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원을 여러 번 만나본 적이 있는 현석이였지만, 장인어른 대 사위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강현석 씨, 안녕하세요.”장서원이 침착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현석에게 손을 내밀었다.현석이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아버님, 편하게 말씀하세요.”아버님이라는 호칭에 긴장하던 장서원의 표정이 풀어졌다.자신을 아버님이라고 칭하는 건 부부 사이에 확실히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아버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예나가 차 한잔을 들고 장서원 앞으로 걸어갔다.“명훈이한테서 네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 어제 병원으로 가고 싶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이렇게 찾아왔 단다.”장서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하루 쉬고 나니 몸은 좀 괜찮아졌어?”“네, 별일 아니에요.”예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오늘 프로젝트 현장에도 가보고 싶은데 현석 씨가 집에서 쉬라고 해서 심심하던 참이었어요.”장서원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현석의 말을 듣거라. 프로젝트는 명훈이가 맡고 있고, 명훈의 뒤에는 나도 있고, 네 할아버지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예나 씨는 세 날만 쉬고 다시 현장을 나가려고 해요. 저는 적어도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일주일로는 부족해. 보름은 쉬어 야지.”장서원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예나야, 착하지. 일단 보름만 집에서 쉬고…….”“…….”‘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다고?’‘보름이나 쉬라고? 내가 임산부도 아니고…… 보름동안 누워만 있으면 몸에 곰팡이가 생기겠어.’하지만 예나는 두 사람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두 사람은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성남시 현재 상황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예나는 이런 얘기를 듣고 있자니 따분한 마음에 하품만 나왔다. 그녀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나른하게 기대앉자, 장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럼 예나야 이만 푹 쉬거라. 나는 이만 돌아가 볼 테니
“강현석 씨,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설민준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예나가 왜 갑자기 생물 칩을 조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H 지역의 조직에서 생물 칩은 아주 흔하게 보이고 있는데 예나가 왜 이걸 조사하는 거예요?”현석의 목소리가 무거웠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조사하고 알려 줄게요. 일단 레이를 당신이 있는 곳으로 보내도록 하죠.”통화를 종료하고 현석이 레이에게 문자를 남겼다.그때, 택배 하나가 도착했고 양 집사가 위층으로 가져왔다. 열어보니 안에는 오전에 의뢰한 지문 필름이 담겨있었다.현석은 필름을 자신의 식지에 씌우고 작은 통신기 하나를 꺼내 지문 인식을 시작했다.“띡- 연결되었습니다.”3초 후 냉소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유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했다.“형님, 드디어 연락하셨군요.”현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앨릭 박사. 요즘 연구 진행은 순조로운 가요?”“새로운 칩 연구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실험체는 이미 폐기 완료했습니다.”앨릭 박사가 전하는 말을 들은 현석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생물 칩의 실험체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다.강남천의 수법은 늘 예상보다 더 지독했다.“형님, 이 칩을 시장에 투입할 겁니까?”현석은 탁자 위를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일단 생물 칩 사용법을 나한테 하나 보내줘요.”앨릭 박사는 바로 문서를 그에게 전송했다.현석이 빠르게 클릭해 확인했고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생물 칩을 인체에 삽입하고 제거할 방법은 따로 없는 건가요?”앨릭 박사는 조금 의아한 듯 말했다.“제거 장치는 형님한테 있지 않습니까?”현석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칩은 일단 보류하고 내 명령을 기다리세요.”전화를 끊고 현석은 한참이나 고민에 빠졌다.사용법을 바라보고 있는 현석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생물 칩을 인체에 삽입하는 방법은 1밀리미터 미만의 이 작은 칩을 혈관에 넣는 것이었
“그러니 너는 영원히 나를 대신할 수 없지.”현석의 말 한마디에 남천은 더 이상 미소를 짓지 못했다.“허!”남천은 담배를 탁자 위로 눌러 비벼 껐다. 탁자 위에는 이미 수많은 담배 그을림 자국이 남아 있었다.“말해, 왜 나한테 연락했는지.”현석이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며 말했다.“네 지하 생물 회사는 내가 불태워버렸어. 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어?”“불태웠으면 태웠지, 내가 미련이라도 가질 줄 알고?”남천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용건이 있는 거야? 보다시피 내가 좀 바빠서.”남천의 뒤로 보이는 침대 위에는 헐벗은 여자가 여럿 있었다.“네 생물 칩 고객이 날 찾아왔어.”현석이 입을 열었다.“칩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칩이 심어진 사람의 언어 시스템에 이상이 생겨 칩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데 이걸 네가 해결해 줬으면 해.”“웃겨,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남천이 노트북 앞으로 얼굴을 가져다 대자 화면 가득 그의 얼굴이 채워졌다.“지금은 네가 날 사칭해서 내 사업을 망가뜨리고 있잖아. 후과라면 네가 직접 책임져야 지. 마피아 우두머리라는 네가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 지금 이러는 거야?”현석이 확대된 남천의 얼굴을 말없이 주시했다.예나에게 생물 칩이 삽입된 일에 대해서 남천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설마 정말 엘리자의 짓일까?’현석이 입꼬리를 매만지며 말했다.“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놓친 건 너야.”