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거니?”나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일을 간단히 털어놓았다.“뭐? 진수현이 왔다고?”지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소영아, 수현이 왔단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너 보러 온 거지?”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영은 마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참담한 기색을 띤 채 그녀의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소영아? 뭐라고 말 좀 해봐!”지혜는 그런 소영이 답답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소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 수현 씨가 알았어요. 다 알았다고요. 이제 나도, 강씨 집안도 가만 두지 않을 거예요.”그 말에 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뭘 알았다는 거니? 말 좀 똑바로 해봐.”“심윤아. 심윤아 그 여자 기억이 돌아왔다고요. 수현 씨한테 다 말해버렸나 봐요. 그날 수현 씨를 구한 게 내가 아니란걸 알아버렸으니 나한테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은 우리겠죠. 엄마, 우리 어떡해요?”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 횡설수설 했지만 그래도 차분히 정리해 보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소영의 말을 모두 이해한 지혜는 사색이 되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소영아, 그게 무슨 말이야.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네가 아니란 걸 알았다니? 그때 네가 강물에 뛰어들어 진수현을 구한 거 아니었니?”소영은 이 비밀을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해왔다.덕분에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그녀가 사실 윤아의 공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그리고 이 비밀은 수현만 모른다면 한평생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이제 수현이 다 알아버렸으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칼 같은 그의 성격에 이 일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는걸 아는 소영은 이제라도 빨리 가족들에게 알려 함께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판단했다.“엄마, 지금 당장 재산을 옮겨야 해요. 아니면 우리 집은 끝장이라고요.”강씨 집안이 망하면 소영의 인생도
지혜가 그렇게 떠난 후, 소영은 침대에 머리를 박고 두 손으로 얼얼해진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럽게 울었다.엄마에게 맞은 게 아파서는 아니다. 그녀조차도 자기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으니까.소영은 이제야 진작에 모든 걸 멈췄어야 했다는 걸 인지했다.하지만 이제 엎질러진 물이었다.이제 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누가... 도와주기나 할까?’그 순간, 누군가가 문득 떠오른 소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나영아, 택시 좀 잡아줘. 빨리.”그녀에게 오늘밤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고즈넉한 테라스.진우진이 선우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부어주고 있다. 뜨거운 차는 차가운 공기와 만나며 모락모락 김을 풍겼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소영이 나영의 부축을 받으며 서있다.그렇게 서 있은 지 한참이 되었는데 선우는 지금까지도 앉으란 말 한마디 없었다.그의 옆에 있는 진우진이라는 비서도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차만 따르고 있었다.다급히 환자복 그대로 나온 소영의 손목엔 죽으려는 척 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처도 아직 그대로였다. 유일하게 몸을 덥힐 수 있는 외투도 나영의 것을 뺏어온 거였다.그러나 외투 하나로는 밤바람의 추위를 이겨낼 수 없었는지 수영은 저도 모르게 몸이 달달 떨려왔다.추위에 시달리다 보니 눈앞의 저 차 한 잔이 너무 간절해졌다.‘따뜻한 차 한 잔이면 몸속의 한기도 다 빠져나갈 텐데.’하지만 소영이 아무리 찻잔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어도 선우의 얼굴에는 아무런 온기도 없었다. 무뚝뚝한 표정이 예전의 그 따뜻하고 자상하던 때와는 완전히 딴 사람 같았다.그래도 차를 마시는 동작에는 예전의 그 부드럽던 모습이 얼핏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후후 불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찬바람은 여전히 매정하게 불어댔고 소영과 나영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수영은 추위에 몸을 떨다 더는 못 참겠는지 입을 뗐다.“선우야... 내가 한 말 생각해 봤어?”소영이 말을 건네자 선우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보고
