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온 음식은 원래 버리려고 했는데 정윤이 아까워서 마저 먹겠다고 했다.정윤이 남은 음식을 먹고 있는걸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 윤아는 뺨을 살짝 붉혔다.그러나 오히려 그녀를 위로하는 정윤이다.“괜찮아요, 윤아 님.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윤아 님이 제 친언니 같아서 전 정말 괜찮아요.”“싫어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네요.”윤아는 이 소녀의 성격이 정말 보기 드물다고 생각했다.차 안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진의 시선은 줄곧 윤아의 뒤통수에 고정되어있었고 머릿속엔 온통 정윤이 오기 전에 윤아가 그에게 물어본 말뿐이었다.“한 가지만 물을게요.”그녀가 당시 이 질문을 할 때 우진은 그녀가 자신을 떠보고 불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사실대로 말했다.그러고 나서도 못 믿겠으면 어쩔 수 없지.하지만 차에 오르자 그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묻는 그 질문은 그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었기 때문에 묻는 것이었다는 것을.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대답이다. 그것이 그녀가 다음에 해야 할 일을 결정할 테니.그리고 이 일은...우진은 그렇게 멍하니 윤아를 바라보던 시선을 흐리더니 표정과 눈빛이 굳어졌다.만약 그녀가 물어본 그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그는 그녀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대충 알 것이다.그는 윤아를 설득해야 했지만 입가에 맴도는 말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충고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도 지키기 어려운 처지에.별장에 도착할 즈음 차에서 내린 우진이 말했다.“윤아 님. 제가 말할 일은 아니지만 무슨 일을 하든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다시 올려다본 우진의 눈엔 더 짙어진 죄책감이 가득했다.윤아는 입술을 오므렸다. 아무래도 우진은 이미 그녀가 뭘 할지 알고 있는 것 같다.하지만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쉽사리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윤아는 그와 눈만 마주친 채 눈을 돌렸다.안으로
윤아가 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우도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그는 집사의 전화를 듣고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식겁했었다. 전에 윤아가 다친 일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듯하다. 선우는 지금 윤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그래서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손에 있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서둘러 돌아온 거였다.윤아가 자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어 제자리에 서서 정윤을 보며 말했다.“외출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네.”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윤아 님이 피곤하다고 해서 음식만 조금 사고 다른 물건은 하나도 사지 않고 돌아왔어요.”윤아가 먹을 것을 샀다는 말에 선우가 곧바로 물었다. “뭐 샀어요?”정윤은 음식 이름을 말한 뒤 말을 이었다.“윤아 님은 몇 입 안 먹었는데 별로 입맛이 없는 것 같았어요.”“괜찮아요. 기억해뒀다 나중에 만들어주세요.”적어도 그녀가 몇 입 먹기를 원한다는 것은 기억할 가치가 있다.“네, 대표님.”정윤은 그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대표님, 윤아 님 찾으러 안 가세요?”“서두를 거 없어요.”그의 검푸른 얼굴은 담담했고 눈에는 온화한 빛이 돌았다.“자고 있다면서요. 잠에서 깬 후에 다시 얘기하죠. 정윤 씨는 부엌에 가서 음식을 준비해줘요.”정윤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부엌으로 갔다. 그녀는 속으로 선우가 윤아에게 정말 잘해주었구나 하고 생각했다.그리고 윤아와도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친해져서 두 사람이 오래 간다면 앞으로의 근무 환경은 훨씬 편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그런데 윤아가 선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은 그녀도 어렴풋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선우가 이미 윤아를 집으로 데려온 데다 선우 자체도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고 또 그가 한 여자에게 이 정도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은 처음이니 그를 좋아하지 않을 여자는 없겠다 싶었다.그렇게 생각하자 정윤도 마음이 놓였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구하려던 그 사람은?”선우도 윤아가 이 일에 대해 말할 거라는 걸 얼추 짐작했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쪽이 윤아답기도 하다.윤아는 원래 이런 성격이다. 그를 거절할 때도 진지하게 딱 잘라 말하던 사람이니.생각 끝에 선우는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진 비서가 알려준 거야?”윤아는 생각지도 않고 덤덤하게 그를 돌아보았다.“네가 기회를 준 거였지.”그는 이 일을 알고 있고 또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윤아를 따라가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기회를 주는 것 아닌가?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이 말을 한 뒤 선우는 한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기억을 잃었지만 역시 넌 내 마음을 잘 알아. 윤아야, 넌 나를 너무 잘 알아.”“...”윤아는 그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데 누가 모르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널 잘 아는 거랑 이 일이 무슨 상관이라고.’하지만 그녀는 이 일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지금 알아야 할 것은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지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그녀는 그의 화제에 끌려가지 않고 해결해야 할 일을 집요하게 말했다.까만 검푸른 눈 밑에 언뜻 언짢은 기색이 보였다. 선우는 윤아가 기억을 잃은 뒤에도 늘 그 일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윤아야. 그건 안 돼.”그러자 윤아의 미간이 금세 찌푸려졌다. “왜? 그 사람을 못 만나게 할 거면 왜 진 비서가 그 일에 대해 말해주게 내버려 둔 거야?”선우는 대꾸 없이 잠자코 그녀를 쳐다보았다.잠시 눈을 마주친 윤아는 다시 말했다.“말해봐.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야?”“만나는 건 안 되지만 치료받고 떠나게 하는 건 돼. 대신 조건이 있어.”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선우는 잠시 멈추었다.“조건이 뭔지는 이제 너도 알겠지.”윤아는 입술을 오므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생각은 정리됐어?”선우가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사람은 놓아줄 테니 넌 내 곁에 있어
