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에 신데렐라처럼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자친구를 만난 여자들이 남자친구의 돈을 쓰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고달픈 생활을 계속해나가는 예도 많지 않은가?이 여자 동료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느꼈다. 방금 동료들 몇이 모여서도 어제 누가 계산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아니에요.”임유진이 부정했다. 과거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네? 아니에요?”그 여자 동료는 임유진이 그렇게 단호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나 씨가 말했었는데...”“한나 씨가 내 남자친구가 누구라고 말하면 내 남자친구가 그 사람이 되는 건가요?” 임유진이 반문했다. 상대방은 그 말에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임유진은 물을 가득 채운 컵을 들고 탕비실에서 나온 뒤, 자리로 돌아가 그녀에게 맡겨진 일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사사로운 감정은 이미 과거일 뿐이고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일하면서 이 도시에서... 다시 한번 변호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길이었다!한지영은 오전 내내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백연신의 얼굴과 그가 한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녀의 수중에 있는 칼이 될 수 있다고, 심지어 그녀가 대적하고 싶은 상대가 강지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고. 남자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부류의 말들은 그저 달콤한 속삭임이 아닐까! 정말로 강지혁과 대적하려면 아마도 백선 그룹 전체를 다 걸어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손해 보는 거래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백연신이 이런 말을 할 때... 그녀는 이 말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백연신이 그녀를 위해 그가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어렵게 얻은 백선 그룹을 기꺼이 걸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용의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남자가 한
기껏해야 몇 개 주거지용 토지의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택가의 집들이나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지영 씨, 저기 안에 들어가서는 정신을 딴 데 팔면 안 돼. 오늘 만날 분들은 다 부동산 회사의 고위 인사들이야.”소장은 한지영에게 당부했다.“알겠어요.” 한지영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일행이 로비로 들어섰을 때, 한지영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로비 안에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바로 진세령이었다! 유진을 감옥에서 고생하게 만든 바로 그 여자, 진 씨 가문의 둘째 딸인 진세령을 한지영은 몹시 증오하고 있었다. 연예계에서 퇴출당했더라도 가문 덕분에 진세령은 여전히 진화 그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부잣집 딸로 돌아갈 수 있었다.지금 진세령은 특별히 주문 제작한 고급스러운 옷들을 입고 있었고 어깨 위로 떨어지는 긴 웨이브 머리와 섬세한 메이크업이 한껏 눈부셔 보였다. 그녀 주변에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한지영 곁에 서 있던 소장도 웃음을 띠며 진세령에게 다가가 열정적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제야 한지영은 진세령이 오늘 진 씨 가문 산하의 부동산 회사를 대표하여 경매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세령과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은 많은 이들이 아부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만약 진 씨 가문이 경매에서 성공한 다음 그 프로젝트를 따낼 수만 있다면 그 디자인 스튜디오의 입장에서는 올 한해가 걱정 없을 큰 일거리가 될 것이다!한지영은 평소 사무실에서 엄격한 모습의 소장이 연신 웃으며 진세령에게 아부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그녀는 진 씨 가문이 이번 경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지를 반드시 손에 넣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소장님 스튜디오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앞으로 협력할 기회가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하지만...”진세령의 말투가 바뀌면서 시선이 한지영에게로 향했다.“소장님 스튜디오에서 저와 거래를 하려고 한다면 적어도 제 취향은
“어떻게 뻔뻔하게 이런 말을 하지? 나가라고 하면 또 어쩔 건데?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진세령 쪽에서 그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그녀를 위해 나섰다.“나가라고? 어느 법에서 내가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고 규정했는데? 나더러 나가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당신의 행동에 대해 고소할 수 있어!”한지영은 완강하게 말했다“고소한다고? 좋아, 네가 나를 어떻게 고소할지 한번 보자고!”말하며 상대방은 자신의 곁에 있는 두 명의 건장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이 사람을 당장 쫓아내 버려, 괜히 세령 씨를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두 명의 건장한 부하가 다가와서 각각 한지영의 두 팔을 잡고 한지영의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동 소장과 다른 동료들은 아무도 감히 한지영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진세령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띠었고 시선은 조롱하듯 한지영을 쳐다보면서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결국 나가줘야겠네. 임유진은 보호자가 있지만, 그게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나는 당신을 내쫓을 거야.”