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꽤 오래 지났어도 우진이 선우 앞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윤아에 관해서 말이다.두 사람 모두 선우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여자였다.하지만 선우의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었다.만약 윤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순간 선우의 눈빛이 요동치더니 우진을 매섭게 노려봤다.“지금 뭐라고 한 거예요?”선우의 살기등등한 눈빛에도 우진은 태연했다.“대표님, 윤아님이 계속 이렇게 음식 섭취 없이 수액만 맞는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선우는 대답이 없었다.“한 달? 근거가 없긴 하지만 사람은 뭔가를 먹지 않으면 얼마 못 버텨요.”우진은 이렇게 말하며 선우가 보는 앞에서 핸드폰으로 검색하려 했다.“그만해요!”우진은 그 자리에 선 채 덤덤한 표정으로 성질을 내며 자리를 떠나는 선우를 바라봤다. 선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우진은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선우에게 설득은 먹히지 않았다.지금 우진이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최대한 부풀려서 들려주는 것뿐이었다. 선우 어머니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선우를 자극할 수 있다면 말이다.우진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윤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다음에 후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사람은 죽으면 되돌릴 수 없으니 말이다.…선우는 홀로 서재에서 거의 8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식사하라고 불러도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조급해 난 도우미들이 우진에게 달려가 물었다.우진은 이렇게 대답했다.“대표님은 기분이 안 좋으실 때 혼자 계시는 걸 좋아합니다. 방해하지 마세요.” 우진의 말에 도우미들은 자연스럽게 왜 선우가 서재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하지만 진짜 골치가 아픈 건 따로 있었다.윤아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지만 뭐만 먹으면 바로 토했다. 윤아 본인의 문제긴 했지만 선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주방이 일을 못 해서
하지만 정윤이 관찰한 데 의하면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 같았다. 윤아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게다가 윤아는 선우를 사랑하지 않았다.몸은 여기에 남았지만 마음에 병이 든 것이다.그렇다 해도 정윤은 윤아가 이곳을 떠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윤도 속으로 선우가 윤아를 놓아줄 리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지금 우진이 이 얘기를 꺼내자 정윤도 반응이 왔다. 혹시 윤아가 여기를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만약 이곳을 떠난다면 마음의 병도 나아지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한 정윤은 이를 자신의 임무 리스트에 추가했다.원래 정윤의 임무 리스트에는 선우를 설득해 윤아에게 심리 상담을 시켜주는 것뿐이었는데 지금 하나가 새로 추가되었다. 그것은 바로 선우를 설득해 윤아를 놓아주게 하는 것이다.정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우진은 마치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대표님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요. 그러다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어요.”이를 들은 정윤은 선우가 자신의 속내를 알아낸 것에 깜짝 놀랐다.하지만 우진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한낱 도우미에 불과했고 맡겨준 일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잘못 말했다가 오히려 윤아를 해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정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윤아의 마음을 최대한 풀어주는 것이었다.선우가 심리 상담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정윤은 온라인으로 문의할 생각이었다.“비서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이만 가볼게요.”“네.”정윤이 방에 돌아와 보니 윤아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정윤은 윤아에게 외투를 벗어 덮어주며 핸드폰으로 문의하기 시작했다.요새 정신에 문제가 생긴 젊은이들이 많았다.정윤이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반에 다니던 친구 한 명이 큰 부담을 미처 이겨내지 못해 우울증에 걸렸고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시도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이 일을 안 동기들은 하나같이 마음이 어수선했다.정윤은 앞으로 자신도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정윤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갑자기 정신과 의사를 부르는 데 동의한다고?정윤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렇게 물었다.“대표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정윤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이를 들은 선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정윤을 쏘아봤다. 정윤은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대답했다.“바로 모셔 오겠습니다.”정윤은 방에서 달려 나오자마자 구석에 있던 우진을 마주쳤고 얼른 이 사실을 우진에게 알려줬다.“비서님, 대표님께서 드디어 윤아님께 정신과 의사를 불러주는 걸 동의하셨어요.”이는 정윤에게 좋은 소식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정윤의 말을 듣고도 우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우진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는 좋은 소식이 아니라고 말이다.이에 정윤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도 점점 옅어졌다.“비서님, 이거 좋은 일 아니에요? 왜 비서님은 하나도 안 기뻐 보이지?”정윤은 혹시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정윤은 아직 뭘 하기 전이었다.우진은 덤덤한 눈빛으로 정윤을 힐끔 쳐다봤다.“저는 늘 이런 표정이죠. 정신과 의사 찾으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우진은 그렇게 정윤을 보내버렸다.정신과 의사가 도착했을 때 윤아는 아직 자고 있었다. 하여 선우는 일단 정신과 의사에게 깨우지 말고 기다리라고 지시했다.정신과 의사는 나와서 진찰을 보는 게 쉽지 않았다. 어렵게 나왔는데 환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옆에 서 있던 집사가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죄송합니다. 진료 비용은 세 배로 드릴게요.”이 말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의사는 이내 마음을 풀었다. 진료비가 3배라니, 몇 시간을 더 기다리라고 해도 좋았다.약 한 시간 뒤, 윤아가 잠에서 깼고 의사가 방으로 들어갔다.정신과 의사는 유지태라는 자였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방안의 환경을 쭉 살폈다.비록 지금은 낮이었지만 방안의 커튼은 모두 닫혀 있었다. 조명으로만 방안을 밝혀주고 있었는데 불빛이 누런 게
