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진수현은 성큼성큼 병동을 향해 걸어갔다.강소영의 말을 들은 후 이성민을 잡기 위해 부랴부랴 아래층으로 내려온 친구들은 진수현의 등장에 하나같이 걸음을 멈췄다.“수현 씨... 소영이가...”진수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찼고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심윤아와의 다툼으로 기분이 최악이었던 진수현은 표정마저 살벌했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감히 그를 막거나 뭐라 할 수도 없었다.진수현은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한 듯 고개 돌려 그들 중 한 명을 바라봤다.“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죠?”사람들 속에 몸을 숨겼던 황주연은 자신을 향한 그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진수현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친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수현 씨.”마침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강소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맨발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강소영의 모습이 보였다. 비록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마에 감긴 붕대에서 흘러나오는 새빨간 피와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바심 나게 한다.“소영아, 왜 내려왔어? 의사 선생님이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잖아.”강소영을 발견한 다른 친구들은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갔고 오직 황주연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줄곧 싸늘함을 유지하던 진수현은 강소영이 다가오고, 그녀의 이마에 난 핏자국을 보고 나서야 조금 따뜻해졌다.“왜 내려왔어?” 강소영은 황주연을 힐끗 쳐다보고선 당황함을 드러내며 말했다.“방금 전에 친구들이 이 조수님이랑 시비가 붙었는데 이 조수님이 홧김에 떠났다고 해서 내려와 봤어. 친구들 대신해서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강소영이 눈치를 주자 황주연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황주연이 떠나자마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수현 씨, 미안해. 날 걱정하는 마음에 이 조수님을 병원까지 보냈을 텐데 친구들이 무례하
그 여자는 눈물이 가득 차올라도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는 사람이고 두 눈이 빨개질 정도로 이 악물고 참다가 한계가 느껴지면 뒤돌아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다.진수현은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또한 어렸을 땐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펑펑 울었고 지금의 강소영처럼 옷깃을 붙잡고 애처롭게 바라보며 코를 훌쩍였다.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모든 걸 숨겼다.진수현은 그제야 왜 가슴 한구석이 텅 빈듯한 느낌이 드는지 알게 됐다. 그와 심윤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고 심윤아는 더 이상 그를 아무 감정이나 공유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수현 씨... 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야?”강소영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신 차린 진수현은 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그 말을 들은 강소영은 멈칫했다.“뭐가?”진수현은 시선을 위로 올리면서 가볍게 물었다.“상처. 어떻게 된 일이냐고.”분명 친구들이 심윤아가 밀어서 다친 거라고 얘기했을 텐데 갑자기 상처를 들먹이는 진수현이 의아했다.그녀는 최근 들어 진수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잠깐 나갔다 온 뒤로 기분이 눈에 띄게 나빠진 그의 모습을 보며 강소영은 잘됐다 싶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눈치를 보며 답했다.“오늘 밤에 있었던 일로 윤아를 탓하지는 마.”“응?”“흉터가 남는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잖아. 내가 중심을 조금 더 잘 잡았더라면 넘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다 내 탓이야.”진수현은 눈을 내리깔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인지 모르겠으나 강소영은 그런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수현 씨?”“그러니까 네 말은 윤아가 널 밀었다는 거야?”진수현이 이렇게 꼬치꼬치 캐 묻을 줄 몰랐던 강소영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강소영을 대신해서 말했다.“수현 씨, 심윤아가 밀지 않았더라면 소영이가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거예요.”그 말
예상치 못한 진수현의 말에 깜짝 놀란 강소영은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불찰인 걸 알면 다음부터 조심하라니?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그러니까 넘어진 게 다 내 탓이고 심윤아랑은 아무 관계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심윤아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도 없는 거네?’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진수현이 왜 잠깐 나갔다가 온 후로 생각이 바뀌었냐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심윤아가 옆에서 이간질한 게 틀림없다.강소영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진수현의 품에 안겨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미안해. 방금 했던 말은 꼭 기억할게. 의사 선생님이 흉터가 남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많이 혼란스럽고 기분이 우울해. 아까 어디 갔었어? 수현 씨, 설마 이마에 흉터가 생겼다고 날 버리는 거야? 못생겨서?”갑작스럽게 품에 안긴 강소영 때문에 기분 잡친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밀어내려고 했다.그러나 강소영은 있는 힘껏 그를 껴안더니 작은 소리로 울먹이며 물었다.“어릴 때 내가 왜 목숨까지 걸고 수현 씨 구한 줄 알아?”어린 시절의 일은 진수현의 약점이었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했다.강소영은 눈물이 그렁한 채로 얼굴을 품에 파묻더니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잃고 싶지 않으니까... 수현 씨, 제발 날 떠나지 마. 응?”진수현은 고개를 숙여 눈앞에 있는 강소영을 바라봤다.강에 빠져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을 때 생사를 가리지 않고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강소영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졌다. 보통 사람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아니었기에 얼마나 그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고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 나무랄 수가 없었다.그 기억이 떠오른 진수현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토닥였다.“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어.”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진 걸 알아차린 강소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역시나 그녀의 유일한 비장의 무기답게 목숨 구해준
