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번 생각해본 거예요.”한지영은 어깨를 으쓱했다.“건축 설계사로서 꿈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백연신이 무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될 때, 백연신은 한지영이 언급한 그 인기 있는 토지 경매에 바로 참여했다. “백 대표님.”곁에 있던 현장 매니저가 놀랐다. 사실 그들의 경매 목표에는 그 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땅은 인기가 많으므로 경매가 매우 치열할 것이고 최종 경매 가격도 그리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마지막에 그 땅을 성공적으로 획득하더라도 그저 명성을 얻는 것이지, 많은 이익은 창출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백연신은 이렇게 말했다. “낙찰받죠. 이 땅으로 백 씨 가문에게 명성을 얻어주는 것으로 합시다.”현장 매니저는 더 말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저도 모르게 과일주스를 마시며 휴대폰을 보고 있는 여자 쪽으로 향했다. 백 대표님이 이 여자의 말 한마디 때문에 그 땅의 경매에 참여하기로 한 건가?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수천억의 자금이 고작 한마디 말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된다.룸 안에 앉아 있는 진세령은 스크린에서 쉼 없이 날뛰는 숫자를 보고 있었다. 백씨 가문도... 그녀와 함께 그 인기 많은 토지의 경매에 참여했다.그녀가 알고 있던 정보에 따르면 백선 그룹은 그 땅에 관심이 없었고 경매에 참여한 다른 회사들 역시 그 땅을 차지할 실력이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만만했었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백선 그룹이 끼어들었다! 진세령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현재는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한지영이라는 여자 때문인 걸까? 백연신이 그 여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 진 씨 가문과 그 땅을 두고 경쟁하기로 한 것일까?! 보아하니 지금은 임유진뿐만 아니라 그녀가 아무 존재감이 없게 여겼던 임유진의 친구까지도 그녀의 방해물이 되고 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나 진세령은 그들이 함부로 대해도 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
“괜찮아요. 당분간은 바꿀 생각 없어요. 나중에 좀 더 실질적인 성과가 생기고 이력서가 더 완벽해지면 그때 이직하죠.”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들이 너에게 그렇게 대한 건 개의치 않는 거야?”“개의치 않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것도 어른들의 무력함이라고 해두죠. 나라도 그 사람들과 지내는 게 그다지 즐겁지는 않지만, 밥벌이를 위해서라도 계속해야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리고 그들은... 음, 그때 나를 괴롭힌 건 진 씨 가문의 둘째 딸 진세령이었어요. 만약 그들이 나를 도왔다면 그건 곧 진세령과 적대한다는 의미였어요. 그들과 나 사이에 무슨 깊은 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죠. 안 그래요?”백연신은 조금 놀랐다. 이 점에 대해 그녀가 이렇게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말을 하고서 그녀는 온몸이 굳어지는 듯하며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을 지나서야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고파요. 뭐 좀 먹고 싶어요.”“그래.”백연신이 웃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연신은 한지영을 최근에 인기 있는 디저트 가게로 데려갔다. 관심 있는 디저트를 주문했지만, 한지영은 마음이 여기에 없는 듯하며 눈길은 자꾸 백연신을 향했다. 그녀가 평소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당연히 느꼈지만... 그렇게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늘 왜 그래, 나를 보는 게 그렇게 좋아?”백연신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한지영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누구든 이익을 추구하고 해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동료들과 소장은 진세령과 적대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와 진세령 사이의 일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이해한다.하지만 그녀와 강지혁이 충돌이 일어났을 때 백연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지영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감정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확실하게 백연신한테 설레고 있다면 그녀는 이렇게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3년 전에 이미 한번 놓쳤다고 얘기할 수 있으니, 지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미세한 모습까지도 눈에 담으려는 듯했다.“정말로 나랑 진지하게 사귀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약간 잠긴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이번에 진짜로 사귀게 된다면 앞으로는 함부로 나를 떠날 수 없을 거야. 지난번에는 네가 갑자기 사라져도 너를 탓하지 않았었지만, 만약 앞으로 다시 그런 일을 한다면 네가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부러뜨릴 수도 있어.” 백연신이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에게 최후의 경고를 날리는 것 같았다. 한지영은 몸이 떨렸고 그녀의 치아가 빨간 입술에 이빨 자국을 남겼다.“아니, 말없이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너에게는 헤어질 권리가 없을 거야.”백연신이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얻은 이후에 다시 그녀를 놓아줄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떠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미래에 그녀가 그를 더는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그를 싫어하게 된다 해도 그는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한지영은 놀란 표정으로 백연신을 바라보았고 입술에 남긴 이빨 자국이 더욱 깊어졌다. “만약 미래에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된다고 할 때, 네가 울고 소리치고 무릎 꿇고 애원하더라도 나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래도 나랑 사귀겠어?”그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물었다. 청아한 그의 목소리는 첼로의 낮은 음표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내용은 무척 무거웠다. 한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힌 것을 느꼈다.아마도 그녀는 백연신에게 고백을 하면서, 그
