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오늘 저녁 회의가 있어서 너희들이랑 함께 있을 시간이 없어.”현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릴 때부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세훈은 현석의 명령에 반항할 마음도 가지지 못했다.그러나 제훈은 고개를 쳐들고 한껏 고집을 피웠다.“엄마랑 밥만 먹고 갈게요. 저녁만 먹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간다고요!”현석이 인상을 찌푸리자 예나가 현석에게 말했다.“밥만 먹이고 돌려보내요.”예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아이들과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그럼 거실에서 놀고 있어, 엄마가 밥해줄 게.”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주방에는 부족한 식재료가 없었다. 대체로 현석이 예나가 잠든 틈을 타 식재료를 가득 채워왔다.예나가 요리하는 동안, 현석이 두 아이에게 몰래 다가가 물었다.“왜 너희 둘만 온 거야? 세윤이랑 수아는?”세훈이 얌전히 대답했다.“둘은 저희가 여기 온 줄 몰라요.”“왔는데 왜 몰래 숨어있었던 거야?”현석이 덤덤하게 물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제훈을 향했다.그는 자기 큰아들인 세훈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하지만 제훈이와 함께 지낸 건 겨우 한 달 남짓한 시간이었으므로 제훈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둘째 녀석이 세훈이 못지않게 똑똑하고 눈치가 빨라 가끔 참 놀라울 때가 많지.’제훈은 현석의 눈길에도 꿋꿋이 대답했다.“엄마가 보고 싶어서요. 엄마가 바쁘니까 형이랑 몰래 엄마만 보고 가려고 했어요.”대답을 들은 현석은 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며칠 뒤면 방학인데 계획은 있어?”제훈이 입을 열었다.“아빠가 보낸 프로세스 해킹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그것부터 해결하려고요.”“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데이터베이스와 연결이 되면 제일 먼저 아빠한테 연락하고.”제훈이 현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아빠는 데이터베이스에 많은 관심이 있나 보군요.”“당연하지.”현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내가 해외에서 목숨이 위험할 때 그 부하가 아빠를 지켜줬어. 그러니
현석이 인상을 찌푸렸다.“세훈아, 제훈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세훈이 깜짝 놀라 물었다.“아직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다 먹고 가면 안 돼요?”현석이 예나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예나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었다. 차가운 그녀의 표정은 마치 기계 사람 같았다.제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제훈은 세훈을 잡아당기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먼저 엄마랑 위층으로 올라가세요. 저와 형은, 마저 먹고 돌아갈 게요.”현석은 별말 없이 예나를 안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 문을 잠갔다.“제훈아, 어떻게 된 일이야?”세훈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정말 네 추측대로 그런 거야?”제훈의 표정이 심각했다.“엄마의 표정 변화를 보면 인터넷에서 읽은 마이크로칩의 피해자 서술과 똑같아. 시스템이 지령을 내린 후의 변화가 맞는 것 같아.”세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그럼 우린 이제 어떡해?”“엄마가 이사를 한 건 어쩌면 가장 최선인 방법일지도 몰라.”제훈이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빠를 도와 하루라도 빨리 프로세스를 해킹하는 거야.”제훈은 눈앞의 한 상 차림을 보고도 입맛이 없어졌다.“형, 우리 이만 돌아가자.”세훈은 2층의 닫긴 안방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제훈과 함께 집을 나섰다.2층의 예나는 현석의 품에 안겨 현석이 반복적으로 불러주는 이름을 들으며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얼마 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아까 내가 이상한 행동을 하진 않았죠?”“아무 일도 없었어요. 내가 바로 방으로 데려왔어요.”현석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예나를 위로했다.“점점 지령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은데요.”“이젠 작동 원리를 알 수 있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예나가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대단하죠, 나?”현석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우리 예나 씨가 세상에서 제일 대견해요.”두 사람이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경호원은 두 아이가 이미 강씨 별장으로 돌아갔다고 전했
