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데 도예나는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강현석은 옷걸이에 걸어진 패딩을 들고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예나 씨, 옷이라도 걸쳐요.”그러나 그는 한발 늦어버렸다.예나는 빠르게 운전석에 올라타 강씨 별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사모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양 집사도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이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나가면 감기 드실 거예요. 빨리 따라가서 사모님 데리고 오세요.”양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석은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타 그녀의 뒤를 쫓았다.평일 오후라 거리에는 차량이 많지 않았다. 추운 날씨 탓에 행인도 적었고 두 차가 앞뒤로 큰길을 질주했다.현석은 예나의 차량으로 바짝 붙어 서지도 못했다. 행여나 예나가 더 빨리 달려 사고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지금의 예나는 생물 칩이 조종하고 있어 모든 이성을 잃어버렸다.현석은 문득 어제 읽은 문장을 떠올랐다. 칩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피해자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자살하라는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했다.남천이 예나에게 칩을 삽입했다면 자살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천이 예나의 목숨을 노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하지만 만약 칩을 삽입한 게 엘리자라면……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엘리자는 이미 목숨을 잃었는데 이 명령은 대체 누가 내리고 있는 걸까?’현석은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핸들을 꼭 쥐고 질주하는 앞 차량을 끈질기게 쫓았다.차량은 아스팔트 길을 지나 점점 교외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량과 인적이 더욱 드물어졌다.어느새 산길까지 달렸는데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길이 많이 울퉁불퉁했다.현석의 초조한 마음은 극에 달했지만, 예나의 감정이 더 극단화 될까 봐 차량을 함부로 가로막지도 못했다.“펑!”그 순간, 예나의 차량이 산길의 가드레일을 들이박았다. 다행히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라 차 앞머리가 움푹 팬 것 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현석이 빠르게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또 한발 늦어버렸다.차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창밖으로 무서운 소리를 냈다.예나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스킨십을 할 때 머릿속에서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처음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목소리는 나를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게 했죠. 그리고 내가 현석 씨한테 다가가면 그 목소리는 나를 당신한테서 멀어지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말을 내뱉게 했죠.”예나는 어지러워진 자기 앞머리를 매만졌다.“그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거든요. 그런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예나 씨…… 예나 씨.”현석은 무슨 말을 건네면 좋을지 몰라, 있는 힘껏 예나를 품에 안고 자신의 체온을 나눴다.그녀의 고통을 체험해 보지는 못했으나 고통스러워하는 예나를 보며 현석은 심장이 찢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자기 심장을 향해 몇 번이고 도살하는 것 같았다.‘차라리 칩이 나한테 심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내가 아프면 아팠지, 예나 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더 힘들어.’“현석 씨, 칩은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떨어지기를 바랄지도 몰라요.”예나가 고개를 들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당신이 나를 사랑할수록 칩은 당신을 괴롭힐거 에요.”“그럴 리가 없어요!”현석이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아직 그 어떤 기술도 사람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요.”“사람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 그 어떤 물질을 뿜어낸다고 해요. 칩이 그 물질을 인식하고 명령을 내릴지도 모르죠.”예나가 쓴 웃음을 지었다.“AI 기술을 무시하지 마요. 특히 암시장에서 개발하고 있는 기술은 생각보다 더 무섭게 발전했을 거 에요.”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착취하는 악독한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칩을 제거해 줄게요. 예나 씨, 너무 걱정 마요. 다 방법이 있을 거 에요.”현석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방법이 있을 거라고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레이가 걸어온 전화였다. 강현석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형님, 30분 전 강남천이 탈주를 시도했으나 다시 잡아왔습니다.”현석의 표정이 굳어갔다.“꽉 붙잡아 둬! 다시 도망갈 틈을 주면 안 돼!”“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을 불러와 지하실을 지키게 했습니다.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현석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렸다.예나가 손으로 그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현석 씨, 다 괜찮아질 거예요. 모든 게 해결될 거에요.”현석이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아이들을 납득시킬 이유라도 알려줘야 죠.”두 사람은 돌아가는 내내 어떤 이유를 대면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렇게 차는 천천히 별장 입구에 들어섰다.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넘긴 시간이라 아이들은 거실에서 정지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예나와 현석이 나란히 집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그들을 에워쌌다.