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해영은 김서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김서진의 목덜미를 향해 뻗는 손은 속도가 엄청났다. 사실 우해영은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그저 김서진의 실력을 떠보려고 실력을 조금 숨겼다.그런데도 우해영은 자기의 무술 실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몇 년 동안 무술을 배우면서 자기에게 패배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이 공격이 먹히지 않을 거란 생각을 단 1초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공격이 정말 먹히지 않았다.김서진의 목을 잡지 못하고 허공이 멈춰 있는 손을 보며 우해영은 정신이 멍해졌다. 중요한 건 김서진이 어떻게 피한 건지 똑똑히 보지도 못했다.움직인 것 같지만 움직이지 않은 것도 같다. 김서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우해영은 김서진이 자기를 비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역시 날 속인 거군요!”지금 보니 우해영은 거의 확신했다. 김서진은 분명 무술을 배운 사람이다! 그가 무술을 배웠다는 것은 김씨 가문에서 남몰래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는 거고 그 고서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고대 무술 가문 중에 김씨 가문에 관한 자료는 없었다. 하지만 방금 김서진이 자기의 공격을 피했다는 건 분명 실력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우해영은 그 고서를 손에 넣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한 번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우해영은 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공격했다.처음에 실수했으니, 이번에는 실력을 남겨두지 않고 진지하게 그에게 공격해 갔다.허공에 멈추었던 우해영의 손이 이번에는 김서진을 향해 내리쳤다. 보기엔 날카롭고 빠른 공격이었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우해영은 다른 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어 김서진의 복부를 향해 공격해 갔다.김서진은 서두르지 않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몸을 뒤로 젖혀 주먹을 피했다. 그러고는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있는 힘껏 내팽개쳤다.우해영은 자기의 몸이 통제되지 않고 내팽개치자는 느낌을 받고 공포감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넘어지지
“싸우고 싶다면 날 찾아와요. 내 아내는 건들지 말아요. 안 그러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우해영은 왜 다른 사람들이 김서진을 두려워하는지 드디어 알았다.“흥, 김서진 씨가 이런 사랑꾼인 줄은 몰랐네요.”그러고는 뭔가 떠오른 듯 이어 말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고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잡아떼진 않을 거죠? 김씨 가문이 이렇게 오랜 시간 숨어서 세계 최고의 무술을 연마하고 있었다니!”“아까도 말했지만, 김씨 가문에는 고대 무술 고서 같은 건 없어요.”김서진은 가볍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고함이 가득했다.“왜요. 배운 거면 배운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감히 인정하지도 못하는 건가요?”우해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김서진과의 싸움에서 우해영은 자기가 절대 김서진을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 김서진이 자기를 찾아온 이유는 한소은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러 온 것이다. 만약 자기가 한소은에게 손을 대려면 김서진이라는 높은 산을 먼저 넘어야 할 것이다.하지만 자기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물건이 바로 자기의 눈앞에 있는데 가질 수 없다는 게 그녀를 괴롭게 했다. 분명 고서의 무술을 배웠으면서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김서진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그건 당신의 자유예요. 김씨 가문은 고대 무술 가문에 속하지 않아요. 무술을 이을 생각도 없고 무술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적어요. 이 세계에 무술 고서가 그렇게 많은데 당신이 다 배울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숨 쉬고 있는 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우해영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마음대로 하세요.”김서진은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는 자기가 우해영을 설득할 수 없는 걸 잘 알고 있었다.“내가 한 말만 잘 기억해 둬요. 한번만 더 내 아내를 건드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김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노려보다 그가 완전히 떠난 걸 보고서야 우해영은 숨을 푹 내
김승엽은 무술을 할 줄 몰랐다. 게다가 우해영이 기습해 오자 무방비 상태에서 중심을 잃고 그녀에게로 쓰러졌다.“악!”그러자 김승엽의 코가 우해영의 입술에 쿡 박았다. 두 사람은 아픔에 동시에 '악' 하고 소리고 소리 질렀다.우해영은 그의 코에 부딪힌 입술이 아프다 못해 저릿한 느낌을 받았다. 김승엽은 아픈 코를 비비며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해영 씨, 뭐 하는 거예요?”아픈 코를 연신 문지르며 김승엽이 겨우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아픔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무술을 할 줄 모르는 거예요?”그를 놓아주며 우해영이 마음속의 생각을 확신했다.아까 김서진이 무술을 할 줄 아는 걸 보고 그녀는 김씨 가문이 숨겨진 고대 무술 가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김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무술을 할 줄 알 것이라고 생각해 김승엽을 떠본 것이다.분명한 건 김승엽은 무술을 할 줄 모른다.만약 무술을 할 줄 모른 척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실력으로 김승엽이 무술을 할 줄 모른 척하는지 정말 할 줄 모르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김승엽에게는 조금의 내공도 없었다. 그가 내뿜는 기운도 무술을 오래 연마한 사람의 기운이 아니다.“당연히 할 줄 모르죠! 우리 김씨 가문은 당신네 우씨 가문처럼 무술 가문이 아니에요!”김승엽이 코를 매만지면 투덜거렸다.‘내가 무술 할 줄 알면 진작에 널 손에 넣었지! 내가 널 그렇게 무서워할 이유가 없잖아!’이렇게 생각하면서 우해영을 달랬다.“해영 씨,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아참. 어떤 자식이 당신을 다치게 했는지 말해줘요. 내가 무술을 할 줄 모르지만, 우리 김씨 가문의 모든 걸 동원해서 그 자식을 잡아다 당신 앞으로 데려올게요!”김승엽을 우해영이 자기가 무술을 할 수 있는지 떠보는 이유가 이래서라고 생각했다. 가슴팍을 두드리며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무술을 할 줄 모르면 어떤가, 그는 무술 따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지금, 이 시대에서 돈과 무기만 있다면 그딴 무술은 아무것도
