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의 목소리는 갑자기 차가워졌고, 주위의 공기가 몇 도 정도 내려간 것 같았다.주효영조차도 릭의 변화에 어깨를 움츠렸고 옆에 있던 임상언도 이를 보고 서둘러 앞으로 나와 말을 돌렸다.“한소은 씨, 자기에게 너무 엄격하게 요구하지 마요. 이미 모두가 이번 실험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건 성공한 거예요.”“당신은 이미 잘 해냈어요. 그전에는 아무도 이런 성과를 얻어 낼 수 없었어요.”임상언은 릭을 바라봤다.“위에서도 많이 기다렸을 거야. 지금은 이런 논쟁을 할 상황이 아닌 거 같아. 어쨌든 일단 실험 결과를 제출하는 게 어때?”임상언의 말은 릭의 차가운 눈빛을 사그라들게 했다.그는 옆의 선반에 있는 시험관들을 한번 보고 고개를 돌려 컴퓨터를 한 번 쳐다보며 한소은에게 물었다“이게 다인가요?”한소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효영이 황급히 대답했다.“그래, 그게 다야. 빠르게 시험관을 챙겨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그녀는 한소은이 지금 이 시기와 맞지 않는 말을 할까 봐 서둘러 시험관을 챙겼다.옆에 서 있던 한소은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책상에 기대어 주효영이 시험관들을 밀봉한 용기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다 챙겼어.”주효영은 잘 담은 박스를 릭의 손에 넘겨주었다.릭이 박스를 받아 들고 한소은을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더 할 말 있어?”한소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더 할 말 없어.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마디뿐이야…….”“무슨 말”릭의 눈빛이 약간 수그러들었다.“당신들이 이 실험이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거지 난 인정하지 않았어. 만약 나중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거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날 탓하지 마.”“난 이 실험이 성공했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한소은은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았다.그녀의 태도는 이 실험품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실제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했다.실험품이 문제가 있으니 이렇게
릭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미소를 지었다.그의 말에 한소은은 어이가 없었다.“지금 나와 했던 약속을 번복하고 배 째라는 건가?”한소은은 릭이 붙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좀처럼 뿌리치지 못했다.릭이 팔을 붙잡은 솜씨는 독특했다. 그다지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자세가 특이했기 때문에 전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팔이 아프지는 않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릭의 손을 떨쳐낼 수가 없다.릭의 무술은 아마 한소은과 한 시간 정도 싸울 수 있는 실력일 것이다.물론, 그건 예전의 한소은과 말이다.지금 거의 만삭인 한소은은 결코 릭을 이길 수 없다.이 순간에 이르러서야 한소은은 자신이 약간 적을 얕잡아 봤다고 느꼈다.그래도 보통 무술을 배운 사람이 아닌 무술 가문 출신으로서 만삭의 몸이라 해도 보통 사람을 상대하기엔 충분하다.하지만 이런 악독한 조직에 총과 같은 무기를 제외하고도 자기만 한 무술 고수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억지로 그와 상대하려 하면 안 될 것 같아 한소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그럼, 당신 말 대로 스페이드 K를 찾아보지.”한소은은 마음속으로 유한성이 이런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아니, 당신은 갈 수 없어. 찾아도 이 사람들이 찾으러 가야 해.”릭의 시선은 한소은의 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도 그대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그래, 알았어.”한소은은 어쩔 수 없이 말을 듣겠다고 표시하며 임상언에게 눈짓했다.임상언은 마음이 급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우리가 빨리 보스를 찾아올게.”릭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며 한 손에는 상자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한소은의 팔을 쥐고 앞으로 걸어갔다.한소은은 그에게 팔이 붙잡혀 휘청거리며 투덜거렸다.“적어도 보호복을 갈아입는 시간은 줘야 하지 않나? 너는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거지? 설마 당신들의 보스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당신네 조직의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보일 수 없는 자들이잖아…….”한소은이 모처
“열심히 하긴 했지!”임상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처음으로 주효영의 말을 인정했다.주효영이라는 사람을 그는 아주 싫어했다.주효영은 악랄하고, 속셈도 깊고, 일을 하는 데 밑도 끝도 없고, 마음이 음침한 사람이다.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노력했다.적어도 실험에 대한 노력은 눈에 띄었다.임상언은 항상 실험실에서 밤낮없이 실험을 하는 주효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책을 뒤적거리거나 자료를 찾아보거나, 여태껏 그녀처럼 고생을 하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그런데 왜! 하늘은 너무 불공평해!”주효영은 두 손으로 책상 위를 두드리며 마음속의 불만을 표출했다.그녀는 그렇게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소은은 아무렇게나 했다.“하지만 노력은 절대적인 재능 앞에 말할 가치도 없어.”임상언이 담담하게 말했다.주효영은 고개를 돌려 임상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임상언은 한숨을 푹 쉬며 말을 이어갔다.“맞아, 당신은 노력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능도 없지 않아 있어. 하지만 타고난 재능도 차이가 있지.”“노력은 확실히 그 차이를 메울 수 있지만 절대적인 재능 앞에서는 이런 노력은 말할 가치도 없어.”사실 아주 오래전에, 그는 이 사실을 알았다.임상언도 힘든 나날을 견뎌낸 셈이다.그는 사업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누구보다 고생을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업에 재능이 있다고 자인했기 때문에 사업을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사업이 커지면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그것을 돌파하기 어려웠고, 한참을 발버둥 쳤지만, 제자리걸음만 했고 하마터면 예전으로 돌아갈 뻔했다.후에 그는 김서진을 만났다.김서진은 한 두 마디 말로 그의 곤혹을 풀었다. 사로는 단번에 열렸고, 곤경에서 벗어났다.나중에 그는 김서진의 생각과 높이가 자신보다 훨씬 높고, 그 생각과 안목은 타고난 차이로 자신이 노력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김씨 그룹의 사업 판도 역시 자신이 평생 도달할 수 없는 높이라고 체
