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입원해 있는 동안 경빈 씨는 왔었어요?”탁유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마 지금쯤 S시를 떠났을 거예요. 오히려 그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지 않게.”말을 이어가던 탁유미는 순간 멈칫하더니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드러났다.“그가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에요. 다만 그랑 계속 엮이게 될까 봐 두렵네요.”왜냐하면 그가 그녀에게 안겨준 상처와 아픔은 지독하리만큼 많았다. 심지어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마저도 그녀에게는 아픔이었다.마치 그녀가 한때 사랑이라고 여겼던 게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앞으로 어쩔 생각이세요?”임유진은 물었다. 필경 이경빈이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아마 난 S시를 떠나 그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겠죠.”탁유미는 덤덤하게 말했다.만약 계속 S시에 남는다면 어느날 갑자기 이경빈이 찾아와서 윤이의 존재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그건 그녀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임유진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탁유미가 내린 결정이 이해되긴 했다.“만약 언니가 S시를 떠나게 되면 우린 앞으로 자주 만나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윤이도, 진짜 서운할 것 같아요.”“그래도 영상통화는 자주 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교통이 그렇게 발달해서 막상 만나려고 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요.”탁유미는 약간 감탄한 듯 말을 이어갔다.“사실 나도 이렇게 여기저기 숨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나중에 이경빈이 공수진과 결혼하고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아이를 갖게 된다면 이경빈은 나를 상대할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때면... 이렇게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겠죠.”“언니, 정말 제가 사건 뒤집을 필요 없으세요?”임유진은 다시 한번 이 일에 대해 꺼냈다.“애초에 경빈 씨가 일부러 언니를 해치려 한 게 아닐지도 몰라요. 아마 수진 씨가 이간질하는 바람에 경빈 씨는 언니가 계단에서 수진 씨를 밀어서 유산 시킨 장본인인
어쩌면 그녀는 강지혁과 사귈 때 두 사람은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자궁 손상으로 임신이 어려웠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는 임신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적어도 그녀와 강지혁 사이에는 아이가 있을 리 없었다. 헤어지더라도 깨끗하게 끊을 수 있었다.하지만... 마음속에는 아련한 아쉬움이 있었다.만약 아이가 있다면 자신과 피를 나눈 가족이 생기는 셈이지만 현재 아이가 없으니 결국 그녀에게는 가족이라고 아무도 없었다.아마 늙어서도 죽을 때까지도 혼자일 것이다.임유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윤이의 이쁘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그녀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그녀는 윤이를 안아 올린 후 연속 뽀뽀를 했다. 그리고 생일날 윤이를 초대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특별히 케이크를 사와 윤이와 함께 나눠 먹었다.그리고 이 녀석은 신이 나서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직접 임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예쁜 샌들 한 켤레였는데 샌들 끝에는 가죽 리본이 달려 있었고 신발은 흰색인지라 여름옷과 매치하기 쉬워 손이 자주 갈듯했다.신발은 대체로 몽환적인 소녀의 로맨틱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임유진은 넋이 나간 채 신발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신발을 신어 본지 오래되었다.“이 신발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랑 비슷해요. 이모도 신으면 예쁜 공주가 될 거예요!”윤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녀석은 지금 말을 아주 유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통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보다 더 잘하는 데다가 긴 문장까지 말할 수 있었다.임유진은 싱긋 웃더니 윤이가 보는 앞에서 신발을 갈아신었다. 신발은 의외로 사이즈가 딱 맞았다.“윤이야, 고마워. 신발 너무 이쁘다. 이모 너무 마음에 들어.”임유진은 말을 마치고 또 한 번 윤이를 안아 올리고 볼에 뽀뽀를 했다.윤이의 부드러운 볼은 삽시에 붉어지더니 임유진을 보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사랑스럽고 철이 든 아이를 혹시라도 이경빈한테 뺏길까 봐 걱정하는 유미언니도 이해가
눈에 익은 실루엣이 지금 그녀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새까만 눈동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혁!그가 어떻게 그녀의 월세방에 있는 거지?임유진은 깜짝 놀란 채 방 안에 있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도 잊었다.강지혁은 입술을 꼭 닫은 채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발걸음 걸음마다 위압감이 느껴졌다.“ 왜? 날 본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어!’임유진은 씁쓸해서 생각했다.그녀는 헤어지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동안 계속 그와 마주쳤다.그를 볼 때마다 그녀는 헤어질 때의 아픔, 그리고... 술에 취한 그날, 그가 그녀를 구해줬고 그녀는 취해서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이 계속 떠올랐다.“강지혁 씨, 우리 집엔 웬일이세요?’그녀는 깊게 한숨을 들이쉬고 침착하려고 애썼다.“널 기다렸지.”그는 짤막하게 다섯 글자를 내뱉었다.‘그래, 그의 능력으로 이 집에 들어오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다만... 그녀를 기다렸다니?’“전 더 이상 강지혁 씨랑 할 얘기가 없어요. 헤어질 때 이미 다 얘기했거든요. 그리고 강씨 저택에서 나올 때 제 물건만 갖고 나왔어요.”그는 안색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녀가 뱉어내는 ‘강지혁 씨’라는 호칭은 그렇게도 귀에 거슬렸다.‘그래, 그녀는 떠날 때 그가 사줬던 물건들을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값어치 없는 물건들만 챙겼을 뿐, 심지어... 그녀가 예전에 그에게 줬었던 사진까지 가져갔다.’“사진은 왜 가져가는데?”그는 싸늘하게 내뱉었다.그녀는 멈칫하더니 즉시 그가 말한 사진이 뭔지 알아챘다.“그건 제 사진이니까요. 헤어진 마당에 강지혁 씨도 제 사진을 보기 싫겠죠. 나중에 쓰레기통에 버리느니 차라리 내가 가지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그건 네가 나한테 줬던 거잖아.”“그건 제가 혁이한테 줬던 거죠.”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혁이는 없고 강지혁만 남았다.그녀의 한마디가 마치 그의 분노 버튼을 누르기라도
