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빈이 정말 자신에게 뭔가를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모두권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붙어서 얻은 것일 뿐이었다.곧이어 박여름이 무대에 등장했다.송주에서 한의학의 샛별이라는 칭호로 유명한 박여름이 등장하자 환호성이 터졌다."송대표님, 보세요. 이게 박여름씨의 인기에요. 서강빈 그놈과는 비할 바가 아니죠!"이세영은 설레는 얼굴로 박여름를 바라보았다.송해인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는 박여름씨를 믿고 있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박여름이 제약을 끝냈다.그리고 4명의 멘토가 4개의 조명을 모두 밝혔다!진출!장내에 열렬한 박수가 터졌다.박여름이 4개의 조명을 받으며 진출할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그녀는 송주 의학계의 샛별이었으니까."진출이에요, 진출했어요! 대표님, 제가 말했죠, 박여름씨는 분명 해낼 거라고!”이세영은 흥분한 채 말했다."이제 채점만 남았어요. 박여름씨의 실력으로는 당연히 만점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송해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나 다를까, 몇 분 후, 네 명의 멘토가 모두 만점을 주었다!두 번째 만점!네 명의 멘토도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역시 송주 의약계의 샛별답네요.”"맞는 말씀입니다. 이런 나이에 이런 실력이라니, 분명 평소에 많은 공을 들였을 것입니다.”"이번 대회에서는 박여름이 우승할 것 같네요.”네 명의 멘토가 칭찬을 아끼지 않던 때, 박여름이 사회자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회자님, 멘토님. 아까 그 선수가 만든 단약을 보고 싶은데, 혹시 안 될까요?”그녀의 요구는 순식간에 현장의 여론을 불러일으켰다.”서강빈이 만든 단약을 보겠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건가?""아마도 그렇겠지. 박여름처럼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와 같은 점수를 받았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겠지.”"학교 다닐 때 반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애가 성적이 제일 안 좋은 애랑 똑같은 점수를
서강빈을 이용한다고?송해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했다. 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지금 자신과 서강빈의 관계가 상극이어도 필경 3년이나 함께 결혼생활을 한 사이였다.이렇게 서강빈을 이용하려니 송해인은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송해인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미가 스치자 이세영이 바삐 말을 이었다.“대표님, 그만 망설이세요. 아까 무대 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세요. 서강빈이 한 말 중에 어느 하나 대표님을 저격하지 않은 말이 있었나요?”“그리고 지금 서강빈 곁에는 권씨 집안 딸도 있으니 자꾸 이리 우유부단하게 나오시면 정말 언젠가 서강빈이 대표님을 넘어설까 걱정돼요.”말이 끝나자 송해인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표정은 한없이 차가워졌다.도정윤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해인아, 이번 일만큼은 나도 이 비서 편이야.”“귀국할 때 내가 분명히 너한테 얘기했잖아. 내가 돌아온 건 순전히 널 돕기 위해서야. 누구든 네가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면 내가 너 대신 싹 다 치울 거거든.”“네 전남편도 포함해서.”송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고민한 뒤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얘기했다.“이 비서, 가서 준비해.”“네, 대표님.”이세영은 송해인이 결심한 것을 보고 얼굴에 감격스러운 빛이 어렸다. 그녀는 급급히 준비하러 떠났다.“정윤아,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정말 맞는 걸까?”송해인은 아직도 망설이듯 물어왔다.도정윤은 송해인한테 걸어와 옆자리에 앉고는 강경한 눈빛으로 얘기했다. “더 생각하지 마. 네가 해야 하는 일을 해. 너의 미래를 한낱 이혼한 남자한테 낭비하지 말란 말이야.”“서강빈이 이렇게 나오는 거 딱 봐도 네 주의를 끌려고 그러는 거야. 딱 봐도 너한테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거라고, 널 후회하게 만들려고.”“너 정말 조금이라도 후회하거나 망설인다면 그 자식 꾀에 걸려드는 거라고.”송해인은 침묵했다.도정윤의 말이 맞았다.더 이상 서강빈한테 감정 낭비를 해댈 수는 없었다.이혼한 거면 이혼한 거지.서강빈이