정신이 번쩍 든 김승엽은 고개를 끄덕이느라 바빴다."그래요, 그래요! 당연한 소리를 하네요!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다니! 어느 누가 간덩이가 부어서 당신을 건드렸는지 말만 해요. 내가 그 사람을 잡아다 복수해 줄게요!""김서진이예요." 그녀는 혀끝으로 입술에 묻은 핏자국을 핥으며 희미하게 말했다."그 사람이라고요? 정말 간덩이가 부어서..." 김승엽은 흥분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녀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표현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되물었다."누, 누구라고 했어요?"그는 자기의 귀가 잘못된게 아닌지 의심했다."김서진, 당신의 착한 조카란 말이에요! 왜요, 그 사람은 안 되나요?" 우해영은 딱딱한 어조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말이 얼마나 진실한지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방금 한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군요. 아, 사람의 입이 귀신도 속인다는 말이 정말이었네요. 당신은 다른 남자들과 다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됐어요, 내가 사람을 잘못 본거였네요." 우해영은 한숨을 쉬며 팔을 내리고 일어설 준비를 했다."잠깐만,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 김승엽은 당황한 나머지 급히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내가 잘 못 들었나 해서요. 누구라고 했죠? 김서진? 우리 김씨 가문의 김서진이라고요? 같은 이름이 아니라? 정말 당신이 잘못 본 거 아닌가요?""왜요, 이름도 같고 얼굴도 같을 수가 있는 거예요?" 우해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아니면 제성에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똑같이 생긴 김서진이 많다는 건가요? 아니면 김씨 가문에 쌍둥이가 있다는 건가요?" "......"김승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 자식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정말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우해영은 화난 표정을 지었다."내가 당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영 씨, 당신은 뛰어난 무술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당신의 실력이 어떤지 내가 잘 아는데 김
"내 질문에 대답해요!"더 이상 그와 말장난하고 싶지 않은 우해영은 짜증 섞인 말투로 물었다.그녀가 짜증이 난 모습을 본 김승엽은 서둘러 말했다."난 단지 당신이 걱정돼서 그래요! 김서진이 어렸을 때 호신술을 배우러 어디론가 보내졌었는데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당시 아버지가 그를 데려 갔었는데 아마 그가 7~8살 정도였을 때였어요. 나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그가 배운 것은 그저 호신용으로 간단하게 배운 거라 무술이라 할 것도 없어요. 어떻게 당신과 비길 수 있겠어요?"“혹시 그 자식이 무슨 수를 써서 당신이 다치게 한거 아닐까요? 그 자식이 당신을 이길 리가 없어요!”어쨌든 우해영은 고대 무술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고, 그녀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김서진 그 자식이 이렇게 쉽게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다면, 그가 그녀를 제압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김승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우해영의 무술이 정말 전설처럼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과장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여자의 무술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힘에 한계가 있으니 얼마나 뛰어날 수 있겠는가?그는 우해영을 흘깃 바라보며, 정말 싸우게 되면 자기의 힘만으로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지 마음속으로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그 전부터 그녀의 기운에 압도당했기에 그녀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시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우해영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지만, 무술가의 예리한 본능으로 그가 지금 뭔가 꼼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말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둬요! 나도 알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요!"그렇게 말하며 우해영이 일어섰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김승엽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무릎에 앉히려 했다. 이 자세로 그녀와 키스할 수 있고 그녀와 자기의 힘 차이가 얼
