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백소은이 목소리를 낮췄다.“지연이랑 결혼은…….”“작은어머니!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여민우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촌 동생이지만, 사촌 동생이랑 결혼이라니,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가요! 그리고 작은어머니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요. 부모님이 간섭만 하지 않았어도 이미 결혼했을 거예요.”“그래 그래, 작은엄마가 농담한 거야.”백소은이 여민우의 어깨를 토닥이고 연회장으로 돌아갔다.여민우와 여민기, 두 사람 중 더 나은 건 여민우였다. 하지만 여민우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으니, 그렇게 쉽게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남은 건 여민기였다.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지연을 바라보며 백소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연아, 날 원망하지 말 거라. 나도 여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단다.’지연이 영원히 과거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백소은은 지연을 평생 품어줄 생각이 있었다.하지만 어느 날인가 과거를 되찾게 된다면, 여씨 가문에 한을 품지 못하게 할 방법은 여씨 가문의 후대를 낳는 것뿐이었다.“어머니, 하실 말씀이 뭐예요?”지연이 걸어와 물었다.“네 할머니가 몸이 조금 불편하시대. 네가 마사지를 참 잘하지 않느냐? 할머니 어깨 좀 주물러 드려.”백소은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네가 선물한 백자 다기가 퍽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그리고 네가 마사지까지 해준다면 앞으로 할머니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될 거야.”지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박정순이 아무리 눈치를 줘도 지연은 대수롭지 않았다.하지만 백소은이 애써 챙겨준 것으로 생각한 지연은 별말 없이 휴게실로 걸어갔다.휴게실 문은 닫혀 있었고, 지연이 노크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지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여민기가 나른한 모습으로 소파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지연의 등장에 여민기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왜 그쪽이 들어오는 거예요?”지연이 입구에
여민기는 음주를 즐기는 사람이었으므로, 두 잔은 그에게 있어 별일이 아니었다.탁자 위로 놓인 두 잔의 술을 여민기는 바로 고개를 젖혀 마셔버렸다.지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다.‘왜 탁자 위에 술 두 잔이 있는 거지?’‘전에 휴게실을 사용한 사람이 남긴 걸까, 아니면 누가 따로 주문한 걸까?’‘어떻게 딱 두 잔이 있는 거지.’지연은 계속해서 여민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는데, 여민기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보였다.“지연 누나,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네요.”여민기는 갑자기 지연에게 다가갔고, 알콜 냄새가 지연에게까지 훅 전해졌다.가까운 곳에서 보니, 지연의 아름다운 미모는 더 대단했다.비록 소문난 플레이보이라고 할지라도, 여민기는 여자에게 강압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지연 누나, 이 술 이상해요!”여민기가 힘겹게 말을 뱉었다.지연은 처음부터 두 잔만 남겨진 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빈 술잔을 들고 지연은 가볍게 향을 맡았다.알콜 향 외에도 진한 꽃 향이 느껴졌다.이건 바로 범죄에 이용되는 약물이었다!지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려는데, 여민기가 단번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쥐었다.“이 손 놔요!”지연이 차갑게 말했다.“누나, 저, 저도 그러고 싶은데……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요.”지연의 말에 손을 거두었지만 여민기는 바로 다시 손을 올렸다.“누나, 누나는 빨리 나가요. 가능하다면 다른 여자를 이곳으로 보내줘요.”“…….”“주씨 가문 둘째 딸이 제 전 여자 친구예요.”여민기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힘겹게 말했다.“오늘 재결합하고 싶다고 날 찾아왔었는데, 그 사람이라면 날 도울 수 있을 거예요.”지연이 입꼬리를 매만졌다.“주씨 가문 둘째 아가씨는 아직 학생인데요.”“오늘, 이 연회장에서 나와 관계를 맺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어요. 또 누굴 찾을 수 있겠어요!”여민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지연 누나, 혹시 누나가 약을 탄 건 아니에요? 설마, 누나가 나한테…….