한지영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하지만 이런 장소에서 그녀는 진세령에게 맞서 싸울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자신을 더욱 굴욕적이고 창피하게 만들 뿐이다.왜... 진세령과 같은 사람들은 좋은 가정 배경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마음대로 굴욕을 주고 괴롭혀도 되는 것일까?마치 옛날에 그녀가 임유진의 손톱을 하나하나 뽑아냈던 것처럼.그녀도 진세령에게 이렇게 굴욕을 당하고 그저 참아야만 하는 걸까? 단지 상대가 거대한 진 씨 가문의 딸이기 때문에?한지영이 저항하기를 포기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요? 제 여자친구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들 마음대로 드나들어야 하는지 몰랐네요.”한지영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이 목소리는...이윽고 긴 실루엣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백연신이다!한지영은 눈앞에 나타난 이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백연신이 일부러 여유롭게 손을 털면서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은 사과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여자친구가 이런 모욕을 당했는데 남자친구로서 당연히 기분을 풀어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보고 웃지 않겠어요?”남자는 지금 맞아서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는데 방금 주먹에 맞은 부위가 너무 아파서 말을 할 겨를이 없었다.백연신은 다시 진세령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당신은요? 진 씨 가문의 둘째 따님, 당신은 사과할 생각이 있어요?”겉보기에는 예의 바르게 물어보는 것 같지만 그 말투는 위험성이 다분했다. 심지어 진세령은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면 아마 이미 맞아서 바닥에 쓰러진 그 남자와 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고 느꼈다.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절대 여자라고 봐주지 않을 것이다. 진세령은 이미 눈앞의 이 남자를 알아보았다. 바로 백씨 가문의 새로운 가주로서 자리에 오른 지 이제 반년이 넘은 백연신이였다. 사생아의 신분으로 백씨 가문을 손에 넣은 사람이니 그 수단과 계략은 더 말할 것 없이 독한 사람일 것이다.백씨 가문은 현재 기세가 등등하여 적극적으로 S시의 시장을 개척하고 있지만, 진 씨 가문은 최근 몇 년간 발전이 그리 좋지 못했고 손에 있는 몇 개 큰 프로젝트에서도 손실을 보았다. 얼마 전 아버지도 몇 개 프로젝트를 백씨 가문과 협력하고자 한다고 말씀했었다. 하지만 백연신의 여자친구가... 바로 임유진의 그 친구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진세령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이 세상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작다고 느꼈다. “사과 안 하려는 겁니까?”백연신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진세령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아까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분께...” “한지영, 제 여자친구의 이름은 한지영입니다.”백연신이 말했다.“한지영 씨, 실례가 많았습니다.”말을 마치고 진세령은 하이힐을 밟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한지영은 아직도 정신이 채 돌아오지 않았다. 백연신이 나타
“그냥 한번 생각해본 거예요.”한지영은 어깨를 으쓱했다.“건축 설계사로서 꿈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백연신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될 때, 백연신은 한지영이 언급한 그 인기 있는 토지 경매에 바로 참여했다. “백 대표님.”곁에 있던 현장 매니저가 놀랐다. 사실 그들의 경매 목표에는 그 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땅은 인기가 많으므로 경매가 매우 치열할 것이고 최종 경매 가격도 그리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에 그 땅을 성공적으로 획득하더라도 그저 명성을 얻는 것이지, 많은 이익은 창출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백연신은 이렇게 말했다. “낙찰받죠. 이 땅으로 백 씨 가문에게 명성을 얻어주는 것으로 합시다.”현장 매니저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저도 모르게 과일주스를 마시며 휴대폰을 보고 있는 여자 쪽으로 향했다. 백 대표님이 이 여자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 땅의 경매에 참여하기로 한 건가?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수천억의 자금이 고작 한마디 말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된다.룸 안에 앉아 있는 진세령은 스크린에서 쉼 없이 날뛰는 숫자를 보고 있었다. 백씨 가문도... 그녀와 함께 그 인기 많은 토지의 경매에 참여했다.그녀가 알고 있던 정보에 따르면 백선 그룹은 그 땅에 관심이 없었고 경매에 참여한 다른 회사들 역시 그 땅을 차지할 실력이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백선 그룹이 끼어들었다! 진세령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현재는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한지영이라는 여자 때문인 걸까? 백연신이 그 여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 진 씨 가문과 그 땅을 두고 경쟁하기로 한 것일까?! 보아하니 지금은 임유진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무 존재감이 없게 여겼던 임유진의 친구까지도 그녀의 방해물이 되고 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나 진세령은 그들이 함부로 대해도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
