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또 그 얘기다.서훈은 이를 꽉 깨물었다.“최선을 다하죠.”서훈은 이렇게 하면 준회가 그녀를 놓아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올려 그대로 샤워실을 나와 휴게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는 준회.“양준회씨. 뭐 하는 짓이에요?”“자자.”말을 마친 그는 냅다 좁은 침대에 몸을 뉘고 눈까지 꼭 감은 뒤 졸린 듯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요 며칠 널 찾느라 제대로 쉬지 못해서 너무 피곤해.”많이 피곤했던 건지 말 몇 마디를 끝으로 정말 잠자리에 들어버린 준회.서훈:“...”피곤한 건 서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점차 안정되는 준회의 숨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잠이 들었다. 준회는 잠이 얕다. 이것은 습관적으로 몸을 방어하는 습관에서 생긴 버릇으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잠시 후...서훈이 이제 막 잠이 들었을 그때, 이미 잠이 든 줄 알았던 준회가 눈을 슬며시 뜨더니 낮게 속삭였다.“남서훈.”그녀에게 바싹 다가가는 준회. 그의 입술은 어느새 서훈의 귓가에 닿을 듯했다.“넌 도망 못 가.”이튿날.잠에서 깬 준회는 또 서훈을 곤란하게 하진 않았다. 다만 떠나기 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했다.“잊지 마. 한 달이야. 그때까지 못 찾으면 널 나한테 주는 거야.”준회는 그렇게 떠났다.그가 서훈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마침 이쪽을 향해 오던 윤성아와 마주쳤다.“준회 씨. 왜 여기에...?”이 이른 아침에 서훈의 사무실 앞에서 준회를 마주칠 줄 몰랐던 성아는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안될 것도 없긴 하다.사실 성아는 진작부터 준회와 서훈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정황상 준회는 아직 서훈이 여자란 사실을 모를 확률이 높다.준회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보아낼 수 없었다.“성아야.”성아의 이름 한번 부르는 것으로 그는 그녀에게 인사했다.“강주환
성아가 웃으며 서훈에게 말했다.“틈만 나면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나쁜 남자들은 뭐 벌써 몇 번이고 벼락 맞아 죽었어야겠네요?”서훈이 피식 웃었다.덕분에 삼엄하던 분위기도 어느새 나름 풀려 한결 가벼워졌다.다시 말을 잇는 성아.“준회 씨는 아마 서훈 씨가 필요할 거예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미 마음에 품고 있죠.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다며 세상을 등질 정도로 흠뻑 빠졌죠.”여기까진 성아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번은 성아도 분명히 얘기할 수 있었다.“나나도 수현 씨를 필요로 해요.”“나나는 불쌍한 아이예요. 어릴 적부터 엄마 없이 살았으니 얼마나 엄마가 그립겠어요.”“그 누구도 친엄마의 사랑은 대체할 수 없어요. 준회 씨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가 새엄마가 될 그 여자가 혹시라도 나나에게 잘 대해주지 않으면 어쩌려고요?”“그러다 그 둘이 아이라도 갖게 되었다간...”성아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돌려 준회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준회 씨는 참 좋은 남자죠!”“제가 알기로는 근 몇 년 동안 나나 때문에 몇 번 소개팅에 나간 것 빼고는 단 한 번도 여자가 있은 적이 없어요. 전엔 저와 제 언니를 도와주느라 몇 번 한동안 연기를 했지만 전부 다 가짜고요.”서훈은 잠시 멈칫했다. 준회가 그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서훈 씨. 조금만 더 용기를 내요. 할아버지가 실종된 일은 제가 도와서 함께 조사해줄게요. 집안의 의술이 남자에게만 전해지는 것도 선대의 원한 관계도 모두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거예요.”“서훈 씨와 준회 씨 분명 잘될 거예요.”둘은 그렇게 한참을 더 얘기를 주고받다 헤어졌다.성아를 배웅해주고 서훈은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겼다.‘나와 준회씨 정말 함께 할 수 있을까?’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서훈과의 한 달짜리 약속이 있었기에 준회도 더는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서훈은 숨이 트인 것
