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레이가 걸어온 전화였다. 강현석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형님, 30분 전 강남천이 탈주를 시도했으나 다시 잡아왔습니다.”현석의 표정이 굳어갔다.“꽉 붙잡아 둬! 다시 도망갈 틈을 주면 안 돼!”“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을 불러와 지하실을 지키게 했습니다.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현석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렸다.예나가 손으로 그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현석 씨, 다 괜찮아질 거예요. 모든 게 해결될 거에요.”현석이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아이들을 납득시킬 이유라도 알려줘야 죠.”두 사람은 돌아가는 내내 어떤 이유를 대면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렇게 차는 천천히 별장 입구에 들어섰다.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넘긴 시간이라 아이들은 거실에서 정지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예나와 현석이 나란히 집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그들을 에워쌌다.세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집에서 푹 쉬라고 했잖아요.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수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아빠, 엄마 잘 보살피겠다고 저희랑 약속했잖아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엄마, 잠옷 입고 외출하신 거예요?”제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세훈의 시선은 더 날카로웠다.“이 날씨에 맨발에 슬리퍼라니.”이 슬리퍼는 현석 차의 트렁크에 있던 슬리퍼로, 현석이 임시로 찾아 그녀에게 신긴 것이었다.예나가 웃어 보였다.“아빠랑 근처로 산책 다녀오는 길이야. 멀리 가지 않았으니, 잠옷과 슬리퍼 차림이지.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소파에 앉아있는 정지숙이 인상을 찌푸렸다.두 시간 전, 예나와 현석은 갑자기 다툼을 시작했는데 화를 내던 예나가 차를 타고 사라졌고, 현석이 그녀의 뒤를 바로 쫓았다.둘이 집을 나서는 순간, 정지숙은 혹시 강남천이 돌아온 건 아닌지 라는 의심이 들었었다.강남천과 함께 일 때 예나
얼마 전만 해도 예나는 정지숙을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오늘 그녀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불안에 떨던 정지숙의 마음도 드디어 가라앉았다.현석과 예나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건 그 일을 거의 덮었다는 뜻이었다.“예나야, 안심하고 일하러 가거라. 아이들은 내가 잘 보살피마.”정지숙이 흔쾌히 대답했다.“엄마, 엄마랑 떨어지지 않을 래요!”세윤이 예나의 몸으로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엄마, 세윤이는 엄마랑 같이 살래요. 제발요!”수아도 예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지금까지 엄마랑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데, 엄마 없이 못 살아요. 엄마 가지 마요.”세훈과 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 속에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제훈은 아쉬운 마음 외에도 한가지 의심이 생겼다.‘수아랑 나는 지금껏 엄마랑 떨어져 지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일이 아무리 바쁘셔도 늘 우리랑 함께 했었지.’‘그런데 아무리 장씨 그룹 프로젝트에 많은 신경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해도 굳이 이사할 필요가 있나?’‘설마 두 사람이 따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긴 한데.’“엄마가 매일 너희들을 보러 올게.”예나가 아이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일단, 지금은 엄마를 도와 짐 정리를 해줄 수 있을까?”“싫어요.”세윤이 입을 삐죽였다.“난 엄마랑 같이 살래요. 엄마 없이 못 살아요.”예나는 가슴 한 편이 너무 쓰라렸다.‘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내 일상에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어?’한 달 동안 모든 걸 해결한다면 좋겠지만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정으로 길어질 수 있었다.“세윤아, 수아야, 제훈아, 세훈아, 엄마는 너희들을 정말 사랑해.”예나가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일을 처리하고 나면 바로 돌아올 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갈 거야.”“엄마, 나도 사랑해요.”세윤이 미련 뚝뚝 흐르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그래서
수아는 울음을 당장 터뜨릴 지경이었다.“엄마가 더 이상 수아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니야? 엉엉엉…….”제훈이 빠르게 수아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엄마는 화가 난 게 아니야. 지금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래.”“장씨 그룹의 후계자 경쟁은 엄마한테 아주 중요한 일이야.”세훈이 입을 열었다.“엄마가 이사하는 건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세윤이 너도 엄마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마.”세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응, 알겠어. 지금 엄마한테 사과하러 갈게.”제훈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아니, 일단 엄마가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엄마랑 아빠는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교외로 잠시 이사 가시는 거야. 다른 나라로 가신 것도 아니라고. 너무 보고 싶으면 할머니한테 엄마 아빠 보러 가자고 하면 돼. 그러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어.”정지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세윤아, 이만 뚝-하자. 네가 울면 수아도 따라서 울 거야. 그러니까 눈물 닦자.”세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비볐다.수아도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20분이 지나고 2층 안방 문이 다시 열렸다. 벽에 기대선 예나가 입을 열었다.“엄마 짐 정리 도와주기로 했잖아. 다들 거기서 뭐해?”세윤이 총총총 달려와 물었다.“엄마, 화난 거 아니죠?”“엄마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그냥 장난친 거야.”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눈이 빨개졌네, 울었어? 세윤이는 씩씩한 아이니까 이런 일로 울면 안 돼.”세윤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네! 엄마 아빠 이사 가시고 동생을 열심히 지킬 게요!”“좋아, 그럼, 엄마가 돌아와서 상 줄게.”예나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네 아이들과 안방으로 들어섰다.제훈이 킁킁 냄새를 맡더니 입을 열었다.“피비린내가 나는 거 같지 않아?”세훈이도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나도 맡았어.”현석은 바로 정장 외투를 꺼내 입었다. 왼쪽 팔목을 어색하게 쓰는 모습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를