서강빈의 단약은 박여름의 것보다 무려 두 배가 넘는 약효를 자랑했다!실로 무서웠다.이게 서강빈의 실력인 걸까?한순간, 박여름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그와 비교하면 자신이 참 뒤떨어진 것 같았다.송주 의료계의 떠오르는 샛별?박여름은 순간 이 칭호가 얼마나 풍자적인 건지 알 것 같았다.이윽고 박여름이 무대를 떠나고 수심 가득한 얼굴로 대기실로 왔다.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이세영이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박여름 씨, 이따가 저 따라서 기자회견에 참석하셔야겠어요. 대본은 준비되어 있으니까 때 되면 대본대로 말하기만 하면 돼요.”“네.”박여름이 무심하게 짧게 대답했다.지금 박여름의 머릿속에는 온통 서강빈, 서강빈이 무대 위에서 단약을 조제하던 방법과 그의 처방뿐이었다.도대체 어떤 처방이면 약효가 두 배에 달하는 거지?송해인은 박여름이 딴생각하는 걸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왜 그래요? 근심 가득해 보이는데.”“대표님, 대표님은 전남편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박여름은 정신이 들어 하며 물어왔다.송해인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그건 왜 물어요?”“그냥요. 알고 싶어서요.”박여름이 대답했다.송해인은 예쁜 눈썹을 찡그렸다. 얼굴은 차가워졌고 목소리도 식어버렸다.“딴 건 몰라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미덥지 않다고?박여름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속으로 얘기했다.“송 대표님, 그 미덥지 않은 전남편이 정말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행동을 보여줄지도 몰라요.”물론 박여름은 이 말을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허나 그녀의 마음속에 서강빈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짙어졌다.“여름 씨, 너무 많이 신경 쓰지 마요. 서강빈 그 점수, 아마 멘토들이 권씨 집안 아가씨의 얼굴을 봐서 일부러 높게 준 걸 거예요. 여름 씨는 송주 의료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잖아요. 여름 씨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남은 라운드에서 계속 만점을 따내는 거예요.”“서강빈이 다음 몇 라운드에서도 오늘
박여름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놀라움으로 술렁였다.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박여름이 자기 의술이 서강빈보다 못하다고 인정했다고?이건 그냥 장난치는 거 아닌가...“아니? 뭔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박여름 씨, 그게 무슨 뜻이죠?”“박여름 씨는 그야말로 송주 의료계의 떠오르는 샛별, 천재 의사예요. 그런데 의술이 서강빈 씨보다 못하다고요?”“미쳤군,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이 비서를 얼굴 못 들고 다니게 하려고 작정했구먼.”의견들이 분분히 오가는 와중에 실내는 시끌벅적해졌다.무대 위에서 박여름의 말을 듣고 있던 이세영의 표정도 경악으로 물들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그녀는 급하게 무대 아래로 내려와 박여름을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급하게 물었다.“여름 씨, 지금 본인이 뭐라 한 줄 알아요?”“네. 잘 알아요.”박여름이 머리를 끄덕였다.이세영의 안색이 급속도로 보기 안 좋게 변했다. 이세영이 차갑게 말했다.“지금 당장 무대 위에 올라 방금 한 말들이 장난이었다고 얘기해요. 서강빈이 오늘 밤 진급해 만점 획득한 거 전부 권씨 집안 아가씨때문이라 말해요.”“그리고 무대 위에서 정말 분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요. 서강빈한테 전쟁을 선포하면서요.”박여름은 고개를 흔들었다. 담담하게 얘기했다.“싫어요.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이 비서님, 아까 밖에서부터 얘기하고 싶었는데요.”“서강빈 씨가 조제한 약은 제 것보다 뛰어나요. 비록 저도 만점을 가져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됐지만 약을 조제하는 방면에서 전 확실히 그보다 못해요.”“이건 사실이에요. 전 거짓말 같은 거 못해요.”“만약 이 비서님이 일부러 저더러 비오 그룹의 홍보를 목적으로 서강빈 씨를 깎아내리라 한다면 죄송합니다. 그건 안 되겠네요.”말을 마치고 박여름은 이세영은 안중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남겨진 이세영은 그 자리에서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어버렸다.“박여름 씨, 박여름 씨! 당장 돌아오는 게 좋을 거예요.”“잊지 말아
