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하지만 이 여자는 야망이 너무 커요. 차씨 가문에 일어났던 일도 이 여자가 꾸민 일이에요.”“음양 듀오를 말하는 건가요?”한소은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녀는 그날 발생했던 일들이 떠올랐다.차성호가 망상에 빠져 많은 일을 계획했지만, 뒤에서 그를 조종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초에 그녀는 차성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차성재도 조사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작업실 일과 여러 가지 일로 바빠 이 일은 잠시 내려놓았었다.‘우씨 가문의 아가씨가 음양 듀오의 주인이라고?’“그 여자가 차성호를 조종해 차씨 가문을 손에 넣으려 한 건가요 그러고 나서 차성호를 꼭두각시로 삼으려 한 거고?”김서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계획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 여자는 차성호란 사람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할할 사람이 아니란 걸 예상하지 못한 거죠. 그 여자가 차성호를 이용해 차씨 가문을 손에 넣으려 한 동시 차성호도 그 여자를 이용해 권력을 손에 쥐려고 했어요. 결국엔 두 사람 모두 당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해서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 거죠.”그의 말을 듣던 한소은은 얼굴이 빨개졌다.“내가 한 것도 없는데요, 뭐.”한소은은 단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했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모든 걸 바로잡은 사람은 차성재였다. 비즈니스에 있어서 차성재는 확실히 자기보다 뛰어났다. 그가 차씨 가문의 후계자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김서진은 한소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다 내 눈에 보여요.”그가 이렇게 머리를 만져주니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한소은이 불편해하며 고개를 저었다.“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방금 말한 비적은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내가 일찍이 차씨 가문을 떠났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께 무슨 비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이 비적이란 게 남자에게만 물려주는 그런 건가? 차성재에게만 물려준 건가?’“차씨 가문의 것이 아니라, 우리 김씨 가문의 비적이에요.”김서진의 말을 듣고 한소은은 놀람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김서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한소은은 이런 일로 그와 삐질 소심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를 놀리고 싶어서 일부러 화가 난 척을 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이자, 김서진은 그녀를 확 끌어안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했다.긴 키스가 끝나자 두 사람 모두 숨을 헐떡였다. 그들은 온몸이 달아오른 듯 후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한소은이 임신하고 나서부처 김서진은 신경을 많이 썼다. 키스는 물론이고 더 이상 잠자리도 하지 않았다. 정말 그가 말했던 거처럼 한번 불을 지피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서진 씨...”한소은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 갈라진 목소리마저 김서진을 유혹하고 있었다.김서진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그녀가 한마디라도 더 한다면 아마 자기도 이성을 잃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그가 안간힘을 쓰며 참는 모습에 한소은은 우습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 혀끝으로 그의 손가락을 핥았다.갑작스러운 그녀의 반응에 김서진은 급히 손가락을 움츠렸고 두 눈은 화가 나 있었다.‘이 여자가 정말! 지금 이러는 거 얼마나 날 고문하는지 모르는 거야?’“정말 말 하나도 안 듣네요!”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한번 꾹 누르고 벌떡 일어서며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그가 이런 반응일 줄 예상하지 못한 한소은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곧이어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너무 심했나?’물소리가 한참 들렸는데 그는 아직 나올 생각이 없었다. 한소은은 침대에서 내려와 마른 수건을 들고 욕실 문을 열었다.김서진은 그녀를 등진 채 쏟아지는 물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단단한 등 근육은 선명했고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물은 그녀를 갈증 나게 했다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김서진이 몸을
그가 손을 거두려 할 때 한소은이 갑자기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김서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에게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오늘...”한소은이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빨개진 얼굴로 이어 말했다.“오늘, 할까요?”“...”김서진의 두 눈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그는 당연히 하고 싶었다.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자고 싶었지만 솟구쳐 오르는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한소은은 직설적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김서진의 눈을 마주치자 부끄러움에 시선을 피해버렸다.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김서진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고는 얼굴, 다음은 입술에 키스했다.하지만 아주 잠깐의 키스였다. 그의 입술이 잠깐 닿았다 바로 떨어졌다.한소은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우린 함께 할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잖아요. 지금은 당신 몸이 제일 중요해요.”“네.”한소은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잘 자요.”김서진은 그녀의 이마에 한 번 더 키스하고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그의 모습을 보던 한소은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당신은 안 자요?”