그래도 얼굴 한 번 보는 것쯤은 선우가 들어줄 것 같았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선우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우진과 윤아가 생각해낸 걸 선우라고 생각을 못 했겠는가? 하지만 윤아는 그런데도 한 번 내기를 걸어보는 거다. 기억을 잃었든 안 잃었든 간에 이곳에 자발적으로 온 거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과거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본능적인 신체 반응과 성격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그녀의 결정은 아마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것일 거다.“윤아야. 내가 말했잖아. 만나는 건 안 된다고.”빙긋이 웃으며 바라보는 선우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다.“만나는 거 말고 다른 건 뭐든 들어줄게. 뭐든 말해.”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날 곤란하게 만드는 거지? 내가 원하는 건 그거 하나야.”“확실해?”윤아는 잠시 멈칫했다.“만난 이후엔? 그놈 상처는 치료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아?”그는 말하는 동시에 윤아의 손목에 가볍게 올려져 있던 손에 힘을 주더니 손목을 확 잡았다.“내가 한 가지 조건만 들어준다면?”윤아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다.“만날 것인가, 아니면 그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낼 것인가.”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윤아가 말했다.“이것도 우리가 전에 약속했던 거야?”“아니.”그녀의 이 질문에 선우는 오히려 매우 태연했다.“이건 약속이 아니야. 내가 주는 선택이야.”윤아는 한참 동안 그를 말 없이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목을 빼내었다.그리고는 몸을 돌렸다.그녀의 태도에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한 거지? 괜찮아, 우리 사이엔 시간이 많으니까. 나도 급하지 않아. 생각 정리되면 알려줘.”“...” ‘그래. 넌 급하지 않겠지. 급한 건 병상에 누워 있는 그 사람일 테니.’기억상실증에 걸린 최근 며칠 동안 그 사람은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윤아는 숨이 턱 막혔다. 만약 그녀가 다시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마...
윤아는 비아냥대며 말했다.“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긴 해?”그러나 선우는 그녀의 눈에 담긴 빈정거림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 남기를 원한다는 말로만 들렸다.“먹을 거 갖다 달라고 할까? 배고프지?”“먹고 싶지 않으니 진 비서님한테 오라고 해.”말을 마친 윤아는 선우에게 등을 돌렸고 그녀를 상대하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이렇게 먼 거리를 두고도 선우는 그녀의 기분이 언짢음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는 지금 기분이 무척 좋아 윤아가 그를 때리고 욕을 해도 기꺼이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선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오라고 할게.”문이 닫히자 방안이 조용해졌다.선우가 떠날 때의 그 유쾌한 말투가 떠오르자 윤아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선우가 윤아가 누굴 만나는 걸 죄다 막고 있는 데다 윤아도 상황이 돌아가는 걸 확인할 수 없으니 지금으로선 우진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윤아는 적어도 그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아는 이따가 우진이 오면 그 사람을 만나게 해줄 방법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다.우진은 얼마 안 가 바로 왔다. 윤아가 남겠다 해서 기분이 좋은 선우가 바로 전달한 모양이다. 그가 나간 지 몇 분 되지 않아 윤아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윤아 님.”우진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윤아는 재빨리 일어나 문을 열고 우진을 안으로 들였다.그가 들어서자 윤아는 조금 전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알겠습니다.”천 특보의 표정도 약간 굳어 있었다.“저희가 생각한 걸 대표님이라고 못할 리가 없겠죠.”“네.”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우진은 입술을 오므린 채 생각에 잠겼다.‘방법이라...’선우가 수현을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아직 모르니 그를 찾기도 어려운데 윤아까지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오르자 윤아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많이 곤란하다면 그만하고 먼저 그쪽으로 가서 저 대신 그 사람 상태를 확인해줘요.”“이선우 대표님은
‘이름을 검색해?’우진이 떠난 뒤 윤아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들어가며 우진이 왜 검색을 해보라 했을지 생각했다.‘설마 엄청 유명한 사람인가?’윤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입력했다.우진의 말대로 검색이 정말 도움이 되긴 했다. 수현의 소식도 있고 심지어 소개도 있었다.다만 한참을 휘젓고도 사진은 보지 못했다.그녀는 지나치게 개인정보를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신분이 높다는 뜻인데 어떻게 사진 한 장이 없는지.윤아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검색했지만 아무런 정보도 찾지 못했다.이제 포기하려고 할 때 윤아는 마침 수현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보고 냉큼 눌러보았다.사람도 많고 거리도 멀지만 훤칠하고 늘씬한 몸매의 남자가 그 사이에서 돋보였다.멀리서 찍은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윤아는 그의 수려한 미모와 실루엣을 간파했다.