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손에 든 음식을 들여다보고는 말했다.“배 안 고파.”“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어서 몸이 안 좋아졌다고 하던데?”“나 진짜 배고프지 않아. 자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줄래?”“윤아야...”선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안 먹으면 탈 나.”“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마.”윤아는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선우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이대로 나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윤아는 귀찮은 듯 등을 돌리고 누운 채 이불을 덮었다.“나갈 때 문도 닫아줘. 그리고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여기는 분명히 그의 곳인데 마치 그가 그녀의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윤아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선우는 어쨌든 자신의 곁에 있을 거란 생각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선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갔다.윤아는 한참을 기다리다 마침내 소리가 나지 않자 그제야 재빨리 일어나 맨발로 문 앞에 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서야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러면 쉽게 들어오진 못할 거다.하지만 선우는 이 별장의 주인이니 분명히 이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을 거다. 그가 굳이 들어온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방을 잠그고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윤아의 태도 표현이었다.-우진은 거의 세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고서야 돌아왔다.그가 돌아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윤아를 찾는 거였다.“어때요?”그를 보자마자 윤아가 다급하게 물었다.우진은 눈앞의 윤아를 바라보며 미리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상황이 안 좋아 보이지만 그쪽도 이선우 대표님 쪽 사람이 통제하고 있으니 적어도 큰 문제는 생기진 않을 겁니다.”윤아는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우진이 일부러 말을 흘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일단은?”결국 참지 못하고 되묻는 윤아.“지금 어떤 상태죠? 많이 안 좋나요?”우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복잡한 듯 한숨을 내쉬
저녁을 먹으러 내려간 윤아, 식탁에는 그녀와 선우 둘뿐이었다.윤아는 먹을 때 옆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걸 싫어했는데 바로 옆에 별장 사용인들이 서 있었다. 참다못한 윤아가 선우에게 말했다.“다들 자기 할 일 하라고 하면 안 돼? 여기서 쳐다보고 계시지 말고.”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사용인들에게 물러나라고 말했다.넓은 방에 오직 둘만 남게 되자 윤아는 그제야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그녀는 숟가락으로 그릇에 담긴 음식을 저으면서 고개를 들어 선우를 보았다.“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응.”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비서님이 수현의 상황을 얘기해줬어.”선우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한 가지만 약속해줘.”“말해봐.”“아무 일 없이 건강히 여길 떠나게 해줘.”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건강히? 그건 안 될 것 같은데.”“뭐?”그 말에 윤아는 펄쩍 뛸 뻔했다. “왜 안 돼?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은 거야?”그녀가 이렇게 다급해하는 모습을 보자 선우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고 얇은 입술을 꼭 오므렸다.‘기억을 잃었는데도 이렇게 그놈을 위해 조급해하는 거야?’“그 자식이 그렇게 좋아?”“그게 좋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네가 한 약속이잖...”“내가 언제 몸 성히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어?”윤아는 믿을 수 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지금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거야?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면 나도 지킬 마음 없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아의 손목이 선우에게 잡혔다.“윤아야. 내가 약속을 지키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이미 몸 성치 않은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윤아는 잠시 멈칫했다.“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겠다고밖에 못해.”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끔찍하게 보이는 거야?”그는 상처받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보았
윤아는 그를 쳐다보다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뗐다.“둘이 예전에 친구였다고 들었는데.”선우는 윤아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조금 당황했다.“친구한테 원래 이렇게 모질게 굴어?”선우 입가에 맴돌던 엷은 미소가 사라지더니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친구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냥 지나치는 거야? 심지어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이라니. 그럼 그다음은? 언젠가는 내 목숨도 가지고 장난칠 수 있겠지?”이 말에 선우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부인했다.“그럴 리가 없어. 윤아야, 넌 내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위치에 있어. 넌 가장 특별한 사람이야.”“그래?”윤아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지금은 나를 좋아하니까 내가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싫다고 느껴지면 남들처럼 대하겠지?”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선우에게 꽂혔다.“윤아야, 무슨 소리야? 난 절대 너한테 그럴 리가 없어. 