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라면 그대로 뒤돌아 갔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소영은 이를 꽉 깨물고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사람 마음을 갖고 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설마 네 마음이 진짜라고 생각해? 정말 그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도 상관없다는 거야?”그러나 선우는 소영을 상대하지 않고 옆에 있던 진 비서에게 말했다.“내보내.”“선우야, 윤아 씨는 곧 수현 씨와 결혼할 거야. 그 두 사람이 함께 떠나도 정말 괜찮다고? 네가 지난 5년 동안 윤아 씨 곁에 있었단 거 알아. 5년이란 시간을 통째로 바친 여자랑 영원히 함께하고 싶지 않아? 정말 다른 사람한테 뺏겨도 상관없어?”소영은 미친 여자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그녀와 달리 선우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말 다 했어?”싸늘한 한마디에 소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무슨 뜻이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아니, 말도 안 되지. 윤아 씨 곁을 몇 년이나 맴돌았는데 좋아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선우가 윤아 곁에 버티고 있어 준 덕에 소영은 그동안 마음 놓고 그쪽에 사람을 붙이지 않은 거였다. 두 사람이 언젠간 감정이 생길 거라 생각했으니까.선우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주면서 맹렬한 애정 공세를 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마다하겠는가. 대부분 여자는 마음이 약해져 결국 그 남자를 받아주게 되어있다.그러나 윤아는 그녀의 예상보다 더 독했고 선우도 그녀의 예상보다 더 끈질겼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강소영 아가씨, 가시죠.”소영이 멍하니 서있을 동안 우진이 다가와 무정하게 그녀를 내쫓았다.선우도 더 이상 그녀와 얘기하고 싶어 보이지 않았다.소영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보탰다.“난 이해할 수 없어. 정말 나와 거래할 생각이 없다면 왜 날 만나준 건데?”정말 사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만남을 거절했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한참을
이른 아침, 어수선하던 모든 게 순식간에 물밑으로 가라앉은 듯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윤아는 산뜻한 바람을 한껏 만끽한 후에야 창문을 닫고 아침을 준비하러 갔다.어젯밤 수현이 떠난 뒤, 윤아는 옛 생각에 밤새 뒤척일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아주 깊은 잠을 잤다.누워서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그 뒤론 언제 잠든 건지 기억이 없었다.윤아가 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있는데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이 시간에 누구지?’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문 앞에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누군지 확인한 윤아는 곧바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선우야, 무슨 일이야?”문 앞에 서있던 선우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오랜만에 보는 건데 별로 안 반가워?”“그럴 리가...”윤아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몸을 돌려 선우를 집안으로 들였다.집에 들어선 선우는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곧 예전과 같이 신발장을 열어 실내화로 갈아신었다.“오늘 주말이니까 다들 약속 없지?”“주말이야?”윤아는 오늘이 주말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윤아와 아이들 모두 주말이어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 별문제는 없었다.윤아의 반응에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야 신발을 갈아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일이 많이 바쁜가봐... 오늘이 주말인지도 몰랐어?”윤아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지난번에 선우한테 모진 말을 내뱉은 이후로 윤아는 선우와 함께 있는 게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기 위해 싫은 소리만 가득 퍼부었으니 어쩌면 어색한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그 일 이후로 윤아는 당연히 선우가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생각했다.선우도 당황스러워하는 윤아의 낌새를 눈치챈 듯 몸을 일으킨 후 대뜸 물었다.“연인은 못해도 친구는 할 수 있지?”윤아는 그제야 반응이 돌아온 듯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당연하지. 너만 괜찮다면 우린 영
‘거절하려는 건가?’‘내가 너무 늦게 왔나?’선우가 생각에 잠길 동안 윤아는 고민을 마쳤는지 고개를 들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냐, 당연히 되지. 다시 친구로 생각해 줘서 고마워.”수현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너무 빨리 찾아오진 않을 거다. 윤아는 자기도 아이들과 함께 잠깐 놀다 오는 거니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하며 승낙했다.수현이 찾아온다고 해도 집에 사람이 없으면 연락이 오겠지.‘그때 가서 설명하면 돼.’윤아의 대답에 선우는 한시름 놓으며 물었다.“윤이랑 훈이는? 한동안 못 봤는데 나 보고 싶다고는 안 했어?”이제 다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윤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그게 더 서프라이즈일 것 같은데?”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이 윤아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떨어지며 더 눈부시게 빛났고 눈동자도 마치 부서진 별 조각처럼 반짝거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윤아에 대한 이런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선우의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은 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평생을 기다리다 겨우 온 기회도...선우의 눈동자에 슬픔이 언뜻 스쳤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래. 내가 직접 물어봐야지.”“아참, 오늘은 어디 가고 싶은데?”윤아는 그제야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캠핑 어때? 오는 길에 사람 시켜서 텐트도 준비해 놓았어.”캠핑이라는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같이 가겠다고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벌써 사람을 시켜 준비했다니. 윤아가 거절하면 쓸데없는 일을 한 셈일 텐데.“그래. 그리고 얼마 전에 아빠한테서 들었어. 너희 집에서 맞선 알아보고 계신다고?”맞선이라는 말에 움직이던 선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윽고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할아버지 지시야. 내 짝이 될 여자를 물색 중이라고 하더라고.”“어때? 마음 가는 사람은 있어?”선우는 윤아를 힐끔 봤다. 그녀는 마