“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았어요. 먼저 자요.”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한마디 덧붙였다.“걱정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당신에게 숨기는 일이 없을 거예요.”한소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위해 영이 떠올랐다.“우해영은...”“오늘 당신을 떠보려고 왔으니, 당분간은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최근은 오지 않을 거예요.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비적뿐인지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이 일은 내가 처리할게요.”김서진이 잠시 고민하다 이어서 말했다.“그 전에 그 여자와 맞서지 말아요. 당신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는 건 잘 알지만, 그런 미친 여자를 상대할 필요 없어요.”김서진의 눈에는 우해영이 그저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고작 그런 책하나 때문에 자기의 평생을 바친다니. ‘김승엽과 결혼해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우해민이 구석에서 숨죽이고 있어도 무술을 몇 년 동안 배운 우해영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숨지 말고 기어나와!”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우해민의 가녀린 몸이 한번 흠칫하더니 빠르게 문 뒤에서 나갔다.“언, 언니...”우해민은 두려움에 쭈뼛거리며 우해영을 불렀다.그저 보기만 해도 우해영은 짜증이 났다. 이 세계에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동생이 자기와는 달리 겁이 많고 쭈뼛거린다는 생각에 순간 창피함이 몰려왔다.“이리 와!”우해영은 숨을 두 번 깊게 들이마시고 화를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에게 명령했다.우해민은 그녀의 명령이 익숙한 듯 그녀의 앞에 가 멈추어 섰다. 고개를 푹 떨구고 어깨를 축 내리며 감히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자기 앞에 겁에 질린 모습으로 서 있는 우해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우해영은 문득 거즈로 감싼 우해민의 귓불을 보더니 며칠 전 발생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일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귀는 좀 나았어?”조금 딱딱한 말투였지만 걱정이 되어 물어보는 것 맞았다. 우해민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관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과 딱 마주쳤을 때 다시 겁에 질린 토끼 눈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거, 거의 다 나았어.”“나았으면 됐어. 앞으로는 그런 짓 할 생각 하지 마.”“응.”우해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무 뜻 없이 물었던 우해영의 머릿속에 문득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게 되었다.원래의 계획대로 라면을 우해민이 자기를 대신해 김승엽과 결혼을 하고 그 뒤의 일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오직 무술 고서를 손에 넣으면 되었기에 남자에 대해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우해민이 자기를 대신해 자기의 신분으로 그 남자와 결혼하고 잠을 자게 된다면 앞으로 번거로운 일들이 많이 줄어들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이렇게 되면 자기는 무술 연습에 온 신경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고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 신경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된다.하
‘역시 믿을 만한 남자가 아니었어!’우해영은 조금 화가 났다. 김승엽 그 자식이 자기와 우해민을 구분해 내지 못한 것이 못마땅했다.‘얼굴 빼고 어디가 닮았다고! 성격이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며 하나도 나보다 잘하는 게 없는데 어떻게 헷갈릴 수 있는 거지?’“악!”그렇게 생각하면서 우해민의 입술을 있는 힘껏 눌렀다. 그녀가 갑자기 힘을 줄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우해민은 입술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런 모습은 정말 누가 봐도 가여워할 모습이었다.“남다 들은 다 너같이 약해 빠진 여자를 좋아하지?”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우해영은 순간이 그 얼굴이 너무 싫어졌다. 분명 자기와 똑같은 얼굴인데 다른 느낌을 주는 얼굴이 싫어졌다.이윽고 우해민의 턱을 확 놓아주더니 몸을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내일 당장 우씨 고택으로 돌아가!”입술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우해영에게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돌아가라니, 우씨 고택으로 돌아가라니!우해민은 가고 싶지 않았다.처음에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죽어도 오고 싶지 않았지만, 여기에 와서 지내다 보니 다시는 고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감옥 같은 곳에, 고립된 섬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자기의 이름을 불러주지도 자리를 산 사람 취급해 주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여기서는 가끔이지만, 쇼핑도 할 수 있고 집 밖을 나가 바깥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이곳에는 자기만의 것이 있었다.오로지... 자기만의 ‘엽이’가 있었다.우해민은 종종 마음속으로 그를 엽이라고 불렀다. 마치 언니가 모르는 그들만의 비밀이 생긴 듯한 느낌은 그녀를 여기서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그와의 데이트가 얼마나 달콤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언니가 고택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한참이나 우해민을 쳐다보던 우해영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그럼...”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용인이 들어오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아가씨, 손님이 오셨는데 김씨 성을 가진 분이세요.”“김씨...”잠시 머뭇거리다 우해영은 옆에 서 있는 우해민을 슬쩍 흘겨 보았다. 김 씨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절대 잘못 본 게 아니다.‘이 계집애, 역시 그 사람에게 빠졌구나.”아까까지만 해도 우해민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우해영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넌 방에 들어가 있어. 