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훈은 한 달 동안 침묵만을 지켜오던 수아의 모습이 떠올랐다.‘우리 수아 다 알고 있었구나.’수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제훈은 줄곧 수아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사실 수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민하여 아빠한테 사고가 났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다만 수아는 아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그런 상태로 날마다 두려워하고 밤낮으로 불안해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아빠를 만난 후 그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다.그래서 수아는 지금 여유롭게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처음의 두려움이 지나간 후에야 곡은 점점 가벼워졌고 객석의 사람들은 이미 안색이 변했다.방금 그 우수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도 그들은 모두 그 상황으로 빠져들지 못했었다.하지만 지금 겨우 네 살로 보이는 어린 소녀는 그들이 작곡가가 느낀 당시의 그런 두려움 속으로 이끌었다.수아의 피아노 기교는 그리 능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감정에 대한 깨달음은 출중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알버트 거장이 제자로 들일만 했네.’사람들의 경탄, 충격, 놀라운 가운데 곡은 천천히 마무리되었다.짝짝짝-연주실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옆에 앉아 감상하던 두 명의 피아니스트는 원래 이 어린 소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하지만 소리가 울리자마자 그들은 자신이 수아를 우습게 여겼고 들을수록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연주회가 끝나자 두 피아니스트는 얼른 다가갔다.“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예요? 우리하고 간단하게 소통할 수 있을까요?”수아는 높은 의자에서 뛰어내려 다소 수줍어하며 제훈 뒤에 숨었다.“죄송합니다만 제 여동생은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없습니다. 저랑 말씀하시면 됩니다.”제훈은 수아의 손을 잡고 대범하게 말했다.세훈도 다가와 입을 열었다.“앞으로 제 여동생이 피아노 연주회를 열면 제가 입장권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세윤은 수아의 몸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우리 동생 넘볼 생각하지 마세요! 저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커피숍.도예나와 스위프트 여왕이 마주 앉았고, 옆 테이블에서는 네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고 있었다.“정말 부러워요.”스위프트 여왕이 옅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네 쌍둥이라니, 한 번에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셨네요…….”스위프트 여왕에게는 딸아이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왕위 계승 자격을 잃고 말았다.‘만약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면 왕권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공주님은 아직 17살 미성년자 아닙니까? 앞으로 인생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거예요.”예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위로했다.“여왕님께서 공주님께 기회를 한 번 더 드린다면 반드시 잘 성장하셔서 차세대 여왕이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제가 기회를 준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여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내각에서는 아이가 18살이 되기 전 공주 자질이 검증되지 않는다면 여왕 자격을 영구 박탈할 거라고 했어요…….”예나가 입술을 매만졌다.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는 모습에 여왕은 흔쾌히 그녀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뉘앙스를 보였다.이에 예나도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황실 내부 다툼은 우리나라 매체에서도 보도가 되었던 사항이에요. 내각은 여왕님이 조실부모하시고 남편도 일찍 보내셨으니 감히 여왕님께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작 열 몇 살인 공주님이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공주님이라는 신분 하나로 그들에게 위협감을 조성했으니, 눈엣가시로 여기고 그러는 겁니다.”스위프트 여왕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오랜 시간 여왕 직을 재위하면서, 여왕은 오직 남편에게만 이렇게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의 입지를 진심으로 분석해 주는 사람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나라 국민은 감히 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고, 이웃 나라 귀부인들은 사생활을 입에 올리기 꺼려했었다…….처음으로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공주님에게 필요한 건 기회예요.”예나가
“트레이북 그 사람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죠.”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마피아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그 사람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어요.”스위프트 여왕이 모자를 아래로 당기며 말했다.“그래요, 일단 당신을 믿어볼 게요. 언제 시작할 건가요?”“구체적인 계획은 직접 만나서 얘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트레이북이 며칠 뒤 몰래 여왕님을 만나 뵈러 갈 거예요.”여왕은 문서를 천천히 찢고, 그 위로 커피를 쏟은 뒤 조각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리고서 여왕은 우아하게 발걸음을 밖으로 옮겼다.“엄마, 성공했어요?”세윤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예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런 셈이지. 너희들 오늘 정말 너무 잘해줬어. 특히 수아, 피아노 연주 아주 대단했어. 수아 덕분에 엄마가 여왕님과 커피를 마실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거야. 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 말만 해.”수아가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동파육 먹고 싶어요.”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여기 음식점 동파육은 맛이 평범할 거야. 엄마랑 같이 마트에 재료 사러 갈까? 엄마가 직접 해 줄게.”세윤이 입술을 다시며 말했다.“와! 너무 오랜만에 동파육 먹을 생각을 하니까 군침이 돌아요.”“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일단 마트부터 가자.”예나는 네 아이와 함께 커피숍을 빠져나왔다.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타려는 찰나, 그녀는 큰길 옆에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뒷모습을 확인하며 차에 올라탔다.차창 너머로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던 예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이지원이 왜…… Y국으로 왔지?’“엄마, 왜 그래요?”제훈이 물었다.예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빨리 마트 가자.”그녀는 길가에 서 있는 이지원을 다시 흘깃 살피고 차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마트에서 간식을 고르고 있을 때 그녀는 몰래 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예나야, 어떻게 됐어?]