“괜찮아요. 당분간은 바꿀 생각 없어요. 나중에 좀 더 실질적인 성과가 생기고 이력서가 더 완벽해지면 그때 이직하죠.”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너에게 그렇게 대한 건 개의치 않는 거야?”“개의치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것도 어른들의 무력함이라고 해두죠. 나라도 그 사람들과 지내는 게 그다지 즐겁지는 않지만, 밥벌이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야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음, 그때 나를 괴롭힌 건 진 씨 가문의 둘째 딸 진세령이었어요. 만약 그들이 나를 도왔다면 그건 곧 진세령과 적대한다는 의미였어요. 그들과 나 사이에 무슨 깊은 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죠. 안 그래요?”백연신은 조금 놀랐다. 이 점에 대해 그녀가 이렇게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말을 하고서 그녀는 온몸이 굳어지는 듯하며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을 지나서야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고파요. 뭐 좀 먹고 싶어요.”“그래.”백연신이 웃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연신은 한지영을 최근에 인기 있는 디저트 가게로 데려갔다. 관심 있는 디저트를 주문했지만, 한지영은 마음이 여기에 없는 듯하며 눈길은 자꾸 백연신을 향했다. 그녀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당연히 느꼈지만... 그렇게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늘 왜 그래, 나를 보는 게 그렇게 좋아?”백연신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한지영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누구든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료들과 소장은 진세령과 적대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와 진세령 사이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이해한다.하지만 그녀와 강지혁이 충돌이 일어났을 때 백연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지영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감정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확실하게 백연신한테 설레고 있다면 그녀는 이렇게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3년 전에 이미 한번 놓쳤다고 얘기할 수 있으니, 지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미세한 모습까지도 눈에 담으려는 듯했다.“정말로 나랑 진지하게 사귀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약간 잠긴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이번에 진짜로 사귀게 된다면 앞으로는 함부로 나를 떠날 수 없을 거야. 지난번에는 네가 갑자기 사라져도 너를 탓하지 않았었지만, 만약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한다면 네가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부러뜨릴 수도 있어.” 백연신이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에게 최후의 경고를 날리는 것 같았다. 한지영은 몸이 떨렸고 그녀의 치아가 빨간 입술에 이빨 자국을 남겼다.“아니, 말없이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너에게는 헤어질 권리가 없을 거야.”백연신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얻은 이후에 다시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떠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미래에 그녀가 그를 더는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그를 싫어하게 된다 해도 그는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한지영은 놀란 표정으로 백연신을 바라보았고 입술에 남긴 이빨 자국이 더욱 깊어졌다. “만약 미래에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된다고 할 때, 네가 울고 소리치고 무릎 꿇고 애원하더라도 나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래도 나랑 사귀겠어?”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물었다. 청아한 그의 목소리는 첼로의 낮은 음표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내용은 무척 무거웠다. 한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힌 것을 느꼈다.아마도 그녀는 백연신에게 고백을 하면서, 그
“아주 잘 맞아.”임유진이 말했다.“다행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미안해하지 말고 나한테 말해. 네가 월급을 받은 다음에 다시 나한테 갚아도 되니까.”한지영이 말했다.“알겠어.” 임유진은 웃음을 띤 후 뭔가 말하려다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뭐가 필요해?” “아니, 그게...” 임유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제 네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었지?”그녀는 온종일 생각해봤지만, 술에 취해 그릴앤바에서 나온 후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강지혁을 본 것 같다는 희미한 기억만 있었다. “너... 음, 그때 강지혁의 품에 안겨서 취해있었어.” 한지영이 말했다. 임유진은 순식간에 몸이 굳어졌다.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그게 다야. 내가 도착하고 나서는 연신 씨와 함께 너를 차에 부축해서 태웠어.”한지영이 말했다.“하지만... 차로 돌아가기 전에, 강지혁이 너와 헤어진 게 화가 나서 내가 충동적으로 강지혁의 뺨을 한 대 때렸어. 나도 이제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너 때문인지 강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갔어.”임유진은 넋이 나갔다. 그녀가 술에 취한 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S시에서 감히 강지혁에게 손찌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그가... 정말로 지영이에게 해코지하지 않았다니? “유진아, 강지혁이 너와 헤어진 이유가...정말 너희 사랑을 그저 장난으로 여겼던 거야?” 어제 일을 겪으면서 한지영은 뭔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정말 장난이었다면, 어제 강지혁은 왜 유진이 취해서 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냥 그대로 한 대 맞고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을까? “맞아. 그 사람이 느끼기에 지쳤었나 봐. 더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끝냈어.”임유진이 말했다. “그렇게 하는 걸 보면 장난이 아니면 뭐겠어?”한지영은 이 얘기를 듣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친구가 하루빨리 이 실패한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