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윤아의 접시를 곁눈질하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윤아야, 이제 몇 입 먹었다고 그래.”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우는 윤아가 지금 자기를 밀어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우는 잠시 입술을 말며 생각하다 뭔가가 떠오른 듯 말했다.“그래, 아무래도 이 요리사가 제대로 만들지 못해서겠지? 괜찮아, 조금 이따 비행기에서 내리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말을 마치고 선우는 사람을 시켜 접시를 치우게 했다. 이윽고 그는 손에 와인 한 잔을 쥐고 걸어왔다.“마실래?”“아니, 괜찮아.”선우는 와인잔을 손에 들고 여유롭게 마셔댔다. 마시고 난 뒤 선우는 조용히 윤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윤아는 그를 보지 않고 있었고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눈 감고 잠에 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선우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다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도착하면 자연스레 그녀를 잘 챙길 것이니. 비행 내내 복잡한 마음을 품고 드디어 카네베에 도착했다.카네베의 시차는 국내와 달라서 도착했을 때 국내는 자정일 시각이었지만 카네베는 밝은 낮이었다.“먼저 공항 근처의 가까운 호텔에 가서 씻고 쉬고 있어. 깨면 그때 별장으로 데려다줄게.”카네베에서의 일정은 모두 사전에 완벽하게 짜였다. 윤아가 비행기에서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면 선우는 바로 윤아를 별장으로 데려갔을 것이다.윤아는 미동 없이 앉아있었다.“이렇게 긴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생각을 못 끝낸 거야? 윤아야, 나 정말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선우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윤아의 팔을 부축했다.“일어나, 내려야지.”윤아는 계속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선우야, 난 쭉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당연하지.”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후에도 난 계속 너의 친구일 거야. 물론 그와 동시에 가장 친밀한 사람이기도 하고.”여기까지 들은 윤아가 선우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넌 미쳤어.”선우는 팔이 내쳐져도 그저 살짝 고개를 숙
두 아이는 고사하고 윤아 혼자 도망가기도 버거웠다. 게다가 윤아의 핸드폰은 선우한테 있었다.그리고 선우가 자기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아마 그녀의 여권이며 신분증을 다 찾아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밥을 할 때 방에 들어가서 뒤진 건가? 윤아는 답답했지만 계속 생각했다.그래서 선우가 그녀 근처로 다가왔을 때, 그녀는 입을 열어 물었다.“내 핸드폰은?”선우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질세라 윤아가 덧붙였다.“비행기에서 내리면 핸드폰 줄 거라고 네가 얘기했잖아.”“응.”선우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윤아한테 건넸다. 핸드폰을 가진 윤아는 꿈인가 싶었다. 선우가 순순히 핸드폰을 내놓을 줄은 몰랐던 터였다. 아까 비행기에서 한 말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비록 아주 미세한 효과인 것 같긴 해도.그러나 핸드폰의 전원을 켰을 때 이내 윤아는 뭔가 달라졌음을 발견했다. 핸드폰의 유심칩은 원래 쓰던 그 칩이 아니었다. 원래 쓰던 칩은 진작 바꿔치기 당했고 지금 쓰는 칩은 카베네에서 쓰는 전용 칩이었다.이러면 핸드폰을 돌려주나 안 돌려주나 무슨 다른 점이 있단 말인가. 윤아는 어이없다는 듯 선우를 쳐다봤다.“너 내 허락도 없이 칩을 바꾼 거야?”묻고 난 뒤 윤아 본인도 그런 질문을 한 자신이 우스웠다.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외국은 뭐 허락받고 왔나, 유심칩 하나 바꾼 건 일도 아니었다.“국내 유심칩은 여기서 못 써, 알잖아.”선우는 평소와 같이 덤덤하게 설명했다.“그래서 미리 새 칩을 준비해 둔 거야, 안심하고 써.”윤아는 카톡을 눌러보고 서야 자신이 사용하던 앱들이 전부 새로 다운받아진 걸 알아챘다. 카톡 계정도 새 계정이었고 카톡 연락처는 선우와 우진 둘뿐이었다. 그 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락처도 말끔히 지워져 핸드폰이 초기화된거나 다름이 없었다. 윤아가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 할 때,“엄마?”마침 두 아이가 기다리는 게 지쳤는지 윤아를 불렀다. 윤아는 두 아이를 돌아보았