“아주 잘 맞아.”임유진이 말했다.“다행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미안해하지 말고 나한테 말해. 네가 월급을 받은 다음에 다시 나한테 갚아도 되니까.”한지영이 말했다.“알겠어.” 임유진은 웃음을 띤 후 뭔가 말하려다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야, 뭐가 필요해?” “아니, 그게...” 임유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제 네가 나를 데리러 왔을 때... 그때 내가 뭘 하고 있었지?”그녀는 온종일 생각해봤지만, 술에 취해 그릴앤바에서 나온 후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강지혁을 본 것 같다는 희미한 기억만 있었다. “너... 음, 그때 강지혁의 품에 안겨서 취해있었어.” 한지영이 말했다. 임유진은 순식간에 몸이 굳어졌다.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그게 다야. 내가 도착하고 나서는 연신 씨와 함께 너를 차에 부축해서 태웠어.”한지영이 말했다.“하지만... 차로 돌아가기 전에, 강지혁이 너와 헤어진 게 화가 나서 내가 충동적으로 강지혁의 뺨을 한 대 때렸어. 나도 이제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너 때문인지 강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갔어.”임유진은 넋이 나갔다. 그녀가 술에 취한 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S시에서 감히 강지혁에게 손찌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 그가... 정말로 지영이에게 해코지하지 않았다니? “유진아, 강지혁이 너와 헤어진 이유가...정말 너희 사랑을 그저 장난으로 여겼던 거야?” 어제 일을 겪으면서 한지영은 뭔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다. 정말 장난이었다면, 어제 강지혁은 왜 유진이 취해서 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냥 그대로 한 대 맞고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추궁도 하지 않았을까? “맞아. 그 사람이 느끼기에 지쳤었나 봐. 더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끝냈어.”임유진이 말했다. “그렇게 하는 걸 보면 장난이 아니면 뭐겠어?”한지영은 이 얘기를 듣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친구가 하루빨리 이 실패한
“알겠습니다.”임유진이 대답했다. “내일 제출해야 하니까, 오늘 꼭 당사자에게 서명을 받아야 해.” 차 변호사는 이렇게 당부하면서 임유진에게 연락처를 주었다. 하지만 임유진이 전화를 걸었을 때는 당사자의 비서가 받았다. 당사자가 저녁에 클럽 옥타곤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만약 서류에 서명을 받고 싶다면 옥타곤에 가서 그를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클럽의 룸 번호도 알려주었다. 옥타곤은 S시에서 아주 유명한 클럽이었다. 임유진이 도착했을 때, 클럽 무대에는 많은 남녀가 모여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고 임유진은 누가 자신이 찾는 당사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비서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결국 당구대 옆에서 그 당사자를 찾아냈다. 당사자는 재벌 3세인데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번 사건도 연인과 연애하는 동안 폭력적인 경향을 보여 여자친구가 소송을 제기해 손해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차 변호사는 이 재벌 2세를 변호하기 위해 사건을 맡았다.임유진은 사건자료를 보았었는데 사실이 거의 명확했다. 이 남자는 확실히 여자에게 폭력을 가해 때린 적이 있었다. 이런 남자에 대해서 임유진은 마음속으로 혐오감을 느꼈지만, 업무는 업무이니 지금 사표를 내고 그만두지 않는 이상 별수 없는 일이었다.“유승호 씨, 이 서류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내일 공식적으로 제출해야 합니다.”임유진은 미녀를 안고서 당구를 치고 있는 유승호에게 말했다.하지만 유승호는 느릿하게 그녀에게 눈길을 한번 주고는 말했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여요? 잠깐 기다려요. 조금 있다가 이 게임 끝나면 사인할게요.”그의 품에 안긴 써니는 킬킬거리며 웃었고 두 사람의 몸은 더욱 밀착되었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살아가다 보면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고 지금 그녀는 이런 어려움을 견뎌야 할 위치에 있다. 적어도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이렇게 한쪽에 서서 기다리는 것쯤은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임유진은 그렇게 조용히 한쪽에서 기
강현수도 오늘... 이곳에 온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그와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임유진은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실루엣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들어왔다.오늘 밤의 강현수는 흰색 캐주얼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정장 차림보다는 조금 덜 엄숙해 보였지만 느긋한 분위기가 한껏 돋보였다.그 잘생긴 얼굴은 불빛 아래에서 여전히 차가운 무관심과 거리감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것처럼 그는 주변의 활기와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마치 자신의 세계에 장벽을 세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그리고 한때... 그 장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어린 시절 그와 고난을 함께 겪은 작은 소녀뿐이었을 것이다... 바로 과거의 자신!다만... 