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일반인이에요... 옛날엔 친구였는데 지금은 연락 안 해요.”임유진은 씁쓸해서 말했다.차 변호사는 뭔가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그럼 그 친구에게 잘해야겠네요.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유진 씨는 지금 변호사 일을 할 수도 없었을 거예요.”임유진은 차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방금 새 상사가 그녀를 도와 사건을 뒤집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꼬치꼬치 캐 묻을까 봐 걱정이었다.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임유진은 일을 손에 익히기 시작했다.처음 입사했을 때, 그녀도 반년 동안 비서로 일했던지라 지금 다시 비서 일을 하니 오히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일이 좀 사소하고 잡다하긴 하지만 어렵지는 않았다.정한나는 그녀의 앞에서 어슬렁거리더니 강지혁에 관한 일을 슬쩍 물었지만 임유진은 덤덤하게 그 물음들을 비껴갔다.퇴근 시간이 되자, 임유진은 막 퇴근하려는데 마침 장한나의 소리가 들렸다.“오늘 유진 씨가 새로 입사했는데 우리 유진 씨를 위해 환영하는 겸 회식하는 게 어때요?”사람들은 이내 맞장구를 쳤다.“좋아요. 새 동료의 입사를 축하해요.”“그러게요. 어쩌다 여자 동료가 입사했는데 축하해야죠!”“그럼 다 같이 가시죠.”임유진은 상황을 보고 거절하기도 무안했다. 게다가 필경 그녀가 처음 입사했기 때문에 인간관계도 가꾸어야 했다. 만약 출근 첫날부터 어울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계속 함께 어울리기 어려울 것이었다.그리고 변호사 같은 직업은 인맥이 중요하다.비록 장한나가 제기한 제안이었고 분명히 호의는 아니었지만 임유진은 이 상황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는 장한나가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도 생각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회식하자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임유진이 지원한 직책은 비서인지라 회식에 참석하는 것은 사무소에서 경력이 짧은 변호사거나 임유진과 마찬가지로 비서뿐이었다.그런데 이 사람들만 합쳐도 열 명쯤 되었다.다만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임유진은 그릴앤바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자, 우리 새로 입사한 임유진 비서를 위하여!”직장동료는 잔을 들고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회식 자리의 주인공인 임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이 술을 권하는 대상이었다.임유진의 주량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몇 잔만 마셨는데도 약간 어질어질했다.그녀는 동료들이 술을 권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대며 화장실에 갔다.화장실에서 임유진은 세면대 옆에 기댄 채 술기운 때문에 뜨거워진 얼굴을 물로 헹궜다.그리고 그녀의 눈동자는 거울 속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이마와 볼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빨개진 두 볼, 앙증맞은 코, 그리고 평소보다 더 붉은 입술.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속눈썹은 마치 작은 부채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자신의 속눈썹이 매우 길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연하게 화장할 때면 마스카라도 할 필요 없었다. 하지만 강지혁을 만난 후, 그녀는 남자의 속눈썹도 그렇게 예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혁이의 속눈썹은 엄청 예뻤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속눈썹이 매번 흔들릴 때마다 사람을 설레게 했다. 그녀로 하여금 감정을 억누를 수 없게 했다...세상에, 그녀는 또 그의 생각을 했다.임유진은 머리를 힘껏 저으며 다시 찬물로 얼굴을 씻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이 세상에는 더 이상 혁이는 없다. 다만 강지혁만 있을 뿐이다.그녀는 심호흡하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찬물로 세수했는데도 머리가 어지럽고 조금 있으면 더 취할 것만 같았다.마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지영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전화 너머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어딨어? 집에 없던데?”“너... 나 찾으러 갔어?”임유진은 입을 열었다.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술에 취해 혀가 꼬였다.“응, 근데 너 목소리 왜 그래?”한지영은 이내 되물었다.“술 좀 마셨어.”“술? 어디서?”한지영은 갑자기 긴장되었다. 필경 유진이는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깐.“그릴앤바.”임유진은 대답했다
임유진은 강지혁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하려는 걸 느끼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렇게 막 몸을 돌려 옆으로 지나가려는데 마침 그녀 쪽으로 다가온 누군가와 부딪혀버리고 말았다.“죄송합니다!”임유진은 얼른 그에게 사과했다.“앞을 똑바로 안 보고 다녀?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부딪혀?!”그녀가 부딪힌 남자는 술에 잔뜩 취했는지 고약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지금, 이 상황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과뿐이었다.그때 옆으로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고 그녀는 단번에 그게 강지혁이라는 걸 알아챘다.낯선 사람한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여줘 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창피함과 쓸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건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까?이미 헤어진 사이라고는 하나, 연인이었을 당시 비참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고는 하나 지금만큼은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머리가 점점 더 어지러워 나고 있음을 느낀 임유진은 가능한 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와 부딪힌 이 술주정뱅이는 쉽게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그렇게 죄송하면 내 술 상대 좀 해. 평생 마셔볼 일 없는 좋은 술을 맘껏 맛볼 수 있을 거야.”