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베란다 창문을 닫았다. 욕실로 걸어간 예나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했다. 하얀 얼굴에 번진 피, 흰 나시에 새빨간 핏자국, 빨개진 눈시울, 헝클어진 머리, 지옥에서 도망친 귀신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을까.’그녀는 고개를 숙여 찬물로 세수하며 정신을 차렸다.다시 안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 시트를 교체하고, 귀걸이를 손에 쥔 채로 한참동안 살폈다.예전의 귀걸이와 거의 똑같았다. 안의 칩도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몸을 기대앉은 예나는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아무리 악마 같은 강남천이라고 해도 오늘 밤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야.’‘하지만 오늘 다치게 했으니 반드시 복수하러 올 거야.’그녀는 몸을 일으켜 옆방으로 걸어갔다.이미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라, 오직 작은 무드 등만이 방안을 비췄다.어두운 곳에서 현실 감각을 잃은 예나는 현석의 방문 앞에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그녀가 들어오자 현석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민첩한 현석은 베개 아래로 손을 넣어 무기를 잡았지만, 방안을 찾은 게 예나라는 걸 알아차리고 다시 무기를 내려놓았다.“예나 씨, 무슨 일이에요?”현석이 예나에게 걸어가 그녀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체온에 깜짝 놀라 물었다.“왜 이렇게 몸이 차가워요?”예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식은땀을 흘리고, 찬물로 세수까지 했으니 아무리 따뜻한 침대 안에 있어도 도저히 몸이 녹지 않았다.그녀는 현석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그러나 현석은 의식적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예나가 그의 얼굴을 감싸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석 씨, 하고 싶어요.”그 말에 현석은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현석은 예나의 허리를 감싸 쥐고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한참이나 이어진 키스에 두 사람 모두 숨을 헐떡이며 침대 위로 누웠다.현석이 예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예나 씨, 지금이라도 그만둘까요? 예나 씨
예나의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자아가 생긴 것처럼 몸은 현석을 밀어냈으나 마음은 그를 원했다.그날 밤,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방에서 둘은 긴 밤을 보냈다.다시 눈을 떴을 때, 예나는 피곤함에 찌들었다.“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해줄 게요.”현석의 물음에도 예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내가 이상한 행동한 거 없죠?”현석이 예나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정말 대단해요, 예나 씨는 칩 시스템을 이겼어요.”“정말요?”예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앞으로 계속 함께 자도 돼요?”예나의 물음에 현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비록 어젯밤 예나가 시스템의 명령 불복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은 너무 힘들어 보였다. 현석은 예나가 힘든 게 싫었다.“함께 자도 돼요. 하지만…….”현석이 조금 뜸을 들였다.“얌전히 잠만 자는 거예요. 다시 날 유혹하지 마요.”예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현석의 품에 안겼다.현석과 함께 지내면 남천이 그녀를 넘볼 기회가 사라질 테니 예나는 그 하나로 만족했다.아침을 먹고 나서 예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벌써 보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어요. 오늘엔 현장 좀 나가볼 게요.”명훈이 매일 보고를 올렸음에도 예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같이 가요.”현석이 차 키를 가지고 나가 차를 문 앞으로 운전해 왔다.그리고 직접 좌 수석 문을 열어 예나를 앉히고 친절히 안전벨트까지 해주었다.리조트와 별장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불과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보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공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기초시설이 거의 완공되어 가고 있었다.예나와 현석이 임시 사무실로 걸어가며 말했다.“고지훈 부장은 어디 있나요?”사람들은 성남시 최고 미녀인 도예나를 모를 리가 없었다.안내데스크의 직원이 다가와 그녀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고지훈 부장님과 문해준 팀장님은 안에서 회의 중이십니다.