가린다고 해도 흉터가 생기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의사가 떠난 후 강소영은 진수현을 바라보며 칭얼거렸다.“수현 씨, 흉터가 남을 거라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우울하네. 나중에 흉터가 생기면 못생겨지겠지? 못생겨졌다고 날 버리면 안 돼.”고민도 없이 대답해야 할 말인데 차마 입 밖으로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일단 쉬면서 치료부터 받아.”원하는 답을 듣지 못해 실망한 강소영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수현이 심윤아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었다.뭐가 됐든 강소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 생각이 아예 없었고 생명의 은인이라는 카드를 잘 이용하여 진수현의 마음을 사로잡기로 다짐했다....심윤아는 잠에서 깨자마자 어지러움을 느껴 잠깐 누워있다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어 곧장 세면대에 엎드려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마침내 온몸에 힘이 풀리는 듯 화장실 문에 기대어 앉았다.왜 요즘 따라 헛구역질이 심한지 알 수 없었다. 심윤아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그렇게 앉아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후 따뜻한 물 몇 모금 마신 뒤 절친 주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현아는 최근에 헛구역질이 심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걱정하며 말했다.“연차쓰고 나랑 같이 병원 가자.”“응. 그럴 생각이야.”전화를 끊은 심윤아는 연차 신청 때문에 진수현에게 연락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임연수에게 문자를 보냈고 오늘 개인적인 사정으로 출근 못하니 진수현이 출근하면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같은 시각 임연수는 막 일어나서 하품하고 있었는데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윤아 님이 왜 이걸 대신 전해달라고 하는 거지? 대표님한테 직접 얘기해도 될텐데... 설마 또 강소영 그 여자 때문인가?”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임연수는 화를 내며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대표님 진짜 바람둥이네! 윤아 님을 괴롭히다니, 절
병원에 도착한 후 주현아는 접수번호를 뽑고 비용을 지불하며 바삐 돌아다녔다.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심윤아는 구석에 있는 의자에 웅크리고 있었고 주현아가 모든 일을 마친 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심윤아의 모습에 주현아는 걱정이 앞섰다.“괜찮아? 임신했는데 왜 몸이 더 아픈 것 같지?”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뻗어 심윤아의 이마를 만졌고 열이 없는 걸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열이 없다면 입덧으로 인한 불편함이 가능성이 컸기에 자연스레 다른 문제도 배제할 수 있다.심윤아는 초조한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쓰다듬었다.“다른 건 다 괜찮은데 계속 졸려. 입덧이 심할 때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데 계속 단 게 땡겨.”“단 걸 먹고 싶다고? 단 음식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을 텐데 너 같은 임산부는 아예 먹으면 안될걸? 이따가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자.”그녀의 제안에 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주현아는 어떤 제안을 해도 얌전하게 다 동의하는 심윤아를 보면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그때의 심윤아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기쁜척했지만 외로움이 느껴졌고 말을 잘 듣는 것 같아도 숨기고만 싶은 우울함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였다.원래 이런 모든 건 진수현이 해야 하는 것들인데... 그는 지금 병원에서 다른 여자를 돌보고 있다.그 생각에 목이 메어온 주현아는 저도 모르게 심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을게.”‘빌어먹을 자식,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주현아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진수현을 저주했다.두 사람은 병원에서 한 시간 가까이 검사를 받았고 병원에서 나오자 어느덧 점심이었다.컨디션이 안 좋은 데다가 병원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검사까지 받으니 심윤아의 안색은 말이 아니었다.주현아는 그녀의 팔을 부축하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아무 문제 없어서 다행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주현아는 그녀가 마음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진수현의 곁을 떠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주현아는 식사 도중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런 질문하는 게 실례인 건 아는데... 할머님은 언제쯤 수술받으셔? 요양원이 아니라 집에 계신 거지?”“응.”심윤아는 주현아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전혀 개의치 않았고 절친에게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집에서 요양 중인데 정확한 수술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지난번 할머니가 쓰러진 일 때문에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할머니가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하셨거든. 2차 스트레스로 이어지지 않도록 시간을 주는 게 좋다고 하셨어.”그 말을 듣고 있던 주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이 일은 또 미뤄야 한다는 거네?”