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의 말이 맞았다.게다가 윤아가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 선우는 절대 이런 희망을 품을 엄두를 못 냈었다.그런 일을 하고도 어찌 윤아가 그를 좋아하기를 바라겠는가?그녀가 그저 옆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고 그렇게 그녀가 천천히 그에게 물들면 된다고 생각했다.선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아는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아챘다.윤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아무튼 내 몸은 여기 남았으니까 약속을 어긴 건 아니잖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 이 정도의 자유는 있는 거 아니야?”선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응, 그렇지.”“그럼 지금은 좀 나가줄래?”이 말을 들은 선우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결국 지는 쪽은 늘 선우였다.“그래, 나갈게. 하지만 안 먹는 건 안 돼. 아래로 내려오기 싫으면 방까지 가져다주라고 하면 되니까.”윤아가 거절할까 봐 그러는지 선우는 이 말을 뒤로 잽싸게 방에서 나갔다.선우가 나가고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조금 기다려서야 윤아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갔네.윤아는 그제야 한시름 놓고 침대에 앉았다.선우가 아까 보여준 행동에 윤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다 선우가 진짜 그녀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전에는 그가 이렇게 나올 줄 모르고 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선우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안 이상 앞으로 절대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다 어느날 선우가 미쳐버리면 어떡하지?이런 생각에 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윤이였다.“윤아님, 대표님께서 주방에 음식을 부탁하셨나봐요.”이를 들은 윤아가 다시 눈을 떴다.“들어와요.”정윤이 접시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접시에는 여러 요리가 담겨 있었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하지만 윤아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윤아님, 오늘 주방에서 여러 가지로 준비했어요. 어떤 종
결국 온몸에 힘이 풀려 윤아는 정윤의 부축을 받으며 욕실에 나와 소파에 널브러졌다.윤아는 지금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고 머리카락도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윤아는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여워 보였다.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정윤은 그런 윤아가 마음 아픈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시울을 붉혔다.“윤아님…”윤아는 한참 숨을 고르고 나서야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이내 들려오는 정윤의 울음소리에 윤아는 고개를 들었다. 정윤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왜 그래요?”정윤이 울 줄은 몰랐다.정윤도 자기가 눈물을 흘릴 줄은 생각도 못 한 듯 눈물을 닦아내며 사과했다.“아니에요. 아까 조금 놀라서 그래요. 윤아님, 괜찮으시죠?”“놀라게 해서 미안해요.”“윤아님은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다 저의 불찰이에요.”정윤은 이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윤아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주며 물었다.“어떡해요? 음식을 아예 안 드실 수는 없잖아요. 만약 집에서 한 음식이 별로라면 외식할까요?”윤아는 소파에 기댄 채 힘없이 웃었다.“괜찮아요. 안 나가도 돼요. 그냥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래요. 아마 며칠이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입맛이 별로 없다고?원래는 정윤도 그렇게 생각했다. 윤아가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거라고, 입맛이 다시 돌아오면 괜찮을 거라고 말이다.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입맛은 돌아오기는커녕 점점 안 좋아졌다.게다가 매일 약까지 먹는데도 이런 상황이면 언제 다 나을 수 있을까?“아니면 윤아님, 의사 선생님을 바꿔 볼까요? 아니면 직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던지. 위가 불편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나 진짜 괜찮아요. 걱정되면 단팥죽이나 가져다줘요.”윤아가 먼저 음식을 찾자 정윤은 바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단팥죽을 윤아 앞에 대령했다.“윤아님, 이건 어때요?”“고마워요.”윤아는 단팥죽을 받아와 몇 모금 먹었다.팥이 잘 익어서 으깨질 정도였고 죽도 온통 팥의 풍
정윤은 윤아의 그런 모습에 놀라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선우를 찾으러 갔다.선우는 이를 듣자마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윤아한테로 달려왔다.정윤은 선우의 뒤를 따라가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윤아님은 전에 그냥 입맛만 안 좋아서 조금 적게 드실 뿐이었는데 오늘 아침엔 먹은 것들을 전부 토해내셨어요.”정윤은 이렇게 말하더니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윤아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혹시… 다른 의사를 부르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윤아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보든지요. 윤아님 요새 계속 밥을 잘 못 드시고 계세요.”이를 들은 선우는 멈칫하더니 이내 걸음을 멈췄고 근처에 있는 도우미에게 손을 흔들었다.도우미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의사 불러오세요.”선우가 의사를 불러오라고 하자 정윤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선우가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고 재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오늘 윤아의 이런 모습을 보고 끝내는 삼켰던 말을 다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정윤은 선우를 몰래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다.‘사실 대표님도 윤아님을 많이 걱정하고 계시네.’다른 제안을 하면 선우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한번 시도해 봐?윤아가 정윤을 많이 잘해줬던지라 정윤도 윤아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싫었다.이렇게 생각한 정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사실 미숙한 건의가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선우는 윤아를 걱정하고 있었던 터라 정윤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요새 윤아를 챙겨준 사람은 정윤이였다.그리고 윤아도 정윤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이런 원인으로 선우는 인내심을 조금 낼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했다.“말해 봐요.”“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윤아님 정신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여요… 윤아님을 저주하거나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제