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남천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노트북을 들어 바닥에 내리쳤고 화면은 산산조각이 났다.현석은 서재를 벗어나 안방으로 돌아갔다.그는 침대 끝에 앉아 예나의 오른쪽 흉터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내가 대장로와 엘리자를 사지로 몰지 않았다면 엘리자가 예나를 납치하지 않았을 텐데…….’‘이 모든 게 내 탓 같아.’‘그날 홧김에 엘리자를 죽여버리는 게 아니었어.’‘죽이지만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현석은 한참이나 예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노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데 도예나는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강현석은 옷걸이에 걸어진 패딩을 들고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예나 씨, 옷이라도 걸쳐요.”그러나 그는 한발 늦어버렸다.예나는 빠르게 운전석에 올라타 강씨 별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사모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양 집사도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이렇게 얇은 옷차림으로 나가면 감기 드실 거예요. 빨리 따라가서 사모님 데리고 오세요.”양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석은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타 그녀의 뒤를 쫓았다.평일 오후라 거리에는 차량이 많지 않았다. 추운 날씨 탓에 행인도 적었고 두 차가 앞뒤로 큰길을 질주했다.현석은 예나의 차량으로 바짝 붙어 서지도 못했다. 행여나 예나가 더 빨리 달려 사고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지금의 예나는 생물 칩이 조종하고 있어 모든 이성을 잃어버렸다.현석은 문득 어제 읽은 문장을 떠올랐다. 칩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피해자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자살하라는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했다.남천이 예나에게 칩을 삽입했다면 자살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천이 예나의 목숨을 노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하지만 만약 칩을 삽입한 게 엘리자라면……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엘리자는 이미 목숨을 잃었는데 이 명령은 대체 누가 내리고 있는 걸까?’현석은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핸들을 꼭 쥐고 질주하는 앞 차량을 끈질기게 쫓았다.차량은 아스팔트 길을 지나 점점 교외로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량과 인적이 더욱 드물어졌다.어느새 산길까지 달렸는데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길이 많이 울퉁불퉁했다.현석의 초조한 마음은 극에 달했지만, 예나의 감정이 더 극단화 될까 봐 차량을 함부로 가로막지도 못했다.“펑!”그 순간, 예나의 차량이 산길의 가드레일을 들이박았다. 다행히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라 차 앞머리가 움푹 팬 것 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현석이 빠르게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달려갔다.그러나 또 한발 늦어버렸다.차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창밖으로 무서운 소리를 냈다.예나는 눈을 내리깔고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스킨십을 할 때 머릿속에서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처음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목소리는 나를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게 했죠. 그리고 내가 현석 씨한테 다가가면 그 목소리는 나를 당신한테서 멀어지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말을 내뱉게 했죠.”예나는 어지러워진 자기 앞머리를 매만졌다.“그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복종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거든요. 그런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예나 씨…… 예나 씨.”현석은 무슨 말을 건네면 좋을지 몰라, 있는 힘껏 예나를 품에 안고 자신의 체온을 나눴다.그녀의 고통을 체험해 보지는 못했으나 고통스러워하는 예나를 보며 현석은 심장이 찢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자기 심장을 향해 몇 번이고 도살하는 것 같았다.‘차라리 칩이 나한테 심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내가 아프면 아팠지, 예나 씨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더 힘들어.’“현석 씨, 칩은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떨어지기를 바랄지도 몰라요.”예나가 고개를 들어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당신이 나를 사랑할수록 칩은 당신을 괴롭힐거 에요.”“그럴 리가 없어요!”현석이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아직 그 어떤 기술도 사람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요.”“사람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때 그 어떤 물질을 뿜어낸다고 해요. 칩이 그 물질을 인식하고 명령을 내릴지도 모르죠.”예나가 쓴 웃음을 지었다.“AI 기술을 무시하지 마요. 특히 암시장에서 개발하고 있는 기술은 생각보다 더 무섭게 발전했을 거 에요.”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착취하는 악독한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칩을 제거해 줄게요. 예나 씨, 너무 걱정 마요. 다 방법이 있을 거 에요.”현석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방법이 있을 거라고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레이가 걸어온 전화였다. 강현석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형님, 30분 전 강남천이 탈주를 시도했으나 다시 잡아왔습니다.”현석의 표정이 굳어갔다.“꽉 붙잡아 둬! 다시 도망갈 틈을 주면 안 돼!”“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을 불러와 지하실을 지키게 했습니다. 