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수도 오늘... 이곳에 온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그와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임유진은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실루엣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들어왔다.오늘 밤의 강현수는 흰색 캐주얼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정장 차림보다는 조금 덜 엄숙해 보였지만 느긋한 분위기가 한껏 돋보였다.그 잘생긴 얼굴은 불빛 아래에서 여전히 차가운 무관심과 거리감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것처럼 그는 주변의 활기와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마치 자신의 세계에 장벽을 세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그리고 한때... 그 장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은 어린 시절 그와 고난을 함께 겪은 작은 소녀뿐이었을 것이다... 바로 과거의 자신!다만... 임유진의 시선은 지금 강현수의 팔짱을 끼고 강현수와 함께 홀로 들어서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 여자는 사촌 언니인 여진이었다. 임유진의 신분을 대신하여 지금 강현수의 곁에 서 있는 배여진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배여진과 강현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임유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에게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결국, 그녀 스스로가 그 과거를 포기하기로 했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영원히 묻어두기로 했었다. 임유진 본인이 강현수 앞에서 자신은 그 작은 소녀가 아니라고 여러 번 부인했으니 이제 무엇을 더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득, 짙은 봉황눈이 그녀 쪽으로 향했고 정확히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임유진은 가슴이 떨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 봉황눈은 이제 냉랭함을 품고 있었는데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전에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이제부터 나는 당신에게 조금의 감정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그래서 지금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고 어린 시절 그와 고난을
비록 남들이 보기에 이 바닥의 사람들은 전부 귀한 출신이거나 재벌 출신이었지만, 이 바닥에서도 여전히 등급을 나눴다.하지만 유승호가 의외였던 것은 강현수가 흔쾌히 허락했다는 것이다.유승호는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로또 1등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뻐했다. 만약 이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 강현수와 엮일 수 있다면 앞으로 이 바닥에서 그의 지위는 달라질 것이다.강현수와 배여진을 데리고 당구대 근처로 가는 유승호를 보며 임유진은 참다못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참... 걱정하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더니...’임유진은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 앞으로 한발 다가가서는 유승호를 향해 말했다.“승호 씨, 먼저 이 서류부터 사인해 줄래요?”“방해 좀 하지 말고 일단 옆에서 기다리세요.”유승호는 다소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라도 그와 강현수가 당구 치는데 방해가 되어 강현수의 라인을 타는 데 영향이라도 갈까 봐 걱정되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강현수의 시선이 자신한테 머문 채 위아래로 훑는 게 느껴졌다.하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했을 뿐이다.“여진아, 당구 해 본 적 있어?”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음... 아니요.”배여진은 그의 말에 급급히 대답했다.“가르쳐줄게.”무심하게 내뱉은 강현수의 말에 배여진은 깜짝 놀란 채 얼른 좋다고 답했다.강현수는 배여진한테 게임 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당구 큐대로 공을 치는 방법도 가르쳐줬다.청량한 목소리는 그 덤덤한 말투와 함께 오히려 독특한 운치를 더했다.배여진은 강현수가 직접 당구 치는 법을 가르쳐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신이 났지만 옆에 있는 임유진을 보며 그녀는 자매 사이를 챙기는 척 강현수한테 밀당했다.“현수 씨, 유진이도 여기 있는데 아니면...”“유진 씨가 여기 있는건 유진 씨만의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인사라도 하고 올래?”강현수는 무심하게 내뱉었다.“그건...”배여진은 고민하는 척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너무 좋죠. 당구가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배여진은 웃으며 말했다.한편 유승호는 강현수와 배여진한테 아부를 떠느라 바빴다. 뭐 강현수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라는지, 배여진이 당구에 재능 있다는지, 하면서 말이다.반면 곁에 있던 임유진은 마치 잊혀진 존재 같았다.임유진은 배여진이 한 말을 들으면서 사촌 언니가 쇼를 제대로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자신의 사촌 언니가 이렇게도 몰입감 있게 거짓말을 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는데 말이다.강현수도 이미 사촌 언니가 어렸을 때 그 여자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그녀가 당장 달려가서 강현수에게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한테 웃음거리로 여겨질 게 뻔했다.무릎 쪽의 통증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깨물며 무릎의 통증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견디려고 애썼다.지금 그녀는 그들이 이 판을 다 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유승호한테 사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임유진은 지금 한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강현수는 자신이 더 이상 임유진을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둘은 그날 산에서 분명하게 얘기했었다. 그가 찾으려던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여진이었고 그가 보답해야 할 사람도 여진이었다. 전에 그가 종종 느꼈던 감정들은 착각일 뿐이었다.반면 임유진의 마음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지혁이었다.‘다만 왜... 지금 그녀는 여기서 유승호 같은 사람의 화를 참는 거지? 단지 유승호의 사인을 받으려고 저렇게 오랫동안 서있는다고?’‘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강지혁은? 임유진을 그렇게 끔찍이 아끼더니 왜 이제 와서 그녀가 천대받게끔 하는 거지?’강현수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의문이 스쳐 갔다. 청순한 그녀의 얼굴은 불빛을 받아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고 입술은 꼭 깨문 채 참고 있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뭐지, 어디 아픈가?’하지만 그는 금세