때가 되면 손쓸 필요도 없이 서강빈은 무너질 것이다.“이해했어요. 지금 바로 진행할게요.”매니저는 이세영의 말을 듣고 순간 알아차렸다.이세영은 매니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음침하게 웃었다.“서강빈, 앞으로의 시합에서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 언제까지 운이 좋을지.”“단 한 번의 실수라도 처참히 당신을 무너뜨리게 될거야.”...그 시각.서강빈과 권효정이 대회 장소를 떠났다.입구에 도착했을 즈음, 우연히 건물에서 나오던 송해인과 도정윤을 맞닥뜨렸다.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 누구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서강빈도 송해인과 더 이상 불필요한 오해로 엮이고 싶지 않아 권효정에게 시선을 보냈다.“얼른 가죠.”“그래요.”권효정은 짤막이 대답하고 서강빈의 팔짱을 끼고 주차장으로 향했다.송해인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서강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도정윤은 그녀의 마음을 읽어냈다. 별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고는 한숨을 내쉬고 서강빈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서강빈, 거기 서!”서강빈은 눈썹을 찡그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돌아선 뒤 웃으며 물어왔다.“도정윤 씨,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도정윤은 서강빈을 째려보고 시선을 권효정에게로 돌렸다. 도정윤은 사람 좋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권효정 씨? 제가 좀 개인적인 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떻게, 편하실지 모르겠네요.”권효정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도정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털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좋죠.”그리고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했다.자리에는 이내 칠팔 미터 정도 멀리쩍이 떨어져 있는 서강빈과 송해인 두 사람만 남겨졌다.밤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서강빈은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도로변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송해인은 한 손으로 핸드백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귓가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시리도록 아름다웠다.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다.좀 지나 서강빈이 입
서강빈의 안색이 변했다. 잠시 망설이다 별수 없다는 듯 서강빈이 입을 열었다.“네 말이 맞아. 내가 의술에 능하다는 거 너한테 감춘 거 맞아. 그런데 정말 일부러 속이려던 거 아니야. 난 그저...”“됐어. 설명할 필요 없어.”송해인은 차갑게 말했다. 귓가의 머리를 넘기곤 다시 입을 열었다.“딱히 나한테 설명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어. 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 네가 정말 해명하고 싶었으면 진작 3년 전에 나한테 해명했어야지.”말을 듣고 서강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서강빈은 알고 있었다. 송해인이 아직도 화가 나 있다는걸.“내가 설명했다 해도 날 믿어줬을까, 네가?”서강빈은 진지한 눈길로 송해인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송해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를 돌려 서강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네 생각에는 내가 널 안 믿어줄 것 같아?”서강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냉랭한 태도는 이미 그의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서강빈! 왜 내가 널 믿지 않을 거로 생각해? 만약, 정말 만약에 3년 전에 네가 나한테 사실대로 얘기했으면 내가 정말 널 안 믿어줬을까?”“넌 정말 우리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게 네가 자초한 거라는 생각 안 들어?”“난 네 와이프야. 도대체 무슨 말 못 할 사정이었다고 3년이나 숨겨야 했는데!”송해인은 말하면 할수록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말하면 할수록 두 눈에 눈물이 고여갔다.결국,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송해인은 머리를 돌려 눈가의 눈물을 닦아냈다. 억울하고 속상했다.서강빈도 마음이 짠해 왔다. 하지만 그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많은 일들을, 서강빈은 송해인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줄 수 없었다.만약 말하게 되면 송해인이 마주하게 될 건 각종 위험일 뿐이었다.서강빈이 침묵을 지키는 걸 보고 송해인은 붉어진 눈시울로 물었다.“말해. 왜 대답 안 해? 서강빈, 넌 그냥 겁쟁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겁쟁이라고!”겁쟁이?서강빈이 그런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변명하지 않았고 반박하지 않았다.
