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뚜...귓가에 들려오는 신호음 소리는 마치 가시처럼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한순간 심윤아는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자신의 물건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왔기 때문에 진수현이 집에 없을 때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심윤아는 주현아에게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했다.“너 어제저녁에 이미 나한테 말했었잖아. 나 차도 있고 다른 친구들도 불렀어. 이제 짐 옮길 때 우리가 도와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잘 챙겨.”주현아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현아야, 고마워.”“아이고, 우리 사이에 고맙긴.”“네 친구들까지 부를 필요는 없어. 짐이 많지 않아서 나 혼자 가도 돼.”그 말을 듣고 주현아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말했다.“너 혼자 간다고? 안돼. 나랑 같이 가. 너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래도 내가 오랫동안 생활했던 곳이고 우리 두 집안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거야?”심윤아의 말을 듣자 주현아는 갑자기 자신이 지나치게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씨 가문도 명망이 있는 집안이라 그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정말 내가 같이 안 가도 되겠어?”“진짜 괜찮아. 어차피 얼마 없어. 나 먼저 병원 갔다가 물건 가지고 올 거야.”“그래... 그럼 혼자 조심해. 어제처럼 그러지 말고.”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심윤아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고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윤아는 병원으로 출발했다.어제 병원에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에 김선월은 그녀를 보자마자 어제 어디 갔었냐고 물었다.심윤아는 할머니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어제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못 왔어요.”김선월도 심윤아에게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자신만의 프라이버시가 있어서 어떤 건 잘 말하려고 하지
심윤아는 제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뭔가를 다짐한 듯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돌아서자마자 병실 입구에 서 있는 진수현을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잠시 뒤 심윤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할머니 뵈러 왔어...”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호칭을 바꾸었다.“어르신 뵈러 온 거야.”진수현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마치 그녀를 못 본 것처럼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그가 지나고 간 공기 속에 마치 얼음 부스러기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심윤아는 제 자리에 십여 초 동안 서 있다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떠났다.심윤아가 떠난 후 진수현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심윤아는 진씨 가문 저택으로 가서 짐을 챙겼다.그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사와 도우미들이 재빨리 다가와 가족을 만난 것처럼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사모님, 드디어 돌아오셨네요.”“사모님, 어제는 어디 가셔서 밤새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엄청 보고 싶었어요.”“그래요, 사모님. 집으로 돌아오셔서 참 좋네요. 배고프진 않으세요? 뭐 드릴까요?”예전에도 그들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자신을 대했었던가?갑작스러운 환영에 심윤아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심윤아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자신의 물건을 챙겼다.정리할 물건은 많지 않았다. 평소에 갖고 다니는 물건 외에 옷 같은 것들은 따로 챙기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려갔다가 도우미들에게 들킬 것이다.오늘 이선희와 진수현 두 사람 다 집에 있지 않아서 심윤아는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재빨리 떠났다.도우미들은 일 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사모님이 오늘 돌아오신 건 대표님과 화해했다는 뜻 아닌가?”“맞을걸? 부부니까 싸우기도 하고 바로 화해하기도 하는 거지.”그
집사의 물음에 심윤아는 얼어붙었다.그녀가 어떻게 대답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갑자기 집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젯밤 대표님께서 집에 돌아오신 뒤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심윤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제 와서 그런 걸 알려줘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대표님과 사모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오랜 시간 함께 하셨으니 잘 해결할 수 있으시면...”심윤아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해결 못 해요.”그녀의 말을 듣고 집사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잠시 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사모님이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 내리셨다면 앞으로 순조롭기를 기원해 드릴 수밖에 없네요.”원래 심윤아의 표정은 심정이 복잡해 보였는데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다.“아저씨, 고맙습니다. 앞으로 꼭 건강 잘 챙기시고요. 할머니도... 신경 써서 잘 돌보아주시길 바랍니다.”