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그러나 몽롱한 등불 아래, 그녀는 남자의 어색한 표정을 보았다. 무심한 척 챙겨주는 그의 표정은 화난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서는 흐뭇함도 살짝 곁들여져 있는 것 같았다! 윤성아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치켜세웠다.이 남자 정말...그녀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안방 문을 열고는 곧장 베란다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밤이 깊었는데 왜 아직 안 자고 있어요?”강주환은 대답했다.“화가 나서!”“...”윤성아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다시금 그에게 설명했다. “저랑 이림 씨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오늘 밤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맺어서는 안 되는 관계를 맺은 적이 없어요! 나와 이림 씨는 결백하다고요!”윤성아의 눈동자에는 확고함이 묻어났다. 남자의 까만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나를 믿지 않는 거예요?”강주환은 비록 아직은 화가 난 상태이고 이 여자 때문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지만! 그래도 두 시간 내내 베란다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한대, 또 한대 담배를 태운 탓에 호텔에 있을 때보다 훨씬 진정되었다.“믿어!”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윤성아와 원이림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4년이란 시간 동안 같이 있으려거든 벌써 같이 있고도 남을 일이었다.그런데 이 여자가 뜻밖에도 원이림 편을 들다니!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은 빌어먹을 놈을 위해 나를 막아서다니!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강주환은 뒤돌아서며 더는 윤성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고는 야경에 비친 정원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이림 씨가 많이 취해 있었어요, 예전의 그는 절대로 이런 적이 없었어요! 이번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혹시 누군가의 계략에 넘어간 게 아닐까요? 그는 줄곧 온화했고,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4년 동안 그는 저와 지안이를 무척 잘 돌봐주었고,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라고요! 그리고 당신도 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얇은 입술이 벌써 윤성아의 입을 막아버렸다. 여전히 평소처럼 박력 있고 저돌적이었다. 한이 절절하게 맺힌 사람처럼 과격한 입맞춤으로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다. 마치 서로의 영혼을 탐하듯...다음날 이른 아침, 고은희와 송아름이 함께 별장으로 왔다.너무 일찍 온 그녀들을 향해 집사가 다가왔다.“사모님, 아름 씨.”“음.”고은희는 대답했다. 화려하고도 귀중한 물품으로 치장한 그녀는 까만 눈동자로 집사를 보며 물었다.“주환이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거야? 하성이는? 내가 듣기로 주환이가 아이를 데려왔다던데?”집사는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도련님은 어제저녁 늦은 시간에 돌아와 지금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작은 도련님께서는 이미 깨어나셨습니다.”“그래, 내가 하성이 보러 올라가 봐야겠네.”고은희는 송아름을 데리고 곧장 강하성의 방으로 향했다.그 시각, 강하성은 이미 옷을 단정히 입고 방에서 혼자 게임을 하며 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은희와 송아름을 보자 그는 인츰 그녀들을 불렀다.“할머니, 아름 이모.”“그래...”고은희가 대답하고는 걸어 들어와 강하성을 바로 안아 들었다. “귀여운 내 새끼, 이렇게 오래 할머니 곁을 떠났는데, 할머니가 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아름 이모도, 이모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너를 살리려고 자기 목숨도 내놓은 사람이거늘! 이 꼬맹이야, 생각한 적도 없지?”강하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아름이 먼저 말했다.“은희 이모, 하성이에게 그런 말 하지 마세요!”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강하성을 바라보았다. “하성이가 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전 믿어요!”강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고은희와 송아름은 하성의 방에서 아이와 잠시 놀아주고는 세 사람이 함께 1층 거실로 내려왔다.강하성이 아직 아침밥을 먹기 전이였고 고은희와 송아름 역시 일찍 온 터라 아침을 먹지 못했다.세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송아름이 대뜸 물었다.“주환 씨를 불러 같이 식사해야 하지 않