“강빈 씨 오늘 밤 결과는 자기 힘으로 이뤄낸 거예요. 저 때문이 아니라.”권효정이 빙긋 웃었다.송해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그래요? 그럼 앞으로의 경기에서도 계속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줬으면 좋겠네요.”“그럴 거예요.”권효정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이윽고 네 사람은 갈라졌다.서강빈도 지친 기색이었다. 그는 권효정더러 그를 이상한 할아버지의 잡화상점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권효정은 조금 앉아있다 자리를 떴다.잡화상점 내, 서강빈은 침대에 누웠다. 잠엔 들지 않은 채.머릿속에는 온통 송해인이 오늘 밤 했던 말들뿐이었다.송해인도 별장의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 밤 서강빈이 했던 말들을 곱씹었고 무대 위에서 그와 권효정이 함께 있던 장면들을 뇌리서 떨치지 못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송해인은 더 기분 나빴고 더욱 화났다.빌어먹을 자식!송해인은 몸을 일으켜 도정윤을 붙들고 거실에서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정윤아, 왜, 왜 걔는 몰라?”“이혼하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아직 걔를 사랑한단 걸. 걔를 사랑한다고, 알아?”“근데 왜 걘 아무것도 몰라? 그러곤 다른 여자와 사랑을 속삭이고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자랑하고!”“권씨 집안 아가씨? 하하, 걔가 뭐 그렇게 좋은가? 나보다 예뻐 걔가? 왜 그 자식은 내가 아닌 권효정을 선택한 건데? 왜!”송해인은 흥분해서 외쳤다. 그녀는 술병을 들고 연이어 들이부었다.도정윤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송해인의 원망과 하소연을 들어줬다.이내 송해인이 도정윤의 품으로 쓰러졌다. 눈에는 눈물이 고인 채 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서강빈, 나쁜 자식, 왜 날 몰라, 왜 날 이해 못해, 흑흑...”결국 그렇게 송해인은 울다 지쳐 잠들었다.도정윤은 품속의 송해인을 보면서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동자에는 차가움이 스쳤다.“해인아,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그 쓰레기를 잊게 만들어줄 테니까!”“걔한테 네가 아까우니까!”...다음날.어제 밤 진행된 첫
은행카드를 보면서 서강빈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이내 웃으며 말했다.“여사님, 오해십니다. 저와 효정 씨가 같이 있는 건 절대...”“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건가요?”손이란은 차갑게 웃었다. 마치 서강빈의 수작을 간파한 것처럼 손이란은 조롱 조로 말했다.“말해봐요. 얼마나 원하는지. 얼마면 내 딸을 떠날 수 있는지.”서강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치 선을 넘었다는 듯.“여사님 눈에는 제가 따님과 함께하는 것이 돈 때문이라고 보이시나요?”서강빈은 불만스럽게 되물었다.손이란은 웃긴 얘기를 들었다는 듯 킥킥거렸다.“서강빈 씨라 했나? 난 경험자예요. 당신이 뭘 생각하는지도 난 다 알고 있다고요.”“우리 딸이 좋아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게 서강빈 씨가 나한테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패기와 자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오늘 그쪽과 이렇게 얼굴 마주 보며 앉아 이 일을 해결해 보려 하는 것도 그쪽 때문에 우리 효정이가 화나거나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에요.”서강빈은 눈썹을 올리 치켜들었다. 담담하게 웃으며 서강빈이 입을 열었다.“그래서요?”“이 돈 가지고 내 딸을 떠나든가.”“아님 내겐 그쪽을 후회하게 만들 방법은 많으니까요.”손이란은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최대한계를 보여줬다.서강빈은 웃었다, 비웃는 듯한 그런.그 웃음은 손이란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고운 아치형 눈썹을 찡그리며 손이란이 불만 섞인 채 물었다.“뭘 웃는 거죠?”“여사님을 웃는 겁니다. 당신의 딸을 아예 잘 모르는군요.”“여사님 눈에 효정 씨는 그저 정략결혼으로 이용할 도구에 불과한가요?”“돈을 주며 저를 내치고 효정 씨를 그 백씨 집안 둘째 도련님한테 시집보내시려고요?”서강빈은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웃었다.“그래요!”손이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날카롭게 서강빈을 노려보며 손이란이 되물었다.“이 세상 부모 마음은 다 똑같아요. 효정이가 백씨 집안 둘째와 결혼하지 않는다 해도 귀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먹고 살
만약 서강빈이 단지 의술이 대단하다고 하면 이선종은 이 정도까지 공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의학은 도문에서 기원했지만, 지금의 의사 중에서는 도술을 아는 이들이 적었다. 그러나 서강빈은 의술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도술 면에서도 이렇게나 조예가 깊으므로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서강빈은 다가가서 이선종을 일으키며 말했다.“선생님,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께서도 어르신의 병세를 걱정하여 혹시나 돌팔이를 만날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이선종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서 선생, 선생을 보니 저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입니다. 