 일에 나서셨다니? 설마 그동안 여자에게 아무런 느낌도 없으셨다가 드디어 사랑에 빠지신 건가? 그것도 첫눈에 반하신 거야?’

‘오늘 만난 그 여자는 확실히 예쁘게 생겼는데, 심지어 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웠지. 근데 여자에게 첫눈에 반하는 건 다 여자를 밝혀서 그런 거 아닌가? 대표님 그동안 아무 욕심 없이 행동하신 거 다 내숭이었어?’

문준은 자신이 무슨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다고 느꼈다. 그는 온몸에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인우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 오늘 일은 제가 꼭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인우는 눈을 부라리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요즘 너무 한가한가?”

문준은 등골이 오싹해졌고, 황급히 부인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상사의 마음을 들추어내지 않는 것은 문준이 그동안 인우의 곁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이었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무기라 할 수 있었다.

...

다른 한편, 라예는 차를 몰고 회사 대신 자신이 지내는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샤워를 한 후, 그녀는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 일찍 쉬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방안은 무척 어두워 침대 머리맡을 한바탕 뒤지고서야 라예는 베개 아래의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7시 30분이었다. 그리고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4시 경 온 문자의 번호는 라예가 이미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기에 그녀는 확인하지 않고 깔끔하게 일어나 먹을 것을 찾았다. 한잠 자고 나니 두통도 많이 나아졌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몇 시간 후면 유통기한이 지나는 토스트 한 봉지와 우유 한 병을 꺼내 책상다리를 하고 소파에 앉아 배를 채웠다.

혼자 있을 땐 그냥 배만 채우면 된다.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물곤 라예는 핸드폰을 들어 그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대충 읽어보고는 바로 지웠다.

토스트를 먹고 간단하게 정리한 다음, 라예는 바로 집을 나섰다.

30분 뒤, 라예는 또다시 제일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원 공원의 은밀하고 조용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10분 뒤, 라예의 눈앞에 피부가 하얗고 아름다운 미모의 많이 허약해 보이는 미인이 나타났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련한지, 남자들이 아껴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만했다. 이렇게 보면 은환이 슬미에게 반한 것도 당연했다.

라예는 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납득이 간 거야? 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려고?”

슬미는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라예 앞에 선 그녀의 눈빛에는 질투와 증오가 나타났다.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지?”

슬미는 비아냥거리며 원망으로 가득 찬 두 눈을 부릅뜨고 라예에게 말했다.

라예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나른하게 돌의자에 기대며 고개를 들어 슬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의 슬미는 마치 독사와 같았다. 사람이 없을 때에야 슬미는 사람들에겐 감춘 악독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라예는 슬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가볍게 웃었다.

“왜? 이제 네 은환 오빠가 싫어졌어?”

슬미는 멈칫하다 곧바로 은환이 오후에 그녀에게 한 말을 떠올렸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환 오빠는 동의하지 않았어.”

“쯧쯧, 진은환을 그렇게 사랑하는 건 아닌가 봐? 무릎조차 꿇으려 하지 않다니.”

라예는 피식 웃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구라예, 너 입 닥쳐. 네가 어떻게 은환 오빠를 향한 내 마음을 알겠어. 오빠는 날 아껴주고 있는 거라고.”

슬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원망을 드러냈다. 말이 점점 더 매정해지며 기고만장해졌다. 경멸에 찬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은환 오빠야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야. 은환 오빠는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네가 먼저 오빠를 만났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오빠의 마음은 여전히 나에게 있고,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구라예, 내가 전부터 말했지, 난 네가 가지고 있는 것과 네가 신경 쓰는 것 모두 빼앗을 거라고. 그리고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구씨 가문은 전부 내 거야.”

“눈치가 있으면 당장 구씨 가문에서 나가고, 은환 오빠 곁에서 떨어져! 그렇지 않으면 난 네 명예를 망가뜨릴 거야. B시에서 영원히 고개 들 수 없도록!”

라예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슬미를 담담하게 바라보았고, 냉소를 하며 그녀를 도발했다.

“그래? 그럼 우리 두고 보자.”

슬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라예의 차디찬 표정과 자기와 상관이 없는 듯이 구는 태도였다. 마치 어떤 일도 그녀에게 타격을 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라예가 어릴 때부터 자신을 이긴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자 슬미는 자신감을 얻었다.

‘설령 무뚝뚝하게 나온다 하더라도 뭐가 달라지겠어. 구라예, 넌 영원히 남에게 미움받고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존재고, 나 구슬미는 남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일 거야.’

“넌 어쩜 머리가 이렇게도 나쁘니? 구라예,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지금 모든 사람들이 다 널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남자를 위해 자신의 언니를 핍박해서 자살하게 한 살인범.”

슬미의 우쭐대면서도 경멸에 찬 그 기괴한 미소는 어두운 밤에 보니 다소 음산해 보였다. 라예의 눈 밑에 차가운 빛이 번쩍이더니 싸늘하게 슬미를 쏘아보았다.