다행히 리조트 부근에는 강씨 가문 명의의 다른 별장이 있었다.산언덕 너머에 있는 오션뷰 별장이었는데 평소에도 관리하는 사람을 두어 언제 찾아도 아름다웠다.차가 별장 앞에 멈춰 서자 도예나가 고개를 돌려 강현석에게 물었다.“상처, 정말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어요?”“이 정도 상처는 별일 아니에요.”현석이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오늘 밤 푹 자는 게 좋을 거예요. 내일 칩 연구자들을 모셔와 칩 해체 작업을 할 거예요.”예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예나는 원본 프로그램 데이터 없이 칩을 해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현석의 기대를 처음부터 꺾고 싶지 않았다.‘시도라도 해 봐야지.’‘혹시 잘될 수도 있잖아.’이튿날 오전 7시, 아래층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예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현석은 서너 명의 연구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녀는 얌전히 현석의 옆에 자리를 잡고 연구자들의 물음에 답했다.연구자들은 오전 내내 그녀의 몸에 감측기를 달고 미세 전류로 검측했다.“죄송합니다, 강현석 씨. 저희 능력으로는 칩의 위치를 알아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마이크로칩은 세포 막으로 형성되어 있어 혈액에 흡수 동화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미 사모님의 혈액과 동화된 듯싶은데 해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현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일반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마이크로칩 해체를 할 수 있는 건가요?”“마이크로칩을 만든 회사는 가능할 듯싶습니다.”연구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칩의 제조 회사를 찾아 백그라운드에서 해체 프로세스를 작동하면 되지 않을까요?”현석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엘리자는 그가 쏜 총알에 맞아 죽어버렸다.‘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하지만 세상에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수고하셨어요.”현석이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연구자들을 향
현석의 차가운 눈빛이 여 도우미의 얼굴로 향했다.“솔직하게 대답해. 대장로가 구매한 마이크로칩 회사 공급업자는 누구야?”“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여 도우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대장로의 군사, 식량, 석유, 칩…… 공급업자만 해도 서너 곳은 된다고 했습니다. 독점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랬어요.”현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과연 대장로다운 생각이야.’서너 군데 공급업자를 둔다면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겨도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현석이 차갑게 말했다.“오늘 칩 공급업자 이름을 대지 못한다면 네 몸에 이게 심어지게 될 거야.”현석의 손에 작은 칩 하나가 쥐여 있었다.여 도우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한테도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다. 엘리자가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싶을 때면 이 칩을 그 사람에게 주사했었다.이 칩을 주사한 사람은 엘리자가 얼마나 과분한 요구를 말해도 순순히 복종했다.그리고 엘리자는 그 사람을 조종하다가 질리면 마지막 지령을 자살하라고 했다.‘내 몸에 이 칩이 심어진다면 죽는 것보다 못한 생을 살게 될 거야.’“아니요!”여 도우미가 몸을 잔뜩 움츠리며 말했다.“말할 게요.”그녀는 머리를 잔뜩 싸매고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세로…… 세로 생물 회사?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저한테 세로 생물 회사로 심부름을 시키신 적이 있어요.”‘세로!’현석이 인상을 팍 썼다.세로는 강남천이 다크웹에서의 코드 네임이자, 강남천 마이크로칩 회사의 이름이기도 했다.역시 칩의 공급업자는 강남천이었다.현석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여 도우미를 향해 말했다.“만약 네가 한 말에 거짓말이 한 줄이라도 있다면 네 끝은 결코 아름답지 못할 거야.”“이 여자를 지하실에 가둬!”“네!”두 경호원이 눈물범벅이 된 여 도우미를 끌고 갔다.다른 한편, 2층에 있는 예나.예나는 침대에 걸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책만 읽으면 잠이 솔솔 왔다.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얼굴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그
창문이 부서지고 안방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어왔다.예나는 현석의 품 안을 파고들며 말했다.“너무 추워요.”현석은 바로 그녀를 안아 들고 옆방으로 옮겼다.예나를 내려놓은 후 현석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예나 씨…….”이번에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도, 그의 품에서 발버둥을 치지도 않았다.“현석 씨,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해요.”예나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남자의 음성이 들려왔고 그 사람이 창문을 깨라고 지시했어요. 전에는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였는데 그건 아마도 시스템 자체 음성이었나 봐요. 그런데 이번의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어요.”현석이 인상을 찌푸렸다.수많은 마이크로칩 기사를 읽으면서 현석은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었다.