선생은 저보다 의술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성품도 저보다 훨씬 훌륭하십니다.”서강빈은 이선종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임성진 어르신을 바라보았다.지금 임성진 어르신의 얼굴은 점점 혈색이 돌아오고 곁에 있는 기기에서도 몸의 각종 수치가 호전되고 있다고 나타나고 있었다.임호는 할아버지가 무사한 것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서 선생, 우리 할아버지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서 선생을 큰 형님으로 모시고 싶은데 서 선생께서 부디 거절하지 마시고 보잘것없는 이 동생을 거둬주십시오.”말하며 임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서강빈을 향해 주먹을 모은 채로 성의를 표했다.서강빈은 임호에 대해 첫인상이 무척 나빴지만, 임호가 가게의 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서강빈이 임호에 관한 생각도 180도 변하였다.하여 서강빈은 거절하지 않고 임호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할아버지를 잘 보살피세요. 내가 남긴 처방전을 따르면 어르신께서는 열흘이 지나지 않아 완치하실 것입니다.”임호는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형님. 할아버지께서 상황이 좋아지시면 반드시 감사 인사를 올리러 직접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서강빈은 임호의 오른 다리를 한번 보더니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다음에 올 때 x 레이 사진을 함께 가지고 오세요.”임호는 영
이선종은 돋보기를 쓰고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듯 서강빈에게 말했다.“서 선생, 이 약재가 백 년이 되는지 한번 살펴보세요.”서강빈이 내린 처방을 본 이후로 서강빈을 대하는 이선종의 태도는 완전히 변하였다. 심지어 서강빈의 앞에서는 초보인 것 같은 모습까지 보였다. 서강빈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설련초를 한번 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맞습니다. 백 년 된 설련초가 맞아요.”서강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임호는 감격하여 말했다.“서 선생, 그 말은 우리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그렇다고 볼 수 있죠. 먼저 어르신께서 탕약을 드시고 난 후에 다시 살펴보죠.”서강빈은 고개를 세게 끄덕이며 말했다.“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니, 너무 다행이에요. 서 선생, 우리 할아버지께서 무사할 수만 있다면 우리 임씨 가문에서는 서 선생의 큰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임호는 서강빈에게 절을 세 번 올렸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니 도련님께서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 설련은 줄기만 사용해야 합니다. 꽃잎은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의 기를 상하게 하여 오히려 어르신께 독이 될 수 있어요.”서강빈은 다시 한번 당부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사람을 시켜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임호는 설련을 곁에 있는 간호사에게 건네려고 할 때 손인수가 서둘러 다가오며 말했다.“도련님, 이런 일은 저에게 맡기세요.”이렇게 말하며 손인수는 고개를 돌려 서강빈을 바라보았다.서강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인수의 의술로 보아 이 정도로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건 거뜬했다.손인수는 나무 상자를 받아들고 무척 공손하게 서강빈을 향해 인사를 건넨 다음에야 병실을 나섰다. 이선종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서 선생과 손 신의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습니까?”“그런 셈이죠.”서강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이선종은 그제야 자신이 병실에 도착
이선종이 듣기에 서강빈의 말은 지금 장난을 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임성진 어르신은 천주 군사구역의 고위층 지도자였다. 만약 정말 병을 완치할 수 있다면 오늘까지 끌었을 필요가 있겠는가? 설마 천주의 모든 유명한 의사들이 다 서강빈보다 못하다는 말인가?서강빈은 침대에 누워있는 임성진 어르신을 살펴보았다. 어르신의 얼굴이 창백하고 호흡이 미약한 것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임성진 어르신의 상황이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듯 보였다. 서강빈은 먼저 진혼 부적을 사용해서 총알 파편을 제거한 후 어르신한테 침을 놓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 보아서는 반드시 임성진 어르신의 상태를 먼저 안정시켜야 했다.“임성진 어르신의 지금 상태로 보아 바로 총알의 파편을 꺼내면 안 됩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기맥을 안정시켜야 해요. 선생님께서는 제 생각에 동의하시는지요?”서강빈은 고개를 돌려 이선종을 보면서 말했다.“흥! 자네는 말을 참 쉽게 하네.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데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무슨 수로 어르신의 상태를 안정시킨다는 말인가? 그리고 임성진 어르신은 지금 폐 기능이 감퇴한 것뿐만 아니라 오장육부가 모두 망가지고 있다네.”이선종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선생님, 그 말은 너무 극단적인 것 같은데요? 