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소영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소영은 수현이 이 일을 물은 이유가 그냥 과정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그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소영은 자신이 어떤 비참한 결과를 맞을지 눈에 선했다. 당황한 소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말도 더듬거렸다.“수현 씨, 당신을 구한 건 내가 맞아. 다른 사람이 하는 소리 듣지 마. 다 수현 씨를 현혹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야. 우리가 헤어졌으면 해서 이간질 하는 거라고.”수현은 소영의 말에서 끝내 듣고 싶었던 관건 정보를 얻어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나 누구라고 말한 적 없는데.”소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때 강가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었을 텐데 넌 왜 하필 윤아가 말한 거라고 단정 짓는 거야? 만약 윤아가 현장에 없었다면 무슨 말을 하든 뭐가 중요해?”수현은 다소 매서워진 말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니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었다든지.”“아, 아니야!”소영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수현의 시선은 피했다.“난 수현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정말 수현 씨랑 나뿐이야. 수현 씨를 살린 것도 나고.”“내가 윤아 씨를 꺼낸 건 어젯밤에 찾으러 갔다길래... 아, 맞다. 어젯밤에 만나러 간 거지? 그래서 오늘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변한 거네. 수현 씨, 어젯밤에는 내가 비굴하게 수현 씨 컵에 약을 탄 건 맞아. 하지만 그것도 수현 씨를 윤아 씨한테 뺏길까 봐 잠시 이성을 잃어서 한 짓이야. 그 행동 하나로 내가 수현 씨를 살린 것까지 부정하지 말아줘.”“수현 씨, 더는 윤아 씨한테 속지 마. 무조건 당신을 속이고 있는 거야.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에 일부러 이야기를 지어내서 나를 해치려 드는 거라고.”소영은 미친 사람처럼 수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소영은
소영은 당황했지만 금방 다시 정신을 차렸다.진수현은 오늘 밤 그녀를 떠보기 위해 온 게 분명하다.하지만 소영이 끝까지 잡아떼면 그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생각이 정리된 소영은 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냥 수현 씨가 은혜도 잊고 나한테서 증거 빼내려고 떠보러 온 거잖아. 그래야 윤아 씨한테 돌아가서 얘기해줄 수 있으니까. 수현 씨, 잘 들어. 난 수현 씨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 없어. 물에 빠진 수현 씨를 구해줬던 날, 난 하마터면 같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어. 윤아 씨가 뭐 어떻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야. 그런데 내가 힘들게 얻은 것들까지 뺏어갈 생각은 하지 마. 네가 구해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나한테서 증거 따위를 빼내려는 생각이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야.”소영이 벌써 눈치채버릴 줄이야.수현은 조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사람이다.그는 긴 다리를 뻗더니 소영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소영. 증거 없으면 내가 널 어떻게 못할까 봐?”증거도 없는데 뭘 할 수 있겠는가.소영은 고개를 들어 수현과 눈을 맞췄다.“내가 그날 수현 씨 목숨을 구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증거 찾을 때까진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야. 윤아 씨가 날 어떻게 비방하든 난 받아들일 수 없어.”“그래도 그 여자 말을 믿고 싶다면 그렇게 해. 대신 진씨 집안은 의리를 저버린 집안이 되겠지.”그 말에 수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음산하고 냉기가 가득해 마치 칼바람처럼 소영의 마음을 후벼파며 소름 돋게 했다.“넌 내가 애초에 널 믿었던 게 고작 진씨 집안 체면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서?”소영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깊은 바다 같은 수현의 눈빛은 잔잔하고 평온했다. 그러나 바다는 원래 차갑고 매정한 법이기도 하다.소영은 불현듯 수현도 그런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진씨 집안의 명성을 신경 쓸 리
“어떻게 된 거니?”나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간단히 털어놓았다.“뭐? 진수현이 왔다고?”지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소영아, 수현이 왔단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너 보러 온 거지?”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영은 마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참담한 기색을 띤 채 그녀의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소영아? 뭐라고 말 좀 해봐!”지혜는 그런 소영이 답답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소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 수현 씨가 알았어요. 다 알았다고요. 이제 나도, 강씨 집안도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뭘 알았다는 거니? 말 좀 똑바로 해봐.”“심윤아. 심윤아 그 여자 기억이 돌아왔다고요. 수현 씨한테 다 말해버렸나 봐요. 그날 수현 씨를 구한 게 내가 아니란걸 알아버렸으니 나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겠죠. 엄마, 우리 어떡해요?”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 횡설수설 했지만 그래도 차분히 정리해 보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소영의 말을 모두 이해한 지혜는 사색이 되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소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네가 아니란 걸 알았다니? 그때 네가 강물에 뛰어들어 진수현을 구한 거 아니었니?”소영은 이 비밀을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해왔다.덕분에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그녀가 사실 윤아의 공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리고 이 비밀은 수현만 모른다면 한평생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이제 수현이 다 알아버렸으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칼 같은 그의 성격에 이 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는걸 아는 소영은 이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알려 함께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판단했다.“엄마, 지금 당장 재산을 옮겨야 해요. 아니면 우리 집은 끝장이라고요.”강씨 집안이 망하면 소영의 인생도