“그래?”

라예는 목소리를 낮추며 차갑게 말했다.

“넌 아직 죽지 않았으니, 나도 이 죄명에 맞게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슬미는 표정이 굳어졌고, 라예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그러자 라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뻗어 슬미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

쿵!

비명 소리 다음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슬미는 전혀 반응하지 못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넘어졌다. 그녀의 어깨는 넘어지는 순간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통증이 극심했다. 곧이어 두피에서 또 한바탕의 통증이 전해져 슬미는 억지로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라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미 앞에서 허리를 구부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통증으로 창백해진 슬미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약간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나한테 살인범이란 죄명을 뒤집어씌우고 싶어 하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오히려 이렇게까지 쇼를 한 언니한테 미안하잖아!”

라예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나타났다. 무정하고 냉담한 말이 슬미의 귀에 들리자 그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너 그러기만 해!”

슬미는 아픔을 참으며 두 눈을 부릅뜨고 라예에게 경고했다. 라예는 웃음을 머금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못할 게 뭐가 있어? 그동안 나도 꽤 많이 참았단 말이야!”

“아! 아파!”

슬미가 소리쳤다.

라예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렇게 라예는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슬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슬미는 자신의 두피가 찢어진 것만 같았다. 어깨의 상처보다 더 아팠다. 마치 누군가가 칼을 들고 그녀의 두피를 베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어 라예는 슬미를 한쪽에 있는 연못가로 끌고 갔다.

라예는 지금 이 병원의 건축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곳에 연못을 하나 만들어준 것에 대해.

고통과 공포에 휩싸여 불쌍해 보이는 슬미를 바라보는 차갑고 아름다운 라예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심지어 한심한 듯 눈을 부라렸다.

“구라예, 너 날 연못에 던지면, 은환 오빠는 널 용서하지...”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먼저 울렸다.

“으악!”

라예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는 것처럼 슬미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손을 툭툭 치며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연못에서 발버둥 치는 새까만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살려줘... 살려줘...”

라예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두들 슬미가 수영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수영 실력이 좋았다.

건물 2층에서 두 줄의 검은 그림자가 이 폭력적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3분 후, 라예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희미한 불빛에 휩싸인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은환이 비서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차갑게 물었다.

“슬미는?”

그는 방금 일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가 슬미가 안 보이자, 라예가 슬미에개 보낸 문자를 보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라예는 눈을 부라렸다.

‘지금 쩌렁쩌렁하게 살려 달라고 하고 있는데, 귀가 먹은 거야 뭐야?’

라예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한쪽의 연못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밤이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서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입이 열렸다.

“대표님, 슬미 아가씨의 목소리가 연못에서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은환은 멍하니 있다가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비서가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을 켜자, 그들은 연못 중간에서 발버둥 치는 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은환 오빠, 살려줘... 은환 오빠...”

확실히 슬미의 목소리였다.

라예는 슬미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에 빠져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조차 은환의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니.

“슬미야, 무서워하지 마, 내가 바로 구해줄게.”

은환은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옷을 벗었고, 생각도 하지 않고 탁하고 더러운 연못에 뛰어들었다. 라예는 혀를 차며 싸늘하게 그 모습을 방관했다.

곧이어 은환의 비서는 의사와 경비원들을 불렀다. 2분 후, 사람들은 힘을 합쳐 두 사람을 끌어올렸다.

간호사는 두 사람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수건을 건네주었다. 추운 겨울은 아니지만 이미 가을이었기에, 밤바람은 생각보다 많이 차가웠다.

“슬미야, 슬미야, 정신 좀 차려봐. 응? 슬미야!”

은환은 한쪽 무릎을 꿇고 핏기가 전혀 없는 슬미를 안으며 안달이 났다. 옆에 있던 간호사도 걱정을 금치 못했다.

“진 대표님, 일단 아가씨를 병실로 옮겨서 검사를 받게 하시는 건 어떨까요?”

재벌 집 아가씨인 슬미가 병원의 연못에 빠졌고, 은환 또한 재벌 집 도련님이었기에 간호사는 큰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콜록콜록...”

그때 슬미가 깨어났다.

그녀는 힘없이 두 눈을 뜨며 은환에게 말했다.

“은환 오빠, 라... 라예 탓하지 마. 이건 라예와 상관 없는 일이니까.”

그녀는 말을 마치고 라예를 힐끗 보더니 바로 기절했다. 라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무덤덤하게 정신을 잃은 슬미를 바라보았다.

‘그래야지, 이렇게 나와야 진은환이 걸려들지.’

사람들은 그제야 줄곧 한쪽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라예는 검은 옷과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데다 소리까지 내지 않았기에, 완벽하게 이 어두운 밤 속에 숨어있을 수 있었다.

은환은 핏발이 서린 눈동자로 라예를 차갑게 할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따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러나 라예는 담담하게 자신의 코를 만졌을 뿐,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은환은 슬미를 안고 황급히 병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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