평소라면 그대로 뒤돌아 갔을 것이다.하지만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소영은 이를 꽉 깨물고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사람 마음을 갖고 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설마 네 마음이 진짜라고 생각해? 정말 그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도 상관없다는 거야?”그러나 선우는 소영을 상대하지 않고 옆에 있던 진 비서에게 말했다.“내보내.”“선우야, 윤아 씨는 곧 수현 씨와 결혼할 거야. 그 두 사람이 함께 떠나도 정말 괜찮다고? 네가 지난 5년 동안 윤아 씨 곁에 있었단 거 알아. 5년이란 시간을 통째로 바친 여자랑 영원히 함께하고 싶지 않아? 정말 다른 사람한테 뺏겨도 상관없어?”소영은 미친 여자처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그녀와 달리 선우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말 다 했어?”싸늘한 한마디에 소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무슨 뜻이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아니, 말도 안 되지. 윤아 씨 곁을 몇 년이나 맴돌았는데 좋아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선우가 윤아 곁에 버티고 있어 준 덕에 소영은 그동안 마음 놓고 그쪽에 사람을 붙이지 않은 거였다. 두 사람이 언젠간 감정이 생길 거라 생각했으니까.선우처럼 오랫동안 기다려주면서 맹렬한 애정 공세를 하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마다하겠는가. 대부분 여자는 마음이 약해져 결국 그 남자를 받아주게 되어있다.그러나 윤아는 그녀의 예상보다 더 독했고 선우도 그녀의 예상보다 더 끈질겼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강소영 아가씨, 가시죠.”소영이 멍하니 서있을 동안 우진이 다가와 무정하게 그녀를 내쫓았다.선우도 더 이상 그녀와 얘기하고 싶어 보이지 않았다.소영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다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보탰다.“난 이해할 수 없어. 정말 나와 거래할 생각이 없다면 왜 날 만나준 건데?”정말 사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만남을 거절했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한참을
이른 아침, 어수선하던 모든 게 순식간에 물밑으로 가라앉은 듯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윤아는 산뜻한 바람을 한껏 만끽한 후에야 창문을 닫고 아침을 준비하러 갔다.어젯밤 수현이 떠난 뒤, 윤아는 옛 생각에 밤새 뒤척일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아주 깊은 잠을 잤다.누워서 한참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그 뒤론 언제 잠든 건지 기억이 없었다.윤아가 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있는데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이 시간에 누구지?’감시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문 앞에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누군지 확인한 윤아는 곧바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선우야, 무슨 일이야?”문 앞에 서있던 선우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오랜만에 보는 건데 별로 안 반가워?”“그럴 리가...”윤아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몸을 돌려 선우를 집안으로 들였다.집에 들어선 선우는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곧 예전과 같이 신발장을 열어 실내화로 갈아신었다.“오늘 주말이니까 다들 약속 없지?”“주말이야?”윤아는 오늘이 주말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윤아와 아이들 모두 주말이어도 늦잠을 자지 않고 제시간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 별문제는 없었다.윤아의 반응에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야 신발을 갈아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일이 많이 바쁜가봐... 오늘이 주말인지도 몰랐어?”윤아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지난번에 선우한테 모진 말을 내뱉은 이후로 윤아는 선우와 함께 있는 게 어색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거절하기 위해 싫은 소리만 가득 퍼부었으니 어쩌면 어색한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그 일 이후로 윤아는 당연히 선우가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생각했다.선우도 당황스러워하는 윤아의 낌새를 눈치챈 듯 몸을 일으킨 후 대뜸 물었다.“연인은 못해도 친구는 할 수 있지?”윤아는 그제야 반응이 돌아온 듯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당연하지. 너만 괜찮다면 우린 영