집사는 엄숙하고도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저는 진씨 집안의 집사입니다. 사모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겁니다.”“맞아요. 아저씨는 늘 책임감이 넘치는 분이시죠.”게다가 집사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먼저 알아차리곤 한다.“사모님, 잘 지내세요.”심윤아는 작은 가방을 들고 진씨 가문 저택을 떠나기 직전에 잠시 멈추어 2년 동안 생활했던 이곳을 둘러보았다.사실 처음에 여기로 왔을 땐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예상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 지났다.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거짓 결혼을 하기 전에 그녀와 진수현은 친구였고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터라 서로 돕는 막역한 사이였다.하지만 이제 처참한 이혼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남이다.그래도... 심윤아는 가장 필요할 때 진수현이 나타나 자신을 도운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심윤아는 돌아서서 떠났고 그녀의 가녀린
강소영은 황주연을 만나기를 거부했고 그녀가 집으로 쳐들어가면 누군가가 그녀를 때리며 내쫓았다.황주연은 그야말로 죽기보다 못한 날들을 살고 있었다.그녀의 어머니는 너무 심한 압박감에 시달려 수면제를 삼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동생이 이를 발견하고 제때 말렸다.마침내 황주연의 동생은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말했다.“누나, 내가 이렇게 빌게. 도대체 누굴 건드렸는지 모르겠지만 가서 그만하라고 부탁하면 안 돼?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가족 다 같이 강에 뛰어들지도 몰라.”결국 그녀의 어머니도 무릎을 꿇으며 그녀에게 빌었다.“주연아, 예전에 우리 가족이 네가 여자라는 이유로 못해주지는 않았잖아. 집안이 이 꼴이 되었는데 네가 누구한테 밉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른 가서 사과해. 우리 가족 더 이상 이렇게 못 버텨.”누구한테 밉보였냐고?황주연은 당연히 자신이 누굴 건드렸는지 잘 알고 있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마침내 진씨 가문 별장으로 찾아갔다.황주연은 진씨 가문 별장 대문 밖에서 눈앞에 있는 높은 건물을 쳐다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집안이 망한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휴대폰이 진동해서 꺼내 보니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누군가가 강소영에게 오후에 같이 쇼핑하러 가자고 했다.그리고 강소영은 곧 흔쾌히 좋다고 답장 보냈다.황주연은 자신과 강소영의 채팅기록을 뒤져보자 두 사람의 채팅은 황주연이 연이어 문자를 보냈지만 강소영은 아무 답장 없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어떻게 부탁해도 강소영은 냉랭하게 무시했다.황주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강소영이 보냈던 메시지를 다시 삭제한 것을 보았다.이에 황주연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비웃었다.강소영은 황주연이 아직 단톡방에 있는 걸 잊은 듯한데, 그녀가 볼까 봐 다급히 삭제한 것이 아닐까?원래 황주연은 강소영이 자신을 만나지 않는 데에 다른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녀의 가족들이 화가 나 못 만나게 했을 수도 있다.그런데
이 한마디에 자극당한 소영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녀의 침묵은 주연을 만족시켰다."왜 더 말하지 않아, 소영아? 네가 이 일을 토로한다면, 수현 씨는 어떻게 반응할까?" “주연아!”소영은 순식간에 흥분했다. 심지어 그녀가 밖으로 걸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수 있었다. 그녀는 주연을 달래며 말했다. "무슨 일이든 우리는 잘 상의해 보자. 너 혼자 충동하지 말아줘, 응?"이를 들은 주연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로 맞추었다. 소영은 그녀가 이 일을 수현에게 말하면 무서워했다. 그렇구나. “나는 충동적이지 않아, 소영아. 나는 단지 수현 씨가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뿐이야. 모든 사람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지, 그렇지 않아?”“주연아...”소영의 걸음 소리가 멈췄고, 목소리는 약간 고통스러웠다.“최근 일로 나한테 화가 났어? 미안해, 널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야. 그냥 아빠가 명령을 내렸어, 너와의 교류를 금지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 용돈을 모두 압수하겠다고.”“그래서, 정말 나랑 만나지 않을 거야? 네가 나에게 했던 말 기억나?”주연은 코웃음을 쳤다.“언젠가 진씨 집안 사모님이 되면, 나에게 보답할 거라고 했잖아. 지금 넌 이렇게 보답하니?”“미안해, 보답하려고 했어. 하지만...”“좋아, 그럼 지금 보답해. 나한테 4억 원을 줘. 지금 당장 송금해.”“뭐라고? 4억?”“왜? 너무 많다고 생각해?" 주연은 두 걸음을 내디디며, 진씨 집안의 대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너희 강씨 집안이 진씨 집안 큰 배에 올라탄 이후로 4억 정도는 너에게 매우 적은 금액이지 않아?""주연아,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이 일은…" 그러나 주연은 매우 흥분되어 전혀 그녀의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나는 4억 원을 원해. 5분 안에 송금하지 않으면 나는 이 집에 들어가서 심윤아 일을 말할 거야." 이 말을 하고 나서, 주연은 소영의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별장 대문 앞에 서 있었는데 조금 전 소영이