지혜가 그렇게 떠난 후, 소영은 침대에 머리를 박고 두 손으로 얼얼해진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럽게 울었다.엄마에게 맞은 게 아파서는 아니다. 그녀조차도 자기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으니까.소영은 이제야 진작에 모든 걸 멈췄어야 했다는 걸 인지했다.하지만 이제 엎질러진 물이었다.이제 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누가... 도와주기나 할까?’그 순간, 누군가가 문득 떠오른 소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나영아, 택시 좀 잡아줘. 빨리.”그녀에게 오늘밤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고즈넉한 테라스.진우진이 선우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부어주고 있다. 뜨거운 차는 차가운 공기와 만나며 모락모락 김을 풍겼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소영이 나영의 부축을 받으며 서있다.그렇게 서 있은 지 한참이 되었는데 선우는 지금까지도 앉으란 말 한마디 없었다.그의 옆에 있는 진우진이라는 비서도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차만 따르고 있었다.다급히 환자복 그대로 나온 소영의 손목엔 죽으려는 척 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처도 아직 그대로였다. 유일하게 몸을 덥힐 수 있는 외투도 나영의 것을 뺏어온 거였다.그러나 외투 하나로는 밤바람의 추위를 이겨낼 수 없었는지 수영은 저도 모르게 몸이 달달 떨려왔다.추위에 시달리다 보니 눈앞의 저 차 한 잔이 너무 간절해졌다.‘따뜻한 차 한 잔이면 몸속의 한기도 다 빠져나갈 텐데.’하지만 소영이 아무리 찻잔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어도 선우의 얼굴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무뚝뚝한 표정이 예전의 그 따뜻하고 자상하던 때와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그래도 차를 마시는 동작에는 예전의 그 부드럽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후후 불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찬바람은 여전히 매정하게 불어댔고 소영과 나영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수영은 추위에 몸을 떨다 더는 못 참겠는지 입을 뗐다.“선우야... 내가 한 말 생각해 봤어?”소영이 말을 건네자 선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보고
평소라면 그대로 뒤돌아 갔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소영은 이를 꽉 깨물고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사람 마음을 갖고 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설마 네 마음이 진짜라고 생각해? 정말 그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도 상관없다는 거야?”그러나 선우는 소영을 상대하지 않고 옆에 있던 진 비서에게 말했다.“내보내.”“선우야, 윤아 씨는 곧 수현 씨와 결혼할 거야. 그 두 사람이 함께 떠나도 정말 괜찮다고? 네가 지난 5년 동안 윤아 씨 곁에 있었단 거 알아. 5년이란 시간을 통째로 바친 여자랑 영원히 함께하고 싶지 않아? 정말 다른 사람한테 뺏겨도 상관없어?”소영은 미친 여자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그녀와 달리 선우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말 다 했어?”싸늘한 한마디에 소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무슨 뜻이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아니, 말도 안 되지. 윤아 씨 곁을 몇 년이나 맴돌았는데 좋아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선우가 윤아 곁에 버티고 있어 준 덕에 소영은 그동안 마음 놓고 그쪽에 사람을 붙이지 않은 거였다. 두 사람이 언젠간 감정이 생길 거라 생각했으니까.선우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주면서 맹렬한 애정 공세를 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마다하겠는가. 대부분 여자는 마음이 약해져 결국 그 남자를 받아주게 되어있다.그러나 윤아는 그녀의 예상보다 더 독했고 선우도 그녀의 예상보다 더 끈질겼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강소영 아가씨, 가시죠.”소영이 멍하니 서있을 동안 우진이 다가와 무정하게 그녀를 내쫓았다.선우도 더 이상 그녀와 얘기하고 싶어 보이지 않았다.소영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보탰다.“난 이해할 수 없어. 정말 나와 거래할 생각이 없다면 왜 날 만나준 건데?”정말 사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만남을 거절했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한참을
