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걘 정말 네 원수야, 걔만 나타나면 넌 또 이렇게 다치잖아.”탁유미 엄마는 분에 가득 차서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진짜 걔 말대로 너 혼자 찌른 거야?”“네.”탁유미는 빠르게 인정했다.“네, 엄마, 제가 그런 거예요.”“하지만 너...”“나보고 아이를 낳아달라는 거예요.”탁유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우습죠? 그땐 저한테 그렇게 대해놓고 지금 저한테 복수하려는 방식이 뜻밖에도 아이를 낳으라는 거예요.”“걔 설마 너한테 아직 감정이 남아있는 거 아니냐? 필경 너희들 전에는...”“엄마!”탁유미는 엄마의 부질없는 환상을 깨버렸다.“그가 나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한 건 공수진이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단지 날 도구로 여겼을 뿐이에요. 만약 나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있다면 당시 나를 감옥에 보내지도 않았겠죠.”그 말을 들은 탁유미 엄마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죄야, 네 아버지가 지은 죄를 지금 너 보고 갚으라니! 이경빈이 어떻게 너한테 그래, 네가 걔를 위해...”“엄마, 됐어요.”탁유미는 엄마의 말을 가로챘다. 과거의 모든 것은 그녀한테는 악몽일 뿐이었다. 그저 그녀가 잊으려고 애쓰는 악몽이었다.“지금 이시간에 병원에 오시면 윤이는 어떡해요?”“집주인보고 잠시 봐달라고 했어. 이경빈이 볼까 봐 병원은 데리고 올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 이경빈이 갔으니 내가 윤이를 병원에 데리고 오는 게 낫겠어, 널 돌보는 것도 더 편하고.”“괜찮아요, 저... 저 병원에서 간병인을 찾으면 돼요. 어쨌든 병원에서 밥은 다 챙겨주니까, 윤이를 병원에 데려오지 마세요. 내가 다쳐서 입원한 것도 윤이한텐 말하지 마세요.”그녀는 아들이 이경빈에게 들킬 가능성을 무릅쓸 수는 없었다.“하지만 너 너무 심하게 다쳤...”“엄마, 나 잘 살게. 엄마 노후도 챙겨줘야지, 윤이 크는 것도 봐야지.”탁유미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담은 채 말했다. 그녀는 엄마가 자기 때문에 걱정하는 게 싫었다.엄마가 그녀를 위해 했던 고생은 이미 충분했다.
임유진은 3일 후 로펌으로부터 면접이 통과되었다는 통지를 전화로 받았다. 차 변호사는 그녀를 비서로 받아들였다.비록 로펌 비서일 뿐이라고 해도 그녀가 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의미했다.임유진은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어 좋은 소식을 전했다. 한지영은 진심으로 친구를 위해 함께 기뻐해 줬다.“너무 잘 됐다. 유진아, 잘해! 나중에 우리 변호사님께서 사주는 밥도 얻어먹어야지.”한지영은 덩달아 기뻐했다.임유진은 그녀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졌다.“변호사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있어? 첫 달 월급만 받으면 크게 한턱쏠게.”“약속한 거다!”한지영은 이어 말했다.“기다릴게.”“그래.”임유진은 쿨하게 대답했다. 며칠간 우울했던 기분은 지금 이 순간에 다 풀려버렸다.인생은 결국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그녀는 상처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지혁에 대한 감정을 모두 내려놓은 채 그저 터무니없는 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전화를 마친 임유진은 여전히 자신의 핸드폰을 보며 연락처를 펼쳤다. 연락처에는 혁이라는 이름이 적힌 번호가 두 개 저장되어 있었다.하나는 그때 그녀가 그에게 핸드폰을 사주며 만들었던 유심카드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평소에 자주 쓰던 번호였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화면을 터치하며 두 개의 번호를 일일이 삭제했다.마치 둘 사이의 마지막 관계를 끊어내는 것 같았다.“강지혁, 잊을게.”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게 그녀를 감싸며 공기 속으로 퍼졌다.퇴근할 때, 백연신은 한지영을 데리러 왔다. 디자인 스튜디오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한지영이 운이 좋게 백선 그룹의 회장과 사귄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백연신이 그녀를 데리러 올 때면 스튜디오의 보기 드문 광경이기도 했다.심지어 일부러 꾸민 채 백연신 앞에서 얼굴을 잠깐 비치며 혹시라도 눈에 띄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품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필경 한지영은 여신까지는 아니었고 기껏해야 깔끔하고 단정했을 뿐이다.많은 사람이 백연신이 한지
“당신은 내가 아니잖아...”그녀는 무심결에 부인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는 마치 자조와 암울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한지영은 가슴이 답답해 났다. 그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고 마치 그에게 무슨 빚이라도 진 것 같았다.차 안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왜? 계속 말해봐.”그제야 이 적막을 깨는 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그녀는 혼자 켕겨서 말했다.‘제발, 뭐가 찔리는데!’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그들은 진짜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둘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다만 때로는 그의 몇 마디 말이... 그녀를 약간 착각하게 했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그와 같은 남자는 못 만나본 여자가 없었다.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아니면 지금 그의 행동이나 말은 단지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그를 사랑하게 되면 그는 아마도 그녀를 차버릴 것이다. 마치 그때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을 때와 같이 말이다.“오늘 어디 가서 밥 먹을래?”그는 이내 말을 돌렸다.“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가죠. 이따 먹어요. 먼저 쇼핑하면서 유진에게 옷 몇벌 사주려고요. 유진이가 오늘 새 직장을 구했대요. 하지만 유진의 옷은 모두 몇 년 전에 입던 옷들이라 공식적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요.”한지영은 말을 이어갔다.강지혁이 사준 옷들을 유진은 한 벌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유진의 옷들은 모두 그해 감옥에 가기 전의 옷이었다. 비록 어떤 옷은 질이 좋았지만 유행도 지났고 색도 죄다 빠졌다.백연신은 한편으로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너 임유진한테는 엄청 잘해주더라, 임유진의 일이라면 맘에 항상 두고. 언제면 내 일을 그렇게 맘에 두고 있을지 모르겠네.”“흠...흠흠...”
