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지연에게 말했다.지연과의 거리가 한걸음 정도 남을 때, 발걸음을 멈춘 현석이 허리를 살짝 숙였다.두 눈을 감고 향을 맡은 현석이 물었다.“여지연 씨는 무슨 향수를 애용하세요?”지연이 인상을 찌푸리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지연은 강현석이 자신을 향한 눈빛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비록 이 사람이 왠지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나한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돼.’지연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뒷걸음을 치다가 발목이 삐끗했다. 그 순간 단단한 팔이 지연의 허리를 감쌌다.바로 몸을 돌려 품에서 벗어나려 는데, 현석이 손을 들고, 핑거 스냅을 했다.스냅 소리가 지연의 귓가에 윙윙 울리고, 점점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리고 지연은 순식간에 기절해 버렸다.“예나 씨.”“드디어 찾았어요.”현석이 나른해진 지연을 품에 안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그가 찾아 헤맨 도예나가 맞았다.느껴진 살냄새가 4년 전 그녀와 일치했다.지연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냄새를 맡다가, 점점 키스로 변질되었다. 그녀의 목부터 입술까지, 현석은 잘근잘근 입에 물었다.“세상에!”“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스위트 룸이 벌컥 열리더니, 금발 소년이 걸어왔다.눈앞의 광경에 소년은 다급하게 두 눈을 가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이리로 와봐요.”현석이 키스를 멈추고, 덤덤하게 말했다.“대표님, 하던 거 계속하세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요. 볼일이 끝나면 다시 올 게요.”현석이 지연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며, 살 끝 하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되돌리고 말했다.“피터, 무슨 상황인지 봐줘요.”피터는 4년 전 예나와 사이가 좋던 정신과 의사였다. 그의 전공이 바로 최면술이었다.피터는 방으로 돌아가 도구를 챙겨 다시 왔다.소파에 누운 여자를 보며 피터가 말했다.“정말 도예나 씨네요. 4년 전 얼굴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아마 흉터 제거 수술을 받은 모양이에요. 대표님, 일단 최면술로 도예나 씨를 깨우겠습니다.”
“강현석 대표님, 기억은 최면으로 봉인된 게 아닌 것 같습니다.”피터의 표정이 심각했다.“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최면을 여러 번 더 진행해 기억을 찾을 수 있지만…….”피터가 잠시 뜸을 들였다.현석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과거의 사람을 떠올리면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지세요. 마이크로 칩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모양이에요. 기억을 강제로 되돌리면 아마도…….”현석과 예나는 4년 전 막다른 골목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다.현석이 들어갈 수 없고, 예나는 나올 수 없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지쳐갈 것이다.“대표님, 도예나 씨가 기억을 잃었다면 그냥 다시 시작하는 게 어때요?”피터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전에 무녀가 피를 교체하면 후유증을 지울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 수술은 자칫하면 수술대에서 목숨을 잃을 리스크가 있는데, 지금 기억을 잃은 것도 후유증에서 벗어날 좋은 방법이에요.”현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이 일은 일단 비밀로 해 둬요.”현석은 지연에게 과거의 일을 밝히지 않을 수 있었으나, 네 아이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피터가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현석은 소파 앞으로 허리를 숙이고, 흐트러진 지연의 머리를 정돈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조용히 쓰다듬었다.그는 밤새 지난 3년 동안 여씨 가문과 지연에게 있었던 일을 모조리 조사했다.3년 전, 갑자기 나타난 예나는 무슨 이유인지 여씨 가문 양녀가 되었다.중간에 사라진 1년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1년을 찾아낸다면 예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예나 씨…….”“예나 씨…….”현석은 예나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예나 씨…….”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지연의 귓가에 들려왔다.새벽의 안개가 가득 찬 바닷가에 서 있는 것처럼, 방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그때, 안개의 끝에서 긴 몸집이 보였다.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저 사람