세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집에서 푹 쉬라고 했잖아요.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수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아빠, 엄마 잘 보살피겠다고 저희랑 약속했잖아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엄마, 잠옷 입고 외출하신 거예요?”제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세훈의 시선은 더 날카로웠다.“이 날씨에 맨발에 슬리퍼라니.”이 슬리퍼는 현석 차의 트렁크에 있던 슬리퍼로, 현석이 임시로 찾아 그녀에게 신긴 것이었다.예나가 웃어 보였다.“아빠랑 근처로 산책 다녀오는 길이야. 멀리 가지 않았으니, 잠옷과 슬리퍼 차림이지.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소파에 앉아있는 정지숙이 인상을 찌푸렸다.두 시간 전, 예나와 현석은 갑자기 다툼을 시작했는데 화를 내던 예나가 차를 타고 사라졌고, 현석이 그녀의 뒤를 바로 쫓았다.둘이 집을 나서는 순간, 정지숙은 혹시 강남천이 돌아온 건 아닌지 라는 의심이 들었었다.강남천과 함께 일 때 예나
얼마 전만 해도 예나는 정지숙을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오늘 그녀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불안에 떨던 정지숙의 마음도 드디어 가라앉았다.현석과 예나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건 그 일을 거의 덮었다는 뜻이었다.“예나야, 안심하고 일하러 가거라. 아이들은 내가 잘 보살피마.”정지숙이 흔쾌히 대답했다.“엄마, 엄마랑 떨어지지 않을 래요!”세윤이 예나의 몸으로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엄마, 세윤이는 엄마랑 같이 살래요. 제발요!”수아도 예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지금까지 엄마랑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데, 엄마 없이 못 살아요. 엄마 가지 마요.”세훈과 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 속에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제훈은 아쉬운 마음 외에도 한가지 의심이 생겼다.‘수아랑 나는 지금껏 엄마랑 떨어져 지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일이 아무리 바쁘셔도 늘 우리랑 함께 했었지.’‘그런데 아무리 장씨 그룹 프로젝트에 많은 신경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해도 굳이 이사할 필요가 있나?’‘설마 두 사람이 따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긴 한데.’“엄마가 매일 너희들을 보러 올게.”예나가 아이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일단, 지금은 엄마를 도와 짐 정리를 해줄 수 있을까?”“싫어요.”세윤이 입을 삐죽였다.“난 엄마랑 같이 살래요. 엄마 없이 못 살아요.”예나는 가슴 한 편이 너무 쓰라렸다.‘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내 일상에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어?’한 달 동안 모든 걸 해결한다면 좋겠지만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정으로 길어질 수 있었다.“세윤아, 수아야, 제훈아, 세훈아, 엄마는 너희들을 정말 사랑해.”예나가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일을 처리하고 나면 바로 돌아올 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갈 거야.”“엄마, 나도 사랑해요.”세윤이 미련 뚝뚝 흐르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그래서
수아는 울음을 당장 터뜨릴 지경이었다.“엄마가 더 이상 수아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니야? 엉엉엉…….”제훈이 빠르게 수아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엄마는 화가 난 게 아니야. 지금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래.”“장씨 그룹의 후계자 경쟁은 엄마한테 아주 중요한 일이야.”세훈이 입을 열었다.“엄마가 이사하는 건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세윤이 너도 엄마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마.”세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응, 알겠어. 지금 엄마한테 사과하러 갈게.”제훈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아니, 일단 엄마가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엄마랑 아빠는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교외로 잠시 이사 가시는 거야. 다른 나라로 가신 것도 아니라고. 너무 보고 싶으면 할머니한테 엄마 아빠 보러 가자고 하면 돼. 그러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어.”정지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세윤아, 이만 뚝-하자. 네가 울면 수아도 따라서 울 거야. 그러니까 눈물 닦자.”세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비볐다.수아도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20분이 지나고 2층 안방 문이 다시 열렸다. 벽에 기대선 예나가 입을 열었다.“엄마 짐 정리 도와주기로 했잖아. 다들 거기서 뭐해?”세윤이 총총총 달려와 물었다.“엄마, 화난 거 아니죠?”“엄마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그냥 장난친 거야.”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눈이 빨개졌네, 울었어? 세윤이는 씩씩한 아이니까 이런 일로 울면 안 돼.”세윤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네! 엄마 아빠 이사 가시고 동생을 열심히 지킬 게요!”“좋아, 그럼, 엄마가 돌아와서 상 줄게.”예나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네 아이들과 안방으로 들어섰다.제훈이 킁킁 냄새를 맡더니 입을 열었다.“피비린내가 나는 거 같지 않아?”세훈이도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나도 맡았어.”현석은 바로 정장 외투를 꺼내 입었다. 왼쪽 팔목을 어색하게 쓰는 모습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를