“그저 일반인이에요... 옛날엔 친구였는데 지금은 연락 안 해요.”임유진은 씁쓸해서 말했다.차 변호사는 뭔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그 친구에게 잘해야겠네요.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유진 씨는 지금 변호사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임유진은 차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방금 새 상사가 그녀를 도와 사건을 뒤집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꼬치꼬치 캐 묻을까 봐 걱정이었다.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임유진은 일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다.처음 입사했을 때, 그녀도 반년 동안 비서로 일했던지라 지금 다시 비서 일을 하니 오히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일이 좀 사소하고 잡다하긴 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정한나는 그녀의 앞에서 어슬렁거리더니 강지혁에 관한 일을 슬쩍 물었지만 임유진은 덤덤하게 그 물음들을 비껴갔다.퇴근 시간이 되자, 임유진은 막 퇴근하려는데 마침 장한나의 소리가 들렸다.“오늘 유진 씨가 새로 입사했는데 우리 유진 씨를 위해 환영하는 겸 회식하는 게 어때요?”사람들은 이내 맞장구를 쳤다.“좋아요. 새 동료의 입사를 축하해요.”“그러게요. 어쩌다 여자 동료가 입사했는데 축하해야죠!”“그럼 다 같이 가시죠.”임유진은 상황을 보고 거절하기도 무안했다. 게다가 필경 그녀가 처음 입사했기 때문에 인간관계도 가꾸어야 했다. 만약 출근 첫날부터 어울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계속 함께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었다.그리고 변호사 같은 직업은 인맥이 중요하다.비록 장한나가 제기한 제안이었고 분명히 호의는 아니었지만 임유진은 이 상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장한나가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도 생각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회식하자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임유진이 지원한 직책은 비서인지라 회식에 참석하는 것은 사무소에서 경력이 짧은 변호사거나 임유진과 마찬가지로 비서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만 합쳐도 열 명쯤 되었다.다만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임유진은 그릴앤바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자, 우리 새로 입사한 임유진 비서를 위하여!”직장동료는 잔을 들고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회식 자리의 주인공인 임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이 술을 권하는 대상이었다.임유진의 주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몇 잔만 마셨는데도 약간 어질어질했다.그녀는 동료들이 술을 권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며 화장실에 갔다.화장실에서 임유진은 세면대 옆에 기댄 채 술기운 때문에 뜨거워진 얼굴을 물로 헹궜다.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이마와 볼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빨개진 두 볼, 앙증맞은 코, 그리고 평소보다 더 붉은 입술.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은 마치 작은 부채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자신의 속눈썹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연하게 화장할 때면 마스카라도 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강지혁을 만난 후, 그녀는 남자의 속눈썹도 그렇게 예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혁이의 속눈썹은 엄청 예뻤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속눈썹이 매번 흔들릴 때마다 사람을 설레게 했다. 그녀로 하여금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했다...세상에, 그녀는 또 그의 생각을 했다.임유진은 머리를 힘껏 저으며 다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이 세상에는 더 이상 혁이는 없다. 다만 강지혁만 있을 뿐이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찬물로 세수했는데도 머리가 어지럽고 조금 있으면 더 취할 것만 같았다.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지영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 너머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어딨어? 집에 없던데?”“너... 나 찾으러 갔어?”임유진은 입을 열었다.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술에 취해 혀가 꼬였다.“응, 근데 너 목소리 왜 그래?”한지영은 이내 되물었다.“술 좀 마셨어.”“술? 어디서?”한지영은 갑자기 긴장되었다. 필경 유진이는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깐.“그릴앤바.”임유진은 대답했다
임유진은 강지혁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하려는 걸 느끼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렇게 막 몸을 돌려 옆으로 지나가려는데 마침 그녀 쪽으로 다가온 누군가와 부딪혀버리고 말았다.“죄송합니다!”임유진은 얼른 그에게 사과했다.“앞을 똑바로 안 보고 다녀?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부딪혀?!”그녀가 부딪힌 남자는 술에 잔뜩 취했는지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지금, 이 상황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과뿐이었다.그때 옆으로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그녀는 단번에 그게 강지혁이라는 걸 알아챘다.낯선 사람한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여줘 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창피함과 쓸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건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이미 헤어진 사이라고는 하나, 연인이었을 당시 비참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고는 하나 지금만큼은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머리가 점점 더 어지러워 나고 있음을 느낀 임유진은 가능한 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와 부딪힌 이 술주정뱅이는 쉽게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그렇게 죄송하면 내 술 상대 좀 해. 