어떤 경우에는 당신이 못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못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의술을 놓고 말할 때도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지는 지금 결론을 내기에는 이른 것 아닌가요?”서강빈은 말을 마치고 곁에 있는 책상에 놓인 종이와 볼펜을 들고 능숙하게 써 내려간 처방을 이선종에게 건네며 말했다.“선생님, 내 처방전이 어르신의 병세를 안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을지 한번 보십시오.”이선종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서강빈의 손에서 처방전을 건네받아서는 자세히 읽어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가소로운 표정을 하고 있던 이선종은 서강빈의 탕약 처방전을 보고 나서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게... 이 처방
이선종은 성회에서 유명한 신의였는데 원장의 체면이 아니면 멀리서 임성진 어르신의 병을 봐주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임성진 어르신의 상황이 복잡하여 이선종도 연신 고개를 저었다.“주 원장님, 감사합니다.”임호는 먼저 원장한테 감사 인사를 하고 뒤에 있는 서강빈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저희 할아버지의 병은 서 선생이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서강빈의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을 대하는 임호의 말투와 태도는 큰 변화가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보아낼 수 있었다. 더는 예전의 거만함이 없었다.“뭐라고요? 서 선생? 무슨 서 선생이요? 하느님이 와도 어르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이선종의 표정에는 분노한 기색을 띠고 고개를 들어 임호를 보며 말했다.“어르신은 폐에 총알의 잔해가 남아있기 때문에 병든 것입니다. 아무리 최고급의 기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꺼낼 수가 없어요. 그 잔해가 남아있는 한 무슨 약을 쓰더라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이 말을 들은 서강빈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총알의 잔해일 뿐인데 그 정도까지는 엄중하지 않죠.”‘뭐라고? 총알의 잔해일 뿐인데?’이 말을 들은 이선종은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자네가 의술을 정말 아는지 의심되네. 잔해가 체내에 남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장기가 쇠퇴하고 있다는 말일세! 그 어떤 사람이 와도 이렇게 엄중한 병은 치료할 수가 없다네.”이선종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가 보기에 서강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었다. 하여 그의 말속에는 오만함이 다분했고 무례하기 그지없었다.“어르신의 폐 검사 결과를 가져와서 저 사람한테 보여주세요!”주 원장은 다급하게 곁에 있는 간호사를 불러서는 손짓을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는 임성진 어르신의 폐 검사 결과를 가지고 와서 서강빈에게 건넸다. 서강빈은 x 레이 사진 속의 음영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여기일 것이다.x 레이 사진 속의 거대한 음영을 보고 임호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이 휘청
“서 선생, 잘못했습니다. 제발 저희 할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할아버지께서... 지금 더 버티기 어렵습니다.”이렇게 말하며 임호는 참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그는 무릎을 꿇는 순간부터 서강빈이 승낙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으리라고 마음을 먹었다.사실 서강빈은 이미 우남기 어르신한테서 임성진 어르신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방금 그린 진혼 부적도 임성진 어르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다.임호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한 것은 임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임호의 행동은 서강빈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대장부로서 무릎을 꿇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더욱이 임호처럼 도도한 사람이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게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의 효심을 증명하기에 족했다.이렇게 생각한 서강빈은 손을 뻗어 임호를 부축했다.“서 선생.”임호는 감격한 얼굴로 서강빈을 쳐다보았다.“그래요, 도련님, 어르신한테 갑시다.”서강빈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저를 용서하신 겁니까?”임호는 눈물을 닦으며 빨개진 두 눈으로 말했다.서강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임호를 칭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자신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심지어 자신의 자존심까지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장부였다.“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서 선생, 이리로 오십시오.”