넌 영원히 나한테 가장 특별한 사람이야.”“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윤아가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영원이란 말을 믿어? 나는? 난 믿을 것 같아?”선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지금은 젊으니까 내가 특별하다고, 심지어 영원하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겠지. 어차피 나중에 손해 볼 거 없으니. 그런데 앞으로도 네가 그럴 거라는 보장 있어?”“못 믿겠으면 내 옆에서 확인하면 되잖아.”“난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네 옆에 있으면서 이런 허무맹랑한 걸 확인하겠어?”싫다는 말은 선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너는 지금 네 친구에게도 이러는 것처럼 앞으로 나한테도 얼마든지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너와 약혼을 하길 바라는 거야?”그녀의 말에 선우는 약간 당황했다.그는 단순히 자신과 약혼시켜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였는데 윤아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몰랐다. 그를 보는 윤아의 눈빛엔 어느새 두려움이 가득했다.선우는 이게 진짜인지 연기인지 헷갈렸다.윤아는 똑똑한
그러나 윤아는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전혀 믿지 않는 모습이었다.“말만으로는 증거가 될 수 없는데. 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선우는 그녀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지금 당장 최고의 의료진을 불러 진수현을 치료하세요.”그가 전화를 걸었을 때 윤아는 곁에서 싸늘하게 바라보았다.선우는 전화를 끊고 다시 윤아를 바라봤다.“이제 날 믿어줄래?”윤아는 의심 좀 했다고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다. 두 사람은 원래 견제하고 구속을 당하는 사이였다. 수현을 대하는 것처럼 나한테도 그럴 수 있지 않냐는 의심에 곧바로 이렇게 반응할 줄이야.운 좋게 발견한 방법에 윤아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네 사람은 모두 네 말만 따르잖아. 내 앞에서 시늉만 하는 거면 어떡해.”윤아는 선우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급한 사람은 선우 쪽일 테니.윤아는 그녀의 의심이 왜 선우를 안달 나게 만들며 그는 증명하려 애쓰기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윤아는 여전히 그를 믿지 않고 있기에 그녀의 믿음을 얻으려면 선우는 결과를 그녀에게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증거일 테니.방으로 돌아오자 윤아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윤을 보았다.밥 먹을 때 옆에 서서 하인들이 쳐다보는 게 싫어서 다들 각자 자기 일을 하러 간 거로 아는데.정윤은 그날 윤아의 간택을 받은 후부터 선우의 지시를 받고 윤아만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래서 윤아가 내려가면 밖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정윤은 돌아오는 윤아를 서둘러 맞이했다.“윤아 님, 식사하셨어요?”열성적인 정윤을 보고 기분이 좀 나아진 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얼마나 드셨어요? 배불러요?”“윤아 님은 너무 말라서 많이 드셔야 해요.”윤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윤이 두 번이나 그녀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왜 그러세요?”“아무것도 아니에요.”짧은 대답 후에 윤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이를 지켜보
우진은 입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수현이 있는 곳은 우진도 한 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그것도 선우의 허락하에 수현의 생명에 위험이 있는지 확인하러 들어간 것이었다.그곳은…우진은 눈을 찌푸렸다. 선우의 허락 없이 들어가려면 난이도가 꽤 클 것이다.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우진은 이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걸어가는데 이내 핸드폰이 울렸다. 열어보니 선우가 보낸 메시지였고 내용은 심플했다.[이쪽으로 오세요.]윤아를 곁으로 데려온 후 선우는 우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선우가 우진에게 준 임무도 윤아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었기에 거의 부를 필요가 없었다.만약 부른다면 아마도 윤아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설마 윤아가 아까 얘기한 일로 부르는 걸까?우진은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선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얘기했다. 윤아가 말한 그 일에 대해 상황을 확인하라는 지시였다.선우가 수현에게 의료팀을 보냈다는 말에 우진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대표님은 도대체 윤아님이 오해할까 봐 이러시는 거예요, 아니면 진수현 씨도 대표님의 옛 친구라 마음이 약해지신 거예요?”이를 들은 선우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우진을 바라봤다.“비서님의 임무는 이 일의 결론을 윤아에게 보고하는 거지 여기서 나의 결정을 왈가왈부하는 게 아닙니다.”“전 그냥 대표님이 한 결정에 대해 후회한 적 없는지 궁금할 뿐이에요.”선우가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우진을 쳐다봤다.지금의 그는 예전의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더는 부드럽고 젠틀한 성격이 아니었다.“나가세요.”우진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선우를 힐끔 쳐다보더니 끝내 이렇게 말했다.“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이 말을 뒤로 우진은 자리를 떠났다.선우는 홀로 남겨진 채 어두운 눈빛으로 어딘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얇은 입술을 꼭 다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 선우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