호텔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하기까지 윤아는 선우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우는 윤아를 공항 부근의 호텔에 데려갔다. 말로는 부근이라더니 차로 반 시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말이다. 윤아가 편히 쉴 수 있게 갖은 준비를 해두고 나서야 선우는 윤아에게 말을 건넸다.“먼저 쉬고 있어, 저녁에 다시 와서...”쾅!선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호텔 방문이 닫혔다. 선우는 잠시 침묵하다 이내 못한 말을 덧붙였다.“데리러 올게.”그러나 방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이 대표님...”옆에서 지켜보던 우진이 망설이듯 선우를 불렀다.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우진의 부름에 선우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명령했다.“여기 잘 지키고 있어요. 그 어떤 수상한 사람도 들이면 안 되니까.”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 대표님, 안심하세요.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인다면 절대 들여보내지 않을 겁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쉬지 못하셨잖아요. 얼른 가서 좀 쉬세요.”선우는 장장 20시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해 눈에 실핏줄까지 어렸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 방에 돌아간다 해도 잘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서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건 안 하느니만 나았다.“알겠어요, 진 비서.”선우는 짧게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한편 윤아는 방문을 닫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 측에서 갓 올려온 신선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지만 두 아이는 조각 케이크를 먹고 난 뒤 나머지 음식들에 손대지 않았다. 아이들은 비행기에서부터 계속 뭔가를 먹으며 애니메이션을 보더니 슬슬 지칠 때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예상대로 두 아이는 이내 소파에서 쓰러져 담요를 껴안고 잠들었다.윤아는 담요를 잘 덮어주고는 다른 편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를 없애면 그녀가 방법이 없을까 봐? 의외로 윤아는 꽤 많은 이들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수현의 전화번호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당시 연락처를 추가하
윤아는 핸드폰을 집어넣고 자리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본 뒤에야 윤아는 자신이 머무르는 층이 16층이란 걸 알았다.문 앞에 다가가 문을 열고 보니 안절부절못하는 우진과 우락부락해 보이는 두 남자가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어디로 가나 도망갈 출구 따위는 없었다. 이는 감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윤아는 화가 나 우진에 말했다.“나가야겠어요.”우진은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윤아 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장시간 비행에 지치셨을 텐데 대표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잠시 나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비행에 지친 절 휴식하라 하는 건가요, 아니면 감금하는 건가요?”감금이라는 단어를 들은 우진은 재빨리 반박하며 말했다.“윤아 님, 감금이라뇨? 윤아 님, 오는 내내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셨는데 대표님이 윤아 님을 위해서 내린 결정입니다.”“아무튼 저 못 나가게 막겠다는 거죠?”우진은 말이 없었다. 윤아는 그를 앞에 두고 또 다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았다.소파로 돌아와 두 아이가 쌔근쌔근 잠 든 모습을 보고 윤아는 차츰 이성을 되찾았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포기할 수 없지, 뭔가 도움을 요청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윤아는 다시 칩을 꽂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 호텔 안내데스크 직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뚜뚜뚜하는 통화연결음이 들려왔다. 윤아는 통화가 연결 된다는 것에 감격했다. 그 말인즉 그저 그녀가 연락하고 싶었던 그 몇 명만 통화가 제한되어 있을 뿐 다른 이에겐 충분히 연락이 가능하단 소리였다. 선우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칩만 바꿀 수 있다면 그들한테 연락할 수 있을 것이다.사색에 잠겨 있을 무렵, 수화기 너머에서 유창한 영어가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왔다. 윤아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안녕하세요, 피자 좀 주문하고 싶은데요.”그녀는 재빠르게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훑고는 피자가 없는 것을 확