선우가 준비할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윤아는 그래도 냉장고에서 먹을만한 식자재를 간단히 준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쓸 일용품들도 챙기고 있는데 선우가 다가왔다.선우는 그런 윤아를 보며 말했다.“그렇게 많이 챙길 필요 없어. 그때 가서 사면 돼.”“캠핑하러 가서 물건 사기도 번거로우니까 직접 챙겨가려고. 집에도 물건 많은데 더 사면 공간만 차지해.”윤아는 한바탕 말을 쏟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쁘게 물건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럼 네 화장품이랑 개인용품도 다 챙기지 그래. 가는 길에 화장을 고쳐야 할지도 모르잖아.”“됐어. 캠핑 가는 거지 여행도 아니잖아.”사실은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 윤아는 아이와 함께 가는 장소에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다.두 녀석이 얼굴에 하도 뽀뽀 세례를 하는 바람에 얼굴의 화장품이 아이의 입술에 닿는 걸 될수록 피하려다 보니 화장하는 횟수도 자연스레 줄게 되었다.엄마가 되는 게 어렵다는 말이 정말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선우도 더 말하지 않고 옆에서 윤아를 도와 짐을 정리했다.두 아이는 오랜만에 선우를 만나 신이 났는지 전보다 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밥을 먹을 때 하윤은 아예 선우의 다리 위에 올라타 우유를 마시며 말했다.“선우 아저씨. 왜 그동안 윤이 보러 안 왔어요. 설마 이제 윤이 안 좋아하는 거예요?”선우는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렇게 왔잖아. 앞으로도 우리 윤이랑 훈이 자주 보러 올 거야.”“진짜요? 윤이 속이면 안 돼요.”“그럼 약속.”둘은 윤아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했다. 큰 손과 작은 손이 꼭 맞닿아있는 걸 보며 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유치하기는.”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윤아는 다시 주방으로 가 아까 하다 말았던 캠핑 준비를 시작했다. 선우가 다시 한번 그럴 필요 없다고 찾아왔지만 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시작했는데 끝은 봐야지.”선우는 하는 수
“아니야. 통화 마치면 바로 출발할 거야.”그때 마침 우진이 통화를 마치고 차에 탔기에 윤아도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그렇게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윤아의 곁에 찰싹 붙어있던 두 녀석이 벌써 지쳤는지 눈을 비비며 윤아의 위로 늘어졌다.“엄마. 윤이 졸려...”윤아는 고개를 숙여 하윤의 말랑한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잠꾸러기네? 아까 금방 깼으면서 또 졸려?”하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자 윤아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 다리를 탁탁 치며 말했다.“그럼 더 자.”“나한테 와.”그때, 선우가 손을 뻗어 하윤을 안았다.“차에 타면 졸릴 수 있지. 훈이도 이제 졸릴 수 있으니까 윤이는 내가 안고 있을게.”윤아는 졸린지 눈을 껌뻑이는 훈이를 보고 그의 말이 맞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그래.”하윤은 처음 선우의 품에 안겨본 거였지만 얼마 안 가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 그의 품이 편한지 귀여운 코골이 소리도 내며 단잠에 빠진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던 윤아는 자기 자식이지만 참 적응력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선우의 예상대로 몇분 지나지 않아 훈이도 졸린다며 윤아의 다리를 베고 잠에 들었다. 윤아는 오늘따라 두 녀석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겨졌다.“이상하네. 어젯밤에 잘 못 잤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졸린다는 거지?”“아이들은 원래 차에 타면 졸잖아. 정상이야.”선우가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윤이랑 훈이는 원래 차에 타고 한참은 지나야 졸린다고 하는데, 오늘은 너무 이른 것 같단 말이지.”윤아는 조금 게름찍했지만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겠거니 하고 더 생각하지 않았다.아마 그녀가 나간 후에도 몰래 깨어있었던 모양이다.“잘 자면 좋지.”선우가 하윤의 머릿결을 정리해 주며 뒷자리의 담요를 꺼내 덮어주었다.“얌전히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있을 거니까.”“그렇긴 하네.”우진이 뒤쪽에서 담요를 하나 더 꺼내 윤아에게 건넸다.“윤아 아가씨, 이거 덮으세요. 날씨가 습해서 오래 앉아계시면 추우실 거예요.”훈
선우의 뜨거운 손끝이 윤아의 차가운 얼굴에 닿았다. 희고 맑은 피부의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선우의 손끝은 우진이 보는 앞에서 천천히 윤아의 얼굴을 누볐다. 지그시 감은 두 눈, 오똑한 코와 그 옆의 발그레한 볼까지...우진은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황급히 눈을 피했다.그리고 선우의 손끝은 어느새 윤아의 촉촉한 입술에 안착했다. 피부로부터 전해지는 온기와 부드러움은 마치 최고급 셰프가 조리해 낸 푸딩 같았다. 비록 직접 느껴보진 않았지만 손끝만으로도 그 느낌을 상상할 수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간절히 바라오던 여자가 눈앞에 있다.그는 윤아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더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눈에 띄는 행동도 해보고 철없이 약 올리기도 했었다.윤아한테 다가갈 수만 있다면 그는 늘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의도와 달리 그는 윤아의 미움을 샀고 그녀가 다른 사람 곁으로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사실이 미치도록 슬펐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진수현 다음으로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아예 관심이 없는 것보다 미움이라도 받으면서 윤아의 마음속에 남아있고 싶었다.