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의 지시에서는 일말의 동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주위 사람들은 이쯤 되니 소란의 중심에 있다가 홀연히 사라진 여성의 정체가 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천하의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풍하 그룹 회장 아들의 다리를 부러트린다니! 이걸로 풍하 그룹과의 협력은 더 이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아무리 풍하 그룹이 가족경영의 중소기업이라고는 하나 고작 여자 때문에 이런다는 게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같은 시각, 임유진은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인지 점점 더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고 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머리까지 어지러워 났다.“유진 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괜... 찮아요.”동료의 걱정에 임유진은 애써 웃어 보였다.“다들 기분 좋게 마신 것 같으니까 환영회는 이쯤하고 끝낼까요? 유진 씨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얼른 쉬게 해줘야죠.”정한나는 웨이터를 불러 계산서를 가져오도록 했다.회식 비용은 총 1460만 원이 나왔고 이건 임유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이었다.당연히 더치페이일 줄 알고 핸드폰을 꺼내 들려던 찰나 정한나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오늘 로펌 식구들이 특별히 축하까지 해줬으니까 오늘은 유진 씨가 쏘는 거 어때요? 강지혁 씨 여자친구인데 이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잖아요.”임유진은 그제야 정한나의 속셈을 눈치챘다. 정한나는 지금 일부러 동료들 앞에서 임유진에게 회식 턱을 내게 해 강지혁과 지금 어떤 사이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정한나의 얼굴에 핀 웃음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역겹고 소름이 끼쳤다.“저 돈 없어요.”임유진의 계좌 잔액은 단돈 156만 원이 전부였다.“어머, 유진 씨, 왜 이래요. 유진 씨가 돈이 없으면 강지혁 씨한테 대신 계산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S 시에서 제일 부자인 남자친구를 뒀으면서 이 정도 요구도 못 해요?”정한나가 생긋생긋 웃으며 말했다.“저 돈 없어요.”임유진은 술에 취
임유진을 그렇게 환영해 줬던 동료들은 종잇장 뒤집듯 태도를 바꿨고 정한나는 이 모든 상황을 흐뭇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그녀가 원했던 장면이 바로 이거였다!임유진이 망신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녀는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고 그동안 묵혔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까지 들었다.애초에 임유진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이전 로펌에서 해고되고 이곳저곳 헤매는 일도 없을 거라고 정한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때 옆에서 쭉 지켜보던 남자 동료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다들 그만해요.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같은 동료끼리. 그리고 유진 씨가 언제 회식비를 내겠다고 했어요. 오늘은 그냥 더치페이로 합시다.”그의 한마디에 신나서 떠들던 동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남자 동료가 말했듯 임유진은 단 한 번도 회식 턱을 내겠다고 한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꾸준히 봐야 할 동료들이었기에 더치페이를 못 하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 동료는 일단 자기가 먼저 계산하고 이따 송금해 달라며 웨이터에게로 향했다.“계산할 필요 없으세요. 이미 어떤 분이 계산하셨거든요.”“네??”웨이터의 말에 룸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체 누가 그 많은 돈을 선뜻 계산했단 말인가!“혹시 다른 테이블이랑 헷갈리신 건 아니에요? 저희 중 누구도 계산한 사람이 없어서요.”정한나가 물었다.“확실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웨이터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룸을 빠져나갔다.룸에 남겨진 사람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대체 누가 계산한 거지?그러다 문득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임유진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비틀거리다 간신히 가방을 들더니 조용히 읊조렸다.“계산... 다 했다고 하니까 이제 가도 되죠?”그러고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룸을 나갔다.머리는 점점 더 어지럽고 그녀는 이제는 눈앞의 길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강지혁이... 계산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큰돈을 소리 소
누구지? 대체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달콤하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 말에 임유진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내가 평생 지켜줄게. 절대 너 억울한 일, 힘든 일 없게 내가 옆에서 널 지켜줄게.”‘아... 이건 혁이구나.’이건 강지혁이 그녀에게 해줬던 말이었다.강지혁이 해줬던 달콤한 말들은 마치 누가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임유진의 귓가에 맴돌았다.그만 생각해. 제발 그만 생각하라고...!임유진은 쭈그려 앉은 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그때 희미하게나마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더욱더 선명하게 들려왔다.누구지?그녀의 눈에 검은색 구두가 들어왔다.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지혁의 얼굴이다... 아까 그릴앤바 안에서 봤던 모습하고 똑같았다.취한 탓에 헛걸 보는 걸까? 이제는 환청뿐만 아니라 환각까지 보이는 걸까?