소영은 주연이 돈을 받은 후에 감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부드럽게 주연에게 속삭였다. "주연아, 지금 진씨 집안 대문에 있니? 내가 갈게, 응?""좋아." 주연은 당장 대답했다."나도 오랜만에 네가 보고 싶었어.""그러면 거기서 기다려줘, 내가 금방 갈게." 주연은 서늘한 곳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소영의 차가 도착했다. 차문이 열리자마자 소영은 빠르게 주연의 앞으로 달려가 조심스러운 미소를 보였다.그리고 주연의 뒤에 있는 몇 걸음 떨어진 곳의 진씨 저택 대문을 살펴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들어가지 않았지?"주연은 앞의 소영을 살펴보았다. 정성스레 차려입은 그녀와 비교하면 이 며칠 동안 자신은 마치 가난뱅이처럼 보였다. 그녀 때문에 자신이 이런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에 주연의 마음속의 원망은 더 심해졌다."왜, 소영 아가씨께선 내가 들어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나 봐?" 소영의 표정은 순간 변했다. 그녀는 또 강제로 미소를 지어내며 말했다."주연아, 더 이상 화내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었어.""그래. 전에는 어쩔 수 없었는데, 지금은 또 왜 나왔어?" 소영은 주연이 콧대를 빳빳이 세우면서 밀어붙이는 것을 보자 정말 갈기갈기 찢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점을 그녀가 손에 쥐고 있었다.만약 그녀가 안으로 달려가서 수현에게 이야기하거나 대문 앞에서 무슨 말이라도 하면, 모든 것은 끝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소영은 이런 괴로움을 참아내고 미소를 계속 지었다. "우리 차에서 얘기하자, 응?”그러나 주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영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소영은 굴욕을 참아내며 주연의 손을 잡고는 말했다. "네 집안도 최근에 안 좋은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 차에서 얘기해 보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 어때?"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떠올리며 주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연를 태운 후, 소영은 진씨 집안 대문을 한 눈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최근
"오해야." 소영은 주연의 손을 잡았는데 마치 좋은 친구 같은 모습을 했다. "내가 왜 널 처리하겠어? 원래 너한테 그런 일이 일어난 후에 도와주려고 했어. 근데 수현 씨가 계속해서 나를 무시하는 바람에 마음이 복잡해져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이 말에 주연은 포인트를 잡았다."수현 씨가 널 무시하니?" 설마? 수현이 어떻게 그녀를 무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수현의 생명의 은인인데..."응, 수현 씨가 거의 나를 안 챙겨주고 있어. 수현 씨가 더 이상 날 원하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돼."원래 주연은 매우 득의양양했다. 윤아의 임신으로 소영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소식을 듣자 주연의 안색은 갑자기 변했다.만약 수현이 소영을 진짜 무시한다면, 또 그와 소영 사이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면.그렇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소영의 약점은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겨우 이것으로 소영을 협박해 4억을 얻었다.그럴 수가."둘은 아직도 이혼하지 않았어?"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몰라. 연락이 안 되거든.""그럼 집씨 저택에 가서 수현 씨를 찾아보지 않을래?" 주연이 갑자기 제안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수현 씨를 찾아가지 않았다간 정말 심윤아가 진씨 집안 사모님으로 될 수도 있어. 그때 가서 후회할 거야?"이 말을 듣고, 소영은 놀란 표정을 짓다."난..." 원래 수현을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수현을 화나게 할까 봐 두려웠다."실은 회사에 가서 그를 찾아봤어. 하지만 수현 씨는 지금 날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리고 회사에 자주 없더라.""자주 없다는 건 그래도 있을 때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 내가 만약 너라면 분명 그곳에서 기다릴 거야." 소영은 말이 없었다.주연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뭘 생각해? 너는 수현 씨 생명의 은인이야. 널 함부로 대하진 못할 거야."주연의 말에 소영은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망가지지 않으면 새로
나중에 집에는 윤아만의 전용 공간이 생겼는데 그곳엔 주로 수현이 그녀에게 선물한 물건들을 보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이번 떠날 때 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반지마저 침실에 남겨두었다.심씨 집안이 파산했을 때, 그녀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모든 물건들은 수현이마련해준 것이었다.떠날 때 당연히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어떻게 그래. 비록 그냥 물건이긴 하지만 돈을 주고 산 거잖아." 현아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말에 윤아는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 그럼 미리 알았다면 좀 값어치 있는 것들을 더 가져갈걸. 적어도 나중에 돈으로 바꿀 수 있었을 텐데."이 말을 듣자, 현아는 곧 생각을 바꿨다. "됐다, 됐어. 어쨌든 떠날 거니까 옛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너도 참, 내가 조금 아쉬워했을 뿐인데, 어떻게 내 앞에서 농담할 수 있어?"윤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며. 그런데 왜 농담할 수 없어?" "맞긴 한 데...”현아는 아직도 어제 윤아가 펑펑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우리는 친구니까 내 앞에서 강한 척 안 해도 돼. 울고 싶으면 울어."현아가 말하자, 윤아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현아야,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아. 어제 슬픈 일들은 이미 지나갔어. 우리는 앞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해. 시간은 흐르고, 지구는 회전하며,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해. 게다가 앞으로 아기를 키워야 하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슬픔에 쓸 여유가 없을 거야."현아는 원래 더 물어보려 했지만 친구가 간만에 마음을 다잡았는데 상처를 더 깊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낙관적인 척해도, 이렇게 유지하다 보면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진짜로 행복해질 거다. 이 생각에 현아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철학가님, 앞으로는 당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