선우는 의외로 약속을 지키는 바람에 우진은 이튿날에도 병원에 갈 수 있었고 의사에게 확인한 결과를 윤아에게 알려주었다.수현의 상황이 꽤 안정적이라는 말에 윤아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윤아가 선우에게 언제 수현을 돌려보낼지 물어보는 일만 남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윤아를 보며 우진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았다.“윤아님.”이를 들은 윤아는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할 말 있어요?”윤아가 멈춰서고 우진은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한 글자도 내뱉지 못했다.“비서님, 내가 여기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비서님뿐이에요. 만약 비서님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정말 나는 혼자 싸워야 하는 거예요.”윤아가 이렇게 말해서야 우진이 입을 열었다.“그냥 물어보고 싶어서요. 앞으로 어쩌실 계획인지.”앞으로의 계획이라.이 물음에 윤아는 넋을 잃고 말았다.“만약 진 대표님이 무사히 이곳을 떠난다면 계속 이 대표님 옆에 계실 건가요?”윤아는 입술을 앙다문 채 고민했다. 선우는 윤아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선우 옆을 지킬 일은 없었다.하지만 그녀도 아직은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일단은 수현을 먼저 이곳에서 무사히 내보내 주고 싶었다.하지만 본인은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혼자라면 행동하기도 편할 것이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우진이 다시 물었다.“만약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모르신다면 제 요구 하나만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씀해 보세요.”“대표님이 많은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만약 정말 무슨 사고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대표님께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이를 들은 윤아는 우진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수현이 떠나고 혹시나 윤아가 신고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윤아가 선우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게끔 부탁한 것이다.윤아는 입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그리고 윤아님이 잃어버린 일에 관해서도 지금 알려드리고 싶습니다.”아마도
만약 몸에서 전해지는 거부 반응만 아니라면 윤아는 가끔 선우와 한 쌍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아쉽게도…“왔어? 저녁에 네가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 했는데 먹어볼래?”그녀가 그쪽으로 걸어가자 선우는 얼른 친절하게 의자를 빼주고는 밥과 국을 퍼주며 그녀를 극진히 보살폈다.윤아는 그녀를 위해 분주히 돌아치는 선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가 자리에 앉고 나서야 숟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선우는 먹는데 급해하지 않고 그녀가 먹는 모습을 덤덤하게 지켜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진 비서가 상황 다 알려줬지? 이젠 내가 너를 그렇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주는 거지?”윤아는 일단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식사했다.선우는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진 비서가 아직 얘기 안 해줬어?”윤아는 그제야 선우를 바라봤다.“알려주면 뭐 해? 수현 씨 아직 네 손에 있는데. 언제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잖아.”“아직도 나를 못 믿는 거야?”선우는 순간 상처받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나를 못 믿겠다는 거냐고?”“그럼 수현 씨 보내줄 수 있어?”“당연하지. 그건 내가 약속한 거잖아.”“그럼 수현 씨 안전하게 보내고 나서 약속 지켰다고 말해.”윤아의 요구에 선우는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에 별로 손도 대지 않은 윤아를 본 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윤아야, 좀만 더 먹어.”“안 넘어가.”이렇게 말한 윤아는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선우는 그런 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끝내 심각한 문제를 깨달았다.윤아가 요새 음식을 너무 적게 먹는다는 것이었다.처음엔 몸이 다 낫기 전이라 입맛이 없어서 그러는 줄 알고 셰프에게 방법이란 방법은 다 동원해 맛있는 음식을 해오라고 했기에 지금 식탁에 올려진 메뉴도 윤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하지만 윤아는 이를 먹으면서도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즐겨 먹는 음식을 보고도 입맛이 돌아오지 않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했고 윤아는 그때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의사가 온다는 말에 윤아는 순간 어리둥절해서 미간을 찌푸렸다.“왜요?”정윤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건강 검사라고 들었습니다.”분명 그녀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갑자기 건강 검사지?윤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를 거절했다.정윤이 윤아의 뜻을 전하자 선우가 직접 윤아의 방으로 찾아왔다.“윤아야, 그냥 일상적인 건강 검사와 질문 몇 개밖에 없어. 시간 좀 내주면 안 될까?”선우를 보는 윤아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아무 뜻도 없어. 그냥 네가 걱정돼서야.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간단하게 검사 한 번 해보려고 그래.”퇴원 얘기를 꺼내자 윤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퇴원 후 다시 한번 진행하는 검사라면 별문제 없지만 이런 검사는 원래 병원에 가서 하는 거 아닌가?왜 의사를 집까지 부른 거지?윤아가 주저하자 선우가 말했다.“지금 날씨도 추워져서 밤에 이렇게 오시기 힘든 거 알잖아. 밖에서 꽤 오래 기다리셨어. 그냥 일반적인 건강 검사와 질문이야. 들어오라고 할까?”뒤에 덧붙인 말이 그래도 먹혔다.윤아는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윤아는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의사일 줄 알았는데 들어온 사람은 아시안이었다. 그가 자기소개를 하고 나서야 윤아는 같은 나라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나니 더 반가웠다.윤아는 윤정이 자기와 같은 도시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진찰이 필요했기에 윤아는 그저 옆을 지키고 있었다.의사는 먼저 윤아의 맥을 짚어보았고 이에 윤아가 놀라며 물었다.“외국에서 진료 볼 때도 진맥을 하시는 거예요?”이를 들은 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한의학은 환자의 병세를 보고, 듣고, 묻고, 맥을 짚어 보는 것을 중요시하죠.”윤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외국에서 자기 나라의 한의사를 만나게 될 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