“의사 선생님 왔는지 확인 좀 해봐요. 아직이면 전화해서 빨리 기어 오라고 하고요.”옆에서 듣고 있는 정윤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기어 오라는 단어까지 쓴 걸 보면 선우의 기분이 매우 안 좋다는 뜻이었다.정윤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얼른 밖으로 뛰어갔다.“네, 지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방에는 선우만 남았다. 그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윤아의 이마를 보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부드럽게 닦아줬다.이마를 닦아주는 선우의 안색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렇게 땀을 다 닦아주고는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입술까지 하얘진 윤아를 조용히 바라봤다.그런 윤아의 모습에 선우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그녀를 억지로 옆에 남겨둔 게 정말 잘못된 짓은 아닐까?윤아는 분명 선우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다. 둘은 원래 친구로 남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둘 사이는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왜 이렇게 된 걸까?그냥 그녀를 좋아한 것뿐인데 말이다.선우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선우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하지만 윤아가 그의 옆에 나타나 그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그와 함께 하기는 싫다고 한다.이런 엔딩을 맞을 줄 알았으면 선우는 차라리 윤아가 자기를 돕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이런 허황한 꿈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윤아의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더니 담요까지 덮어줬다.“잠깐만 기다려. 의사 선생님 곧 오실 거야.”말이 끝나기 바쁘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윤정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왔다.“대표님, 의사 선생님 오셨어요.”저번에 왔던 그 의사였다. 그는 마치 오늘의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이번엔 무슨 상황이죠?”가까이 다가온 의사는 쓰러진 윤아를 보고 표정이 삭 변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다.저번에 진찰을 왔을 때부터 앞으로 다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생각이
의사와 정윤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선우가 덤덤한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고 있었다.“먼저 약부터 처방해요.”의사는 선우의 개인 의사로 지낸 지 꽤 오래되었기에 서로 친하지는 않아도 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선우의 말에 의사는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끼어드는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아까 제가 한 얘기 다 들으셨죠? 환자분은 아무 병이 없어요. 그런데 무슨 약을 처방하겠어요? 약을 잘못 먹으면 오히려 문제 될 수 있어요.”선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봤다.“마음의 병이라면서요. 그럼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을 처방하세요.”“그게… 제가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어찌 알까요?”옆에 서 있던 정윤도 이 광경에 넋을 잃었다. 선우가 윤아를 많이 챙긴다고 생각하던 정윤이었다. 의사도 윤아는 마음의 병이기에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선우는 자꾸만 의사에게 약을 처방하라고 요구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대표님, 의사 선생님 말씀은 윤아님이…”“정윤 씨가 끼어들 자리는 아닌 거 같은데?”하지만 정윤이 말끝을 맺기도 전에 선우가 매몰차게 잘라버렸다.선우가 차가운 표정으로 정윤을 쏘아봤다.“이제 정윤 씨가 도울 일은 없으니 나가주세요.”정윤은 윤아가 걱정되는 마음에 몇 마디 덧붙였다가 선우에게 쫓겨나고 말았다.정윤은 입을 앙다문 채 어딘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분명 의사가 윤아의 상황을 명확하게 얘기해줬는데 선우가 계속 이렇게 나온다는 건 윤아를 해치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윤아가 자신을 꽤 잘 챙겨줬던 게 생각나 정윤은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편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가 이때 입을 열었다.“그래요. 일단 약을 처방해 줄게요.”“선생님!”이를 들은 정윤이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아까 분명…”“대표님 말씀 못 들었어요? 약 처방하라잖아요.”“…”정윤은 할말을 잃었다.선우만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의사도 미친 것 같았다. 대표