이른 아침, 어수선하던 모든 게 순식간에 물밑으로 가라앉은 듯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윤아는 산뜻한 바람을 한껏 만끽한 후에야 창문을 닫고 아침을 준비하러 갔다.어젯밤 수현이 떠난 뒤, 윤아는 옛 생각에 밤새 뒤척일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아주 깊은 잠을 잤다.누워서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그 뒤론 언제 잠든 건지 기억이 없었다.윤아가 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있는데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이 시간에 누구지?’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문 앞에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누군지 확인한 윤아는 곧바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선우야, 무슨 일이야?”문 앞에 서있던 선우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오랜만에 보는 건데 별로 안 반가워?”“그럴 리가...”윤아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몸을 돌려 선우를 집안으로 들였다.집에 들어선 선우는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곧 예전과 같이 신발장을 열어 실내화로 갈아신었다.“오늘 주말이니까 다들 약속 없지?”“주말이야?”윤아는 오늘이 주말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윤아와 아이들 모두 주말이어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 별문제는 없었다.윤아의 반응에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야 신발을 갈아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일이 많이 바쁜가봐... 오늘이 주말인지도 몰랐어?”윤아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지난번에 선우한테 모진 말을 내뱉은 이후로 윤아는 선우와 함께 있는 게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기 위해 싫은 소리만 가득 퍼부었으니 어쩌면 어색한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그 일 이후로 윤아는 당연히 선우가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생각했다.선우도 당황스러워하는 윤아의 낌새를 눈치챈 듯 몸을 일으킨 후 대뜸 물었다.“연인은 못해도 친구는 할 수 있지?”윤아는 그제야 반응이 돌아온 듯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당연하지. 너만 괜찮다면 우린 영
‘거절하려는 건가?’‘내가 너무 늦게 왔나?’선우가 생각에 잠길 동안 윤아는 고민을 마쳤는지 고개를 들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냐, 당연히 되지. 다시 친구로 생각해 줘서 고마워.”수현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너무 빨리 찾아오진 않을 거다. 윤아는 자기도 아이들과 함께 잠깐 놀다 오는 거니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하며 승낙했다.수현이 찾아온다고 해도 집에 사람이 없으면 연락이 오겠지.‘그때 가서 설명하면 돼.’윤아의 대답에 선우는 한시름 놓으며 물었다.“윤이랑 훈이는? 한동안 못 봤는데 나 보고 싶다고는 안 했어?”이제 다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윤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그게 더 서프라이즈일 것 같은데?”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이 윤아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떨어지며 더 눈부시게 빛났고 눈동자도 마치 부서진 별 조각처럼 반짝거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윤아에 대한 이런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선우의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은 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평생을 기다리다 겨우 온 기회도...선우의 눈동자에 슬픔이 언뜻 스쳤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래. 내가 직접 물어봐야지.”“아참, 오늘은 어디 가고 싶은데?”윤아는 그제야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캠핑 어때? 오는 길에 사람 시켜서 텐트도 준비해 놓았어.”캠핑이라는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같이 가겠다고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벌써 사람을 시켜 준비했다니. 윤아가 거절하면 쓸데없는 일을 한 셈일 텐데.“그래. 그리고 얼마 전에 아빠한테서 들었어. 너희 집에서 맞선 알아보고 계신다고?”맞선이라는 말에 움직이던 선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윽고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할아버지 지시야. 내 짝이 될 여자를 물색 중이라고 하더라고.”“어때? 마음 가는 사람은 있어?”선우는 윤아를 힐끔 봤다. 그녀는 마
선우가 준비할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윤아는 그래도 냉장고에서 먹을만한 식자재를 간단히 준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쓸 일용품들도 챙기고 있는데 선우가 다가왔다.선우는 그런 윤아를 보며 말했다.“그렇게 많이 챙길 필요 없어. 그때 가서 사면 돼.”“캠핑하러 가서 물건 사기도 번거로우니까 직접 챙겨가려고. 집에도 물건 많은데 더 사면 공간만 차지해.”윤아는 한바탕 말을 쏟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쁘게 물건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럼 네 화장품이랑 개인용품도 다 챙기지 그래. 가는 길에 화장을 고쳐야 할지도 모르잖아.”“됐어. 캠핑 가는 거지 여행도 아니잖아.”사실은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 윤아는 아이와 함께 가는 장소에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다.두 녀석이 얼굴에 하도 뽀뽀 세례를 하는 바람에 얼굴의 화장품이 아이의 입술에 닿는 걸 될수록 피하려다 보니 화장하는 횟수도 자연스레 줄게 되었다.엄마가 되는 게 어렵다는 말이 정말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선우도 더 말하지 않고 옆에서 윤아를 도와 짐을 정리했다.두 아이는 오랜만에 선우를 만나 신이 났는지 전보다 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밥을 먹을 때 하윤은 아예 선우의 다리 위에 올라타 우유를 마시며 말했다.“선우 아저씨. 왜 그동안 윤이 보러 안 왔어요. 설마 이제 윤이 안 좋아하는 거예요?”선우는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렇게 왔잖아. 앞으로도 우리 윤이랑 훈이 자주 보러 올 거야.”“진짜요? 윤이 속이면 안 돼요.”“그럼 약속.”둘은 윤아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했다. 큰 손과 작은 손이 꼭 맞닿아있는 걸 보며 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유치하기는.”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윤아는 다시 주방으로 가 아까 하다 말았던 캠핑 준비를 시작했다. 선우가 다시 한번 그럴 필요 없다고 찾아왔지만 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시작했는데 끝은 봐야지.”선우는 하는 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