말을 마친 은협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는 서훈이 그의 대표님께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도 않는 듯 부리나케 가버렸다.사실 은협이 호텔 방을 빠져나올 땐 이미 머리에 땀이 흥건했다. 그는 곧바로 보안실로 가 엘리베이터 영상을 지운 후 준회의 비서에게 연락했다.“선배님. 앞으로 저희 대표님이 접대에 나가야 하실 일이 있으면 선배님이 맡아주십시오. 전 겁이 많아서 못 해 먹겠습니다.”“게다가...”“이렇게 엄청난 비밀을 감춰야 한다니. 저 말라 죽을지도 모릅니다.”한편, 호텔 방에서는 서훈이 준회의 술을 깨게 해주기 위해 그녀의 침을 꺼내고 있었다.서훈이 그의 혈 자리를 찾아 침을 꽂으려 하던 그 순간, 준회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천천히 눈을 뜨는 준회. 그의 촉촉한 눈동자는 마치 한 마리의 독수리같이 날카롭고 고혹했다. 누구든 보면 겁에 질릴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보며 서훈은 이 모습이야말로 진짜 그의 모습이라 생각했다.용병이었던 그때의 그 독기 어린 남자의 모습.눈앞의 사람을 확인한 준회는 그제야 눈에 담겼던 적의를 지우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요 녀석. 또 날 찔러 기절시키려고?”“아니에요.”서훈은 술을 깨는 데 도움을 주려고 그런다고 말하려 했으나 준회는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네 멋대로 하게 순순히 두지 않아.”말을 마친 준회는 그녀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줘 침대로 끌어당겼다. 이어 그는 순식간에 몸을 돌려 서훈을 몸을 깔아버렸다.“양준회씨. 지금...”“아무 말도 하지 마.”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그는 모든 걸 삼킬 듯한 검은 눈동자로 서훈을 주시하며 물었다.“언제까지 날 괴롭힐 거야? 난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근데 왜? 왜 아직도 나와 함께 해줄 수 없는 거야? 응?”그는 서훈을 알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거침없는 그의 숨결은 서훈의 숨을 앗아가 버릴 듯 맹렬하게 다가왔다.술에 이미 취한 상태이지만 지금 이
술에 취한 다음 날 아침, 호텔 방 킹사이즈 침대에서 깨어난 그는 호텔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게다가 양준회가 깨어날 때 그의 몸과 침대 그 어디에도 여자의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어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그의 바지만이...설마...?양준회는 혹시 이 모든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웠다.하지만 그럴 리가?“그럴 리가 없어!”양준회가 고함을 질렀다.그는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충혈이 된 듯한 붉은 눈동자가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양준회는 그렇게 남서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넌 그냥 사기꾼이야! 난 안 믿어! 그날 밤 네가 나한테 약을 먹인 이유가 이럴 리는 없어. 분명...”모든 것이 그토록 선명하고 생동했는데!두근거리는 심장과 그 외의 모든 것이 6년 전보다도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웠다.그뿐만 아니라 양준회는 어렴풋이 남서훈의 붉은 얼굴이 떠올랐다.남서훈이 양준회의 몸 아래에서...하지만 양준회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뻔한 사실이 있는데 그는 분명 한 여인과 함께 있었고 그 여인은 분명 남서훈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흔적을 남기지 않은 거지?그중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그날 밤, 남기준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을 때 남서훈은 이미 정신을 차린 뒤라는 것이다.남서훈은 자신이 이 감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날 밤의 그 순간, 그녀는 결국 그렇게 이성의 끈을 놓친 것이다.하여 그녀는 방에서 나오기 전 무의식 간에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온 것이다.남서훈은 연고를 꺼내 들어 매우 세심하게 양준회의 몸에 발라주어 남지 말아야 할 흔적과 그녀가 실수로 긁어놓은 흔적을 전부 가려주었다.그 뒤로 남서훈은 침대까지도 정리를 마쳤다.그리고 같은 시각.남서훈은 남성을 바라보며 굳건히 말했다.“정말 꿈입니다.”“난 절대 그게 꿈이라고 안 믿어!”양준회가 갑자기 다가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이어 양준회는 남서훈의 손목을 단단히 옭아맸고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남서훈의 아름답고 작