강주환은 선뜻 허락하지 않은 채 고은희에게 말했다. “제가 이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저는 이미 하성이를 성아에게 보내줬어요! 지금 하성이는 성아의 아이예요! 어머니가 하성이를 본가에 데려가고자 한다면, 성아의 허락을 받아야겠죠!”고은희는 화가 치밀어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그녀는 윤성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도 윤성아가 자신이 친손자를 본가에 데려가겠다는 요구를 반대할 면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윤성아는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온화하고도 따뜻한 눈길로 하성이를 바라보며 물었다.“하성이는 할머니랑 같이 본가에 가고 싶어?”강하성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하성이를 잘해줘요, 아름 이모도 하성이를 좋아하고요. 그런데 엄마, 내가 할머니랑 얘기 다 했어요. 딱 3일만 할머니랑 본가에 가 있기로요!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엄마 따라갈 거예예요!”윤성아는 대답했다.“그래.”그녀는 강하성을 본가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윽고 고은희를 보며 말했다.“3일이 지나서, 제가 하성이 데리러 본가에 가겠습니다.”고은희는 어이가 없는 듯 웃어 보이며 윤성아에게 차마 욕하지 못해 말을 뱉었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응? 자기가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남의 자식까지 뺏으려고 들어! 허허.”고은희는 차갑게 웃었다.“왜? 우리 하성이가 엄마라고 부르니까, 네가 정말로 하성이 친엄마라도 되는 줄 알아?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강주환과 강하성은 동시에 같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들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말을 꺼내려던 찰나, 윤성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하성이는 제 자식이에요!”고은희는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윤성아에게 말했다.“주환이와 결혼해서 하성의 의붓엄마가 되겠다고? 내가 똑똑히 알려줄게, 내가 죽지 않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어!”윤성아가 대꾸했다.“저는 하성의 의붓엄마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윤성아는 더 이상 고은희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하성이가 어디에 있어요? 단지 그게 궁금해요.”고은희가 도우미를 보며 말했다.“작은 도련님에게 안내하세요.”“네.”도우미는 윤성아를 데리고 강하성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마침 방에서 송아름이 다정하게 강하성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하성은 그림에 재능을 보였는데 머리를 푹 숙인 채 작은 손에 쥔 색연필로 스케치북에 여자와 남자가 손잡는 그림을 그렸다.비록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림에서의 남자는 강하성이고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여자는 송아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올라오는 인기척에 송아름은 머리를 들어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아름 씨, 오셨어요?”“네.”그녀는 덤덤하게 대답하고는 강하성에게로 다가가 열심히 그리고 있는 그림을 지켜보았다. 그림을 보자 웃음이 절로 나왔다.송아름은 강하성의 목숨도 구해줬기에 하성이가 송아름과 손잡고 있는 그림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하성아, 엄마가 데리러 왔어.”윤성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윽하게 강하성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림 다 그리고 나서 가자? 응?”강하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윤성아와의 신체 접촉을 꺼렸다.곧바로 차가운 눈빛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저는 남자에요, 이제부터는 머리 만지지 말아주세요!” 윤성아는 움찔하더니 이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엄마가 이제는 만지지 않을게.”하지만...윤성아는 강하성의 태도가 유달리 쌀쌀맞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가까지 하는 것도 모자라 밀어내는 느낌을 받았다.그러면서 강하성은 싸늘한 말투를 이어갔다.“엄마 따라 가지 않을래요! 할머니 말이 맞았어요. 아름 이모가 최고예요! 아름 이모가 아빠랑도 더 잘 어울리고 저의 엄마도 되어줄 거고요!”윤성아는 큰 충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성아, 그게 무슨 말이야!”“말한 그대로예요!”송아름의 얼굴에는 약간은 뿌듯해하는 표정이