“장, 장 선생님. 아까 한 말 진심은 아니었어요.”“됐어요. 마음은 착한데 급해서 그런 거 알아요. 다음엔 좀 스마트하게 움직입시다.”“그럼 장 선생님, 윤아님 어떡하면 좋을까요?”정윤은 의사의 손에 들린 그 비타민을 건네받더니 고민에 찬 표정이었다.“선생님 말씀처럼 마음의 병이라면 비타민을 먹어도 쓸데없잖아요.”“맞아요.”의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약은 그냥 임시방편이고 대표님을 설득해 빨리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해요. 그래야 마음의 병이 나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엔 환자님이 고민하고 있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심리 상담의를 찾아도 효과가 별로 없을 거예요. 환자분 상태는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거든요.”정윤도 당연히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방법이라고는 선우를 설득한 길밖에 없었다.“장 선생님,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의사는 정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저는 들어가서 수액 좀 놓아줄게요. 지금 많이 허약하거든요.”“제가 도울게요.”둘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윤아에게 수액을 놓아줬다.의사가 혈관을 찾는데 윤아가 예전보다 많이 야위었음을 발견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윤아에게 수액을 꽂았다.의사는 그렇게 한참을 분주히 돌아치더니 선우에게 말했다.“일단 쉬게 놔둬요. 조금 있다 깨어날 거예요. 큰 문제는 없어요.”선우는 무표정으로 대꾸했다.“고마워요.”의사는 그런 선우의 모습에 입을 뻐끔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삼켰다.…윤아는 오후에 깨어났다.깨어나 보니 선우가 곁을 지키고 있었다.눈을 뜨자마자 선우의 눈빛과 마주했다.그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선우는 윤아가 깨어나자 너무 기뻤고 인사를 건네려 했는데 윤아가 그렇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선우는 말문이 막혔다.반감을 드러내는 윤아의 태도에 선우는 목구멍이 살짝 메어왔지만 그것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칼로 조금씩 에는 듯한 고통이었다.한꺼번에
윤아의 말에 선우가 티 나게 멈칫했다.선우는 그렇게 몇초간 반응하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화장실에 가고 싶은 거였구나. 갈 힘이 없어? 내가 안아다 줄까?”“그걸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윤아가 대꾸했다.이 말에 선우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하긴, 네가 그럴 리 없지. 다른 사람 불러줄게.”이 말을 뒤로 선우는 잽싸게 방에서 나갔다. 아마 윤아가 오래 참는 게 힘들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선우가 나가고 나서야 윤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에서 아픔이 전해졌다. 고개를 숙여 확인해 보니 손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몸이 너무 힘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의식을 잃고 만 것이다.아마도 쓰러진 게 아닐까 싶었다. 쓰러진 윤아를 발견한 정윤이 선우와 의사를 불러와 수액을 놓아준 거겠지.윤아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몸을 일으키기엔 무리였다. 손이 아픈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몸은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기어서 일어나는 데도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몇몇 도우미가 빠른 속도로 윤아에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윤아님, 저희가 신발 신겨드릴게요.”도우미는 얼른 쪼그리고 앉아 신발을 신겨주고 그녀를 침대에서 일으켰다.“윤아님, 가요. 저희가 화장실로 모셔다드릴게요.”윤아는 정말 까닥할 힘도 없었다. 누군가 부축해 주겠다고 하니 그게 동성이든 이성이든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고마워요.”화장실에서 나온 윤아는 몸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았다. 침대로 돌아와 누웠는데 정윤이 돌아왔다.윤아가 깨어난 걸 보고 정윤은 매우 기뻐했다.“윤아님, 드디어 깨셨네요.”정윤을 본 윤아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왔네요.”도우미들은 정윤이 온 뒤로 줄곧 정윤만 바라보는 윤아의 모습에 더는 남아 있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여 윤아에게 고하고는 밖으로 나갔다.정윤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윤아에게로
윤아가 쉬려고 침대에 누운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정윤은 방에서 나왔다.방 앞.선우는 떠난 게 아니었다. 윤아가 자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자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인기척을 들은 선우가 정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까만 눈동자는 어느새 아무런 정서를 읽어낼 수 없이 차갑기만 했고 예전의 온화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선우의 모습에 정윤은 화들짝 놀랐다. 그런 선우가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윤아님 깼다가 다시 잠들었습니다.”“네.”선우가 이렇게 대꾸하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상태는 어때요?”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아님 상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아마도 장 선생님이 수액을 놓아주셔서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수액은 임시방편일 뿐이라고도 하셨죠. 길게 보면 윤아님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돌려놓아야 해요. 아니면…”말끝은 굳이 맺지 않았다. 선우도 총명한 사람인지라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알아듣는 건 듣는 거고 그대로 진행할지는 의문이었다.선우가 이내 차갑게 되물었기 때문이다.“지금 나 지적하는 거예요?”정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대표님, 월급쟁이가 대표님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지적을 하겠어요. 저는 그냥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전달해 드리는 거예요.”“아, 그럼 의사가 이렇게 전달하라고 시키던가요?”“아니요. 장 선생님은 그저…”“혹시 정윤 씨도 장 선생님처럼 윤아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해요?”이를 들은 정윤이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아닌가요?”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정윤의 질문에 선우가 멈칫했다.선우가 멈칫하는 걸 보고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생각한 정윤은 담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대표님, 정말 윤아님을 걱정하고 계신다면 이때 상담 받을 수 있게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다 윤아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늦어요. 제 말 언짢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다 사실이에요.”이 말을 뒤로 정윤은 선우가 어떤 표정을 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