현석은 본인이 이렇게 쓰레기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한구석 목소리는, 지연은 결국 자기 아내이니 괜찮다고 다독였다.그러다 보니 현석은 지연이 잠을 자는 틈을 타, 또 몰래 그녀에게 키스했다.키스 한 번에 불붙은 마음은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고, 그는 탐욕스럽게 더 많은 것을 탐했다.“죄송해요.”현석이 자기 정장 외투를 벗어 건넸다.지연은 외투를 바닥으로 걷어차고, 본인의 셔츠 단추를 다시 잠갔다. 차가운 미소를 지은 지연이 말했다.“강씨 그룹 대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네요!”현석은 바로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어요, 죄송해요.”진심으로 사과하는 그의 모습에 지연은 화를 내고 싶으나 또 화를 낼 수가 없었다.“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이 되는 일인가요?”지연이 분노를 참으며 물었다.지연은 자기 입술이 조금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거울로 확인하지 못했으나 기절했을 때, 본인에게 강제로 키스했을 거라고 짐작이 갔다.기절!지연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대체 내게 무슨 짓을 했기에 내가 기절을 한 거예요?”“눈가 다크서클이 짙어요. 아마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아서, 잠시 휴식할 수 있게 해줬어요.”현석의 목소리는 낮지만 부드러웠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먹물이 도화지에 천천히 퍼지는 것처럼 끈적거렸다.지연이 차가운 얼굴로 입술을 매만졌다.‘내가 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데! 강씨 그룹이 여씨 그룹에 큰 죄를 뒤집혀 씌웠으니 잠에 들 수가 없었지!’그 장본인이 바로 지연의 눈앞에 버젓이 서 있었다.지연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현석 대표님, 여씨 그룹의 풍력 발전 프로젝트는 정부의 승인을 받아, 규정 내의 폐수를 배출시켰고, 모든 수치는 정상적인 범위내에 있어요. 강씨 그룹의 신고는 너무 터무니가 없어요. 대체 여씨 가문이 강씨 그룹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거예요?”이런 그녀의 모습에 현석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현석은 처음 만났던
지연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절했고, 기절한 사이 현석은 자신을 탐했다. 만약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면, 현석은 그녀를 더 많이 탐했을 것이다.“강현석 대표는 정말 변태 같네요.”지연이 차갑게 비꼬았다.“저 하나 만나겠다고, 이런 일을 꾸미다니.”“여지연 씨, 너무 깊게 생각한 것 아니에요?”현석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여지연 씨를 만나겠다고 제가 성남시에서 날아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여지연 씨는 확실히 제 취향이 맞긴 해요. 관심이 있다면 제 비서를 하는 게 어때요? 그러면 여씨 그룹을 봐줄 수도 있고요.”지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현석의 차가운 얼굴에는 아직도 지연이 날린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었다.현석의 신분으로 얼마든지 지연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지연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현석이 말하는 비서는, 아마도 평범한 비서가 아닐 것이다.지연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그 제안은 조금 더 고민해 볼 게요.”“그러세요.”현석이 입꼬리를 올렸다.“내일 저녁 성수시를 떠날 예정이에요. 그전에 생각 정리를 마치 시길 바라요.”지연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현석은 자기 입술을 계속 매만졌다.아직도 지연 입술의 달콤한 향이 맴돌았다.‘예나 씨,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에요.’지연이 방문을 나서자 여진석과 여 여지수가 앞으로 다가왔다.“지연아, 강현석 대표가 뭐라고 했어?”여진석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너, 지연아, 무슨 일 있었어?”여진석의 시선이 조금 부은 지연의 입술과, 옅게 자국이 남은 목을 향했다.여진석은 바로 이 방문 안에서 어떤 일이 생겼는지 짐작이 갔다.‘어쩐지 한 시간이 넘도록 나오지 않더라니.’“언니, 설마, 설마…….”지수가 입을 막고 말했다.“강씨 그룹 대표와 잔 거예요?”지연이 지수를 흘겨보며 말했다.“강현석 대표가 나한테 약을 먹였어.”본인이 여씨 가문을 위해 희생된 것을 숨길