남자가 느끼한 말을 하며 임유진의 어깨를 끌어안듯 몸을 가까이 붙여오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해버렸다.임유진은 이런 술주정뱅이와는 이 이상 엮이면 못 볼 꼴만 보게 될 게 뻔할 거라는 생각에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임유진을 끌어안으려는 목적에 실패한 남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바로 다리를 들어 그녀의 몸을 힘껏 차버렸다.갑작스러운 공격에 임유진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뒤뚱거리거니 그대로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자에게 맞은 왼쪽 허리에서 알싸한 고통이 일었다.“이런 X 년이, 감히 튕겨? 내가 좋게 좋게 넘어가 줬으면 고맙다고 안길 것이지. 어디서 감히 내 손을 피해?”남자는 거친 욕을 마구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까 남자에게 얻어맞은 왼쪽 허리에서 또다시 심한 통증이 일었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많이 아파?”청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더니 곧 예쁜 손이 그녀의 왼쪽 허리를 살포시 감쌌다.그에 임유진의 몸이 티 나게 굳어버렸고 그와 닿고 있는 왼쪽 허리만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지금 강지혁의 얼굴은 속눈썹까지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역시... 예쁘네.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면 그녀의 심장도 같이 떨리는 듯했다. 그녀의 얼음장 같던 마음을 녹여줬던 것도 이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녹았던 그 마음이 이제는 또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이를 깨물고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더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강지혁 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전... 괜찮아요.”그녀는 오랜만에 존댓말까지 써가며 정중하게 인사한 후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강지혁의 손을 서서히 풀어버렸다. 그러고는 조금 비틀거리며 다시 룸으로 향했다.한편, 강지혁은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고, 두 손은 갈 길을 잃은 채 그녀가 움직여 줬던 그대로 가만히 굳어버렸다.손에는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아까 임유진을 본 순간 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녀가 웬 남자한테 맞았을 때는 살인 충동마저도 느꼈다.이제 더는 그녀를 의식하지 말자고 매번 다짐하지만, 임유진의 얼굴만 보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가는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둘은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대표님.”그때 고이준이 강지혁을 불렀다.주위에는 어느덧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고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에 가게 매니저와 경호원들까지 달려왔다.물론 허겁지겁 달려왔다가 강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서로 말이라도 맞춘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나더러 강지혁 씨래.”강지혁의 뜬금없는
강지혁의 지시에서는 일말의 동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주위 사람들은 이쯤 되니 소란의 중심에 있다가 홀연히 사라진 여성의 정체가 뭔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천하의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풍하 그룹 회장 아들의 다리를 부러트린다니! 이걸로 풍하 그룹과의 협력은 더 이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아무리 풍하 그룹이 가족경영의 중소기업이라고는 하나 고작 여자 때문에 이런다는 게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같은 시각, 임유진은 방금 있었던 소란 때문인지 점점 더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고 룸으로 돌아왔을 때는 머리까지 어지러워 났다.“유진 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괜... 찮아요.”동료의 걱정에 임유진은 애써 웃어 보였다.“다들 기분 좋게 마신 것 같으니까 환영회는 이쯤하고 끝낼까요? 유진 씨도 오늘 힘들었을 텐데 얼른 쉬게 해줘야죠.”정한나는 웨이터를 불러 계산서를 가져오도록 했다.회식 비용은 총 1460만 원이 나왔고 이건 임유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가격이었다.당연히 더치페이일 줄 알고 핸드폰을 꺼내 들려던 찰나 정한나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오늘 로펌 식구들이 특별히 축하까지 해줬으니까 오늘은 유진 씨가 쏘는 거 어때요? 강지혁 씨 여자친구인데 이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잖아요.”임유진은 그제야 정한나의 속셈을 눈치챘다. 정한나는 지금 일부러 동료들 앞에서 임유진에게 회식 턱을 내게 해 강지혁과 지금 어떤 사이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다.정한나의 얼굴에 핀 웃음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역겹고 소름이 끼쳤다.“저 돈 없어요.”임유진의 계좌 잔액은 단돈 156만 원이 전부였다.“어머, 유진 씨, 왜 이래요. 유진 씨가 돈이 없으면 강지혁 씨한테 대신 계산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S 시에서 제일 부자인 남자친구를 뒀으면서 이 정도 요구도 못 해요?”정한나가 생긋생긋 웃으며 말했다.“저 돈 없어요.”임유진은 술에 취