임유진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무릎에 힘이 빠진 채 앞으로 쓰러질 듯했다.순간 누군가 허리를 감싸안아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다리 왜 그래?”강현수는 쌀쌀맞게 물었다. 그는 진작에 그녀가 쩔뚝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눈치챘다.“고질병이에요.”임유진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이내 고맙다고 인사했다.그는 얇은 입술을 오므린 채 허리에 감쌌던 손을 내렸다.‘고질병? 그녀한테 이런 고질병도 있었나?’“유진아, 괜찮아?”배여진은 그제야 동생을 각별히 관심하는 척하며 물었다.“다리가 불편하면 옆에 앉아서 좀 쉬어도 되는데.”임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봤다. 만약 사촌 언니가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면 그렇게 계속 서 있는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신이 나서 당구를 칠 리가 없었다.유승호는 멈칫하더니 곧 안색이 어두워져서 물었다.“서로... 아는 사이인가요?”“네, 제 사촌 동생이에요.”배여진은 웃으며 말했다.유승호는 순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는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진 채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아니,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그러면 진작에 서명했죠.”“그럼 지금 사인해도 되겠어요?”임유진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건네며 덤덤하게 물었다.“되죠! 당연히 해드려야죠!”유승호는 갑자기 아부를 하더니 서류를 건네받아 사인했다.임유진은 서류를 다시 건네받고 몸을 돌려 쩔뚝거리며 떠나려던 찰나 몇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임유진은 고개를 들고 의아한 표정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현수 씨, 저한테 무슨 용건 있으세요?”강현수는 넋이 나간 채 임유진을 잡고 있는 손을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지? 분명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아까 그녀가 넘어질 뻔한 것을 외면하지 않을 때부터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셈이다.하지만 지금 그녀가 쩔뚝거리며 떠나려고 하자 그는 본능적으로 데려다주고 싶었다.‘그녀가 정말 무릎 고질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그게 뭐
아니, 아닐 거야!언젠가 그녀는 완벽히 임유진의 존재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옆에서 끝까지 웃는 자가 될 것이다!-임유진은 버스를 타고 월세방으로 돌아왔다. 두 다리는 거의 들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그녀는 약상자에서 파스 두 장을 꺼내 무릎에 붙였다.한참 후, 무릎 쪽이 뜨끈해 나며 통증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밤, 그녀는 마치 큰 전쟁을 치른 듯이 온몸이 피곤하기 그지없었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그녀의 무릎관절은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오래 노출되지 않는 게 좋았다.오늘 밤, 강현수와 배여진을 마주친 것은 의외였다. 그녀가 떠나려던 참에 강현수가 팔목을 잡고 강지혁에 관해 물을 때 그녀는 또 한 번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만약 예전이라면 그녀가 늦은 밤에 혼자 업소에 간다면 혁이는 무조건 함께했을 것이다.유승호도 그녀를 오래도록 내버려둘 담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게다가 그녀의 무릎이 아파 나면 혁이는 조심스레 그녀를 안은 채 손으로 무릎을 주물러줬겠지...하지만 이 모든 건... 이젠 존재하지 않았다.예전의 달콤하고 좋았던 기억은 지금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버렸다.이젠 그녀의 혁이는 없었다.임유진은 어제 업소에서 있었던 일이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다음 날 그녀가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문어귀에서 강현수가 기다리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자리에서 멈칫하더니 눈에는 의아함이 스쳐 갔다.“유진 씨, 지금 여기서 살아요?”강현수는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네.”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강현수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다만... 강현수가 그녀의 현재 주소까지 알아냈으니 아마 그녀의 현재 상황까지 이미 다 조사했을 것이다.“궁금해서 그러는데, 유진씨가 왜 이런 곳에서 월세 내며 사는 거죠? 강씨네 저택에서 살았었잖아요. 강지혁이 유진 씨를 이런 곳에서 살게 할 리가 없을텐데요.”그는 마치 물음표 살인마라도 된 듯 궁금했던 걸
지혁이가... 임유진이랑 헤어질 리가 없는데... 애초에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일말의 대시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랑 헤어지다니!강현수와 강지혁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보니 그는 자연스레 강지혁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시크했고 여자한테 관심이라고는 없었지만 임유진은 예외였다.강지혁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한번 사랑에 빠지면 아마 죽을 때까지 한 명만 바라보는 스타일이다.그런데 지금 둘 사이에 죽을 때까지 한 명만 바라본다는 약속은 파투 났고 그저 간결한 헤어짐뿐이었다.“왜 헤어졌는데요?”그는 밀어붙였다.“그건 우리의 프라이버시니 존중해주세요. 현수 씨.”그녀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둘 사이에 거리를 뒀다.“더 이상 용건이 없으면 전 그만 들어가서 휴식해야겠어요.”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키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혼자 남겨진 강현수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 문밖에 서 있었다.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강현수는 아까 강지혁과 헤어졌다고 말하는 그녀의 유난히 평온하고 차분했던 표정을 되새기며 도리어 그의 가슴이 먹먹해 났다.그녀의 평온함은 마치 엄청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왜 번마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걸까?강현수는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심장은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이한은 오늘 강지혁과 강현수 둘이 여기로 모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귀하신 두 분을 여기까지 오셨을까? 너희 둘 다 평소에 여기 오기도 싫어했잖아? 아니면 사람 더 불러서 포커나 할래?”강현수는 덤덤하게 눈길을 강지혁에게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난 쟤 찾으러 왔어.”“너 그럼 마침 잘 왔네. 지혁이 어쩌다 여기 온 거야.”이한은 한편으로 술잔과 술을 꺼내더니 세 사람에게 각각 한 잔씩 따라 주고는 자신의 술잔을 들고 가볍게 홀짝거렸다.‘음...
