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이가... 임유진이랑 헤어질 리가 없는데... 애초에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일말의 대시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녀랑 헤어지다니!강현수와 강지혁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보니 그는 자연스레 강지혁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시크했고 여자한테 관심이라고는 없었지만 임유진은 예외였다.강지혁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한번 사랑에 빠지면 아마 죽을 때까지 한 명만 바라보는 스타일이다.그런데 지금 둘 사이에 죽을 때까지 한 명만 바라본다는 약속은 파투 났고 그저 간결한 헤어짐뿐이었다.“왜 헤어졌는데요?”그는 밀어붙였다.“그건 우리의 프라이버시니 존중해주세요. 현수 씨.”그녀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며 둘 사이에 거리를 뒀다.“더 이상 용건이 없으면 전 그만 들어가서 휴식해야겠어요.”그녀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키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혼자 남겨진 강현수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 문밖에 서 있었다.굳게 닫힌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강현수는 아까 강지혁과 헤어졌다고 말하는 그녀의 유난히 평온하고 차분했던 표정을 되새기며 도리어 그의 가슴이 먹먹해 났다.그녀의 평온함은 마치 엄청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기로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왜 번마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걸까?강현수는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심장은 평소보다 더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이한은 오늘 강지혁과 강현수 둘이 여기로 모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귀하신 두 분을 여기까지 오셨을까? 너희 둘 다 평소에 여기 오기도 싫어했잖아? 아니면 사람 더 불러서 포커나 할래?”강현수는 덤덤하게 눈길을 강지혁에게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난 쟤 찾으러 왔어.”“너 그럼 마침 잘 왔네. 지혁이 어쩌다 여기 온 거야.”이한은 한편으로 술잔과 술을 꺼내더니 세 사람에게 각각 한 잔씩 따라 주고는 자신의 술잔을 들고 가볍게 홀짝거렸다.‘음...
강지혁은 우악스럽게 강현수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았다.곁에 있던 이한은 술잔을 내려놓고 이내 달려가 강지혁의 손을 낚아챘다.“지혁아, 뭐 하는 거야? 현수는 그냥 물어봤을 뿐이잖아, 네가 참아...”이한은 깜짝 놀라 죽을 지경이었지만 반면 멱살을 휘어잡힌 강현수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 채 입을 열었다.“설마... 나 때문이야?”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지혁은 손가락을 더 조여들었다. 강현수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얼굴빛도 확 달아올랐다.이한은 급해 난 나머지 달려가 제지했다.“지혁아, 손 풀어. 뭐 하는 거야? 너 진짜 현수를 졸라 죽이기라도 할 작정이야?”‘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이 둘이 그의 구역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이한은 아마 남은 생을 다 말아먹은 셈이다.이한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강지혁의 손을 잡아당겼다.‘진짜...강현수 때문이라고?’강지혁은 빤히 눈앞의 강현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 강현수의 탓이라기보다 그는 나중에 정말 배신당할 날이 올까 봐, 임유진의 마음에 진짜 강현수를 담아두기라고 할까 봐 두려워서 매일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하루를 보내기 싫었던 게 더 컸다.그는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기 싫었다. 나중에 자신의 생사를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넣고 싶지 않았다.그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는 건 그뿐만이어야 한다.강지혁은 손의 힘을 풀었다. 강현수는 마른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한은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 만약 이런 일이 몇 번 더 반복된다면 그는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맞든 아니든, 그게 중요해?”강지혁은 지독하리만큼 차갑게 내뱉었다.강현수는 그를 바라보며 입꼬리 한쪽을 씨익 올리며 자극했다.“뭐, 중요하진 않지. 너랑 유진은 이미 헤어졌다니 앞으로 유진이가 누구랑 사귀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그 순간, 강지혁은 살기 가득한
“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경빈 씨는 왔었어요?”탁유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마 지금쯤 S시를 떠났을 거예요. 오히려 그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지 않게.”말을 이어가던 탁유미는 순간 멈칫하더니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드러났다.“그가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에요. 다만 그랑 계속 엮이게 될까 봐 두렵네요.”왜냐하면 그가 그녀에게 안겨준 상처와 아픔은 지독하리만큼 많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마저도 그녀에게는 아픔이었다.마치 그녀가 한때 사랑이라고 여겼던 게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앞으로 어쩔 생각이세요?”임유진은 물었다. 필경 이경빈이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아마 난 S시를 떠나 그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겠죠.”탁유미는 덤덤하게 말했다.만약 계속 S시에 남는다면 어느날 갑자기 이경빈이 찾아와서 윤이의 존재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그건 그녀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임유진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탁유미가 내린 결정이 이해되긴 했다.“만약 언니가 S시를 떠나게 되면 우린 앞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윤이도, 진짜 서운할 것 같아요.”“그래도 영상통화는 자주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교통이 그렇게 발달해서 막상 만나려고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요.”탁유미는 약간 감탄한 듯 말을 이어갔다.“사실 나도 이렇게 여기저기 숨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나중에 이경빈이 공수진과 결혼하고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경빈은 나를 상대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때면... 이렇게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겠죠.”“언니, 정말 제가 사건 뒤집을 필요 없으세요?”임유진은 다시 한번 이 일에 대해 꺼냈다.“애초에 경빈 씨가 일부러 언니를 해치려 한 게 아닐지도 몰라요. 아마 수진 씨가 이간질하는 바람에 경빈 씨는 언니가 계단에서 수진 씨를 밀어서 유산 시킨 장본인인