임호는 이렇게 말하며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조금 전 비를 맞으며 빗속에서 너무 오래 있은 탓에 예전에 다쳤던 무릎이 다시 말썽을 일으켜 임호는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했다. 서강빈은 손을 뻗어 임호를 부축하고는 은침을 하나 떠내 임호의 무릎에 있는 혈 자리에 꽂았다.은침의 위에 영기가 맴돌더니 바로 임호의 체내로 들어갔다. 이윽고 따뜻한 느낌이 몸에 퍼지면서 임호의 무릎에 있던 상처는 기적처럼 완치되었다.“이게...”임호는 깜짝 놀랐다. 대단한 한의사, 심지어 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의사까지 다 찾아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강빈은 임호에게 눈길을 보내지도 않고 곁에서 청소하는 염지아에게 말했다.“그만하고 손님 보내드려.”염지아는 서둘러 손에 있던 걸레를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돌아가십시오. 여기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습니다.”염지아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권효정한테서 어느 정도 맥락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임호처럼 자신의 출신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염지아도 좋게 보지는 않았다.천주에서 오면 어떤가? 그 누가 와도 주인님한테 병을 치료해달라고 하려면 공손한 태도로 부탁해야 한다.임호는 침을 삼키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서 선생, 어제의 일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한테 뭐든 시켜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앞으로 며칠 버티지 못하십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임호는 말하면서 염지아를 지나치려고 했다.“왜 이러는 거예요?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당장 나가세요!”염지아는 앞으로 다가가서 임호의 길을 막았다.임호는 염지아를 한번 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문 앞까지 물러났다.두 시간 동안 임호는 문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강렬한 태양에 임호는 땀범벅이 되었지만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임호는 다시 돌아서서 서강빈에게 말했다.“서 선생,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무릎 꿇겠습니다.”말을 마친 임호는 문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미안하지만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강빈은 여전히 임호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 말했다.“서 선생, 만약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임호는 말하면서 연신 절을 올렸다. 눈가가 빨개진 임호를 보면서 염지아와 권효정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물론 임호가 어제는 행동이 지나쳤지만, 그의 효심은 용서를 받을 만했다.바로 이때, 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순식간에 비가 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졌다.임호는 비를
손인수는 서강빈의 의술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임성진 어르신이 잠시는 무사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룻밤 사이에 어르신께서 다시 위독해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손... 손 신의, 서강빈이 안 온다고 합니다.”임호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서강빈 씨는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얘기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손인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그게...”임호는 그 물음에 마음이 찔렸지만, 할아버지를 위해 그때의 상황을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뭐라고요? 도련님, 부탁하러 간 사람이 그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건 납치 아닙니까?”손인수의 마지막 말은 거의 호통치듯 했다.임호도 아주 자책하며 말했다.“손 신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할아버지께서 지금 정말 위독하십니다. 제발 부탁합니다.”이렇게 말하는 임호의 강인한 얼굴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손인수는 난감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도련님, 사실대로 말하면 제가 어르신을 살리고 싶지 않은 게 아닙니다. 저는 실력이 모자라서 그럴만한 능력이 안 됩니다.”손인수의 말에 임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황급하게 물었다.“손 신의, 그 말씀은 신의께서도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까?”지금까지 임호는 모든 희망을 손인수에게 걸었었다. 아무래도 5년 전에 임성진 어르신의 고질병이 재발했을 때, 손인수가 한번 살려준 적이 있었다.이번에 임호가 서강빈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도 손 신의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손인수의 그 말은 그의 모든 신념을 한순간에 다 무너뜨렸다.어렸을 때부터 그는 할아버지의 곁에서 자라왔는데 군인이 된 이후로 항상 할아버지를 인생의 롤모델로 여겼었다. 할아버지가 곧 자신을 떠난다는 생각에 임호는 더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통곡했다.“도련님, 제가 돕지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몇 년 전 그때는 운이 좋았던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임성진 어르신의 상태는 그때보다 더 심각합니다. 제