김승엽은 그녀가 너무 변덕스럽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던 사람이 다음 순간 그의 손목을 부러뜨리려 하니 김승엽은 조금 감당하기 벅찼다."내가 정확히 뭘 잘못해서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한 거죠?"김승엽은 손가락을 호호 불면서 말했다."그래요, 당신을 다치게 한 사람이 김서진이라면, 정말 그 사람이라면, 내 조카라는 이유로 당신이 화가 났다면 그건 인정할게요. 어쩔 수 없지만 김서진은 내 친조카예요.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니 내가 대신 보상해 드릴게요.""하지만 해영 씨, 우리는 앞으로 한 가족이 될 사이잖아요. 애초에 김서진과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그 자식이 나 때문에 당신을 찾아온 건가요? 나 때문에 당신을 협박하러 온 건가요?"김승엽은 우해영이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김서진이 그녀를 다치게 한 것이 사실이라면 김서진이 도대체 왜 그녀를 다치게 했고 왜 여기에 왔을까하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설마...순간 김승엽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해영 씨, 김서진이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건가요?"우해영은 그의 터무니 없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게 질투가 나서, 내가 당신과 힘을 합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봐 당신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죠!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내 물건을 빼앗고, 내가 받아야 할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고, 김씨 가문의 유산도 빼앗고, 모든 걸 빼앗아 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당신까지 빼앗아 가려 하다니! 이번에는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당신이 그 자식의 청혼을 거절해서 당신을 다치게 한 건가요?"김승엽은 이렇게 말하면 할수록 이 이유가 그럴듯 하다는 생각 들었다."정말 너무 하네요! 걱정 말아요. 내가 반드시 당신을 다치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할게요!"그는 분노에 휩싸여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나가려 했다.몇 걸음 나가더니 점점 속도를 줄였다. 그를 말리는 우해영의 목소리가 들리지
김서진이 할머니의 전화를 받았을 때 회사에서 회의 중이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설립과 해외 진출에 대해 보고받아야 했기 때문에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데이터 분석을 위해 핸드폰 화면을 컴퓨터와 연동하고 있을 때, 전화가 들어오자, 회의가 중단되었다.그는 전화를 끊고 서둘러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가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김서진의 할머니는 화를 내며 그에게 물었다."지금 어디야?""회사에 있어요."김서진은 할머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당장 집에 들어와!""지금요?""지금 당장!"잠시 머뭇거리다 한마디 더 덧붙였다."네 아내도 데려와"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할머니가 이어서 말했다."안 데려오면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라고 할 거야! 그보다, 그 애가 임신했다던데 얼마나 귀하길래 이 늙은이가 한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거야?""......"김서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전화로 할머니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알았어요."할머니가 갑자기 자기를 찾는 건 아마도 우해영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김승엽과 할머니에게 어떻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한 시간 후, 김서진의 차가 천천히 김씨 고택으로 들어왔다. 그의 할머니는 거실에 앉아 지팡이를 손에 꼭 쥔 채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김승엽은 노부인의 옆에 서 있었고 노부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김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옆에 앉아 구경했다."할머니."김서진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이 시간에 왜 아직 낮잠을 주무시지 않았어요?""낮잠?"김서진의 할머니는 못마땅한 듯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내가 평생 낮잠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아니고?”"할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허! 누가 감히 김 대표님한테 막말하겠어? 내가 고작 몇 마디 한거 가지고 막말했다고 생각해? 그럼, 여자를 때릴 때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는 왜
김서진의 할머니가 지팡이로 바닥을 '탁' 치며 지금 매우 화가 났음을 나타냈다.“그 여자가 다쳤다고요?”김서진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자기가 얼마나 세게 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우해영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이 하도 드세어 기필코 자기를 이기겠다며 하는 공격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공격들이었다. 이에 대응하려 조금 힘을 주니 그녀가 크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흥, 와서 고자질이라도 했나 보지?’그 여자처럼 성격이 드센 사람은 고자질 따위 하지 않을 거라고 김서진은 생각했었다.하지만 김씨 집안 어른의 힘을 빌려 위협하려 하다니!“해영 씨 많이 다쳤어. 피까지 토했단 말이야!”김승엽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곧이어 고개를 노부인에게 돌리더니 당시 상황을 설명해줬다.“어머니, 해영 씨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 못했죠. 집안이 아주 난장판이 되었어요! 테이블은 다 뒤집히고 해영 씨는 피를 토하지 않나. 해영 씨가 어려서부터 무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만약 김씨 집안에 살인자가 나타났다고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우리 김씨 가문은 이 개자식...”김서진의 두 눈을 마주친 김승엽은 순간 겁에 질려 말을 잇지 못했다.“우리 김씨 가문의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단 말이에요!”김승엽의 말을 듣던 노부인의 얼굴이 한껏 찌그러졌다. 김씨 가문의 명예가 무너진다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래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거야? 김서진! 네가 무슨 이유로 해영이를 다치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술을 겨룬 거든, 아니면 다른 뭔가 있거든 네가 해영이를 다치게 한 건 변하지 않은 사실이야! 가서 고개 숙여 사죄하고 잘못했다고 빌어. 안그러면...”“안그러면...”노부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 어떤 걸로 김서진을 위협해야 그가 말을 들을지 몰랐다. 지금 김씨 가문의 권력은 모두 김서진의 손에 있기에 더 이상 이 손주를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내버려 두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