임유진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너... 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녀는 강지혁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간신히 마음을 정리하려나 싶다가도 그의 얼굴만 보면 또다시 마음이 일렁였다.한편 강지혁도 마찬가지로 눈앞에 있는 여인을 빤히 바라봤다.눈동자가 흐릿하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게다가 힘겹게 몸을 지탱하려고 애쓴다고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행여 임유진이 바닥에 넘어질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그의 행동에 임유진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직도 아파?”그는 문득 자신이 잡은 곳이 아까 그녀가 다쳤던 왼쪽 허리라는 걸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다 임유진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한 남자를 떠올리고 남은 한쪽 다리도 부러트릴 걸 그랬다며 이를 꽉 깨물었다.임유진은 몽롱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아직도 아프냐고? 어떻게 안 아플 수 있을까. 아까 맞은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혁아, 나 이제 네 생각하는 거 그만할래. 이제는 매일매일, 네 생각했던 거 그만둘래...”임유진은 취기를 빌어 그동안 묵혀뒀던 말들을 전부 다 전하려는 듯했다.“너한테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는 게 그토록 쉬운 일이었구나. 우리는 대체... 누가 누구를 배신했던 걸까...? 맞다, 오늘은 고마워... 나 구해줘서 고맙고... 계산해준 것도 고마워. 하지만 난... 이제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다. 하나 있네. 이제 더는 네 생각 안 하고 너한테 이렇게 들러붙지도 않을게... 나 그 정도로 질척거리는 사람 아니야... 걱정하지 마...”임유진은 알까?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강지혁의 심장에 꽂히고 있다는걸...강지혁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미 헤어졌는데,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는데 대체 왜 그녀는 아직도 그의 모든 감정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걸까?취기 때문에 어눌한 임유진의 말이, 임유진의 바보 같은 웃음이, 임유진의 모든 행동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강지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듯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그러면... 딱 한 마디만 더 할게.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임유진은 천천히 발끝을 들더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그녀의 술 냄새와 온기가 천천히 그의 입술 위에 퍼져갔다.강지혁은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린 듯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반면, 임유진은 이 모든 키스에 그녀의 감정 전부를 담으려는 듯 그를 잡고 열심히 입을 맞췄다.키스가 길어지자, 강지혁의 심장은 점점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손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그는 지금 두려워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눈앞에 있는 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여자일 뿐이었지만 그는 지금 세상 그 무엇
하지만 강지혁의 앞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고이준에 의해 앞길이 막혀버렸다.“비켜!”한지영이 고이준을 피해 옆으로 가려고 하자 고이준은 또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려도 강지혁과 임유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지 못하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지금 막 차에서 내린 백연신을 향해 외쳤다.“빨리 이 사람 좀 어떻게 해 봐요!”그에 백연신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고이준이 아닌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강지혁 씨, 내 여자친구가 임유진 씨를 데려가야 해서요. 비서 좀 물려주시죠.”하지만 강지혁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여전히 품 안에 있는 여인만 바라보았다.“당신이 뭔데 유진이를 안아? 헤어지자며, 유진이한테 헤어지자며!”한지영은 예의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태도로 강지혁에게 소리를 질렀다.그녀는 임유진이 버스 정류장에 혼자 처량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돈이 많으면 사귀는 것도 마음대로고 헤어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야? 돈 없는 사람은 그걸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해? 강지혁 당신은 이 관계를 게임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유진이는 아니었어. 당신이 한 번이라도 유진이 생각을 했다면 이래서는 안 됐다고! 소민준 그 자식 때문에 상처받고 억울하게 옥살이한 걸 겨우 이겨낸 애한테 다른 누구도 아닌 강지혁 당신이 칼을 꽂아?!”한지영은 지난번 강씨 저택에 찾아가 그를 만나지 못해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뱉어냈다.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져 가자 고이준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근 몇 년을 돌아봐도 강지혁의 바로 앞에 대고 이렇게 할 말을 다 한 여자는 아마 한지영이 처음일 것이다.고이준은 초조한 마음이 드는 한편 친구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한지영이 조금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고 비서, 비켜 서.”한참이 지나서야 강지혁의 입이 열렸다.고이준이 물러서자 한지영은 재빠르게 달려가 술에 잔뜩 취해 강지혁의 품에 쓰러진 친구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으으... 그만...