그리고 그렇게 했고.수현과 소영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을 때, 수현이 생명의 은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애정이라 착각하도록 바람을 잡은 것도 다름 아닌 선우였다.성인식 때도 그는 나무 뒤로 숨은 윤아의 치마를 발견했었다.윤아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도 수현이 그런 말을 하도록 유도한 거였다.윤아가 수현에 대한 마음을 접길 바라면서.그러다 집에 변고가 생기며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바람에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이상 예측할 수 없게 되었지만 수현의 맹세를 들은 소영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윤아도 그 말을 들었으니 적어도 집안일이 모두 해결되기까지 몇 년 동안은 두 사람 사이에 진전이 있긴 힘들거라고 예상했었다.그러나 변수는 늘 존재했다. 윤
우진이 하윤을 다시 선우의 품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대표님.”선우는 조심스레 하윤을 받아안고 아이가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요?”“2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도착하면 헬기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목적지까지 총 한 시간 정도 소요할 거고요.”우진은 조금 머뭇거리며 윤아와 두 아이를 바라봤다.“가는 도중에 깨진 않겠죠?”그러자 선우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설령 깬다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겠지만요.”우진은 다시 한번 윤아 쪽을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캠핑 쪽도 사실 준비를 마쳤는데...”“네.”그러나 선우는 담담한 대꾸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이라도 차를 돌리면 윤아 아가씨가 깨도 너무 피곤한 탓이라고 여기고 별로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그 말에 선우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진 비서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우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대표님이 후회하실까 봐요. 그동안 윤아 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덕에 이제 대표님을 가족같이 믿을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시잖아요. 이러다 들켰다간... 원망을 살 겁니다.”“그래서요?”선우가 비아냥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윤아가 다른 남자한테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만큼 후회될 일은 없어요.”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우진이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한 선우를 보며 더 말려봤자 소용없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애꿎은 한숨만 푹 쉬며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이번 계획이 윤아한테는 얼마나 기분 나쁠지 예상이 갔기에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설령 성공한다 해도 선우와 윤아가 쌓아왔던 관계는 아마 점차 균열이 생길 것이다.그러나 지금 선우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생각해 보면 윤아 님이 귀국한다고 했을 때 대표님이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이미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듯한 저 태도.선우는 이미 윤아의 원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윤아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고 창밖을 통해 비행고도를 가늠해 봤다.지면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비행기가 뜬지 한참은 된 모양이었다.“훈이랑 윤이는?”“앞쪽에 돌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 마.”“아이들을 좀 봐야겠어.”그 말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데려다줄게.”윤아는 선우를 따라 다른 칸으로 들어갔다. 먼저 깨서 간식을 먹고 있던 두 아이는 윤아가 다가오는 걸 보고 방긋 웃었다.아이들한테는 이미 적당히 둘러낸 모양이다. 아이들은 워낙 선우를 믿고 잘 따르니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그나마 사리가 밝은 서훈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엄마, 우리 캠핑 가는 거 아니었어요? 왜 갑자기 비행기를 탄 거예요?”윤아는 애써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갑자기 생각이 바뀌었어. 맛있어?”“맛있어요.”“그럼 먼저 먹고 있어. 엄마는 선우 아저씨랑 할 얘기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찾으러 올게.”“네.”두 녀석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아이가 안전한 걸 확인한 윤아는 몸을 일으켜 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화가 치미는 걸 겨우 억누르며 무표정으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이런 반응을 예상했던 선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윤아의 뒤를 따라나섰다.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긴 뒤, 윤아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대로 앞을 보며 선우에게 물었다.“어디로 가는 건데?”“해외.”“얼마나 더 걸려?”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아는 그가 대답하든 말든 할 말을 쏟아냈다.“도착하면 곧바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알아볼 거야. 두 아이와 함께 무사히 귀국하면 오늘 일은 그냥 여행 온 셈 쳐줄게.”그녀는 선우에게 앞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든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래도 꽤 좋은 사이였지 않은가. 윤아는 가능하다면 둘 사이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윤아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