“여기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없어. 모두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목적은, 이 실험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함이야. 하지만 당신과 한소은은 달라. 당신들은 이 실험을 파괴하려고 온 거잖아. 당신들 말고는 누가 하겠어!”“이런 근거 없는 추측은 전혀 의미가 없어!”임상언은 돌아섰다. 그는 더 이상 주효영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주효영은 정말 그들이 한 짓을 알았을 수도 있고, 혹은 추측으로 임상언이 자기 입으로 말하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건 다 시간을 낭비하는 짓이다.“의미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보스는 버려진 바둑알일 뿐이야. 실험은 성공했고 이제 당신, 나, 보스 모두 버려졌어.”주효영이 갑자기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그녀의 상태는 약간 광기 적이었고, 필사적으로 웃으며 책상에 엎드렸다.살면서 일어난 우스운 일들을 모두 생각해 낸 것 같았다.임상언의 마음에 와닿지 않은 것은 아니다.실험이 성공했고 조직의 목적이 달성되었다.이제 모든 사람은 버림받았다.하지만 임상언은 조직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깊은 슬픔이 솟아났다.“네 말대로라면 너나 나나 똑같아. 비웃을 게 뭐가 있어? 이렇게 싸우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나?”임상언은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그저 서로를 다치게 하는 것일 뿐이야.”이 말을 마치고 임상언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다만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주효영이 그의 뒤에서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릭이 한소은을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알아?”“더 높은 보스를 만나러 가는 거겠지.”임상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한소은은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냈어. 위의 사람들이 이렇게 그녀를 중요하게 생각하니 자연히 만나봐야 하겠지.”“큭큭…….”주효영이 차갑게 웃었다.“당신은 정말 순진해.”“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실험은 완전한 성공한 건 아니야. 아직 마지막 단계가 남아있어. 마지막 단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주효영은 의미심장하
“이거 놓지?”임상언의 손을 내려다보며 주효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가 얼굴의 웃음을 거두자 표정은 더욱 음흉하게 변했다.임상언의 손가락에 힘이 조금 풀렸지만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주효영, 실험의 마지막 단계가 뭔지 분명하게 말해! 실험은 이미 성공한 게 아니야?”임상언은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놓여 있는 컴퓨터를 바라보았다.그는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오랜 시간 실험실에 있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이런 결과가 나온 건 성공한 거잖아!’‘만약 그렇지 않다면, 방금 주효영과 한소은은 왜 성공했다고 말했지?’그의 시선을 따라 주효영은 고개를 돌려 컴퓨터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그 실험품을 만들어 내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거야?”“아니야?”임상언의 질문에 주효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순간 임상언의 손이 풀리며 태도도 느슨해 졌다.“방금 한 그 말, 무슨 뜻인지 말해.”“네가 알고 싶다고 해서 내가 꼭 말해줘야 하는 거야? 우리 그렇게 좋은 사이가 아니잖아?”주효영이 반문했다.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심지어 원수라고 말할 수도 있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크게 원한이 있지는 않다. 실험이 이 정도까지 진행되니 사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이제 자기의 미래는 알 수 없다.그들은 이 조직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가장 핵심적인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했고, 심지어 어떻게 연락하는지도 몰랐다.그들이 조직에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그들을 살려 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주효영.”임상언이 정색하며 말했다.“릭이 한소은을 데리고 갔어. 무엇을 하러 갔는지 우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거고. 우리는 이 조직에서 개미만도 못한 존재 란 뜻이지.”“넌 정말 능력이 있어.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네가 이렇게 죽으면 앞으로 더 이상 실험도, 더 이상 주목할 만한 성과도, 세상 사람들에게 너의 이름을 알리지도 못할 거야.”잠
주효영은 임상엄의 말에 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그녀의 말을 듣고 임상언은 크게 놀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주효영은 아차 싶어 급히 입을 틀어막고 자리를 뜨려 했다.순간, 임상언이 빠르게 주효영의 팔을 붙잡았다.“가지 마! 똑바로 말해! 무슨 용기야? 방금 당신이 시험관을 모두 집어 넣었잖아? 근데 무슨 용기란 말이야?”임상언은 주효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당신이 들은 뜻 그대로야. 난 더 이상 할 말 없어!”그러나 주효영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지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임상언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쉽게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기필코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내야 했다.“주효영, 방금 네가 다 말했잖아! 비밀을 누설한 네가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무슨 용기인지 제대로 말해!”임상언이 주효영에게 추궁하듯 물었다.주효영은 짜증을 내며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임상언을 바라보았다.“임상언, 당신 정말 바보구나! 