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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라예는 웃으며 은환에게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다 무언가 떠올린 듯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살짝 돌려 나른하게 말했다.

“참, 방금 내가 한 말 진심이니까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해.”

말을 끝낸 라예는 곧장 뒤돌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은환은 눈썹을 찌푸린 채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은 시각, 제일병원 화원

아치형 문 옆, 커다란 반얀나무 아래 놓인 돌의자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우아하면서도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함께 앉아 있었다.

“인우야, 네가 올해 스물여덟인데 어떻게 여자친구 하나 없을 수가 있느냐? 내가 사람들 보기가 민망하구나.”

육태산은 여전히 정정한 모습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남자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등을 돌 의자에 기대며 긴 두 다리를 꼬고는 겹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에서 고상함과 우아함이 느껴졌다.

육인우는 마치 신이 공들여 조각한 듯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 곱고 긴 쌍꺼풀진 눈, 오뚝한 콧날, 얇은 입술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게야?”

육태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자에게 수많은 용모가 뛰어난 재벌 집 아가씨를 소개해 주었지만, 인우는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설마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인우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가 어이없어하며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할아버지, 정정해 보이시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인우의 목소리는 낮고 듣기 좋았다. 말을 마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떠나려 했다.

육태산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 녀석 좀 보게. 너 설마 혼자 늙어 죽고 싶은 게냐?”

인우는 우아하게 구겨진 양복을 매만졌다. 완벽주의자인 그에게 구겨진 옷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인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그럴 계획이에요.”

육태산은 숨이 꽉 막혀 가슴이 답답했다.

“됐어요, 할아버지. 저 회사에 일이 있으니 백 비서더러 집으로 모셔다 드리라고 할게요.”

인우는 수시로 아프다는 핑계로 병원에 와서 자신에게 맞선을 보라고 하는 육태산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백 비서, 할아버지를 본가로 모셔다 드려.”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백지혁이 바로 대답했다.

“네, 대표님.”

...

라예는 병원을 나선 후 바로 떠나지 않고, 병원 외곽의 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오늘 아침 은환은 라예에게 전화를 걸어 구씨 저택으로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파혼 문제를 논의하자는 이유였다.

라예가 혼사를 취소하지 않는 한, 은환과 슬미는 영원히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불륜남과 내연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은환은 자신의 여린 여자 친구를 소중히 여겼기에, 끊임없이 라예를 찾아가 결혼을 취소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라예는 은환의 설득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슬미가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겉으로는 자신과 은환의 혼사를 성사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라예에게 또 하나의 죄명을 씌워 구씨 가문이 라예를 압박해 진씨 가문과 파혼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구씨 가문은 슬미를 애지중지했기에 그녀가 이런 일을 겪고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구슬미의 자살 시도는 치밀한 선택이었어.’

어릴 때부터 슬미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언제나 연약하고 이해심 많은 언니였고, 라예는 철없고 독한 동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라예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힌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녀가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차츰 실망감이 쌓이며 이제는 감정이 마비된듯했다.

24살의 라예는 20년 동안 가족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끝없는 홀대를 견뎌야 했고, 그로 인해 사람에게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냉혹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라예는 어느새 한쪽 호숫가에 멈춰 서 있었다. 깊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호수를 응시하며 라예는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 어두운 호수는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그녀의 뜨거웠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얼어붙어 있었다.

...

라예의 뒤에서 고급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인우는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백양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200미터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이 인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홀린 듯 그는 차가 여인을 지나칠 즈음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 세워.”

끼익!

운전에 집중하던 소문준은 급히 차를 멈추었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문준은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물었지만, 인우는 대답 대신 천천히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문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차창 너머 호숫가에 가냘픈 그림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긴 검은 곱슬머리를 뒤로 늘어뜨리고 검은 상의와 바지를 입은 한 여인은 유난히 가냘프고 수척해 보였다. 호숫가에 언제라도 뛰어들 것만 같은 불안감을 자아냈다.

이어 문준은 자신의 대표님이 그 여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대표님께서 지금 저 아름다운 여인을 구하려는 건가?’

라예는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었고,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봐요, 아가씨.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라예는 깜짝 놀라 몸을 돌려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발을 헛디뎌, 그녀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뒤의 호수로 넘어지려했다. 주변에 잡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라예는 당황한 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조심해요!”

차에서 급히 내린 문준은 눈앞의 장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라예가 호수로 떨어지려는 순간, 인우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물에 빠지지 않고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문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물에 빠지지 않았군.’

낯선 품에 안긴 라예는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것을 느꼈고, 귓가에 들려오는 인우의 심장 박동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다. 인우는 여전히 라예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예는 당황하며 말했다.

“이봐요, 이제 그만 놓아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인우는 그제야 라예를 놓아주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혀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라예가 고개를 들어 인우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청 잘생겼네. 게다가 완전 내 스타일이야.’

짙은 눈썹 아래 깊고 매혹적인 눈, 뚜렷한 이목구비와 오뚝한 콧날, 짙으면서도 얇은 입술까지. 그의 얼굴은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였다. 고급스러운 회색 수제 양복을 입고 있는 인우는 차가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신사의 기품이 흘러넘쳤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권력자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진은환과 비교하니 정말 상대도 안 되는구나. 난 왜 B시에 이런 사람이 있는 걸 몰랐을까?’

“왜 뛰어내리려고 한 거예요?”

인우는 라예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여자 의외로 굉장히 섬세하고 아름답군. 그런데 좀 많이 마른 것 같아.’

“네?”

라예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지금 이 사람 내가 자살하려는 줄 알고 오해한 건가?’

“아,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는 아픈 걸 싫어해서 자살을 한다면 이런 방법은 절대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물에 빠져 죽는 건 너무 고통스럽잖아요.”

라예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인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뒤따라오던 문준도 라예의 말을 듣고는 당황했다.

‘자살할 생각이 있어도 방법을 따져가며 선택해야 한다는 건가? 치밀한 사람이었나?’

“그럼 아가씨는 어떤 방법을 선택할 건가요?”

인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라예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자살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설령 자살을 결심한다 해도, 슬미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아무도 동정의 손길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인우는 라예의 눈빛 속에서 실의와 씁쓸함을 발견했다.

“앞으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서 있지 마요.”

인우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라예는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에 무언가가 부딪혀 틈이 생긴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의아한 눈길로 인우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건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방금 고마웠어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마 호수에 빠졌을 거예요.”

라예는 냉담한 목소리였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고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아가씨도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잖아요.”

인우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말투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옆에 있던 문준은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표님이 남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잠시 후, 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태워드릴까요?”

라예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 차가 병원에 있어서요.”

인우는 은근한 아쉬움을 느꼈지만, 여전히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요, 그럼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아, 네.”

...

라예는 그 자리에 서서 검은색 마이바흐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차는 한정판인데... 저 사람, 재벌이거나 명문가 집안의 도련님인가 보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라예는 이내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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