다행히 리조트 부근에는 강씨 가문 명의의 다른 별장이 있었다.산언덕 너머에 있는 오션뷰 별장이었는데 평소에도 관리하는 사람을 두어 언제 찾아도 아름다웠다.차가 별장 앞에 멈춰 서자 도예나가 고개를 돌려 강현석에게 물었다.“상처, 정말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어요?”“이 정도 상처는 별일 아니에요.”현석이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오늘 밤 푹 자는 게 좋을 거예요. 내일 칩 연구자들을 모셔와 칩 해체 작업을 할 거예요.”예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이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예나는 원본 프로그램 데이터 없이 칩을 해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현석의 기대를 처음부터 꺾고 싶지 않았다.‘시도라도 해 봐야지.’‘혹시 잘될 수도 있잖아.’이튿날 오전 7시, 아래층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예나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현석은 서너 명의 연구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녀는 얌전히 현석의 옆에 자리를 잡고 연구자들의 물음에 답했다.연구자들은 오전 내내 그녀의 몸에 감측기를 달고 미세 전류로 검측했다.“죄송합니다, 강현석 씨. 저희 능력으로는 칩의 위치를 알아내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 마이크로칩은 세포 막으로 형성되어 있어 혈액에 흡수 동화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미 사모님의 혈액과 동화된 듯싶은데 해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현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일반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마이크로칩 해체를 할 수 있는 건가요?”“마이크로칩을 만든 회사는 가능할 듯싶습니다.”연구자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칩의 제조 회사를 찾아 백그라운드에서 해체 프로세스를 작동하면 되지 않을까요?”현석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엘리자는 그가 쏜 총알에 맞아 죽어버렸다.‘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하지만 세상에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마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수고하셨어요.”현석이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연구자들을 향
현석의 차가운 눈빛이 여 도우미의 얼굴로 향했다.“솔직하게 대답해. 대장로가 구매한 마이크로칩 회사 공급업자는 누구야?”“모릅니다. 제가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여 도우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대장로의 군사, 식량, 석유, 칩…… 공급업자만 해도 서너 곳은 된다고 했습니다. 독점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랬어요.”현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과연 대장로다운 생각이야.’서너 군데 공급업자를 둔다면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겨도 빠른 대처가 가능했다.현석이 차갑게 말했다.“오늘 칩 공급업자 이름을 대지 못한다면 네 몸에 이게 심어지게 될 거야.”현석의 손에 작은 칩 하나가 쥐여 있었다.여 도우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녀한테도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다. 엘리자가 다른 사람을 조종하고 싶을 때면 이 칩을 그 사람에게 주사했었다.이 칩을 주사한 사람은 엘리자가 얼마나 과분한 요구를 말해도 순순히 복종했다.그리고 엘리자는 그 사람을 조종하다가 질리면 마지막 지령을 자살하라고 했다.‘내 몸에 이 칩이 심어진다면 죽는 것보다 못한 생을 살게 될 거야.’“아니요!”여 도우미가 몸을 잔뜩 움츠리며 말했다.“말할 게요.”그녀는 머리를 잔뜩 싸매고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세로…… 세로 생물 회사?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저한테 세로 생물 회사로 심부름을 시키신 적이 있어요.”‘세로!’현석이 인상을 팍 썼다.세로는 강남천이 다크웹에서의 코드 네임이자, 강남천 마이크로칩 회사의 이름이기도 했다.역시 칩의 공급업자는 강남천이었다.현석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여 도우미를 향해 말했다.“만약 네가 한 말에 거짓말이 한 줄이라도 있다면 네 끝은 결코 아름답지 못할 거야.”“이 여자를 지하실에 가둬!”“네!”두 경호원이 눈물범벅이 된 여 도우미를 끌고 갔다.다른 한편, 2층에 있는 예나.예나는 침대에 걸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책만 읽으면 잠이 솔솔 왔다.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얼굴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그
창문이 부서지고 안방에는 찬 바람이 쌩쌩 불어왔다.예나는 현석의 품 안을 파고들며 말했다.“너무 추워요.”현석은 바로 그녀를 안아 들고 옆방으로 옮겼다.예나를 내려놓은 후 현석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예나 씨…….”이번에는 감정 기복이 심하지도, 그의 품에서 발버둥을 치지도 않았다.“현석 씨, 방금 있었던 일을 기억해요.”예나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남자의 음성이 들려왔고 그 사람이 창문을 깨라고 지시했어요. 전에는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였는데 그건 아마도 시스템 자체 음성이었나 봐요. 그런데 이번의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어요.”현석이 인상을 찌푸렸다.수많은 마이크로칩 기사를 읽으면서 현석은 이러한 상황을 예측했었다.기계적인 음성은 시스템 자체 기능이었다면, 남자의 음성은 누군가 지령을 내렸다는 걸 의미했다.‘엘리자도 죽었는데 누가 지령을 내리는 거지.’웅웅-그때, 현석의 전화가 진동했다. 수신자는 레이.“형님, 강남천이 전화 통화를 요청합니다.”현석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에 빠진 예나를 바라보며 현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바꿔.”“브라더, 내 전화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남천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어디 한번 맞혀볼까? 음…… 아마 도예나랑 같이 있겠지?”현석이 표정을 굳혔다.“할 말없으면 전화 끊을게.”“뭐가 그렇게 급해?”남천이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내 말 계속 들어봐. 아까 도예나 씨가 베란다 창문을 깨부쉈지?”현석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예나도 시선을 돌려왔다.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예나 역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며 현석의 옆으로 다가가 핸드폰에 귀를 가져다 댔다.“브라더, 나를 햇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 가둔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남천이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숨이 붙어있는 한 너희 둘이 무사한 날은 없을 거야. 도예나, 지금 내 목소리 들리지? 잘 들어. 네가 나한테 한 만큼 백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