“어머님, 연회가 끝나면 민기를 시켜 집으로 모실 게요.”여씨 가문 첫째 며느리, 이경은이 입을 열었다.“어머니, 안에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백자 다기로 차를 끓여 올 게요.”방안의 지연이 눈썹 한쪽을 치켜세우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일부러 박정순을 이곳으로 유인해, 지연과 여민기의 여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려는 계획인 듯싶었다.‘그렇다면 내 명성을 무너뜨리거나, 민기와 날 결혼시키려는 목적일 텐데.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계획한 거지?’딸깍-문이 가볍게 열렸다.“어머나, 지연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이경은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너 혼자 여기 있었던 거야?”지연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그럼 누가 더 있어야 하는데요?”“아니, 왜 네가 혼자 이곳에 있는지 물어본 거야.”이경은이 지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연회장 안에 손님들이 아직 많은데,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어?”지연이 술병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방에서 좋은 술을 발견했는데, 맛이 참 좋더라고요. 큰어머니, 마셔 보실 래요?”그리고 술을 따른 잔을 이경은에게 내밀었다.지연은 이경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나와 큰어머니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데, 왜 본인의 아들을 미끼로 이런 계획을 세운 거지?’“연회장에서 술을 많이 마셨더니 더는 못 마시겠어.”이경은이 인상을 찌푸렸다.“지연아, 볼일 없으면 차 끓이는 거나 확인하러 갈래? 할머니가 마실 차 한잔 가져와 줘.”이경은의 표정과 몸짓 모두 너무 자연스러웠다. 심지어 여민기의 행방은 물어보지도 않았다.굳은 표정의 지연이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던 백소은에게 향했다.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감히 시선을 앞으로 돌리지 못하는 모양이 퍽 불안해 보였다.지연이 술잔을 백소은에게 건넸다.“어머니, 무슨 맛인지 한번 마셔 보시겠어요?”“난…….”고개를 든 백소은의 눈빛에는 불안과 죄책감이 드러났다.이런 표정에 지연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오늘 일은 꾸민 사람은 큰어머니가
지연의 머릿속에는 3년 동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백소은은 자기 친딸 여지수를 애지중지 아꼈지만, 양딸인 지연에게도 전혀 부족한 것 없는 보살핌을 주었다.지수가 가진 건 지연도 가졌다.지연의 방은 지수의 것과 똑같은 평 방수와, 똑같은 가구로 모든 게 일치했다.백소은이 지연에게 잘해줄수록, 지연은 자신이 이런 보살핌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받아도 되는 사람인지를 고민했다.백소은이 아낌없이 주는 사랑에 지연은 여씨 가문에 남았고, 여태껏 그곳을 떠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일은…….”“네가 권석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다른 혼사를 알아봐야 했어. 민기가 아직 철이 없어 그렇지 나쁜 아이는 아니야.”백소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꿋꿋이 말을 이었다.“네가 만약 민기와 결혼을 한다면, 내가 평생 널 지켜줄 수 있어.”지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어머니, 이 일에 있어 할머니 의견을 물어보셨나요? 큰어머니는 요? 아니면 여민기의 의견이라도 물어보셨어요?”백소은이 침묵하자 지연이 말을 이었다.“당사자의 의견은 하나도 묻지 않고 어머니 멋대로 이 상황을 만들고, 큰어머니가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결과일지 생각해 보셨어요? 큰어머니 눈에 저는 별 볼 일 없는 양녀일 텐데, 어떻게 감히 가문의 작은 도련님과 결혼할 수 있겠어요? 어머니의 계획대로 됐다면 여씨 가문의 두 아들 사이가 악화하고, 가문에 분열이 생길 수도 있었어요. 우리 가문을 노리는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조금의 분열이 보인다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에요.”“지연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백소은이 입술을 달싹였다.이 일은 여진태의 허락을 받았었다. 여진석, 여진태 두 형제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계획이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건데, 이 혼사에 이경은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백소은은 생각했다.“지연아, 넌 이렇게 예쁘고 능력도 있는데, 왜 민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고 할 수 있겠어? 절대 너 자신을 의심하지 마!”