예나는 핸드폰을 들고 서재로 돌아가 노트북을 켰다.장씨 그룹의 기사는 이미 내려 갔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이익률을 높이려고 장서영은 많은 근로자들을 밤샘 근무시켰고 최대 16시간 동안 일했으며 대부분 근로자가 현장에서 실신하고, 심각한 자는 쇼크사로 목숨이 위태로웠으며 어떤 사람은 중환자실에 들어갔다.예나는 빠르게 기사를 확인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명훈아, 우리 현장은 반드시 2교대로 진행되어야 해. 매 교대는 8시간 근무이고, 내일 네가 직접 확인해 봐.”그녀의 말을 명훈은 열심히 적어갔다.전화를 끊은 후에도 예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이대로 라면 석유 화학 프로젝트는 한 달 안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낼 수 있었다.리조트 프로젝트도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으나 출발선 자체가 달랐으니 열심히 달려 비등비등한 수준은 유지해도 추월하기는 어려웠다.그리고 평가 기간도 어느새 절반이 훌쩍 지나고 열흘만 지나면 종료가 되었다.안방 창문은 이미 새로 달았고, 미닫이문으로 변경된 후로는 한 번도 잠금을 푼 적이 없었다.그녀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창문이 훌쩍 열리고 검은색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예나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벌떡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다.“거기 서.”차갑고 사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예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두 다리를 움직이고 싶었으나 몸은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문을 몇 걸음 앞두고 멈춰 버렸다.검은색 그림자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예나를 향해 걸어왔다.“도예나, 많이 놀랐지? 내가 여기 나타날 줄 감히 예상이나 했겠어?”예나의 차가운 시선이 눈앞의 사람에게 떨어졌다.“강남천, 여긴 성남시야. 현석 씨가 있는 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안방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은 바로 강남천이었다.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가린 남천은 검은색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얼굴을 반쯤 가렸다.그러나 날카로운 입술 선만은 선명하게 보였고 그 입술은
남천은 침대 옆에 누워 한 손으로 예나의 턱을 잡았다.지령을 완성한 예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남천의 손을 탁 쳐냈다.그러나 남천이 다른 손으로 예나의 입을 막아버렸다.“강현석을 불러올 생각 마. 나도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으니까.”그리고 남천은 손에 쥔 귀걸이를 그녀의 앞으로 흔들었다.“강현석을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당신은 그것마저 복종할 수밖에 없을 거야. 한번 시도해 볼래?”“미친놈!”예나는 참지 못하고 욕을 읊조렸다.“당신 몸에 마이크로칩이 심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남천이 예나의 얼굴을 그러쥐며 말했다.“더구나 그 칩이 내 회사에서 만든 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어. 정말이지 난 그 지하실에서 그렇게 죽어가려고 했었는데 당신이 나한테 새로운 희망을 준 거야.”예나는 뒤로 슬금슬금 도망가며 남천의 손길을 피했다.남천의 손길이 닿을 때면 예나는 속이 메슥거렸다.‘현석 씨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왜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건지.’“도예나, 나랑 함께 떠나자.”남천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내가 잘해 줄게. 평생 사랑해 줄게. 그러니까 나랑 성남시를 떠나.”“꿈 깨!”예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 물건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남천이 귀걸이를 손에 쥐며 말했다.“세 날 동안 고민할 시간을 줄게. 만약 나와 함께 떠나지 않는다면 난 지령을 내릴 거야.”“당신…….”예나가 입을 열려는데 안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예나 씨, 들어가도 될까요?”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천의 얼굴에 조롱과 질투의 표정이 여렸다.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내가 이곳을 찾아온 걸 강현석에게 알린다면 당신 손으로 직접 강현석을 죽이라고 명령할 거야.”그 말을 끝으로 남천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예나는 빠르게 걸어가 베란다 창문을 닫았다.닫아봤 자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예나는 커튼까지 꽁꽁 닫아버렸다.현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잠이 든 줄