명훈의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어느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불 보듯 뻔했다. 또 장서영의 짓이었다.명훈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왜 고모는 사사건건 프로젝트에 태클을 거는 거야.’‘고지훈 부장과 문해준 팀장을 따돌리고, 우리 프로젝트로 넘어온 두 매니저를 매수하고, 오늘은 강제적으로 공사 중단까지 시키려고 하다니.’‘석유 화학의 승리는 따다 놓은 당상이어도 고모는 태클을 멈추지 않았어.’명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뒤로 돌아섰다.그러다가 휴게실에서 나오는 두 사람과 마주친 명훈은 깜짝 놀랐다.“누나, 누나가 여긴 어떻게?”예나가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오지 않았다면 누가 우리 프로젝트의 물을 흐리게 하는지도 모를 뻔 했잖아.”예나가 시선을 몸집이 우람진 사람에게로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에 아까까지 당당하던 남자는 금세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외면했다.예나의 시선을 외면하며 뒤로 시선을 돌리자 더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쳤다.현석이 입을 열었다.“오 부장, 여기서 다 만나네요.”몸집이 우람진 그 사람은 건설 부문의 오민석 부장이었다. 이 구역 건설은 모두 오민석의 소관이었는데 현석과는 구면이었다.현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오민석은 큰일이 났다는 걸 직감했다.현석 얼굴의 흉터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차가운 시선과 타고난 카리스마는 보는 이에게 오싹한 기분이 들게 했다.“강, 강현석 대표님.”오민석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손을 내밀었다.“여기에서 만나 뵙다니 정말 반가워요.”그러나 현석은 여전히 차가운 태도였다.“이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죠?”오민석이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강씨 그룹 대표님이 왜 이런 작은 프로젝트에 관심을 돌리시는 겁니까?”“기자 좀 섭외해 올까요?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게 어때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오민석 부장님이 뇌물이라도 받은 줄 알겠어요.”오민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성남시에서 강씨 그룹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겨우 건설부 부장인 오민석은 감히
예나가 명훈을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말하라고 했잖아. 왜 지금까지 알려주지 않았어?”명훈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이깟 작은 일로 누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몸은 괜찮아요?”“난 괜찮아.”예나가 입꼬리를 올렸다.“심사 기간이 12날 정도 남았네.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 명훈아.”명훈이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외부 사람들의 눈엔 도예나와 이지원의 경쟁으로 보일진 몰라도, 사실은 장명훈과 이지원의 경쟁이었다.만약 이 경쟁에서 진다면, 명훈과 장서원은 가문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일 생기면 바로 연락 줘.”현석이 입을 열었다.“나는 매형이잖아.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매형.”그동안 예나와 영상 통화를 하면서 명훈은 예나의 뒤로 요리하고, 빨래를 하고, 바닥을 닦는 현석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정말 믿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니 인터넷에 도는 이혼설은 정말 루머에 불과했다.현석은 오늘 새로 받은 문서를 모두 차 트렁크에 넣고 예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바람을 쐬고 나니 예나는 기분이 퍽 좋아졌다.현석이 서재에서 업무를 처리하자, 예나는 책 하나를 꺼내 들고 거실에서 뒹굴거렸다.겨우 몇 줄 읽었을 뿐인데 머릿속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예나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천천히 힘겹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남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귀걸이는 얼마든지 새로 만들 수 있었다.“예나야, 내 목에 칼을 꽂은 대가로 강현석의 목에도 칼을 꽂아줘.”남천의 목소리가 예나의 귓가에 울렸다.예나는 최후의 발악으로 두 손을 묶은 채 지령을 거부했다.“나한테 하던 대로 강현석한테 해. 빨리 가, 예나야 빨리.”“예나야, 강현석의 목에 칼만 꽂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아.”그녀는 뒤통수가 너무 아파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예나의 자아는 또 둘로 나누어져 한쪽은 지령을 완수하려고 애쓰고 다른 한쪽은 안