이때 고은희가 앞질러 말했다.“하성이가 이 여자가 싫다며 따라가지 않으려 했어!”“그런데 이 여자가 다짜고짜 아이를 빼앗았어!”고은희는 울며 보채는 강하성이 안쓰러운 나머지 강주환에게 제구실 못 한다며 잔소리했다.“잘 봐, 이게 바로 네가 반해서 기어코 결혼하겠다는 여자야!”“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본색을 드러냈어.”“벌써 내 손자 뜻을 무시하고 이렇게 울리는데 앞으로 집에 바람 잘 날이 있겠어?”강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쪽 말만 들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윤성아에게 다시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윤성아를 바라보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뭘 더 물어볼 게 있어?”고은희가 또 참견했다.“너는 하성이 겁에 질려서 서럽게 우는 게 안 보여? 하성이 울음소리가 안 들려?”윤성아 품에 안겨 있는 강하성은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채로 윤성아를 향해 마구 발길질하며 버둥거리고 있었다. 물론 강하성의 울음소리도 들렸다.강주환은 미간이 더욱 찌푸려지고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했다.“그 자식을 나한테 줘!”“...”설마 이 남자도 내 아이를 빼앗으려는 건가? 그녀는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걱정 마, 빼앗지 않아.”강주환은 사랑 가득한 눈으로 윤성아를 보며 말했다.“이 자식 발길질에 당신이 다칠까 봐 그래!”아들도 중요하지만 그에게는 아내가 더 중요하다.윤성아는 그제야 강하성을 강주환에게 넘겨주면서 강하성의 이상한 행동과 반드시 병원에 검사 받으러 가야 한다는 것도 얘기했다.강주환이 알았다고 하자 강하성이 소리 질렀다.“난 병원에 안 갈 거야.”강주환은 자기 품에 안겨 있는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아빠한테 말해봐, 너 전에는 엄마를 무척 좋아하지 않았어?”“오늘 왜 그래? 왜 엄마랑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거야? 그리고 갑자기 엄마한테 쌀쌀맞게 굴고?”강하성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잠깐의 망설임과 갈등을 보였지만 그건 단지 한순간이었다. 그는 이내 눈빛이 차가워지며 말했다.
그는 엄마를 좋아하는 게 맞지만...“아가, 넌 지금 아픈 거야.”“엄마를 믿어. 네가 무슨 병을 앓든 엄마는 반드시 너를 낫게 할 거야. 예전의 너로 돌려놓을 거야.”...영주시의 어느 병원에서 깨어난 원이림, 머리가 너무 아프고 온 몸이 쑤신다.내가 다쳤나?빌어먹을! 어떤 놈이 나를 이 꼴로 만들었어?그리고 중요한 거래처를 접대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만취 상태가 되자 여은진이 호텔 방을 잡아준 기억이 났다.이 여자가 환경을 바꿔 나랑...며칠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던 터라 그 역시 마음이 동했다.그는 호텔 방에 들어서기 바쁘게 샤워했고 그 후 벨 소리가 울리고 룸서비스가 도착했다.원이림은 모든 것이 생각났다.그 후 윤성아가 호텔 방에 들어왔고 그는 이성을 잃고 윤성아를 덮쳤다.빌어먹을!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너무 후회됐다.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윤성아 앞에 나타나겠는가?원이림은 맥이 쭉 빠졌고 갑자기 삶의 희망과 모든 생명력을 잃은 사람처럼 넋을 잃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하루, 이틀, 어느새 사흗날 저녁이 됐다.“빌어먹을!”원이림은 낮은 소리로 욕했다.그는 무서울 정도로 음울한 눈빛을 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뭔가 조사하라고 시켰다.얼마 후 전화가 걸려 왔고 조사 결과는 그의 추측과 맞아떨어졌다.화나서 미칠 지경이다.무서울 정도로 안색이 어두워진 원이림은 즉시 병상에서 몸을 일으켜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병원을 떠났다.그는 직접 여은진의 아파트 앞에 나타났다.벨을 누르자 여은진이 문을 열었다.아파트 문 앞에 나타난 남자를 본 그녀는 어리둥절해했다.“대표님, 무슨...”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이림은 여은진의 목을 졸랐고 눈이 새빨갛게 충혈됐다.“빌어먹을! 네가 감히 나를 모함해?”온몸이 살기와 분노로 가득 찬 그는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하마터면 여은진을 그대로 목 졸라 죽일 뻔했다.“대, 대표님.”여은진은 원이림의 큰 손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얼굴이 빨갛다