기계적인 음성은 시스템 자체 기능이었다면, 남자의 음성은 누군가 지령을 내렸다는 걸 의미했다.‘엘리자도 죽었는데 누가 지령을 내리는 거지.’웅웅-그때, 현석의 전화가 진동했다. 수신자는 레이.“형님, 강남천이 전화 통화를 요청합니다.”현석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에 빠진 예나를 바라보며 현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바꿔.”“브라더, 내 전화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남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어디 한번 맞혀볼까? 음…… 아마 도예나랑 같이 있겠지?”현석이 표정을 굳혔다.“할 말없으면 전화 끊을게.”“뭐가 그렇게 급해?”남천이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내 말 계속 들어봐. 아까 도예나 씨가 베란다 창문을 깨부쉈지?”현석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예나도 시선을 돌려왔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예나 역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며 현석의 옆으로 다가가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 댔다.“브라더, 나를 햇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 가둔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남천이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숨이 붙어있는 한 너희 둘이 무사한 날은 없을 거야. 도예나, 지금 내 목소리 들리지? 잘 들어. 네가 나한테 한 만큼 백배
현석이 낮은 목소리로 예나를 달랬다.“예나 씨, 두려워하지 마요. 배후가 강남천이라는 걸 알아냈으니 이제 해결할 일만 남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그리고 그는 다시 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반 시간 후, 레이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형님, 찾았습니다. 작은 귀걸이였는데 수신기 기능이 있었어요.”“당장 나한테 보내.”현석이 차갑게 말했다.그러나 아무리 빠른 국제 운송이라고 해도 최소 두 날은 걸렸다.예나는 두 날 동안 질문 밖을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그건 현석도 마찬가지였다.예나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거나 티비를 보면, 현석은 주방에서 요리를 했다.서투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예나는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요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현석이 그녀를 위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비록 맛은 평범해도 예나는 현석이 직접 만든 요리를 먹는 게 좋았다.“장씨 그룹이 보기 드문 유전을 발견하여…….”티비에 장씨 그룹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자 예나가 고개를 들었다.“성남시 최초로 유전이 발견되었는데, 채굴할 수 있는 석유량은…… 장씨 그룹의 주가가 하룻밤 만에 급상승하고 있습니다.”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평가 기간에 유전을 개발한다면 평가 점수가 높을 게 뻔했다.리조트 프로젝트로 우세를 차지하려면 더 많은 공을 세워야 했다.예성과학기술 회사 일은 현석이 전적으로 맡고 있었으니 예나는 마침 시간이 많이 비었고, 리조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그때, 예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장서원이 걸어온 전화였는데, 아마 유전 문제로 걱정이 되어 전화가 온 듯싶었다.예나는 고민도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장대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집에 한 번 들리거라.”예나가 놀라서 되물었다.“네?”“장씨 별장에 오거라.”장대휘가 덤덤하게 말했다.“30분 안으로.”장서원이 바로 전화를 바꿔 들었다.“예나야, 급해 말고 천천히 운전해서 와. 한 시간 늦어도 괜찮으니까.”예나는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다는 걸 눈치챘다.“네, 바로 갈게요
“예나 씨, 잠깐만 기다려요. 설거지만 끝내고 데려다 줄게요.”현석이 앞치마를 두르고 빠르게 그릇을 씻어냈다.예나는 식탁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훤칠한 키와 듬직한 어깨, 길쭉한 다리, 정장 바지를 입은 그의 뒷모습은 정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예나는 군침을 꿀꺽 넘겼다.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그쪽으로 넘어갔다.별장으로 이사하고 두 사람은 각방으로 지냈는데, 행여나 문제라도 생길까 둘은 키스도 하지 못했다. 스킨십은 겨우 포옹에 그쳤다.현석이 고개를 돌려 예나의 시선과 마주치자, 현석 역시 침을 꿀꺽 삼켰다.그는 고개를 다시 휙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표정으로 날 보지 마요.”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고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현석 씨도 얼마나 힘들겠어, 괜히 건드리지 말아야 지.’현석이 차를 별장 문 앞까지 운전해 왔고 예나가 좌 수석에 올라탔다.“요즘 계속 나랑 별장에 갇혀 지내느라 회사 업무가 많이 밀렸을 텐데 강씨 그룹에 다녀와요.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장씨 별장에서 만나요.”차에서 내린 예나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사실 현석은 예나와 함께 장씨 별장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현석은 마음을 접었다.“그래요, 한 시간 후에 다시 올 게요.”예나가 별장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현석은 여전히 별장 주위에 머물렀다. 노트북을 꺼낸 현석은 그 자리에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장씨 별장에서.장대휘는 서재 책상에 앉아있었는데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다.장서영은 맞은편에 앉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정말 이기려고 아득바득하는 걸 좀 보세요. 지금껏 가문 밖에서 자란 아이가 공평 경쟁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다행히 이 일은 우리 장씨 가문 내부 사람들만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세상에 알려지면 무슨 창피를 당하겠어요.”“고모, 아직 누가 벌인 일인지 밝혀지지 않았는데 너무 앞서 나가시는 거 아니에요?”장명훈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증거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