“제가 강현석 대표의 비서로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지연이 입술을 매만졌다.그녀는 현석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진석 역시 알아차릴 것으로 생각했다.지연은 이 일에 있어 여씨 가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했다.여진석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차가운 지연의 시선과 마주했다.그 순간, 여진석은 지연이 이 말을 꺼낸 이유를 그제야 알아차렸다.본인이 여씨 가문을 위해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이었다.“지연아, 넌 비록 우리가 입양해 온 딸이지만, 여씨 가문의 첫째 딸이지 않으냐? 딸을 팔아 가문을 살리는 일은 할 수가 없구나.”여진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 일은 돌아가서 네 할머니랑 더 의논을 해보는 게 좋겠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야.”“내가 갈게요!”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내가 강현석 대표 비서 할 게요.”여진석이 얼굴을 굳혔다.“허튼소리 말 거라.”“정말이에요!”지수가 마음이 급해져서 발을 동동 굴렀다.“언니는 우리 가문 양녀니까 그렇게 큰 희생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난 여씨 가문의 피가 흐르는 후손이니까, 여씨 가문을 위해 뭘 못하겠어요?”“…….”제 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여진석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잘생긴 얼굴 하나에 현석에게 반한 게 분명했다.“일단 돌아가서 할머니랑 의논해 보자 꾸나.”지연도 지수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지연이 밖으로 또각또각 걸었다.여진석은 바로 지수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절대 물을 흐리지 말 거라. 이 일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왜 나랑 상관이 없어요! 난 여씨 가문 후손이니까 여씨 가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게요!”지수는 거침없이 말했다.“그리고 아빠가 그랬잖아요. 우리 가문이 여지연에게 빚을 진 게 많다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대신 갈게요. 날 살려준 목숨 값을 갚는다고 치죠.”여진석은 제 딸에게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이 말을 절대 지연의 앞에서 하면
지연은 말이 통하지 않는 지수와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현석이 원하는 건 본인인데, 굳이 지수를 보낸다면 현석의 화만 돋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지연의 추측일 뿐이었고, 어쩌면 지수를 이용해 현석의 태도를 떠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듯싶었다.그리고 지연은 이 일을 통해 여씨 가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기도 했다. 본인이 이렇게 큰 희생을 할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다.“그래.”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나랑 강현석 대표를 만나러 갈래?”“이 일은 일단 돌아가 의논하는 게 좋겠어.”운전하는 여진석이 차갑게 둘의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점점 차 속도를 높였다.셋은 빠르게 여씨 저택에 도착했고, 내리자마자 여민기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작은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강현석 대표는 만나 보셨어요?”여진석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의자에 등을 기대앉아 있던 박정순도 빠르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진석아, 어떻게 되었느냐?”“우리 가문 사람이 강현석 대표의 비서로 일한다면, 우리 가문을 봐줄 거라고 하네요.”지수가 빠르게 대답했다.“그리고 저는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뭐라고?”백소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이해가 되지 않아.”여진석이 지수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췄다.“강현석 대표는 나와 지수를 방 밖으로 내보내고, 지연과 단둘이 얘기를 나눴어요. 지연은 방안에 1시간 정도 머물렀고, 방 밖으로 나와 말을 전했어요. 강현석 대표는 지연이 비서로 일한다면 우리 가문을 봐주겠다고 했어요.”그 말에 여씨 가문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박정순은 아름다운 지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눈을 감았다.“이런 망할!”“애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를 양녀로 들이면 안 된다고, 내 그리 반대하지 않았 더냐!”이경은이 화를 참지 못하고 숨을 세게 내쉬었다.“이렇게 겉모습이 화려한 아이를 집에 들였으니, 눈에 띄기 마련이에요. 이 아이를 입양하지 않았다면