윤아는 이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익숙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남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익숙하다는 느낌만 받을 뿐 기억을 자극하지는 못했다.지금도 그녀는 이 사진을 오랫동안 보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윤아는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달갑지 않아 이 사진을 저장해 두고 다른 사진은 더 없는지 계속 뒤졌다.보안이 정말 잘 되는 모양이다.하지만 아무리 철저히 한다고 해도 몰래카메라를 찍는 대중을 당해낼 수는 없지.윤아는 포기하려고 할 때쯤 간간이 인파 속 흐릿한 그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더 열심히 찾는다면 더 선명하고 가까운 사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가 더 살펴보기도 전에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발소리가 차분해지는걸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윤아는 곧바로 페이지를 나가 베개 밑에 핸드폰을 넣고 다시 누웠다.그녀가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문이 열리자 음식 향기가 풍겨왔다.문을 등지고 누운 윤아는 음식 냄새를 맡고 눈살을 찌푸렸다.“윤아야, 자?”“일어나서 뭐 좀 먹고 잘래?”윤아는 아예 눈을
윤아는 손에 든 음식을 들여다보고는 말했다.“배 안 고파.”“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어서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하던데?”“나 진짜 배고프지 않아. 자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줄래?”“윤아야...”선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안 먹으면 탈 나.”“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마.”윤아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선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이대로 나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윤아는 귀찮은 듯 등을 돌리고 누운 채 이불을 덮었다.“나갈 때 문도 닫아줘. 그리고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여기는 분명히 그의 곳인데 마치 그가 그녀의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윤아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선우는 어쨌든 자신의 곁에 있을 거란 생각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선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윤아는 한참을 기다리다 마침내 소리가 나지 않자 그제야 재빨리 일어나 맨발로 문 앞에 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러면 쉽게 들어오진 못할 거다.하지만 선우는 이 별장의 주인이니 분명히 이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거다. 그가 굳이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방을 잠그고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윤아의 태도 표현이었다.-우진은 거의 세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고서야 돌아왔다.그가 돌아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윤아를 찾는 거였다.“어때요?”그를 보자마자 윤아가 다급하게 물었다.우진은 눈앞의 윤아를 바라보며 미리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상황이 안 좋아 보이지만 그쪽도 이선우 대표님 쪽 사람이 통제하고 있으니 적어도 큰 문제는 생기진 않을 겁니다.”윤아는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우진이 일부러 말을 흘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일단은?”결국 참지 못하고 되묻는 윤아.“지금 어떤 상태죠? 많이 안 좋나요?”우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복잡한 듯 한숨을 내쉬
저녁을 먹으러 내려간 윤아, 식탁에는 그녀와 선우 둘뿐이었다.윤아는 먹을 때 옆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걸 싫어했는데 바로 옆에 별장 사용인들이 서 있었다. 참다못한 윤아가 선우에게 말했다.“다들 자기 할 일 하라고 하면 안 돼? 여기서 쳐다보고 계시지 말고.”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사용인들에게 물러나라고 말했다.넓은 방에 오직 둘만 남게 되자 윤아는 그제야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그녀는 숟가락으로 그릇에 담긴 음식을 저으면서 고개를 들어 선우를 보았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응.”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비서님이 수현의 상황을 얘기해줬어.”선우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한 가지만 약속해줘.”“말해봐.”“아무 일 없이 건강히 여길 떠나게 해줘.”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건강히? 그건 안 될 것 같은데.”“뭐?”그 말에 윤아는 펄쩍 뛸 뻔했다. “왜 안 돼?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은 거야?”그녀가 이렇게 다급해하는 모습을 보자 선우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고 얇은 입술을 꼭 오므렸다.‘기억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그놈을 위해 조급해하는 거야?’“그 자식이 그렇게 좋아?”“그게 좋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한 약속이잖...”“내가 언제 몸 성히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어?”윤아는 믿을 수 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지금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거야?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나도 지킬 마음 없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아의 손목이 선우에게 잡혔다.“윤아야. 내가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이미 몸 성치 않은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윤아는 잠시 멈칫했다.“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겠다고밖에 못해.”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끔찍하게 보이는 거야?”그는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보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