지연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여진태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우자, 현장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여진태는 여씨 그룹의 대표로, 성수시에서도 높은 명성을 쌓아왔다. 오지성 국장이 그나마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여진태 대표님, 잠시 서로 가셔서 차 한잔 마시며 조사를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한 조사가 끝나면 바로 돌아가실 수 있으세요.”“오지성 국장, 할 말 있으면 좋게 좋게 하세.”박정순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조사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 여씨 그룹은 얼마든지 협조할 테니, 굳이 서로 이동하지 않는 게 어떻겠는가.”경찰서로 출석한다면 명성에 얼룩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여씨 그룹에 작은 오점이 생긴다면 성수시에서의 지위가 한층 꺾이는 건 시간문제였다.오지성 국장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어르신,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상대가 성남시 거물이라서요. 위쪽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지시하니 어쩔 수 없이 조사할 테지만, 너무 큰 걱정은 마세요. 별문제가 없다면 바로 돌아오실 수 있을 거예요.”오지성 국장이 손을 흔들자, 젊은 두 경찰이 바로 여진태를 양옆으로 끼고 밖으로 호송했다.여진태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덤덤하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권씨 그룹, 차씨 그룹, 이씨 그룹이 함께 참여한 거예요. 어머니가 연락 좀 돌려주세요.”그리고 여진태는 경찰차 안으로 올라탔다.이경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멀쩡하던 프로젝트에 왜 갑자기 일이 생긴 거예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예요?”이경은이 바로 김성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권씨 그룹이 제일 큰 투자자인데, 권씨 그룹은 왜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김성희는 빠르게 손을 빼냈다.“조사 협조일 뿐인데 사모님, 너무 당황해 마세요. 오늘 연회도 이쯤이면 끝이 난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김성희가 발걸음을 돌리자 다른 손님들도 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났다.시끌벅적하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여진석이 핸드폰을 들고 나타났다.“사람을 찾아 물어보니, 어제
박정순 팔순 잔치는 그렇게 갑작스레 끝이 났다.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큰 집으로 모여 초조한 얼굴로 소식을 기다렸다.밤 9시가 되고, 여민우와 여민기는 피곤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성수시 수많은 가문이 성남시에서 온 거물을 한번 만나겠다고, 호텔 밖에서 줄을 섰어요.”여민우가 실망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8시 반이 넘어서자, 모든 사람이 호텔 밖으로 내쫓아졌어요. 성수시 시장도 거물을 만나지 못 했다고요.”이경은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대체 누군데 시장까지 호텔을 찾아간 거야?”“성남시 강씨 그룹 대표.”여진석이 물었다.“강씨 그룹이라고 다들 들어본 적 있어?”이에 박정순이 고개를 끄덕였다.“성남시에 있는 세계 1위 그룹인 강씨 그룹을 누가 몰라? 강씨 그룹은 지금껏 해외나 국제도시에만 투자를 해왔는데, 왜 우리 성수시처럼 작은 도시를 찾아왔지?”“우리 프로젝트의 배수 지역을 바로 강씨 그룹이 인수했어요.”여민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강씨 그룹이 성수시에서 발을 붙이려고 제일 먼저 우리 여씨 그룹을 과녁으로 돌린 모양이에요. 지금 성수시 다른 그룹들은 그 다음 순서가 본인이 될까 봐 걱정하고 있어요.”“그러면 이젠 어쩌면 좋아요?”이경은이 발을 동동 굴렀다.“진태 씨는 아직 경찰서에 있어요.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추운 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면, 허리와 무릎 고질병이 또 도질 텐데.”여진석이 고개를 들었다.“내부 직원에게 물어보니, 강씨 그룹이 성수시에 구축한 인터넷 시스템이 3시간 전 해킹 당했다고 하더군요. 기밀 정보 유출 가능성이 있다 보니 강씨 그룹은 아마 보안에 모든 신경을 돌렸을 겁니다. 우리 여씨 가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예요.”여민기가 눈을 반짝였다.“작은아버지 뜻은, 강씨 그룹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버지를 경찰서에서 빼낼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무슨 생각 하는 거야!”여민우가 여민기를 노려보았다.“작은아버지 말씀은 우리가 강씨 그룹을 도와 보안 문제를 해결한다면 강씨 그룹에게