임유진을 그렇게 환영해 줬던 동료들은 종잇장 뒤집듯 태도를 바꿨고 정한나는 이 모든 상황을 흐뭇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그녀가 원했던 장면이 바로 이거였다!임유진이 망신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녀는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고 그동안 묵혔던 체증이 싹 내려가는 느낌까지 들었다.애초에 임유진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이전 로펌에서 해고되고 이곳저곳 헤매는 일도 없을 거라고 정한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때 옆에서 쭉 지켜보던 남자 동료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다들 그만해요.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같은 동료끼리. 그리고 유진 씨가 언제 회식비를 내겠다고 했어요. 오늘은 그냥 더치페이로 합시다.”그의 한마디에 신나서 떠들던 동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쭈뼛거렸다.남자 동료가 말했듯 임유진은 단 한 번도 회식 턱을 내겠다고 한 적이 없었고 더군다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꾸준히 봐야 할 동료들이었기에 더치페이를 못 하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남자 동료는 일단 자기가 먼저 계산하고 이따 송금해 달라며 웨이터에게로 향했다.“계산할 필요 없으세요. 이미 어떤 분이 계산하셨거든요.”“네??”웨이터의 말에 룸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체 누가 그 많은 돈을 선뜻 계산했단 말인가!“혹시 다른 테이블이랑 헷갈리신 건 아니에요? 저희 중 누구도 계산한 사람이 없어서요.”정한나가 물었다.“확실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웨이터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룸을 빠져나갔다.룸에 남겨진 사람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대체 누가 계산한 거지?그러다 문득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임유진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비틀거리다 간신히 가방을 들더니 조용히 읊조렸다.“계산... 다 했다고 하니까 이제 가도 되죠?”그러고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룸을 나갔다.머리는 점점 더 어지럽고 그녀는 이제는 눈앞의 길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강지혁이... 계산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큰돈을 소리 소
누구지? 대체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달콤하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 말에 임유진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내가 평생 지켜줄게. 절대 너 억울한 일, 힘든 일 없게 내가 옆에서 널 지켜줄게.”‘아... 이건 혁이구나.’이건 강지혁이 그녀에게 해줬던 말이었다.강지혁이 해줬던 달콤한 말들은 마치 누가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임유진의 귓가에 맴돌았다.그만 생각해. 제발 그만 생각하라고...!임유진은 쭈그려 앉은 채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그때 희미하게나마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더욱더 선명하게 들려왔다.누구지?그녀의 눈에 검은색 구두가 들어왔다.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강지혁의 얼굴이다... 아까 그릴앤바 안에서 봤던 모습하고 똑같았다.취한 탓에 헛걸 보는 걸까? 이제는 환청뿐만 아니라 환각까지 보이는 걸까?임유진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너... 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 마.”그녀는 강지혁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간신히 마음을 정리하려나 싶다가도 그의 얼굴만 보면 또다시 마음이 일렁였다.한편 강지혁도 마찬가지로 눈앞에 있는 여인을 빤히 바라봤다.눈동자가 흐릿하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게다가 힘겹게 몸을 지탱하려고 애쓴다고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가 행여 임유진이 바닥에 넘어질까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그의 행동에 임유진의 미간이 찌푸려졌고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아직도 아파?”그는 문득 자신이 잡은 곳이 아까 그녀가 다쳤던 왼쪽 허리라는 걸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다 임유진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한 남자를 떠올리고 남은 한쪽 다리도 부러트릴 걸 그랬다며 이를 꽉 깨물었다.임유진은 몽롱한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아직도 아프냐고? 어떻게 안 아플 수 있을까. 아까 맞은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혁아, 나 이제 네 생각하는 거 그만할래. 이제는 매일매일, 네 생각했던 거 그만둘래...”임유진은 취기를 빌어 그동안 묵혀뒀던 말들을 전부 다 전하려는 듯했다.“너한테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는 게 그토록 쉬운 일이었구나. 우리는 대체... 누가 누구를 배신했던 걸까...? 맞다, 오늘은 고마워... 나 구해줘서 고맙고... 계산해준 것도 고마워. 하지만 난... 이제 너한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아니다. 하나 있네. 이제 더는 네 생각 안 하고 너한테 이렇게 들러붙지도 않을게... 나 그 정도로 질척거리는 사람 아니야... 걱정하지 마...”임유진은 알까?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강지혁의 심장에 꽂히고 있다는걸...강지혁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미 헤어졌는데,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는데 대체 왜 그녀는 아직도 그의 모든 감정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걸까?취기 때문에 어눌한 임유진의 말이, 임유진의 바보 같은 웃음이, 임유진의 모든 행동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알겠으니까 그만 말해.”강지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듯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그러면... 딱 한 마디만 더 할게.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임유진은 천천히 발끝을 들더니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그녀의 술 냄새와 온기가 천천히 그의 입술 위에 퍼져갔다.강지혁은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린 듯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반면, 임유진은 이 모든 키스에 그녀의 감정 전부를 담으려는 듯 그를 잡고 열심히 입을 맞췄다.키스가 길어지자, 강지혁의 심장은 점점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손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그는 지금 두려워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을?눈앞에 있는 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여자일 뿐이었지만 그는 지금 세상 그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