감금을 들먹이니 우진 쪽은 또 말이 없었다.“나 지금 먹고 싶어요.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안 먹으면 말죠 뭐.”말이 끝나고 윤아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핸드폰이 도청되고 있던 게 맞았던 걸까. 그 말인즉슨 그녀가 어디에 전화를 치든, 무엇을 요구하든 다 소용이 없단 소리였다.윤아는 선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해야 했다. 무언가 방법이 꼭 있을 것이다....한편 우진은 전화를 끊은 뒤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선우의 의견을 물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선우는 윤아의 요구를 들은 뒤 입술을 말며 생각하다 말했다.“윤아 말대로 해주세요.”“그런데 호텔에는...”“호텔에 없으면 밖에도 없습니까? 차이나타운 같은 데라도 찾아봐요. 운전해야 하면 운전해서 갔다 오고 정 안되면 돈을 주고 요리사를 고용하든가요.”“...”“윤아 옆에는 지금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다면 누가 들어준답니까?”별수 없이 우진은 시키는 대로 했다. 선우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려댔다. 한창 휴식하고 있었던 그는 다시 안경을 썼고 그 깊고 차가운 눈빛이 안경알 뒤로 가려졌다.그저 먹고 싶은 음식일 뿐이니 그 정도는 선우도 자연스레 해줄 수 있었다. 선우는 윤아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결코 자신이 수현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윤아는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고 두 아이를 안아 침실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이불을 꼭 덮어준 뒤 문을 닫아 거실과 담을 쌓았다. 이윽고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눌렀다. 아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혹시 앱으로 전화번호를 검색했을 때 친구 추가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가 그녀에게 계정을 만들어주며 아마 이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윤아 자신도 너무 급한 나머지 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윤아가 검색창에 전화번호를 입력하려던 찰나에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잽싸게 핸드폰을 치우고는 가만히 앉아있
갑작스러운 윤아의 분노는 직원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직원은 그대로 제자리에서 굳어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사실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선우였다. 윤아와 알고 지낸 수많은 세월 동안 이렇게 크게 화내는 모습은 선우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이 음식들, 먹을 수 있어. 그렇지만 넌 보고 싶지 않아.”윤아는 선우의 눈을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마친 뒤 윤아는 손을 써 선우를 밀며 앞으로 나갔다.윤아가 자기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선우의 마음은 칼로 에는 듯 아파 났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선우는 문밖으로 내밀렸고 이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우진이 나는 듯이 달려와 선우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선우는 평형을 잡으며 말했다.“괜찮아요.”그리고 선우는 우진의 손을 밀어냈다. 두 사람이 이 지경까지 된 걸 보면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대표님, 지금 후회하십니까? 윤아 님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대표님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말을 들은 선우는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시간이 지나면 윤아도 받아들일 거야.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됐다, 말을 말자.문을 닫은 뒤 윤아의 가슴은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직원을 향해 웃어 보였다.“물건 가지고 올라와 줘서 고마워요.”직원은 윤아가 선우한테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불똥이 자기한테 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길 향해 웃다니, 직원은 살짝 멍하기도, 어색하기도 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별말씀을, 이게 제 일인걸요.”말을 마치고 직원은 뭔가가 생각난 듯 손에 있던 물건을 건넸다.“이게 카운터에 말씀하신 물건이죠?”“네.”윤아는 안색이 밝아지며 물건을 건네받았다.“고마워요.”“괜찮습니다. 그럼... 시키실 일 없으시면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맛있는 식사 되세요.”윤아는 직원을 바라보며