“나가요!”“나가!”예나가 이를 악물며 겨우 몇 글자를 뱉었다.현석이 예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무리하지 마요.”칩으로 조종된 예나는 대부분 주변 사람을 다치게 했다.현석은 자신이 다쳐도 좋으니 예나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가요! 나가라고요!”예나가 새빨개진 눈시울로 현석을 노려보았다.“나가요, 현석 씨. 제발 나가요. 더 이상 못 참겠어요.”머릿속 남천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예나야, 베개 아래에 숨겨둔 칼을 꺼내 강남천의 목을 찔러!”“싫어!”예나는 고통에 몸부림쳤다.현석은 여전히 예나를 품에 안고 그녀를 다독였다.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와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커다란 덫이 되어 그녀를 옭아맸다.예나는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그러다가 있는 힘껏 끈을 끊어낸 예나는 단숨에 베개 아래 감춰진 칼을 들고 현석을 향해 휘둘렀다.칼이 현석의 목을 관통하려는 찰나, 예나는 손목을 꺾어 자신의 손등을 내리찍었다.손등 위로 새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드디어 머릿속을 지배하던 목소리가 사라졌다.“예나 씨!”현석이 바로 그녀의 손을 지압하다가 아래층으로 안고 내려가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예나는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현석에게 손을 맡겼다.치료가 끝나고 현석이 물었다.“아까 시스템이 무슨 지령을 내렸던 거예요?”예나가 입술을 우물거렸다.“멀리 떨어지라니까 왜 자꾸 다가온 거예요?”그녀의 말에 현석이 얼굴이 굳었다.예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하려던 말을 삼켰다.만약 기본 시스템의 지령이라면 예나는 자기 행동을 기억하지 못한다.하지만 예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러니 방금 지령은 시스템이 아닌 누군가가 지령을 내린 것이었다.“강남천!”현석이 인상을 찌푸렸다.“성남시에 이미 사람을 풀었으니 금방 찾아낼 거예요.”예나가 현석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우리 당분간만 떨어져서 지내요.”“왜요?”현석이 그녀의 다친 손
웅웅-핸드폰이 진동했다.수신자를 확인하니 아이들이었다.현석이 수신 확인을 누르자 네 얼굴이 화면 가득 채워졌다.“엄마, 오늘부터 겨울 방학이에요.”세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한 달 동안 방학인데 엄마 보러 가면 안 돼요?”세윤의 천진한 얼굴을 보며 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강남천 이 사악한 악마가 성남시에 있으니 예나는 아이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아이들이 남천의 눈에 띈다면 아이들마저 목표물이 될 수 있었다.“엄마가 요즘 너무 바빠서 너희들이랑 함께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예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달랬다.“열흘 뒤면 새해인데, 그땐 아빠랑 같이 돌아갈 게. 우리 새해는 함께 보내자.”수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새해는 처음인 것 같아요.”제훈이 말했다.“우린 해외에서도 새해를 같이 보냈어. 네가 너무 어려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야.”“와, 난 엄마랑 처음 새해를 보내는 거예요!”세윤이 입을 헤벌쭉 벌렸다.“엄마, 갖고 싶은 새해 선물 말하시면 제가 사드릴 게요.”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엄마는 바랄 게 없어.”“안 돼요, 선물 하나만 고르세요.”세윤이 고개를 저었다.“목도리? 모자? 아니면 코트?”예나는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대화를 이어가다 가는 또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었다.예나는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데 제훈이가 물었다.“엄마 손이 왜 그래요?”금방 치료를 마친 손이라 아직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흰 거즈 위의 빨간 피는 공포스러운 느낌을 줬다.예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옷소매 안으로 숨기며 말했다.“오늘 채소를 다듬다가 실수로 베었어. 괜찮아.”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저번에 부탁하신 코드 새로운 발견이 있어요.”현석이 핸드폰을 받아 쥐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말해봐 봐.”“아직 원본 데이터를 해킹하지는 못했지만, 프로세스를 고칠 수는 있어요.”제훈이 천천히 말했다.“아빠가 말하셨던 그 부하를 한번