양준회가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그렇게 그는 남서훈을 놓아준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회사로 돌아온 뒤.양준회는 주위에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고 그의 머리 꼭대기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양준회의 모습은 엊그제보다도 더 저기압에 휩싸여 감히 숨도 큰소리로 못 쉴 정도였고 그는 줄곧 대표 사무실에 앉아 일만 하였다.태운 그룹의 모든 사람이 위기감을 느꼈다.양준회가 집으로 돌아간 뒤 양나나도 그의 저기압을 느꼈다.그녀는 한 번도 아빠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조금 무서웠다.“아빠.”양나나가 작은 목소리로 양준회를 불러보았다.이윽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양준회의 눈치를 살피며 그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다.“우리 이모 집에 안 간지 엄청 오래됐잖아요. 저 이모가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우리...”양나나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양준회가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안돼!”양준회의 안색이 더욱 험상궂게 변해버렸다.딸바보로 유명했던 양준회는 단 한 번도 양나나에게 이렇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양나나에게 당부했다.“앞으로는 그곳에 안 갈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은 네 이모도 아니야. 내가 몇 번을 더 말해야겠니? 그 사람은 남자라고. 삼촌이야!”양나나:“...”양나나의 눈시울이 한순간에 붉어졌다.그녀는 어떻게든 입을 삐죽이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아빠...”양준회는 곧바로 마음이 약해져 나나를 안아 들어 조금 더 부드럽게 타일렀다.“곧 엄마가 생길 거야.”그러자 양나나가 기대에 찬 눈길로 물었다.“혹시 이모예요?”“아니야!”양나나는 비록 이렇게 말하면 아버지의 기분을 건드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꿋꿋하게 주장을 펼쳤다.“하지만 난 이모가 좋은걸요! 아빠, 제 목적은 오로지 이모가 제 엄마가 되는 거예요.”그날, 부녀 사이에 처음으로 다툼이 오갔다.양나나는 화가 나 기필코 혼자 남서훈을 찾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결국, 참지 못한 양준회
강주환은 한눈에 윤성아의 마음을 알아차렸다.그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윤성아의 귓가에 다가와 소곤소곤 말을 꺼냈다.“여보, 급해 하지 마. 당신한테는 이 세상 최고의 모든 것을 얻을 가치가 있어.”그렇게 강주환은 윤성아의 손을 잡고 헬기에 올라탔다.윤지안은 김은우 품에 안겼다.이윽고 모든 헬기가 강주환과 윤성아가 탑승한 헬기를 따라 천천히 자리를 뜨고는 운성시를 에워싸고 세 바퀴를 돌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운성시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향했다...운성 광장.이곳은 이미 일찍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일주일 전부터 노동자들이 와 꽃으로 아치형 문과 무대를 꾸며놓았다.같은 시각.안진강과 서연우, 나엽과 안효연, 양준회, 원이림 등 윤성아의 가족과 친구들 모두 현장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운성시와 영주시 주요 방송사들도 소식을 접하고 현장에 찾아와 성대한 프러포즈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기다리던 헬기가 드디어 도착했다.강주환은 헬기 안에서 예복을 갈아입고 스타일 메이크업을 받은 윤성아를 안고 헬기에서 내렸다.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그리고 마치 청아한 연꽃처럼 우아하게 레드카펫을 밟으며 무대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모든 가족, 친구, 그리고 언론 기자들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따라온 운성시 시민들의 앞에서 강주환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의 눈앞에 선 연인을 바라보았다.이윽고 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쥐며 입을 열었다.“성아야, 나와 결혼해 줘. 나와 결혼해서 내 아내가 되어줘. 난 한평생 너와 아이들을 지키며 네가 내 생에 유일한 여왕이 되길 약속할게.”강주환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빨간 벨벳 케이스를 더듬어 꺼냈다.반지 케이스를 천천히 열자 그 안에는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반지 한 쌍이 고이 놓여있었다.“여보, 이건 내가 직접 디자인한 반지야.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그리고 당신의 여생을 함께하기 위한 반지야. 내가 직접 끼워줘도 될까?”주위의 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환호를 질렀다.“결혼해!