어쩌면 그녀는 강지혁과 사귈 때 두 사람은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자궁 손상으로 임신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는 임신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적어도 그녀와 강지혁 사이에는 아이가 있을 리 없었다. 헤어지더라도 깨끗하게 끊을 수 있었다.하지만... 마음속에는 아련한 아쉬움이 있었다.만약 아이가 있다면 자신과 피를 나눈 가족이 생기는 셈이지만 현재 아이가 없으니 결국 그녀에게는 가족이라고 아무도 없었다.아마 늙어서도 죽을 때까지도 혼자일 것이다.임유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윤이의 이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녀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그녀는 윤이를 안아 올린 후 연속 뽀뽀를 했다. 그리고 생일날 윤이를 초대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특별히 케이크를 사와 윤이와 함께 나눠 먹었다.그리고 이 녀석은 신이 나서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직접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예쁜 샌들 한 켤레였는데 샌들 끝에는 가죽 리본이 달려 있었고 신발은 흰색인지라 여름옷과 매치하기 쉬워 손이 자주 갈듯했다.신발은 대체로 몽환적인 소녀의 로맨틱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임유진은 넋이 나간 채 신발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신발을 신어 본지 오래되었다.“이 신발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랑 비슷해요. 이모도 신으면 예쁜 공주가 될 거예요!”윤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녀석은 지금 말을 아주 유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통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보다 더 잘하는 데다가 긴 문장까지 말할 수 있었다.임유진은 싱긋 웃더니 윤이가 보는 앞에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신발은 의외로 사이즈가 딱 맞았다.“윤이야, 고마워. 신발 너무 이쁘다. 이모 너무 마음에 들어.”임유진은 말을 마치고 또 한 번 윤이를 안아 올리고 볼에 뽀뽀를 했다.윤이의 부드러운 볼은 삽시에 붉어지더니 임유진을 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사랑스럽고 철이 든 아이를 혹시라도 이경빈한테 뺏길까 봐 걱정하는 유미언니도 이해가
눈에 익은 실루엣이 지금 그녀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새까만 눈동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혁!그가 어떻게 그녀의 월세방에 있는 거지?임유진은 깜짝 놀란 채 방 안에 있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잊었다.강지혁은 입술을 꼭 닫은 채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발걸음 걸음마다 위압감이 느껴졌다.“ 왜? 날 본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어!’임유진은 씁쓸해서 생각했다.그녀는 헤어지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동안 계속 그와 마주쳤다.그를 볼 때마다 그녀는 헤어질 때의 아픔, 그리고... 술에 취한 그날, 그가 그녀를 구해줬고 그녀는 취해서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강지혁 씨, 우리 집엔 웬일이세요?’그녀는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 침착하려고 애썼다.“널 기다렸지.”그는 짤막하게 다섯 글자를 내뱉었다.‘그래, 그의 능력으로 이 집에 들어오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다만... 그녀를 기다렸다니?’“전 더 이상 강지혁 씨랑 할 얘기가 없어요. 헤어질 때 이미 다 얘기했거든요. 그리고 강씨 저택에서 나올 때 제 물건만 갖고 나왔어요.”그는 안색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녀가 뱉어내는 ‘강지혁 씨’라는 호칭은 그렇게도 귀에 거슬렸다.‘그래, 그녀는 떠날 때 그가 사줬던 물건들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값어치 없는 물건들만 챙겼을 뿐, 심지어... 그녀가 예전에 그에게 줬었던 사진까지 가져갔다.’“사진은 왜 가져가는데?”그는 싸늘하게 내뱉었다.그녀는 멈칫하더니 즉시 그가 말한 사진이 뭔지 알아챘다.“그건 제 사진이니까요. 헤어진 마당에 강지혁 씨도 제 사진을 보기 싫겠죠. 나중에 쓰레기통에 버리느니 차라리 내가 가지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건 네가 나한테 줬던 거잖아.”“그건 제가 혁이한테 줬던 거죠.”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혁이는 없고 강지혁만 남았다.그녀의 한마디가 마치 그의 분노 버튼을 누르기라도