강지혁은 우악스럽게 강현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았다.곁에 있던 이한은 술잔을 내려놓고 이내 달려가 강지혁의 손을 낚아챘다.“지혁아, 뭐 하는 거야? 현수는 그냥 물어봤을 뿐이잖아, 네가 참아...”이한은 깜짝 놀라 죽을 지경이었지만 반면 멱살을 휘어잡힌 강현수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채 입을 열었다.“설마... 나 때문이야?”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지혁은 손가락을 더 조여들었다. 강현수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얼굴빛도 확 달아올랐다.이한은 급해 난 나머지 달려가 제지했다.“지혁아, 손 풀어. 뭐 하는 거야? 너 진짜 현수를 졸라 죽이기라도 할 작정이야?”‘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 둘이 그의 구역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이한은 아마 남은 생을 다 말아먹은 셈이다.이한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강지혁의 손을 잡아당겼다.‘진짜...강현수 때문이라고?’강지혁은 빤히 눈앞의 강현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 강현수의 탓이라기보다 그는 나중에 정말 배신당할 날이 올까 봐, 임유진의 마음에 진짜 강현수를 담아두기라고 할까 봐 두려워서 매일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하루를 보내기 싫었던 게 더 컸다.그는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기 싫었다. 나중에 자신의 생사를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넣고 싶지 않았다.그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는 건 그뿐만이어야 한다.강지혁은 손의 힘을 풀었다. 강현수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한은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 만약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된다면 그는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맞든 아니든, 그게 중요해?”강지혁은 지독하리만큼 차갑게 내뱉었다.강현수는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 한쪽을 씨익 올리며 자극했다.“뭐, 중요하진 않지. 너랑 유진은 이미 헤어졌다니 앞으로 유진이가 누구랑 사귀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그 순간, 강지혁은 살기 가득한
“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경빈 씨는 왔었어요?”탁유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마 지금쯤 S시를 떠났을 거예요. 오히려 그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지 않게.”말을 이어가던 탁유미는 순간 멈칫하더니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드러났다.“그가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에요. 다만 그랑 계속 엮이게 될까 봐 두렵네요.”왜냐하면 그가 그녀에게 안겨준 상처와 아픔은 지독하리만큼 많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마저도 그녀에게는 아픔이었다.마치 그녀가 한때 사랑이라고 여겼던 게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앞으로 어쩔 생각이세요?”임유진은 물었다. 필경 이경빈이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아마 난 S시를 떠나 그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겠죠.”탁유미는 덤덤하게 말했다.만약 계속 S시에 남는다면 어느날 갑자기 이경빈이 찾아와서 윤이의 존재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그건 그녀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임유진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탁유미가 내린 결정이 이해되긴 했다.“만약 언니가 S시를 떠나게 되면 우린 앞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윤이도, 진짜 서운할 것 같아요.”“그래도 영상통화는 자주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교통이 그렇게 발달해서 막상 만나려고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요.”탁유미는 약간 감탄한 듯 말을 이어갔다.“사실 나도 이렇게 여기저기 숨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나중에 이경빈이 공수진과 결혼하고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경빈은 나를 상대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때면... 이렇게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겠죠.”“언니, 정말 제가 사건 뒤집을 필요 없으세요?”임유진은 다시 한번 이 일에 대해 꺼냈다.“애초에 경빈 씨가 일부러 언니를 해치려 한 게 아닐지도 몰라요. 아마 수진 씨가 이간질하는 바람에 경빈 씨는 언니가 계단에서 수진 씨를 밀어서 유산 시킨 장본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