예나의 기억 속에 제훈은 똑똑하고 일찍 철이 든 아이라 2살을 넘긴 후로는 우는 모습도 드물었다.하지만 그렇게 듬직하던 제훈이 숨이 차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예나가 빠르게 걸어가 제훈을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제훈아, 엄마 여기 있어. 제훈이 옆에 있으니까 그만 울어.”예나는 제훈의 등을 토닥였다.“엄마, 엄마…….”제훈은 천천히 진정하기 시작했다.예나는 이런 제훈을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빠가 왜 제훈이를 오라고 했는지 알아?”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몸의 칩 프로세스를 고치려고요.”예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역시 제훈이는 알고 있었어.’예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자신 있어?”“최선을 다해볼 게요.”현석이 컴퓨터와 각종 기구를 꺼내 왔다.모든 준비는 끝났다.예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두 눈을 감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제훈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작은 두 손으로 키보드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검은색 화면 위로 하얀색 파란색 부호가 나타나고 빨간 점이 계속 깜박였다.현석은 귀걸이를 손에 쥐고 긴장한 모습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시간은 1분 1초가 지나고 날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겨울 찬 바람이 창밖으로 몰아쳤으나 거실 안은 적막했다.탁!제훈이 컴퓨터를 닫아버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원본 프로세스는 파괴가 되지 않아요.”제훈이 입술을 매만졌다.“하지만 프로세스 내용을 수정해서 호르몬이 분비되어도 작동하지 않도록 했어요.”예나의 눈이 반짝거렸다.“그게 정말이야, 제훈아?”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데이터베이스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겨우 몇 가지만 수정했어요. 며칠 더 연구하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 거예요.”“제훈아, 너무 대단해!”현석이 제훈을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못했다.‘제훈이는 생각보다 더 재능이 있어.’“제훈아, 고마워.”예나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네가 엄마를 구해준 거야.”제훈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푹 숙였다.“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
현석은 침대 옆에 서서, 길쭉한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하나씩 천천히 풀어 내려갔다.그의 판판한 가슴이 드러나자, 예나는 자연스럽게 침을 삼키며 그 모습에 눈길을 돌렸다.어젯밤 현석은 예나의 상황을 살피느라 많이 억제했었다.하지만 오늘 밤에는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예나 씨, 사랑해요.”현석은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타며 이마부터 키스를 시작했다.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예나는 자연스럽게 발가락이 오므라졌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스킨십을 막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오늘 밤 아무도 그들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예나와 현석은 알지 못했다. 다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예나는 까무룩 잠에 들었고, 그동안 억눌렀던 마음을 모두 분출한 현석도 예나를 품에 안고 깊은 잠이 들었다.그렇게 밤은 점점 더 깊어 가고…….예나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깜깜한 방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뒤척이자 현석도 잠에서 깨어났다.“무슨 일이에요?”“목이 말라서 물 마시고 올 게요.”현석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제가 화장실 다녀오면서 한잔 따라올 게요.”그러나 예나는 다시 현석을 침대 위로 눕히고 이불을 꽁꽁 덮어주었다.외투 하나를 걸친 예나는 실내화를 신고 조심조심 안방 문을 닫았다.그러나 문을 닫은 예나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웠다.이 야심한 시간에, 남천은 지령을 내렸다.깊은 잠이 들었던 예나는 지령 소리에 너무 시끄러워 잠에서 깬 것이었다.“문을 나서고 왼쪽으로 100미터 걸어.”그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다.예나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두꺼운 패딩 하나를 더 껴입었고 몰래 별장을 나섰다.겨울 밤의 성남시는 영하 10도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예나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별장을 나서고 왼쪽으로 꺾어 100미터 정도 걸자 골목 끝에 서 있는 검은색 몸짓이 보였다.우중충한 나무숲에 몸을 숨긴 그는 저승사자라고 해도 믿을 몰골이었다.예나가 발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