“응. 할머니의 병세가 중요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심윤아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입장에서 고려하기보다 주현아는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친구의 입장에서는 심윤아가 제일 중요했다.주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걱정거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강소영이 너한테 안 좋은 일 저지를까 봐 걱정돼.”어젯밤에 일어난 일만으로도 강소영이 얼마나 심윤아를 원망하고 미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심윤아가 진수현옆에 2년이나 있었으니 원망의 감정이 생긴 걸 어느정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주현아는 이런 감정들이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심윤아가 내연녀도 아니고, 강소영과 진수현이 만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악감정을 가지고 있냐는 말이다.생각할수록 화가 점점 치밀어 오른 그녀는 행동마저 거칠어졌다.“주현아, 나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사리 분별 능력은 나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네가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있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 모든 사람이 인성 바르다면 어젯밤 같은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강소영은 지금 어때?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얼굴 망가진 거 아니야?”이 말을 꺼내자 심윤아는 저도 모르게 눈빛이 어두워졌고 말투마저 싸늘하게 변했다.“망가지는
예전에 강소영과 계약을 맺은 건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였다.하지만 현재의 분위기로 봐서는 이번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될 건 분명했고 심윤아가 강소영을 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실이 뭐가 됐든 강소영은 모든 걸 심윤아에게 떠넘길 테니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건 물 건너 간 거나 다름없다.가장 중요한 건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강소영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는 것이다.처음에는 강소영이 연약한 척 연기하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욕심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상상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연약한 겉모습 뒤에는 남을 모함하려는 사악한 마음이 숨어있었다.온갖 생각이 떠오른 심윤아는 주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스스로 주의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봐봐, 지금도 날 해치려다가 실패했잖아? 오히려 화를 입었으니 쌤통이지 뭐.”“하긴.”주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이 한 짓만큼 돌려받는 걸 보니까 속이 통쾌하긴 하네.”“맞아.”말이 끝나는 동시에 종업원이 디저트를 심윤아에게 건네줬고 그 모습을 본 주현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심윤아, 너 내가 안 보는 틈타서 몰래 디저트 하나 더 시켰지? 의사 선생님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거야?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잖아.”“알아. 몇 입만 더 먹을게.”“안돼. 너 아까도 일 인분 다 먹었어.”“그럼 한입만.”심윤아는 흥정을 시도했다.“안돼! 절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니까 포기해.”...점심을 먹고 나서 두 사람은 백화점으로 향해 밤늦게까지 쇼핑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방해금지 모드를 켰던 심윤아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그것을 껐다. 곧바로 임연수의 카톡이 쏟아졌는데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일이라 하나씩 읽어보며 정성스레 답장을 보냈고 그 후 진수현의 카톡도 발견했다.첫 번째 카톡.「어디야?」두 번째 카톡은 30분 정도 지나서 보내온 것인데 아마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이런
“그렇군요. 그럼 사모님, 전화는 왜 안 받으셨어요? 사모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도련님이 미칠 지경이었어요.”‘미칠 지경?’심윤아의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게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눈빛엔 비아냥거림이 스쳤다. ‘단어 사용 참...’만약 박범수가 전부터 항상 진수현의 좋은 말만 하지 않았다면 심윤아는 아마 그 말이 진짜라고 믿어버렸을 것이다. ‘전화도 아마 강소영의 병실에서 한 거겠지.’“어젯밤 잠들기 전에 무음 모드로 해놨었거든요. 일어나서는 그걸 깜빡해서요.”심윤아가 나지막이 해명했다. 그 말을 들은 박범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범수가 손에 들린 쇼핑백을 들어주려고 하자 심윤아가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마침 올라가서 정리를 하려던 참이라, 제가 들고 올라가면 돼요.”“그럼 사모님, 제가 위층으로 가져다드릴게요.”“괜찮아요. 제가 하면 돼요.”심윤아가 완곡하게 박범수의 호의를 거절하고 직접 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범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막 진수현에게 전화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도련님. 네네. 사모님께서 막 돌아오셨어요.”계단을 오르던 심윤아의 귓가로 진수현에게 보고하는 박범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정말 관심이 많네. 수시로 전화해 확인하다니. 차라리 일단 병실에서 좀 나오지 그래?’심윤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봉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짐을 정리해야 했기에 심윤아는 샤워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먼저 봉투를 열어 할머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먼저 드리고 돌아와 다른 걸 정리했다. 사실 쇼핑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임신하기 전 심윤아의 옷은 전부 몸매가 잘 드러나는 것들이라, 그녀는 오버사이즈의 옷을 사고 싶었다. 아직 몇 개월 되지 않아 원래 있던 옷을 입어도 티가 나지 않았지만 미리 준비해야했다. 지금부터 천천히 스타일을 바꿔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다. 다행히도 지금은 겨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