본질적으로 그녀는 단지 놀음 상대일 뿐이었다.“그건 내 일이야.”그의 싸늘한 목소리는 허공에 퍼지더니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그래, 그의 일이지. 그녀는 물어볼 자격조차도 없었다.’“그럼, 사진만 돌려주면 그만 떠나주는 거죠?”임유진은 깊은 심호흡을 반복하며 감정을 끌어내렸다.그는 몸을 멈칫하더니 눈초리도 따라서 가볍게 흔들렸다. 한참 후에야 입에서 한 글자를 내뱉었다.“어.”“그래요. 돌려줄게요.”그녀는 그를 밀어내고 서랍을 뒤져 사진첩을 꺼내고는 그녀가 어릴 적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사진을 찾았다.지금 그녀는 단지 그를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이 좁은 방에 머무르는 일분일초마다 그녀의 마음은 따라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그녀는 그를 멀리해야만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를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사진을 강지혁에게 건넸다.그는 사진을 건네받고 고개를 살짝 젖히더니 혼이 나간 채 손에 들린 사진을 몇 번이고 바라봤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한지영이 그의 뺨을 때렸다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정말 지영이가 말한 것처럼 그는 그녀 때문에 지영이를 봐준 걸까?“강현수도 여기 온 적 있어?”싸늘한 목소리는 침묵을 깨고 허공에 울려 퍼지면서 생각에 잠겼던 그녀를 깨웠다.“네?”임유진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자 그의 그윽한 시선이 머물렀다.“왔었어?”그는 다시 한번 곱씹었다.“강지혁 씨, 그건 제 프라이버시에요. 사진은 이미 가졌으니 이젠 떠나도 되죠?”임유진은 말을 마치고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고 했다.다만 그녀의 손이 문고리에 올려지기도 전에 강지혁의 손은 한발 빨리 그녀가 닫친 문을 열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이내 그녀의 온몸으로 그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온화한 숨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강현수한테 갈 거야?”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본능적으로 그를 피하려고 했다. 단지 한쪽으로 비켜섰을 뿐인데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품속으로 더욱 끌어
“현수 씨는 적어도 나를 게임 상대로는 안 보겠죠...”강지혁의 속도 모르고 임유진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만해, 그만...!’그는 그녀가 강현수 곁으로 갈 거라는 가능성 따윈 듣고 싶지 않았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입을 닫으려는 듯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임유진은 갑작스럽게 부딪혀 오는 입술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이미 헤어진 사이에 키스가 웬 말인가?‘이런 건 싫어!’그녀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고 강지혁은 그녀가 움직일 수 없게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얼마나 지났을까, 거칠었던 키스가 끝이 나고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댄 다음, 마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강현수한테 가지 마...”그의 목소리에 임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고는 그와 선을 그으려고 일부러 썼던 강지혁 씨라는 호칭과 존댓말은 어느새 집어던진 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화를 냈다.“강지혁,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강지혁의 눈에 아른거리던 애절함은 그녀의 말에 어느새 분노로 바뀌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자그마한 월세방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때, 무릎 쪽에서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고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서히 허리를 숙여 손을 무릎 쪽으로 가져다 댔다.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강지혁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아니... 아무것도 아니야...”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애써 통증을 참아보려 했다.얼마 전 무릎 통증이 재발한 이후로 또다시 이따금 아프기 시작했다. 가벼운 통증일 때도 있었지만 심하게 아플 때도 있었다.강지혁은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의 치마를 위로 올렸다.“지금 뭐 하는...?!”임유진이 깜짝 놀라 외쳤다.치마를 위로 올리자 거기에는 파스로 도배된 그녀의 무릎이 있었다.“무릎 왜 이래? 아픈 거야?”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별거 아니야. 조금 있으면 나아. 그보다 사진도 줬으니