여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있으면서 시험품이 된 사람이 적다고 생각해? R16, R13, R18…… 이것들 다 본 적 있잖아! 그럼 내가 말한 건 무슨 용기였을까?”임상언은 어리둥절했다. 이 익숙하고도 낯선 코드 네임을 들으며 머리 속에는 험상궂고 고통스러운 얼굴들이 한 장씩 스쳐 지나갔다.그는 순간 등줄기의 솜털이 곤두서면서 소름이 쫙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그 말은…….”“내 말은 스스로 생각하 란 말이야. 알아낼 수 없으면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어!” 주효영은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뿌리쳤다.“다시 말해서, 당신이 이해하든 말든 결과에 어떤 변화도 없을 거야.”말을 마친 주효영은 그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자리를 떠났다.주효영의 뒷모습을 보고 임상언은 쫓아가서 다시 물어보려 했지만 이내 멈추었다.주효영의 말이 머릿속에 울리면서 충격이 매우 커 보였다.이 조직에서 한 실험은 당연히 한소은이 한 것 뿐만이 아니다.다만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실험
한소은이 방호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릭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한소은이 도망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물론, 여기서 만삭인 그녀가 빠져나가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한소은은 릭을 향해 눈을 뒤집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흥, 재미없군! 도망갈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따라와!”릭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뒤돌아서서 앞으로 나아갔다.한소은은 느릿느릿하게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그가 들고 있는 상자를 흘겨보며 말했다.“오늘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만약 성공하지 못했다면 날 바로 죽일 생각인 거야?”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한소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원래 속도대로 걸어갔다.한소은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우리가 지금 이 조직의 고위층을 만나러 가는 거지? 당신들의 고위층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고, 평소에 어떻게 연락하는 거야? 이곳에 무슨 특별한 연락할 장비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은데.”“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말을 안 하는 거야? 아니면 조직의 사람들이 당신을 감시하는 건가? 혹시 더 고급스러운 도청 장치가 있기라도 해?”“이번의 시험품의 성능이 불안정해서 실패한다면…….”한소은은 입술을 핥으며 단념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그때 릭이 갑자기 반응했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나를 화나게 하려고 하지 마.”한소은은 더 이상 그에게 물음을 던지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무고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신을 화나게 한다니? 아니야!”그녀를 깊게 쳐다본 릭은 자기 손에 든 것을 내려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야! 너는 너무 많은 것을 물어봤어.”이 말은 그녀가 묻는 이런 것들에 대해 릭은 모두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릭이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로봇처럼 걷는 것을 보고 한소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적어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해줄 수는 있지 않나?”“나도 몰라.”릭이 딱딱
향기에 익숙했던 한소은은 곧 이것이 사람을 잠재우는 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임상언은 차를 몰고 가속 페달을 최대로 밟았다.그는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렇게 많은 것들을 생각 할 수 없었다.실험은 성공했지만, 실험실의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을 알지 못했다.그들은 여전히 일상적으로 해야 할 실험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다만 임상언만이 지금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안다.김서진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임상언만 초조해 하며 미쳐 날뛰었다.‘김서진, 이런 중요한 시간에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지금, 이 순간 김서진도 바빠서 전화를 받을 시간이 없다는 걸 임상언은 몰랐다.원청현이 또 발작을 일으켰고 원철수 혼자서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김준도 이유 모를 미열이 나기 시작했고 정원의 가사 도우미들도 상황이 악화되었다.밖에서 김서진의 측근이 그들을 지키고 있지만, 이 정원에서 어떤 끔찍한 일들을 겪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임상언은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곧장 회사로 향했다.그는 김서진이 전화를 받지 않아 회사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허탕을 쳤다.김서진이 벌써 며칠째 회사에 나가지 않았고 재택근무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다행히도, 회사 쪽에서 비서를 통해 지금 김서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구체적인 행방은 알 수 없었다.임상언이 김씨 그룹에서 나올 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것을 보며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지금 김서진이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다. 집에도 없는 것은 분명했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지금 한소은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만약 주효영의 말처럼 한소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임상언은 정말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전화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보니, 김서진의 번호가 번쩍였다. 임상언은 순간 흥분하여 전화를 받았다.“이봐, 드디어 전화를 받았구나!”김서진의 목소리는 약간 잠겼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