박정순은 말없이 자리에 등을 기대앉았다.4년 전 여진석이 박정순에게 자세한 사정을 밝히진 않았으나, 박정순은 지수를 살린 게 바로 양녀 지연임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또 여씨 가문을 살리겠다고 지연을 몰아붙이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러니 지연이 자발적으로 하겠다고 대답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지수는 여러 차례 입을 열려고 했으나, 진석이 옆에서 눈치를 주었고, 분을 못 이긴 지수의 얼굴이 빨개졌다.백소은도 두 주먹을 꼭 쥐고, 초조한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지연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어머니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사지로 몰고 있었다.그렇다면, 살려준 은혜를 모두 갚고 나면, 지연은 아무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이렇게 큰 여씨 가문의 운명을 겨우 가녀린 여자에게 맡긴다고요?”평소에 제일 철없이 굴던 여민기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여씨 가문에는 아직 남은 남정네가 셋이에요. 아무리 무너져가는 가문이라고 해도 어떻게 양녀에게 모든 책임을 넘길 수가 있겠어요?”“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이경은이 불같이 화를 냈다.“네 아빠는 저 양녀 때문에 경찰에게 잡혀 갔어. 안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지금 저 양녀 따위를 감싸고 도는 것이냐!”이경은이 손을 들어 여민기의 한쪽 귀를 길게 잡아당겼다.“아야, 아파요!”여민기가 귀를 감싸며 말했다.“여민기 말이 맞아요!”지수가 그 틈을 타 말했다.“우리 여씨 가문 일인데, 왜 굳이 양녀에게 이 일을 맡기겠어요? 강현석 씨에게 비서가 필요한 거라면, 제가 할 게요!”백소은이 깜짝 놀라 지수를 잡아당겼다.“너 비서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엄마! 내가 강현석 대표 비서 하게 해줘요.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과하게 반응하는 거예요?”지수가 입을 삐죽였다.“이건 어른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너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거라.”백소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수를 달래는
다음 기사는 강씨 그룹 대표의 혼인 관계에 대한 내용이었다. 4년 전 결혼, 결혼한지 한 달 후에는 내연녀 스캔들이 있었다.이에 지연이 가벼운 코웃음을 쳤다.첫 만남부터 약물로 기절시킨 남자가, 결혼 생활 동안 바람을 피운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지연은 강씨 그룹 사모가 불쌍해졌다. 결혼한지 한 달 만에 바람이라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똑똑-노크 소리가 들리자, 지연은 빠르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덤덤하게 대답했다.백소은이 따듯하게 데운 우유 한잔을 들고 들어섰다.“지연아, 어젯밤 제대로 자지 못했을 텐데, 따뜻한 우유 마시고 자거라.”지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우유 잔을 받아서 들었다.우유를 모두 마시자, 백소은이 자연스럽게 빈 잔을 건네받았고,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움찔거렸다.“어머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지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여씨 가문이 3년 동안 저를 잘 보살펴줬으니, 저도 신세를 갚아야 죠.”백소은은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지연아, 내가 너무 미안해.”백소은은 어제만 해도 지연과 여민기를 엮으려고 시도했었는데, 오늘은 지연에게 여씨 가문의 운명을 맡겨야 했다.‘사람이 이렇게 뻔뻔해 질수도 있다니.’“내가 강현석 대표의 비서가 된다면, 강현석 대표를 따라 성남시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지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면 정말 여씨 저택을 떠나게 될 거예요. 시간 되면 자주 어머니를 뵈러 올 게요.”“지연아…….”백소은이 빈 우유 잔을 꽉 잡으며 말했다.백소은은 그동안 지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지연에게 미안한 마음에 또 최선을 다해 지연에게 보답했다.지연이 기억을 되찾고 여씨 가문에게 복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갖은 계략을 세우기도 했다.그런데 앞으로 자주 만나러 오겠다는 지연의 말에, 백소은은 마음이 무거워졌다.“어머니, 일찍 주무세요. 내일이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예요.”지연이 웃으며 백소은을 방 밖으로 배웅했고, 방문이 다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