‘거절하려는 건가?’‘내가 너무 늦게 왔나?’선우가 생각에 잠길 동안 윤아는 고민을 마쳤는지 고개를 들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냐, 당연히 되지. 다시 친구로 생각해 줘서 고마워.”수현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너무 빨리 찾아오진 않을 거다. 윤아는 자기도 아이들과 함께 잠깐 놀다 오는 거니 금방 돌아올 거라 생각하며 승낙했다.수현이 찾아온다고 해도 집에 사람이 없으면 연락이 오겠지.‘그때 가서 설명하면 돼.’윤아의 대답에 선우는 한시름 놓으며 물었다.“윤이랑 훈이는? 한동안 못 봤는데 나 보고 싶다고는 안 했어?”이제 다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윤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건 나중에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그게 더 서프라이즈일 것 같은데?”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이 윤아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떨어지며 더 눈부시게 빛났고 눈동자도 마치 부서진 별 조각처럼 반짝거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윤아에 대한 이런 감정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선우의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은 늘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평생을 기다리다 겨우 온 기회도...선우의 눈동자에 슬픔이 언뜻 스쳤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그래. 내가 직접 물어봐야지.”“아참, 오늘은 어디 가고 싶은데?”윤아는 그제야 오늘의 일정을 물었다.“캠핑 어때? 오는 길에 사람 시켜서 텐트도 준비해 놓았어.”캠핑이라는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같이 가겠다고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벌써 사람을 시켜 준비했다니. 윤아가 거절하면 쓸데없는 일을 한 셈일 텐데.“그래. 그리고 얼마 전에 아빠한테서 들었어. 너희 집에서 맞선 알아보고 계신다고?”맞선이라는 말에 움직이던 선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이윽고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응. 할아버지 지시야. 내 짝이 될 여자를 물색 중이라고 하더라고.”“어때? 마음 가는 사람은 있어?”선우는 윤아를 힐끔 봤다. 그녀는 마
선우가 준비할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윤아는 그래도 냉장고에서 먹을만한 식자재를 간단히 준비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쓸 일용품들도 챙기고 있는데 선우가 다가왔다.선우는 그런 윤아를 보며 말했다.“그렇게 많이 챙길 필요 없어. 그때 가서 사면 돼.”“캠핑하러 가서 물건 사기도 번거로우니까 직접 챙겨가려고. 집에도 물건 많은데 더 사면 공간만 차지해.”윤아는 한바탕 말을 쏟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바쁘게 물건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럼 네 화장품이랑 개인용품도 다 챙기지 그래. 가는 길에 화장을 고쳐야 할지도 모르잖아.”“됐어. 캠핑 가는 거지 여행도 아니잖아.”사실은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 윤아는 아이와 함께 가는 장소에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다.두 녀석이 얼굴에 하도 뽀뽀 세례를 하는 바람에 얼굴의 화장품이 아이의 입술에 닿는 걸 될수록 피하려다 보니 화장하는 횟수도 자연스레 줄게 되었다.엄마가 되는 게 어렵다는 말이 정말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선우도 더 말하지 않고 옆에서 윤아를 도와 짐을 정리했다.두 아이는 오랜만에 선우를 만나 신이 났는지 전보다 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밥을 먹을 때 하윤은 아예 선우의 다리 위에 올라타 우유를 마시며 말했다.“선우 아저씨. 왜 그동안 윤이 보러 안 왔어요. 설마 이제 윤이 안 좋아하는 거예요?”선우는 손을 뻗어 하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렇게 왔잖아. 앞으로도 우리 윤이랑 훈이 자주 보러 올 거야.”“진짜요? 윤이 속이면 안 돼요.”“그럼 약속.”둘은 윤아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했다. 큰 손과 작은 손이 꼭 맞닿아있는 걸 보며 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유치하기는.”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윤아는 다시 주방으로 가 아까 하다 말았던 캠핑 준비를 시작했다. 선우가 다시 한번 그럴 필요 없다고 찾아왔지만 윤아는 단호하게 말했다.“시작했는데 끝은 봐야지.”선우는 하는 수