말을 마친 임호는 분노하여 콧방귀를 끼고는 병실로 들어갔다.“동진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송주의 시장 허명수가 조용히 병실을 나서면서 방동진에게 물었다.“참나, 임호 도련님께서 너무 경솔하신 탓에 서 선생을 모셔오지 못한 것도 모자라 서 선생한테 손을 대려고까지 했어요. 우남기 어르신께서 중간에서 수습하지 않으셨다면 정말...”방동진은 여기까지 말하고 난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 임호도 참.”허명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복도를 거닐며 말했다.“서강빈이라고 하는 사람이 임성진 어르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확신해?”“아주 확신합니다.”방동진은 이렇게 말하며 난처한 표정으로 허명수의 귓가에 몇 마디 속삭였다. 아무래도 남자인데 남자 구실을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면 입에 담기가 어려웠다.허명수는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당장 서강빈한테 전화해봐. 지금 당장 올 수 있으면 제일 좋고. 임성진 어르신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으셔.”방동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시장님, 그때 상황을 보지 못해서 그렇게 얘기하십니다. 만약 그 사람이 저라고 해도 저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동진아, 임성진 어르신의 안위가 달린 일이야. 그 사람을 납치해오더라도 데리고 와야 해.”허명수는 명령하는 말투로 말했다.“시장님, 문제는 저한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서 선생이 나서주기를 원한다면 임호 도련님께서 직접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얘기도 있잖습니까?”방동진은 서강빈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임호가 만약 예의를 차리고 정중하게 부탁하면 우남기 어르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서강빈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임호가 아예 서강빈을 무시하고 심지어 서강빈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다는 것이다.서강빈이 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방동진조차 임호가 너무했다고 생각이 들었다.하여 방동진은 임호가 강효 그룹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 일에 더는 관여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서강빈은 차갑게 곽수철을 쳐다보며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곽수철, 설마 오늘 여기를 살아서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뭐라고?’곽수철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고 서강빈과 눈이 마주쳤다. 서강빈의 눈빛에서 그는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너... 너 감히 나를 죽인다고?”곽수철은 서강빈이 감히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절대 믿지 않았다. 곽수철은 자신이 킬러를 고용해서 서강빈을 죽일 수만 있지 절대 서강빈이 자신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서강빈은 이 작은 송주의 별 볼 일 없는 작은 가게의 사장님일 뿐이다. 그런 서강빈에게 사람을 죽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달빛이 비치지 않은 깊은 밤에 바람까지 세게 불면 사람 죽이기 딱 좋아. 네가 장소를 아주 잘 골랐어. 시간대도 잘 골랐고.”서강빈은 고개를 들고 고요한 숲을 한번 둘러보고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아니... 서강빈, 너는 나를 죽이면 안 돼. 내가...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나를 놔줘. 내가 정말 잘못했어.”곽수철은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죽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많은 돈을 아직 다 쓰지 못했고 여자들과도 더 놀고 싶었다. 그리고...어찌 됐든 지금 그는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말해. 저것들은 다 무슨 사람들이야?”서강빈은 곽수철의 가슴을 밟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말한다면 너... 너는 나를 놔줄 거야?”곽수철은 겁을 먹은 얼굴로 말했다. 서강빈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곽 대표, 시간을 아껴. 지금 피가 빠져나오는 속도로 봐서는 5분 안에 죽게 될 거야.”말하면서 서강빈은 곽수철의 허벅지에 꽂힌 칼을 세게 휘저었다. 곽수철은 아파서 경련을 일으켰다. 곽수철처럼 곱게 자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참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몇 초가 지난 후, 곽수철은 연신 애원하며 말했다.“서강빈, 말할게, 내가 다 말할게! 제발 나를 그만 괴롭히고 나 좀 놔줘!”“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