백연신은 서둘러 한지영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자신의 뒤에 숨겼다.“강지혁 씨, 지영이는 그저 친구를 위해 나선 것뿐이에요. 기분이 상했다면 나하고 얘기하시죠. 책임은 내가 집니다.”“연신 씨가 나설 필요 없어요. 책임은 내가 져요!”한지영이 백연신을 향해 외쳤다.“네가 뭘 책임져!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조용히 해!”백연신이 그녀를 향해 화를 냈다.“맞을 각오 돼 있으니까 날 때리든 반 죽여놓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요!”“한지영, 조용히 하라고 했지!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백연신은 항상 한지영 앞에만 서면 감정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의 서늘한 시선이 백연신 너머의 한지영에게로 향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듯싶다.하지만 바로 그때,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임유진이 한지영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말했다.“우리 지영이는... 내가 지켜줄 거야...”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자신을 지키겠다는 친구의 한마디에 한지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고이준도 다급하게 그의 뒤를 쫓아갔다.한지영은 강지혁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등이 식은땀으로 가득 찼다는 걸 깨달았다.“너 다음번에도 오늘처럼 운이 좋을 거라는 생각 하지 마.”백연신이 그녀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그가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그녀도 알고 있다. 강지혁이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자리를 뜬 건 아마 임유진 때문일 것이다.“타.”백연신은 한지영과 임유진을 뒷좌석에 태우고 임유진의 월세방으로 향했.집에 도착한 후 한지영은 임유진에게 잠옷을 갈아입혀 주고 침대에 눕혀준 뒤에야 백연신과 함께 집을 떠났다.다시 차로 돌아와 두 사람은 나란히 앞 좌석에 앉았다. 백연신이 뭐라고 얘기를 꺼내기 전에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도 내가 오늘 무모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까
“나 학창 시절 때 누가 반에서 돈을 훔쳤던 일이 있었어요. 당신 그 범인으로 내가 지목됐죠. 선생님은 앞장서서 내가 범인이라고 단정을 지어버렸고 부모님마저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요. 그저 딸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기에 급급했죠.”그 상황이 떠올랐는지 한지영의 코가 시큰해졌다.“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가요? 내가 믿어왔던 세상에 배신당하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내가 아니라고 계속 얘기를 했는데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날 믿어준 게 유진이었어요. 나를 도와 돈을 훔쳐 간 애를 잡아주기도 했죠.”한지영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걸렸다.“그때 알았어요. 내 평생 친구는 유진이뿐이라고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조금 다른 감정이 들었다.고작... 어릴 때 있었던 그 작은 일 때문에 임유진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다고?물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생아인 탓에 서로 모함하고 음해가 판을 치는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다만 그런 성장 과정에서 백연신이 깨달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억울한 상황에서는 열심히 결백을 얻을 게 아니라 조용히 힘을 길러서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이다.마치 지금 적기에 백씨 가문 실세가 되어 그를 음해했던 여자와 그 두 아들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그래서 유진 씨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준 거야?”백연신이 물었다.“네, 내가 아는 유진이는 절대 남을 해칠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유진이가 아니라고 하면 정말 아닌 거예요. 그리고 친구니까 이 정도의 믿음은 당연한 거 아니에요?”한지영의 말에 백연신은 그만 말 문이 막혔다.세상에는 모르는 사람보다 바로 그 친구라는 관계에서 배신당해 서로 죽네 사네하는 일이 많았다. 하여 단지 임유진이 어릴 적 그녀를 도와줬다는 이유 하나로 무모한 짓까지 자처하는 모습은 백연신의 눈에는 바보짓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바로 그런 ‘바보’ 같은 모습 때문에
백연신은 한지영의 손을 감싸더니 동요 따위는 없는 얼굴로 얘기했다.“응, 그 상대가 강지혁이라 할지라도 나는 네가 원하면 할 거야.”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백연신은 그 누구와도 적이 될 준비가 되어있다.한지영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이건 사랑이 틀림없다. 한지영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그 어느 감정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그녀와 떨어져 있던 3년간, 처음에는 그 감정이 분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이미 그는 그때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고 3년이라는 그리움이 더해져 그 사랑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지영아, 네가 원하는 거면 난 뭐든 해.”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가 마치 해일처럼 그녀를 덮쳐왔다....다음날, 임유진은 휴대폰 알람 덕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보니 아직도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이 숙취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머리맡에는 어젯밤 한지영이 남긴 메모가 있었고 이것으로 임유진은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준 사람이 한지영이라는 걸 알게 됐다.또한, 메모 옆에는 새 옷과 새 신발이 놓여있었는데 이건 한지영이 그녀의 취직 기념으로 선물해 준 것이었다. 선물을 보자 임유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과음한 탓인지 두통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서둘러 씻은 후 아침도 먹지 않고 바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버스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나니 어젯밤 일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그릴앤바를 나선 후 얼핏 강지혁을 만나 이런저런 말을 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에게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임유진은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어젯밤 그녀가 뭐라고 했든 간에 이미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고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되짚어 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어제 그를 만난 건 우연이었을 테고 앞으로 그런 우연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