직원이 자신과 선우를 커플이라 오해하는 것을 보고는 윤아는 귀찮음에 따로 해석하지 않고 아예 순순히 인정하며 말했다.“제가 그 이랑 싸워서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러니까 부탁이에요. 저 이를 약 올린다고 생각하고 같이 먹어주세요, 네?”윤아는 다가가 직원의 팔을 흔들며 도와주기를 바랐다. 여직원도 심성이 여린지라 윤아가 이리 부탁하자 결국 이렇게 얘기했다.“그럼, 그럼 매니저님한테 연락해 볼게요. 만약 동의하시면...”“그래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시면 전화 나한테 줘요. 내가 말하게.”여직원은 윤아를 향해 웃어 보이고 이내 전화기를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이따가 결과 알려줘요.”“네.”화장실에 들어선 뒤, 윤아는 신속하게 칩을 꺼내 바꿨다. 유심 핀이 없었으나 다행이었던 건 윤아가 아침에 문을 나설 때 화장을 안 했어도 귀걸이를 하고 나와 조금이나마 신경을 쓴 것이었다. 마침 그 귀걸이가 도움이 됐다.칩을 바꿀 때 윤아는 가슴이 계속 콩닥콩닥 뛰어왔다. 칩을 빼냈을 때 그들이 알 수 있는지도 몰랐다. 이 화장실에 카메라 같은 건 없겠지?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무의식 간에 사위를 둘러보며 구석구석 살폈다. 침착하려고 애썼으나 떨리는 손이 윤아를 팔아넘겼다.핸드폰이 땅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윤아는 재빠르게 주어 핸드폰을 닦고는 칩을 핸드폰에 꽂아 넣고 전원을 켰다. 마침 현아에게 연락하려던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고객님, 물어봤습니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모든 물건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문을 열었다.“동의한대요?”여직원은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매니저님이 고객님이 마주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 또한 우리 직원의 의무 중 하나라면서 고객님이 필요로 하시고 팁까지 주신다는데 저더러 남아서 잘 도와드리랍니다.”“고마워요.”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그럼 제가 남자 친구분한테 가서 말씀드리고 올게요.”“아니요, 그럴
예를 들자면 지금 남자 쪽에서 여자 쪽을 보는 표정은 어이없는 표정이었고 여자 쪽은 팔짱을 끼고 남자 쪽과는 더 이상 말 섞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싸우는 모양인데 남자 쪽에서 먼저 문제를 일으키고 지금 사과하는 것처럼 보였다.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좋다고 하면, 내가 꼭 너랑 밥을 먹어야 해?”말을 마치고 윤아는 고개를 들어 선우를 봤다. 그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뭔 짓을 한 건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많은 짓을 벌여놓고 내가 너랑 마주 보면서 평화롭게 밥을 먹어야 해? 아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할게. 만약 날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이후에 밥 먹을 때마다 다른 사람이랑 먹을 거야. 그게 누구든 설사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랑 먹어도 너랑은 절대 안 먹어.”윤아의 말은 비수처럼 선우의 심장에 꽂혔다. 만약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는 제삼자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분명 윤아가 한 말들이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직원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말을 마친 뒤 선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그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윤아는 입술을 말아 올리면서 웃었다.“아니면 내가 사람과 밥을 먹는 거 자체가 싫은 거야? 좋아, 그럼.”윤아는 손안의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나와 저 직원이 먹은 것들 다 가져가. 그리고 날 방에 가둬. 되도록 누구도 만날 수 없게, 어때?”“윤아야.”선우의 목소리는 정말 별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네 생각에는 네가 밥을 안 먹는 게 네 건강을 다치게 하는 거겠지만 사실 다치는 건 내 마음이야.”말하며 선우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윤아가 내려놓은 젓가락을 다시 손에 쥐고 말했다.“그냥 사람 찾아서 밥 좀 먹는 거잖아? 뭐 동의하고 말고 할 게 있어? 하지만... 좋기는 저 직원이 널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