초능력이 있다고 해도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현석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렸다.예나가 손으로 그의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현석 씨, 다 괜찮아질 거예요. 모든 게 해결될 거에요.”현석이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아이들을 납득시킬 이유라도 알려줘야 죠.”두 사람은 돌아가는 내내 어떤 이유를 대면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그렇게 차는 천천히 별장 입구에 들어섰다.어린이집 하원 시간을 넘긴 시간이라 아이들은 거실에서 정지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예나와 현석이 나란히 집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이 그들을 에워쌌다.세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집에서 푹 쉬라고 했잖아요. 어디 다녀오는 거예요?”수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아빠, 엄마 잘 보살피겠다고 저희랑 약속했잖아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엄마, 잠옷 입고 외출하신 거예요?”제훈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세훈의 시선은 더 날카로웠다.“이 날씨에 맨발에 슬리퍼라니.”이 슬리퍼는 현석 차의 트렁크에 있던 슬리퍼로, 현석이 임시로 찾아 그녀에게 신긴 것이었다.예나가 웃어 보였다.“아빠랑 근처로 산책 다녀오는 길이야. 멀리 가지 않았으니, 잠옷과 슬리퍼 차림이지.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소파에 앉아있는 정지숙이 인상을 찌푸렸다.두 시간 전, 예나와 현석은 갑자기 다툼을 시작했는데 화를 내던 예나가 차를 타고 사라졌고, 현석이 그녀의 뒤를 바로 쫓았다.둘이 집을 나서는 순간, 정지숙은 혹시 강남천이 돌아온 건 아닌지 라는 의심이 들었었다.강남천과 함께 일 때 예나
얼마 전만 해도 예나는 정지숙을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오늘 그녀를 어머님이라고 불렀다.불안에 떨던 정지숙의 마음도 드디어 가라앉았다.현석과 예나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건 그 일을 거의 덮었다는 뜻이었다.“예나야, 안심하고 일하러 가거라. 아이들은 내가 잘 보살피마.”정지숙이 흔쾌히 대답했다.“엄마, 엄마랑 떨어지지 않을 래요!”세윤이 예나의 몸으로 펄쩍펄쩍 뛰며 말했다.“엄마, 세윤이는 엄마랑 같이 살래요. 제발요!”수아도 예나의 옷깃을 잡아당겼다.“지금까지 엄마랑 떨어져 지낸 적이 없는데, 엄마 없이 못 살아요. 엄마 가지 마요.”세훈과 제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눈빛 속에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제훈은 아쉬운 마음 외에도 한가지 의심이 생겼다.‘수아랑 나는 지금껏 엄마랑 떨어져 지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일이 아무리 바쁘셔도 늘 우리랑 함께 했었지.’‘그런데 아무리 장씨 그룹 프로젝트에 많은 신경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해도 굳이 이사할 필요가 있나?’‘설마 두 사람이 따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그렇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긴 한데.’“엄마가 매일 너희들을 보러 올게.”예나가 아이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일단, 지금은 엄마를 도와 짐 정리를 해줄 수 있을까?”“싫어요.”세윤이 입을 삐죽였다.“난 엄마랑 같이 살래요. 엄마 없이 못 살아요.”예나는 가슴 한 편이 너무 쓰라렸다.‘평화로울 줄만 알았던 내 일상에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어?’한 달 동안 모든 걸 해결한다면 좋겠지만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시간이 무한정으로 길어질 수 있었다.“세윤아, 수아야, 제훈아, 세훈아, 엄마는 너희들을 정말 사랑해.”예나가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일을 처리하고 나면 바로 돌아올 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갈 거야.”“엄마, 나도 사랑해요.”세윤이 미련 뚝뚝 흐르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그래서
수아는 울음을 당장 터뜨릴 지경이었다.“엄마가 더 이상 수아를 사랑하지 않는 거 아니야? 엉엉엉…….”제훈이 빠르게 수아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엄마는 화가 난 게 아니야. 지금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래.”“장씨 그룹의 후계자 경쟁은 엄마한테 아주 중요한 일이야.”세훈이 입을 열었다.“엄마가 이사하는 건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세윤이 너도 엄마 마음 불편하게 하지 마.”세윤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응, 알겠어. 지금 엄마한테 사과하러 갈게.”제훈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아니, 일단 엄마가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엄마랑 아빠는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교외로 잠시 이사 가시는 거야. 다른 나라로 가신 것도 아니라고. 너무 보고 싶으면 할머니한테 엄마 아빠 보러 가자고 하면 돼. 그러면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어.”정지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세윤아, 이만 뚝-하자. 네가 울면 수아도 따라서 울 거야. 그러니까 눈물 닦자.”세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비볐다.수아도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20분이 지나고 2층 안방 문이 다시 열렸다. 벽에 기대선 예나가 입을 열었다.“엄마 짐 정리 도와주기로 했잖아. 다들 거기서 뭐해?”세윤이 총총총 달려와 물었다.“엄마, 화난 거 아니죠?”“엄마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그냥 장난친 거야.”예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눈이 빨개졌네, 울었어? 세윤이는 씩씩한 아이니까 이런 일로 울면 안 돼.”세윤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네! 엄마 아빠 이사 가시고 동생을 열심히 지킬 게요!”“좋아, 그럼, 엄마가 돌아와서 상 줄게.”예나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네 아이들과 안방으로 들어섰다.제훈이 킁킁 냄새를 맡더니 입을 열었다.“피비린내가 나는 거 같지 않아?”세훈이도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나도 맡았어.”현석은 바로 정장 외투를 꺼내 입었다. 왼쪽 팔목을 어색하게 쓰는 모습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