백은협은 긴장되어 침을 꼴딱 삼켰다.마침 그가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버렸다.한편, 양준회는 또다시 자신의 특별 비서한테 전화를 걸어 그더러 호텔로 가 CCTV를 돌려보도록 지시하여 그날 밤 남서훈은 즉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서훈은 해가 곧 뜨려는 새벽에 그의 방에서 나와 떠난 것이다.그렇게 되어 양준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의심은 더욱 커져갔다.분명 그날 밤의 일은 꿈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이윽고 양준회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남기준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도록 해.”지금까지 그렇게 찾아왔지만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조금의 단서도 찾지 못했던 나나의 친어머니를 남기준은 대체 무슨 수로 찾은 것인지 한번 볼 필요가 있었다.이튿날.양나나가 갑자기 몸살이 나 앓아누웠다.양준회는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열이 39도까지 치솟은 양나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오늘은 학교 가지 말고 아빠랑 병원 가자.”그러나 양나나는 즉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전 병원 안 가요.”양나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양준회를 바라보고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애교를 부렸다.“이모더러 와서 나 간호해 주라고 하면 안 돼요? 저 정말 이모가 보고 싶어요. 이모가 오신다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양준회:“...”양준회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이윽고 그는 바로 남서훈에게 전화를 걸어 입을 열었다.“나나가 몸살 났는데 네가 보고 싶대!”소식을 들은 남서훈은 곧바로 집으로 찾아왔다.양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남서훈은 얼굴이 빨갛게 열이 오른 양나나를 바라보고는 팽팽하게 잔뜩 긴장된 마음을 내려놓았다.양나나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무척 걱정되고 혼란스러웠었다.양나나는 남서훈이 줬던 약을 먹었기에 3, 5년 사이에는 체질이 좋아 감기도 걸릴 일이 없는데 어떻게 갑자기 병에 걸린단 말인가?“나나야, 너 지금 혹시 꾀병 부리고 있는 거니?”남서훈은 단번에 양나나의 꾀병을 알아낸 것이다.그러자 양나나가
양준회의 검은 눈동자가 남서훈의 수려하고 남녀를 분간할 수 없는 아리따운 얼굴을 바라보았다.“알려줘. 나나가 왜 너와 그렇게 닮은 거야? 너와 나나는 대체 무슨 사이야?”정곡을 찔린 남서훈이 마음속으로 크게 당황했다.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다잡고 담담하게 상황에 대처했다.이 모든 상황을 먼저 예상하고 준비했었기에 참 다행이었다.“결국, 들킨 건가?”남서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절미한 여우 눈이 양준회를 응시하며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듯한 말투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이유는 간단해요. 나나의 친어머니가 나와 엄청 비슷하거든요.”양준회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러자 남서훈이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6년 전의 그 여인은 남기준이 아무렇게나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계속하여 제 곁을 따라다니던 경비원이고 대역이었어요. 제 몸이 남자치고는 무척 왜소하다는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게다가 제 얼굴도 일반 남성보다 부드럽고 어여쁘게 생겨 여자처럼 보이죠. 그래서 당시 할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대역 한 명을 찾아주셨는데 저와 엄청나게 닮은 여인은 단 한 명뿐이었죠.”말을 마친 남서훈이 큰소리로 외쳤다.“남기준!”그러자 곧이어 남기준이 순간이동을 하듯 방안에 나타났다.이윽고 남서훈이 그에게 지시를 내렸다.“향길이 데려와.”“네!”그렇게 남기준이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이제 좀 놓아주시겠어요?”예정보다 조금 빨라졌을 뿐 남서훈도 원래 김향길을 공개하기로 계획했었다.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양준회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조금 있으면 나나의 친어머니를 볼 수 있을 겁니다.”“허!”양준회가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남서훈에 대한 속박을 풀지 않았다.외부인이 보기에 항상 부드러운 그의 동공이 현재는 그저 싸늘함만이 맴돌 뿐이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절미한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디.“6년 전, 나한테 아무 여자나 던져 줬다면서 왜 말을 바꿔? 아 맞다. 제일 처음에는 나한테 꿈을 꿨다고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