“아니야. 통화 마치면 바로 출발할 거야.”그때 마침 우진이 통화를 마치고 차에 탔기에 윤아도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그렇게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윤아의 곁에 찰싹 붙어있던 두 녀석이 벌써 지쳤는지 눈을 비비며 윤아의 위로 늘어졌다.“엄마. 윤이 졸려...”윤아는 고개를 숙여 하윤의 말랑한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잠꾸러기네? 아까 금방 깼으면서 또 졸려?”하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자 윤아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 다리를 탁탁 치며 말했다.“그럼 더 자.”“나한테 와.”그때, 선우가 손을 뻗어 하윤을 안았다.“차에 타면 졸릴 수 있지. 훈이도 이제 졸릴 수 있으니까 윤이는 내가 안고 있을게.”윤아는 졸린지 눈을 껌뻑이는 훈이를 보고 그의 말이 맞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그래.”하윤은 처음 선우의 품에 안겨본 거였지만 얼마 안 가 바로 깊은 잠이 들었다. 그의 품이 편한지 귀여운 코골이 소리도 내며 단잠에 빠진 모습이었다.그 모습을 보던 윤아는 자기 자식이지만 참 적응력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선우의 예상대로 몇분 지나지 않아 훈이도 졸린다며 윤아의 다리를 베고 잠에 들었다. 윤아는 오늘따라 두 녀석이 조금 이상하다고 여겨졌다.“이상하네. 어젯밤에 잘 못 잤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졸린다는 거지?”“아이들은 원래 차에 타면 졸잖아. 정상이야.”선우가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윤이랑 훈이는 원래 차에 타고 한참은 지나야 졸린다고 하는데, 오늘은 너무 이른 것 같단 말이지.”윤아는 조금 게름찍했지만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잤겠거니 하고 더 생각하지 않았다.아마 그녀가 나간 후에도 몰래 깨어있었던 모양이다.“잘 자면 좋지.”선우가 하윤의 머릿결을 정리해 주며 뒷자리의 담요를 꺼내 덮어주었다.“얌전히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있을 거니까.”“그렇긴 하네.”우진이 뒤쪽에서 담요를 하나 더 꺼내 윤아에게 건넸다.“윤아 아가씨, 이거 덮으세요. 날씨가 습해서 오래 앉아계시면 추우실 거예요.”훈
선우의 뜨거운 손끝이 윤아의 차가운 얼굴에 닿았다. 희고 맑은 피부의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선우의 손끝은 우진이 보는 앞에서 천천히 윤아의 얼굴을 누볐다. 지그시 감은 두 눈, 오똑한 코와 그 옆의 발그레한 볼까지...우진은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황급히 눈을 피했다.그리고 선우의 손끝은 어느새 윤아의 촉촉한 입술에 안착했다. 피부로부터 전해지는 온기와 부드러움은 마치 최고급 셰프가 조리해 낸 푸딩 같았다. 비록 직접 느껴보진 않았지만 손끝만으로도 그 느낌을 상상할 수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늘 간절히 바라오던 여자가 눈앞에 있다.그는 윤아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더 바라봐주길 바랐다. 그녀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눈에 띄는 행동도 해보고 철없이 약 올리기도 했었다.윤아한테 다가갈 수만 있다면 그는 늘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의도와 달리 그는 윤아의 미움을 샀고 그녀가 다른 사람 곁으로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사실이 미치도록 슬펐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래도 진수현 다음으로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란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아예 관심이 없는 것보다 미움이라도 받으면서 윤아의 마음속에 남아있고 싶었다.그리고 그렇게 했고.수현과 소영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을 때, 수현이 생명의 은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애정이라 착각하도록 바람을 잡은 것도 다름 아닌 선우였다.성인식 때도 그는 나무 뒤로 숨은 윤아의 치마를 발견했었다.윤아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도 수현이 그런 말을 하도록 유도한 거였다.윤아가 수현에 대한 마음을 접길 바라면서.그러다 집에 변고가 생기며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하는 바람에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이상 예측할 수 없게 되었지만 수현의 맹세를 들은 소영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윤아도 그 말을 들었으니 적어도 집안일이 모두 해결되기까지 몇 년 동안은 두 사람 사이에 진전이 있긴 힘들거라고 예상했었다.그러나 변수는 늘 존재했다.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