평생 마셔볼 일 없는 좋은 술을 맘껏 맛볼 수 있을 거야.”남자가 느끼한 말을 하며 임유진의 어깨를 끌어안듯 몸을 가까이 붙여오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해버렸다.임유진은 이런 술주정뱅이와는 이 이상 엮이면 못 볼 꼴만 보게 될 게 뻔할 거라는 생각에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임유진을 끌어안으려는 목적에 실패한 남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다리를 들어 그녀의 몸을 힘껏 차버렸다.갑작스러운 공격에 임유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뒤뚱거리거니 그대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에게 맞은 왼쪽 허리에서 알싸한 고통이 일었다.“이런 X 년이, 감히 튕겨? 내가 좋게 좋게 넘어가 줬으면 고맙다고 안길 것이지. 어디서 감히 내 손을 피해?”남자는 거친 욕을 마구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까 남자에게 얻어맞은 왼쪽 허리에서 또다시 심한 통증이 일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많이 아파?”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곧 예쁜 손이 그녀의 왼쪽 허리를 살포시 감쌌다.그에 임유진의 몸이 티 나게 굳어버렸고 그와 닿고 있는 왼쪽 허리만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지금 강지혁의 얼굴은 속눈썹까지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역시... 예쁘네.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면 그녀의 심장도 같이 떨리는 듯했다. 그녀의 얼음장 같던 마음을 녹여줬던 것도 이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녹았던 그 마음이 이제는 또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이를 깨물고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더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지혁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전... 괜찮아요.”그녀는 오랜만에 존댓말까지 써가며 정중하게 인사한 후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강지혁의 손을 서서히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조금 비틀거리며 다시 룸으로 향했다.한편, 강지혁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고, 두 손은 갈 길을 잃은 채 그녀가 움직여 줬던 그대로 가만히 굳어버렸다.손에는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아까 임유진을 본 순간 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녀가 웬 남자한테 맞았을 때는 살인 충동마저도 느꼈다.이제 더는 그녀를 의식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임유진의 얼굴만 보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가는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둘은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대표님.”그때 고이준이 강지혁을 불렀다.주위에는 어느덧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고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에 가게 매니저와 경호원들까지 달려왔다.물론 허겁지겁 달려왔다가 강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서로 말이라도 맞춘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나더러 강지혁 씨래.”강지혁의 뜬금없는
강지혁의 지시에서는 일말의 동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주위 사람들은 이쯤 되니 소란의 중심에 있다가 홀연히 사라진 여성의 정체가 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천하의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풍하 그룹 회장 아들의 다리를 부러트린다니! 이걸로 풍하 그룹과의 협력은 더 이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아무리 풍하 그룹이 가족경영의 중소기업이라고는 하나 고작 여자 때문에 이런다는 게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같은 시각, 임유진은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인지 점점 더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고 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머리까지 어지러워 났다.“유진 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괜... 찮아요.”동료의 걱정에 임유진은 애써 웃어 보였다.“다들 기분 좋게 마신 것 같으니까 환영회는 이쯤하고 끝낼까요? 유진 씨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얼른 쉬게 해줘야죠.”정한나는 웨이터를 불러 계산서를 가져오도록 했다.회식 비용은 총 1460만 원이 나왔고 이건 임유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이었다.당연히 더치페이일 줄 알고 핸드폰을 꺼내 들려던 찰나 정한나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오늘 로펌 식구들이 특별히 축하까지 해줬으니까 오늘은 유진 씨가 쏘는 거 어때요? 강지혁 씨 여자친구인데 이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잖아요.”임유진은 그제야 정한나의 속셈을 눈치챘다. 정한나는 지금 일부러 동료들 앞에서 임유진에게 회식 턱을 내게 해 강지혁과 지금 어떤 사이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정한나의 얼굴에 핀 웃음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역겹고 소름이 끼쳤다.“저 돈 없어요.”임유진의 계좌 잔액은 단돈 156만 원이 전부였다.“어머, 유진 씨, 왜 이래요. 유진 씨가 돈이 없으면 강지혁 씨한테 대신 계산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S 시에서 제일 부자인 남자친구를 뒀으면서 이 정도 요구도 못 해요?”정한나가 생긋생긋 웃으며 말했다.“저 돈 없어요.”임유진은 술에 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