예나는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미소를 지은 채 현석과 주방으로 향했다.예나가 감자를 씻으며 덤덤하게 물었다.“현석 씨, 강남천은 요즘 말썽 안 피워요?”현석이 고개를 숙인 채로 채소를 썰며 대답했다.“요즘 지하실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어요.”처음 갇힌 몇 달 동안 남천은 각종 이상한 요구를 했고, 그 틈을 타 도망을 가려고 했으나 매번 다시 잡혀 왔다.탈출할 수 없다고 마음을 비운 요즘은 오히려 조용했다.감자를 씻던 예나의 손이 뚝 멈췄다.‘강남천이 탈출한 걸 현석 씨는 아직 모르고 있어.’그녀는 고개를 숙여 천천히 말했다.“현석 씨, 나 강남천하고 통화하고 싶어요.”현석이 하던 일을 멈추고 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예나 씨, 강남천은 너무 위험한 사람이에요. 예나 씨가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칩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알아보려고 아무리 함정을 파도 남천은 입을 꾹 다물었다.‘현석 씨는 내가 강남천과 연락하는 게 싫은가 봐.’“여보, 뭘 걱정하는 거예요?”예나가 손을 닦고 그의 목에 두 팔을 걸었다.“난 현석 씨 한 사람만을 사랑해요. 날 믿지 못하는 거예요? 강남천에게 연락하려는 건 칩에 대해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래요. 혹시 말실수로 중요한 단서를 흘릴 수도 있잖아요.”현석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알겠어요. 레이한테 연락할 게요.”“급하지 않아요. 저녁 먹고 연락해요.”예나는 감자를 마저 씻었고 현석은 미소를 터뜨렸다. 두 사람은 함께 저녁 요리를 완성했다.감자반, 제육볶음, 미역국, 밥 두 그릇. 간단한 집 밥이었지만 너무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석이 설거지를 했다.그리고 전화를 꺼내든 현석이 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위협적이고 상위 포식자 같은 위압감이 있었다.그런데 이런 남자가 방금 주방에서 설거지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을 하는가?예나는 턱을 괴고 현석을 보며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남천이 없어졌다는 걸 알아버린다면 평화롭던 둘의 생활에 또 금이 생길 것이다
예나가 걸어가 현석의 등을 토닥였고 현석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입술을 매만지며 고민하던 현석이 입을 열었다.“모니터는 이미 망가졌을 수도 있어. 해커를 찾아서 내용을 복구하고 강남천을 다시 잡아와.”전화를 끊은 후에도 현석은 화를 삼키지 못했다.“괜찮아요.”예나가 현석을 다독였다.“강남천같은 사람이 어떻게 얌전히 지하실에 갇혀 지내겠어요. 갇힌 그날부터 어떻게 탈주할지 고민했겠죠.”현석이 차가운 예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예나 씨가 강남천과 연락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면 난 강남천이 사라졌다는 걸 꿈에도 모를 뻔했어요.”“현석 씨, 지금 자책할 시간이 없어요. 강남천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아봐야 죠.”현석이 굳은 얼굴로 잠시 고민에 빠졌다.“성남시로 왔을 거예요.”그는 점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남천은 자신을 원망했으니, 자신에게 복수하러 왔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현석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남천이 예나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현석은 예나를 품에 안았다.“오늘부터 단 1초도 내 옆에서 사라지지 마요.”마이크로칩이 심어진 예나는 너무 위험했다.“현석 씨, 걱정하지 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날 찾아오면 현석 씨가 있을 텐데 강남천은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두 사람은 꼭 껴안았으나 서로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지 못했다.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어느새 저녁 11시가 다 되어가자, 현석이 예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예나 씨,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난 옆방에 있을 게요.”예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갔다.방으로 돌아간 후, 예나는 베란다 창문을 꼼꼼히 확인하고 화장대로 문 앞으로 막아 두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남천의 목소리가 울렸다.“예나야, 착하지. 베란다 문 열어.”그 목소리는 반복해서 예나의 머릿속에 울렸다.예나는 필사적으로 자기 손바닥을 꼬집으며 목소리와 대적했다.하지만 명