윤아를 외간 남자와 한방에 두어야 되는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른다. 선우가 어떻게 마을 놓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윤아는 지금 몸이 너무 허약했다. 그러다 쓰러지면 밖에서 알아차릴 수도 없는데 그땐 어떡해야 할까?유지태는 선우의 눈빛에서 경계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남자에 대한 경계였다. 유지태도 이런 가족과 친구를 많이 봐서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건 그의 업무이니 어쩔 수 없었다.선우가 너무 심하게 걱정하자 유지태는 이렇게 위로했다.“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도 십여 년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절대 업무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선우는 입을 앙다물었다. 상대가 보증을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하지만 결국 한발 물러섰다.“잠깐 얘기 좀 할까요?”유지태는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유지태는 선우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정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윤아를 살폈다. 잠에서 깬 윤아는 줄곧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약 2분 뒤, 유지태가 드디어 안으로 들어왔다.그러더니 정윤을 힐끔 쳐다봤다.그와 눈빛을 주고받은 정윤은 밖으로 나갔다. 선우도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없는데 정윤도 당연히 나가야 했다.정윤은 밖으로 향하며 선우가 유지태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생각해 봤다. 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분명 전에는 윤아는 외간 남자와 단둘이 같은 공간에 있는 걸 걱정했는데 말이다.하지만 이내 자신이 걱정할 부분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어냈다.선우와 우진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윤은 밖으로 나와 선우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선우는 대꾸하지 않았다.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뿐인데 밖에 나와 있는 세 사람은 마치 수술실 밖을 지키는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시간이 유난히 늦게 지나는 것 같았다.선우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비용 얘기가 나오자 유지태도 살짝 민망했다. 실제 진료 비용도 두 배나 지불했다.돈을 받았으니 그만큼의 아웃풋을 내야 한다.선우의 차가운 시선에 유지태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한 번 더 시도해 볼게요.”방으로 들어가기 전 유지태는 뭔가 생각난 듯 이렇게 물었다.“여러분들은 환자분이 평소에 흥미를 느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환자분이 제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 수가 있어요.”“흥미를 느끼는 일이요?”정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윤아님을 지금까지 모셨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볼 만한 게 없었어요. 대표님은 알고 계세요?”정윤은 아무 생각 없이 유지태의 질문을 선우에게로 돌렸다.하지만 돌아온 건 선우의 침묵이었다.우진은 선우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올라갔다. 비아냥의 의미였다.윤아가 흥미를 느낄만한 일이라면 여기를 떠나는 것, 아니면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이겠지.하지만 선우는 이 두 가지 중 그 무엇도 먼저 꺼내지 않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한참 침묵하던 선우가 유지태에게 이렇게 말했다.“나도 잘 몰라요.”옆에 있던 정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며 물었다.“잉? 대표님. 대표님도 모른다고요? 윤아님은 좋아하는 게 딱히 없는 건가?”정윤의 말이 너무 많아 언짢아진 선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정윤을 쏘아봤다.“…”선우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한기에 정윤은 입을 꾹 다문 채 말할 엄두를 못 냈다.유지태는 지금 이 상황이 정확하게 어떤지는 잘 몰라도 그들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윤아가 좋아하는 게 뭔지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어도 선우가 모른다니.유지태는 윤아가 아픈 원인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이 모든 게 너무 수상하고 괴이했다.이렇게 생각한 유지태가 입을 열었다.“대표님, 제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말씀하세요.”선우의 말투는 고운 편이 아니었다.유지태도 이걸 느꼈지만 환자를 위해