본질적으로 그녀는 단지 놀음 상대일 뿐이었다.“그건 내 일이야.”그의 싸늘한 목소리는 허공에 퍼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그래, 그의 일이지. 그녀는 물어볼 자격조차도 없었다.’“그럼, 사진만 돌려주면 그만 떠나주는 거죠?”임유진은 깊은 심호흡을 반복하며 감정을 끌어내렸다.그는 몸을 멈칫하더니 눈초리도 따라서 가볍게 흔들렸다. 한참 후에야 입에서 한 글자를 내뱉었다.“어.”“그래요. 돌려줄게요.”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서랍을 뒤져 사진첩을 꺼내고는 그녀가 어릴 적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사진을 찾았다.지금 그녀는 단지 그를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이 좁은 방에 머무르는 일분일초마다 그녀의 마음은 따라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그녀는 그를 멀리해야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사진을 강지혁에게 건넸다.그는 사진을 건네받고 고개를 살짝 젖히더니 혼이 나간 채 손에 들린 사진을 몇 번이고 바라봤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한지영이 그의 뺨을 때렸다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정말 지영이가 말한 것처럼 그는 그녀 때문에 지영이를 봐준 걸까?“강현수도 여기 온 적 있어?”싸늘한 목소리는 침묵을 깨고 허공에 울려 퍼지면서 생각에 잠겼던 그녀를 깨웠다.“네?”임유진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자 그의 그윽한 시선이 머물렀다.“왔었어?”그는 다시 한번 곱씹었다.“강지혁 씨, 그건 제 프라이버시에요. 사진은 이미 가졌으니 이젠 떠나도 되죠?”임유진은 말을 마치고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했다.다만 그녀의 손이 문고리에 올려지기도 전에 강지혁의 손은 한발 빨리 그녀가 닫친 문을 열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내 그녀의 온몸으로 그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온화한 숨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강현수한테 갈 거야?”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본능적으로 그를 피하려고 했다. 단지 한쪽으로 비켜섰을 뿐인데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품속으로 더욱 끌어
“현수 씨는 적어도 나를 게임 상대로는 안 보겠죠...”강지혁의 속도 모르고 임유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만해, 그만...!’그는 그녀가 강현수 곁으로 갈 거라는 가능성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입을 닫으려는 듯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럽게 부딪혀 오는 입술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이미 헤어진 사이에 키스가 웬 말인가?‘이런 건 싫어!’그녀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고 강지혁은 그녀가 움직일 수 없게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거칠었던 키스가 끝이 나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 다음, 마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강현수한테 가지 마...”그의 목소리에 임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고는 그와 선을 그으려고 일부러 썼던 강지혁 씨라는 호칭과 존댓말은 어느새 집어던진 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화를 냈다.“강지혁,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강지혁의 눈에 아른거리던 애절함은 그녀의 말에 어느새 분노로 바뀌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자그마한 월세방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때, 무릎 쪽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고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서히 허리를 숙여 손을 무릎 쪽으로 가져다 댔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강지혁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아니... 아무것도 아니야...”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통증을 참아보려 했다.얼마 전 무릎 통증이 재발한 이후로 또다시 이따금 아프기 시작했다. 가벼운 통증일 때도 있었지만 심하게 아플 때도 있었다.강지혁은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의 치마를 위로 올렸다.“지금 뭐 하는...?!”임유진이 깜짝 놀라 외쳤다.치마를 위로 올리자 거기에는 파스로 도배된 그녀의 무릎이 있었다.“무릎 왜 이래? 아픈 거야?”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별거 아니야. 조금 있으면 나아. 그보다 사진도 줬으니
“필요 없어. 병원 갈 정도는 아니야.”임유진이 그를 잡으며 말했다.“출발해.”강지혁의 명령에 기사는 천천히 차에 시동을 걸어 병원으로 향했다.임유진은 이 상태의 강지혁은 누구도 말릴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말리려는 시도를 접은 채 시트에 기대 앉았다.근 몇 년간 의도치 않게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인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다.임유진이 아무런 저항도 없자 강지혁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적막 가득한 차 안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굴은 창백기가 조금 도는 듯했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무릎 통증을 완화하려는 듯 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는 듯 보였다.“계속 아파?”강지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별로, 너무 아픈 건 아니야.”며칠 전 장시간 서 있었을 때 느꼈던 통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치료받으러 안 갔어?”“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병원이 아니야.”서심 병원은 VVIP들이 자주 찾는 병원이라 월급 140만 원짜리 변호사 비서가 쉽게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관절염은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기에 지금의 그녀에겐 부담만 될 뿐이다.“예약은 이제부터 내가 매주 잡아 줄 테니까 꾸준히 치료받아.”그 말에 임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강지혁은 지금, 마치 두 사람이 아직 연인인 것처럼 그녀를 걱정했다.“나 이제 네 여자친구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내 예약을 대신 잡아줄 이유 없어.”강지혁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게 뭐? 우리가 헤어진 건 맞는데 내가 네 진료 예약을 잡는 거는 별개야. 우리가 헤어졌어도 네가 원하는 거, 너한테 필요한 거, 나는 아무런 명분 없이도 너한테 해줄 수 있어. 로펌도 네가 원한다면 차려줄 수 있어.”그러자 임유진이 쓰게 웃었다.이건 뭐 이별 선물인 건가?그녀의 두 눈이 예쁜 그의 두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필요 없어.”그가 주는 걸 그대로 받아버리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