임유진의 시선은 지금 강현수의 팔짱을 끼고 강현수와 함께 홀로 들어서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 여자는 사촌 언니인 여진이었다. 임유진의 신분을 대신하여 지금 강현수의 곁에 서 있는 배여진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배여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임유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에게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결국, 그녀 스스로가 그 과거를 포기하기로 했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영원히 묻어두기로 했었다. 임유진 본인이 강현수 앞에서 자신은 그 작은 소녀가 아니라고 여러 번 부인했으니 이제 무엇을 더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득, 짙은 봉황눈이 그녀 쪽으로 향했고 정확히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임유진은 가슴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 봉황눈은 이제 냉랭함을 품고 있었는데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전에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이제부터 나는 당신에게 조금의 감정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지금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고 어린 시절 그와 고난을
비록 남들이 보기에 이 바닥의 사람들은 전부 귀한 출신이거나 재벌 출신이었지만, 이 바닥에서도 여전히 등급을 나눴다.하지만 유승호가 의외였던 것은 강현수가 흔쾌히 허락했다는 것이다.유승호는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로또 1등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뻐했다. 만약 이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 강현수와 엮일 수 있다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그의 지위는 달라질 것이다.강현수와 배여진을 데리고 당구대 근처로 가는 유승호를 보며 임유진은 참다못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참... 걱정하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더니...’임유진은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 앞으로 한발 다가가서는 유승호를 향해 말했다.“승호 씨, 먼저 이 서류부터 사인해 줄래요?”“방해 좀 하지 말고 일단 옆에서 기다리세요.”유승호는 다소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라도 그와 강현수가 당구 치는데 방해가 되어 강현수의 라인을 타는 데 영향이라도 갈까 봐 걱정되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강현수의 시선이 자신한테 머문 채 위아래로 훑는 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이다.“여진아, 당구 해 본 적 있어?”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음... 아니요.”배여진은 그의 말에 급급히 대답했다.“가르쳐줄게.”무심하게 내뱉은 강현수의 말에 배여진은 깜짝 놀란 채 얼른 좋다고 답했다.강현수는 배여진한테 게임 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당구 큐대로 공을 치는 방법도 가르쳐줬다.청량한 목소리는 그 덤덤한 말투와 함께 오히려 독특한 운치를 더했다.배여진은 강현수가 직접 당구 치는 법을 가르쳐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신이 났지만 옆에 있는 임유진을 보며 그녀는 자매 사이를 챙기는 척 강현수한테 밀당했다.“현수 씨, 유진이도 여기 있는데 아니면...”“유진 씨가 여기 있는건 유진 씨만의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인사라도 하고 올래?”강현수는 무심하게 내뱉었다.“그건...”배여진은 고민하는 척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너무 좋죠. 당구가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배여진은 웃으며 말했다.한편 유승호는 강현수와 배여진한테 아부를 떠느라 바빴다. 뭐 강현수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라는지, 배여진이 당구에 재능 있다는지, 하면서 말이다.반면 곁에 있던 임유진은 마치 잊혀진 존재 같았다.임유진은 배여진이 한 말을 들으면서 사촌 언니가 쇼를 제대로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자신의 사촌 언니가 이렇게도 몰입감 있게 거짓말을 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는데 말이다.강현수도 이미 사촌 언니가 어렸을 때 그 여자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그녀가 당장 달려가서 강현수에게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한테 웃음거리로 여겨질 게 뻔했다.무릎 쪽의 통증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며 무릎의 통증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견디려고 애썼다.지금 그녀는 그들이 이 판을 다 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유승호한테 사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임유진은 지금 한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강현수는 자신이 더 이상 임유진을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둘은 그날 산에서 분명하게 얘기했었다. 그가 찾으려던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여진이었고 그가 보답해야 할 사람도 여진이었다. 전에 그가 종종 느꼈던 감정들은 착각일 뿐이었다.반면 임유진의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지혁이었다.‘다만 왜... 지금 그녀는 여기서 유승호 같은 사람의 화를 참는 거지? 단지 유승호의 사인을 받으려고 저렇게 오랫동안 서있는다고?’‘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강지혁은? 임유진을 그렇게 끔찍이 아끼더니 왜 이제 와서 그녀가 천대받게끔 하는 거지?’강현수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의문이 스쳐 갔다. 청순한 그녀의 얼굴은 불빛을 받아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입술은 꼭 깨문 채 참고 있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뭐지, 어디 아픈가?’하지만 그는 금세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