내가 나오라고 하기 전에 절대 나오면 안 돼!”“...”이건 예상했던 상황이다. 우해민은 입술을 삐죽이다 대답했다.“알았어.”몸을 돌려 지하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아서서 빠르게 걷던 걸음을 늦추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혹시 그 사람일까?’“들어오라고 해.”우해영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김승엽인지 김서진인지 가늠하며 자리에 앉아 고용인을 시켜 테이블을 치우게 했다. 그러고는 차를 다시 내오라고 말했다.고용인이 차를 들고 올 때 김서진도 들어왔다.들어온 사람이 김서진인 것을 발견하고 우해영은 조금 실망했다.“당신이었군요.”말하면서 시선은 지하실로 통하는 길을 흘려 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해민의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우해영 씨.”김서진이 입을 열었다.모퉁이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우해민이 흠칫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우해영을 찾아온 김씨 성의 손님이 김승엽이 아닌 낯선 남자라는 걸 확인하고 실망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그녀의 기운이 사라진 걸 느끼고 우해영은 입꼬리를 씩 올리고 김서진을 보며 말했다.“김서진 대표가 찾아오시다니. 무슨 일로 오셨나요?”“우해영 씨, 난 신혼 축하 선물을 주러 온 거예요.”김서진이 웃는 얼굴과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나무로 만들어진 네모반듯한 상자는 값져 보
“당신이 우리 집까지 찾아온 이유가 이거 때문에 아닌가요? 왜요, 내 아내를 떠볼 용기는 있으면서 상자를 열어 볼 용기는 없는 거예요?”김서진은 말을 돌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젯밤 한소은을 기습한 여자가 우해영이라는 걸 확신했다.그런데도 우해영은 이 사실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헛웃음을 한번 짓더니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김서진 씨,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잘 모르겠네요. 당신의 아내를 떠보다니요? 난 당신 집에 간 적도 없는걸요. 아, 혹시 김씨 고택을 말하는 거라면 당신 작은아버지와 곧 결혼할 사이라서 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앞으로는 날 작은어머니라 불러야 하겠네요?”그녀가 인정하지 않자, 김서진은 더 이상 그녀를 밀어붙이지 않았다.“호칭은 결혼하고 바꾸어도 늦지 않아요. 우해영 씨, 내가 준 선물을 열어보지 못하는 건 내가 선물에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는 건가요? 아니면 내가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우해영은 자기의 맞은편에 앉은 이 남자를 천천히 진지하게 바라보았다.사실 그녀는 김서진을 자기의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무술을 배우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일이다. 어려서부터 무술에 푹 빠져 있었고 가업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가업을 크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우씨 가문도 지금의 큰 가문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우해영은 아버지가 사업을 위해 무술을 포기한 게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자기의 아버지는 무술을 배울 재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대 무술 가문에서 우씨 가문은 세 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이었는데 나중에는 가문을 이을 후계자들이 하나둘씩 무술을 포기하는 바람에 점차 몰락했다.우해영은 우씨 가문의 무술을 발전하고 고대 무술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워 온 세상 사람들이 우씨 가문의 무술을 인정하게 만드는 게 소원이었다. 다른 가문이 모두 우씨 가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만들고 싶었다.이렇게 생각하니 그 상자를 바라보던 눈빛이 달라졌다.김서진은 이 상자에 담긴 물건이 그녀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해영은 김서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김서진의 목덜미를 향해 뻗는 손은 속도가 엄청났다. 사실 우해영은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그저 김서진의 실력을 떠보려고 실력을 조금 숨겼다.그런데도 우해영은 자기의 무술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무술을 배우면서 자기에게 패배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이 공격이 먹히지 않을 거란 생각을 단 1초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공격이 정말 먹히지 않았다.김서진의 목을 잡지 못하고 허공이 멈춰 있는 손을 보며 우해영은 정신이 멍해졌다. 중요한 건 김서진이 어떻게 피한 건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다.움직인 것 같지만 움직이지 않은 것도 같다. 김서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우해영은 김서진이 자기를 비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역시 날 속인 거군요!”지금 보니 우해영은 거의 확신했다. 김서진은 분명 무술을 배운 사람이다! 그가 무술을 배웠다는 것은 김씨 가문에서 남몰래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거고 그 고서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고대 무술 가문 중에 김씨 가문에 관한 자료는 없었다. 하지만 방금 김서진이 자기의 공격을 피했다는 건 분명 실력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우해영은 그 고서를 손에 넣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한 번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우해영은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공격했다.처음에 실수했으니, 이번에는 실력을 남겨두지 않고 진지하게 그에게 공격해 갔다.허공에 멈추었던 우해영의 손이 이번에는 김서진을 향해 내리쳤다. 보기엔 날카롭고 빠른 공격이었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우해영은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 김서진의 복부를 향해 공격해 갔다.김서진은 서두르지 않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몸을 뒤로 젖혀 주먹을 피했다. 그러고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우해영은 자기의 몸이 통제되지 않고 내팽개치자는 느낌을 받고 공포감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넘어지지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