예나는 자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빨간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셋 셀 테니 대답해. 아니면 당장 강현석을 위험하게 만들 거야.”남천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귀걸이를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버튼만 누르면 예나를 조종할 수 있었다.아무리 저항하고 애써도 결국 예나는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손에 든 칼이 현석을 향해도 예나는 자신을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현석 씨는 내가 공격해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야.’“하나.”“둘.”“셋.”“…….”“그래, 알겠어.”예나가 고개를 들어 남천을 바라보았다.“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남천이 침대를 힐긋 보며 말했다.“올라가서 옷을 벗어.”예나는 말없이 몸을 돌려 침대 옆으로 걸어가 불을 끄려고 했다.그러나 남천이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옷이나 벗어.”예나는 고개를 떨구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이어 하얀색 민소매와 정교한 쇄골 라인, 흰 피부가 드러났다.남천이 군침을 꿀꺽 삼켰다.몇 달 전, 법적으로 부부 사이임에도 남천은 예나의 몸에 손 한번 대지 못했다.그날 밤 예나가 약을 탄 술을 먹여 정신을 잃은 남천은 관계를 맺은 걸 기억하지 못하는 줄만 알았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예나의 계획이었다.‘교활한 여자, 지금까지 날 속였어!’예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남천에게 걸어가며 말했다.“이러면 돼요?”남천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체향을 맡았다.지하실에 몇 달 갇혀 지내면서 수많은 여자와 하룻밤을 보냈지만…… 모두 예나만큼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얼굴에 흉터가 생겼다고 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손색이 없었다.예나의 말 한마디, 움직임 하나하나가 남천에게는 치명타였다.예나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오늘 밤만 같이 지내면 나와 현석 씨를 놔줄 거예요?”“네 목숨은 살려주지. 하지만 강현석은…….”남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와 강현석의 원한은 20년이 넘었어. 네 말 한마디로 없어질 원한이 아니라고.”예나가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
“적응할 시간이라도 줘야 죠.”눈물을 그렁그렁 단 예나가 말했다.“어떻게 내가 아무 감정 없이 당신이랑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겠어요.”예나의 눈물은 남천의 마음을 한순간에 누그러뜨렸다.교활한 여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남천은 마음이 약해졌다.“그럼 천천히 적응하도록 해.”그는 손가락으로 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남천은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어둠 속에 갇혀 낮과 밤이 없는 나날들, 그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여전히 머리를 쓰다듬던 남천이 물었다.“어때, 마음이 좀 편해졌어?”예나는 가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느슨하게 몸을 풀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남천은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예나의 몸 위로 향했다. 그의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바로 그때!”예나는 베개 아래에 숨겨둔 칼을 꺼내 남천의 목에 꽂았다.뜨겁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단숨에 공기마저 살벌해졌다.남천이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잘 지내보려고 달래고 애써도 이 여자는 내 목숨만 노리고 있어.’칼이 꽂힌 목에서 고통이 찾아오고 피가 주르륵 흘러 흰 침대 시트를 물들였다.예나는 두 손으로 칼을 꼭 쥔 채로 몸을 바로 세웠다.옷도 챙겨 입지 않은 상태로 예나가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예상 밖의 일이지?”남천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쉽게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그는 귀걸이를 손에 쥐고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예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령을 내려도 난 당신을 죽일 만큼의 시간은 버틸 수 있어. 그럼, 우리 둘 다 죽는 거야.”남천의 손이 멈춰 섰다.‘정말 지독한 여자야. 새삼 놀랍지도 않네.’예나가 손을 뻗어 귀걸이를 낚아채자, 남천이 웃음을 터뜨렸다.“이 귀걸이가 마음에 드는 거야? 나한테 몇 백 개는 있는데.”남천이 나른하게 침대 머리에 몸을 기댔다. 목에 칼이 꽂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천이 말을 이었다.“내 모든 부하한테도 있어. 날 죽이고 부하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