“닥쳐!”여지수가 여민기를 노려보았다.“우리 가문에서 사고를 제일 자주 저지르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그만하거라!”박정순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말다툼이나 하고 있어? 다들 조용히 하고 방으로 돌아가서 쉬거라.”그날 밤, 여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큰 집에서 묵었다.이튿날 아침, 여민우는 여지연, 여지수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성수시 5성급 호텔 앞으로 기자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크고 작은 대포 카메라를 멘 기자들은 오매불망 호텔 입구를 바라보았다.기자를 제외하고, 성수시 다른 가문 사람들의 책임자들도 문 앞을 지켰다.지연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권씨 그룹, 이씨 그룹, 차씨 그룹…… 이번 프로젝트 투자자인 그룹 책임자들을 보았다.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자, 모든 책임은 여씨 그룹이 떠안게 만든 장본인들이었다.한때는 우호적인 파트너였지만, 오늘날 호텔 입구에서 마주쳐도 서로 인사도 주고받지 않았다.“강씨 그룹 대표는 언제쯤 나와요?”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기자가 직원에게 물었다.“대표님은 아직 많은 회의가 잡혀 모든 손님을 받지 않고 계십니다. 호텔을 떠날 계획도 없으시니 다들 돌아가시죠.”직원의 말에 현장 모든 사람이 실망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여민우가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내가 직원과 몇 마디 해볼 게요.”여민우가 직원에게 발걸음을 옮겼다.“강씨 그룹이 성수시에 건립한 인터넷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전해 들었어요. 천재 해커를 모시고 왔는데, 대표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직원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오늘 이곳을 찾은 대부분 가문 사람이 해커를 데리고 왔어요. 그 사람들에게 모두 기회를 준다면 강씨 그룹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나요? 이 일은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시고 이만 돌아가세요.”직원은 이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강현석을 모시는 정재욱 비서가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직원은 정재욱에게 물었다.“비서님, 이 사람들은 호텔 입구를 에워싸고 떠날 생
“여러분 너무 조급해 마세요.”정재욱이 손을 올리자 소란스럽던 현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강씨 그룹이 성수시 프로젝트에 투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에 투자할지는 아직 의논 중이며, 초기 작업이 준비되면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니, 잠시 기다려주세요.”강현석과 오랜 세월 함께한 정재욱의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니었다.정재욱이 입을 열자, 사람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어떤 기자들은 고분고분 카메라와 마이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정재욱이 계단 아래로 내려와 여진석을 향해 걸어갔다.“여진석 대표님이신가요?”여진석은 조금 어안이 벙벙해서 대답했다.“네, 네, 맞습니다.”“어제 강현석 대표님이 여진석 대표님을 만나 뵙고 싶어 했지만, 시간을 낼 수 없어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여진석 대표님 안으로 들어가시죠.”정재욱이 공손하게 말했다.정재욱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여씨 그룹이 강씨 그룹에게 밉보였다는 게 사실인가 봐.][여씨 그룹 대표는 이미 경찰서에 잡혀갔다 던데, 다음은 부대표인가 보네.][여씨 가문도 성수시에서 손에 꼽히는 가문인데, 겨우 강씨 그룹 비서 앞에서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다니.][강씨 그룹은 세계 1위 그룹인데, 여씨 가문 따위가 다 뭐람.][여씨 그룹 곧 망할 건가 봐.][성수시에도 천지개벽이 일어날 건가 봐].……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은 여진석의 얼굴이 창백 해졌다.고개를 숙인 여진석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너희 둘은 먼저 돌아가거라. 내가 안으로 들어가 볼 게.”“아빠, 설마 아빠도 잡혀가는 건 아니겠죠?”여지수는 울 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가요, 네?”큰아버지가 이미 잡혀갔는데, 아버지까지 잡혀가면 여씨 가문은 바로 망하는 길이었다.“울긴 왜 울어?”여진석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지연이를 좀 봐, 얼마나 침착한지.”“친딸이 아니니까 나처럼 불안하지 않은 거겠죠!”여지수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아빠, 저도 같이 가요!”여진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