그렇게 약 3분간 살펴보던 유지태가 이렇게 물었다.“윤아 씨, 그렇게 앉아 있으면 안 힘들어요?”윤아가 앉아 있는 자세는 실로 기괴했다. 소파에 기댔다고는 하나 오랜 시간 그런 자세로 앉아 있으면 매우 불편해야 맞았다.아니나 다를까 유지태의 질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윤아는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대꾸하지 않았다.유지태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흥미를 느낄만한 화제가 있는데, 들어볼래요?”하지만 이 말도 딱히 윤아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 유지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여기를 떠나고 싶나요?”유지태는 윤아의 그 어떤 표정도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아니나 다를까 유지태의 이 질문에 윤아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윤아가 유지태를 유심히 살펴봤다.이 표정에 유지태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걸 알아챘다.윤아가 아픈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유지태가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린 듯 안경을 쓸어올리며 말했다.“윤아 씨, 만약 이곳을 떠나고 싶다면 제가 도울 수도 있습니다.”끝내 윤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유지태를 바라봤다.“돕는다니, 어떻게요?”유지태가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오고 지금까지 윤아가 내뱉은 첫마디였다.윤아의 목소리는 약하고 부드러웠지만 사실 힘이 없어서였다. 말할 때 숨이 가빠하는 걸로 봐서는 마음의 병이 몸까지 잠식하고 있다는 의미였다.매번 이런 환자를 볼 때마다 유지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난감했다.“어떻게 돕길 바라나요?”이럴 때일수록 윤아와 라포르를 형성해야 한다.윤아는 유지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떻게 돕길 바라냐고?윤아의 눈빛은 어딘가 막연해 보였다.“나도 모르겠어요.”“모른다고요?”유지태는 다른 돌파구를 찾은 듯 보였다.“왜요? 혹시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나요?”“생각은 정리됐어요.”윤아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생각이죠?”이 질문에 어렵게 입을 열었던 윤아가 다시 침묵하기 시작했다.유지태도 그런 윤아를 다그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려줬다.그렇게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그의 눈빛에 선우는 불쾌함을 느꼈다.윤아가 그에게 뭔갈 알려주기라도 한 건가.“왜 자꾸 쳐다보는 거죠?”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지태는 원래 말하려 하지 않았으나 먼저 물어보니 이 기회에 그도 바로 본론을 꺼냈다.“대표님도 윤아 님과 함께 상담받아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그의 오랜 업무 경험으로 볼 때 윤아보다는 선우가 더 문제가 있어 보였다.옆에 있던 우진과 정윤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 둘도 지태가 갑자기 이런 말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두 사람은 일제히 선우의 표정을 살폈는데 과연 낯빛이 먹빛처럼 캄캄했다.그러나 지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진심입니다. 대표님께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고 필요하시면 바로 전화 주세요.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모셔다드릴게요.”그를 배웅하는 우진의 뒤로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는 선우가 보인다. 하지만 윤아를 치료하려면 담당 의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그는 말할 수 없으니 다른 누군가가 대신 말해주는 수밖에.-그들이 떠난 후 정윤은 우두커니 서서 선우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말을 꺼냈다.“대표님. 그럼 들어갈까요?”그녀는 윤아의 방을 가리켰다.선우는 그런 정윤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곧장 걸어 들어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윤도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웅크린 채 아무 기운도 없는 윤아의 모습에 선우는 화가 치밀고 마음이 아팠다.그녀가 자기 곁에서 이렇게 행동하고 먹고 마시지도 않고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많은 상황이 말해주다시피 윤아는 지금 고의로 안 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저항하는 거다. 그녀의 몸은 먹으면 토하고 기운도 없고 잠만 자는 상태로 되어버렸다. 선우는 한참 동안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가 나갔다.나올 때마침 지태를 배웅 배웅하고 돌아온 우진을 만났다.“진 비서.”선우의 눈빛은 싸늘했다.“훈이랑 윤이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요.”
“하지만 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윤아 님은 죽기보다 더 괴로워할 겁니다.”“일이 생길 리가 있나?”선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윤아도 내 곁에 있는데 아이들도 데려와 재회시키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대표님께서 정말 가족이 모이길 원하신다면 윤아 님을 내보내야 합니다.”여기까지 들은 선우는 가볍게 웃었다.그의 웃음소리에서 우진은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그는 재빨리 말했다.“이 일은 제가 조사하겠습니다.”우진이 승낙하자 선우가 귀찮게 그를 더 상대하지 않았다.“빨리 진행하세요. 늦어도 3일. 그 안에 두 아이가 윤아 곁으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할 겁니다. 윤아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진 비서도 다시 돌아올 필요 없어요.”우진은 주먹을 움켜쥐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전에 그는 선우가 윤아를 아끼니 결국엔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의 집착을 과소평가했던 거지.-한편, 한국.밤이 깊었지만 집은 여전히 불을 끄지 않고 있다.서훈과 하윤 두 녀석을 재운 선희는 방을 나오고 순식간에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바뀌었다.이 집에 들어와서 이렇게까지 그녀의 속을 태우는 일은 있은 적이 없었다.과거에 그녀는 걱정할 일이 딱히 없었다. 그녀는 외모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미용보다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줄곧 사용해 왔다. 일반적으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거나 정서가 불안정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진태범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낀 그도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선희를 발견하고는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빨아들인 후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그의 동작은 선희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고 본래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태범은 젊었을 때부터 담배중독이었지만 선희가 담배 냄새를 싫어해 그때부터 담배를 끊으려 노력했다.그 후 수십 년 동안 선희 앞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