“필요 없어. 병원 갈 정도는 아니야.”임유진이 그를 잡으며 말했다.“출발해.”강지혁의 명령에 기사는 천천히 차에 시동을 걸어 병원으로 향했다.임유진은 이 상태의 강지혁은 누구도 말릴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말리려는 시도를 접은 채 시트에 기대 앉았다.근 몇 년간 의도치 않게 배운 게 있다면 그건 인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다.임유진이 아무런 저항도 없자 강지혁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적막 가득한 차 안에서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굴은 창백기가 조금 도는 듯했고 시선은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무릎 통증을 완화하려는 듯 다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건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는 듯 보였다.“계속 아파?”강지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별로, 너무 아픈 건 아니야.”며칠 전 장시간 서 있었을 때 느꼈던 통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치료받으러 안 갔어?”“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병원이 아니야.”서심 병원은 VVIP들이 자주 찾는 병원이라 월급 140만 원짜리 변호사 비서가 쉽게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관절염은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기에 지금의 그녀에겐 부담만 될 뿐이다.“예약은 이제부터 내가 매주 잡아 줄 테니까 꾸준히 치료받아.”그 말에 임유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강지혁은 지금, 마치 두 사람이 아직 연인인 것처럼 그녀를 걱정했다.“나 이제 네 여자친구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내 예약을 대신 잡아줄 이유 없어.”강지혁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게 뭐? 우리가 헤어진 건 맞는데 내가 네 진료 예약을 잡는 거는 별개야. 우리가 헤어졌어도 네가 원하는 거, 너한테 필요한 거, 나는 아무런 명분 없이도 너한테 해줄 수 있어. 로펌도 네가 원한다면 차려줄 수 있어.”그러자 임유진이 쓰게 웃었다.이건 뭐 이별 선물인 건가?그녀의 두 눈이 예쁜 그의 두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필요 없어.”그가 주는 걸 그대로 받아버리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어느새 병원 앞에 멈춰 섰다. 강지혁은 아까처럼 임유진을 안아 들고 병원으로 들어갔다.의사는 전에 임유진을 치료해줬던 의사였다.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의사가 말했다.“복용하던 약을 갑작스럽게 끊는 바람에 통증이 재발한 것 같네요. 게다가 추운 곳에 오랜 시간 있어 더 욱신거리는 거고요. 관절염은 장기간 꾸준히 치료받아야 합니다. 도중에 약을 끊게 되면 오히려 더 악화할 수도 있어요.”“약 처방부터 해주세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매주 진료받으러 오게 할게요.”강지혁이 말했다.“아니요. 그냥 진통제만 처방해주세요.”상반되는 두 사람의 말에 의사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봤다.“제가 말한 대로 해주세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호사를 불러 약을 가지고 오게 했다.그리고 강지혁은 곧바로 임유진의 자궁을 치료해줬던 산부인과 전문의까지 불러왔다. 하지만 그걸 본 임유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럴 필요 없어.”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뭐라고 하려는데 임유진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때는 아이를 원해서 치료받았던 거지만, 지금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굳이 치료받을 필요도 없겠지.”강지혁은 그녀를 뚫어지게 보더니 의사에게 나가라며 손짓을 했다.임유진은 특실 소파에 앉아 또다시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통증은 여전했고 이대로라면 짧게는 2, 3시간, 길게는 7, 8시간까지 통증이 이어질 것이다.그때, 강지혁이 한쪽 무릎을 꿇어 임유진 앞에 자리하더니 그녀를 대신해 무릎과 다리를 마사지해주기 시작했다.예쁜 손이 적당한 힘으로 규칙적이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 임유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리고 그와 닿은 부분만 데일 것처럼 뜨거워 났다.“좀 괜찮아?”조용한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다.임유진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그녀는 언뜻 자신을 향한 그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읽은 것만 같았다.하지만... 걱정이라니, 이제는 눈까지 맛이 간 건가?
“키... 키스? 내가? 너한테?”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고 많이 당황한 듯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임유진의 표정 변화에 강지혁의 눈빛은 어느새 위험하게 빛났다.“그래, 그날 밤, 그릴앤바 앞에서.”“...”‘그릴앤바?’임유진은 이제 식은땀까지 났다.필름이 끊겨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날 술에 취해 키스까지 했다는 건가?“못 믿겠으면 고이준이라도 불러올까?”고이준이라면 항상 곁에 있는 그 비서?그럼 단순히 둘이 있을 때 한 게 아니라 제삼자가 보는 앞에서 했다는 건가?임유진의 얼굴은 이제 데일 것처럼 빨개졌다.“아니면 그 근처 CCTV라도 돌려볼래?”CCTV까지...임유진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아... 아니, 됐어.”그녀는 상당히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술 따위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이 순간, 강지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지금, 마치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한 얼굴을 했고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에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천천히 몸을 그녀에게로 기울였다.덜컥.바로 그때 특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임유진의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어마어마한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그녀가 본 건 강지혁이 임유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서 그녀의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은 임유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고 그 눈빛에는 욕망과 애절함이 잔뜩 섞여 있었다. 오직 눈앞에 있는 이 여자밖에 안 보이는 듯이...이 남자가 정말 그 강지혁이 맞는 건가?여자에게는 관심 없다던 사람이 맞나?전에 강지혁이 여자를 데리고 병원에 왔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그걸 두 눈으로 보게 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한편, 문이 열리는 소리에 강지혁과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강지혁의 절절한 눈빛은 어느새 차가운 눈빛으로 바뀌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