그 모습은 마치 이 큰 침대 위에서 여은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오지 마요.”“싫어요!”여은진은 놀라서 뒤로 물러갔다.“놓아주세요, 제발! 저는 정말 당신을 모함하지 않았어요.”이 순간 악마가 되어버린 남자를 겁먹은 눈으로 바라보며 그녀는 한없이 울었다.“당신을 좋아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제발, 놓아주세요…”“복수도 도와줄 필요 없어요. 당신 곁에서 멀리 떠나갈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여은진은 이 순간 남자 손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원이림은 그녀의 발목을 힘껏 잡아당겨 침대에 쓸어 눕히고 우람진 몸뚱이로 그 위에 올라탔다.이 캄캄한 밤, 여은진은 마치 끝없는 나락과 지옥에 던져진 것 같았다.그녀는 까무러쳤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둠이 걷히고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어떤가? 지옥과 나락에 던져진 그녀는 언제 밝은 빛을 볼 수 있을까?배가 또 아파져 왔다. 너무너무 아프다. 늦어진 생리가 이제 오려는 건가?그녀는 모든 것을 견디며 영혼 없는 낡은 인형처럼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날이 점점 더 밝아오고 원이림이 끝내 행동을 멈췄다.그는 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여은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직접 아파트 위층으로 돌아갔다.…꽈르릉! 하늘을 찢을 듯한 번개와 함께 쩌렁쩌렁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여은진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그녀는 창백한 얼굴과 공허한 눈빛을 한 채 먹구름에 덮여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꽈르릉! 꽈르릉!연이어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콩알만 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여은진은 폭우가 쏟아지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배가 점점 더 아파져 왔고 밑이 빠질 것 같은 아픔과 뒤늦게 찾아온 생리 때문에 여은진은 더 이상 시체처럼 누워있을 수 없었다.그녀는 간신히 일어섰지만 이내 맥없이 다시 쓰러졌다.한참
여은진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증오에 찬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난 아직 너한테 복수할 능력이 없어.”“하지만 언제든지 할 거야.”여석진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누나.”그는 어릴 때부터 그녀를 이렇게 불러왔다.차분한 눈빛으로 여은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누나 어젯밤에 기절했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임신했다고요!”“그 자식이 이렇게 괴롭힌 거에요?”내가 아끼는 누나를 누구도 괴롭혀서는 안 된다.그는 독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 놈을 죽여버릴 거야.”여은진은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석진을 바라보았다.“뭐라고?”임신이라니! 그럴 수가? 분명 어제 밤 생리도 왔는데...하지만 그게 생리가 아니었다면?여은진은 어제 밤 배가 너무 아프고 출혈량도 생리가 왔을 때와 달리 엄청 많았던 것이 기억났다.설마 정말 임신이란 말인가? 그렇다면...그녀는 평평한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 허허! 너무 멍청한 것이 아닌가?생리가 그렇게 늦어졌는데도 임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이가 없어지다니.여은진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차라리 날 죽여줘.”그녀는 초점을 잃은 까만 눈동자로 여석진을 차갑게 바라보았다.삶의 희망을 잃었고 복수고 뭐고, 그냥 죽고 싶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안 계시고 바보처럼 자기 아이까지 죽게 했다. 죽으면 아버지, 어머니조차 보지도 못한 채로 떠나보내야겠지?여석진은 한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가 아직 살아있으니, 누나도 죽을 필요 없어요.”초점을 잃었던 그녀의 눈동자에 금방 생기가 돌았다.“내 아이가 괜찮다고? 아직 살아있어?”“응.”“그때 많이 위험하긴 했지만 내가 제때에 병원에 데려온 덕분에 아이는 다행히 살아있어요.”여석진은 한 마디 더 보탰다.“이 아이가 누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요.”어느 한순간 여은진만 무사하다면 그녀 배 속의 아이는 차라리 유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유산되면 여은진과 그 남자는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