“설민준! 네가 어디 사는지 나 다 알아!”지원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녀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로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바로 네 집으로 갈 테니까 딱 기다려.”이 말에 민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사는 곳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난 네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늘 주시하고 있었어. 그리고 네가 한 여자와 네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지원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너, 도예나랑 함께 지내고 있었던 거지?”민준이 인상을 팍 쓰며 물었다.“너 나한테 사람 붙였어?”“그럴 필요가 뭐 있어. 네 카드 명세서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데. 네가 Y 국에 있다는 걸 알아내고, 여기저기 소식 좀 물어보니까 바로 네가 어디서 누구랑 뭘 하는지 알아냈지.”지원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강현석은 국내에서 도예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아내가 너랑 해외로 도주한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도예나가 심지어 네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는 걸 알아버린다면 설씨 그룹은 어떤 풍파를 겪게 될지 참 궁금하네.”민준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원이 입을 열었다.“너희 집 앞이야. 문 열어.”민준이 고개를 들자, 별장 앞에 선 택시 차와 화려하게 꾸민 지원이 보였다.그는 얼굴을 굳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카엘, 피터. 거실에 있는 모든 장난감을 치워줘요. 들키면 안 되니까.”두 사람은 그의 표정에서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빠르게 상자에 장난감을 담아 베란다 커튼 뒤로 숨겼다.집을 간단히 치우고 나서 민준은 질문 밖으로 나섰다.“왜 이렇게 늦게 문 여는 거야?”이지원이 불만이라는 듯 쏘아붙였다.“일부러 너 보러 온 사람을 그런 눈길로 보지 마.”민준의 눈빛이 서늘했다.민준과 지원은 연인 사이였었다. 지원에게는 민준이 첫사랑이었고, 민준은 지원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예나에게 가짜 여자친구 행세를 해달라고 했었다.지원의 자존심을 지켜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죽어도 포기하지 않았
카엘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럼 당신은 뭔데 민준 씨에게 사랑을 강요하고 있는 겁니까? 사랑한다고, 잘해줄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이 당신의 사랑을 받아줘야 하는 거예요?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가 사랑한다고 하면 당신도 역겨운 감정이 들지 않나요? 지금 당신이 느낀 그 기분을 민준 씨도 느끼고 있으니, 이만 가주세요.”쾅!카엘이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지원은 너무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폭발할 것 같았다. 그녀는 철문을 발로 걷어찼지만 되려 발을 감싸 쥐고 콩콩거리며 소리쳤다.그녀는 민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도예나 때문에 나를 이딴 식으로 대하다니, 네가 도예나를 선택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거야!”민준이 여전히 무표정으로 말했다.“그래, 기대할 게.”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별장 밖의 외부인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카엘은 어딘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한국에 있는 강현석이라는 사람이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데, 정말 찾아오면 어쩌려고 그래요?”“진짜 현석 씨는 현재 마피아 우두머리예요. 근데 강남천 따위가 뭐가 두렵겠어요?”민준은 턱을 감싸 쥐며 말했다.“다만 현석 씨가 아직 기억을 찾지 못했으니, 둘이 싸울 일은 없을 듯싶어요.”민준이 핸드폰을 꺼내 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별장 밖의 지원은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먼 곳을 찾아왔는데, 별장 안으로 들여보내지도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민준이 자신을 원한다면, 하룻밤도 괜찮았다.‘여자 혼자, 낯선 이국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게 걱정도 되지 않는 거야?’지원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아내며 이를 악물었다.“매정한 건 너였어.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하던 날 탓하지 마!”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Y 국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인 곳에서 강남천은 창가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검은색 옷차림의 남자 여럿이 그의
도예나와 아이들은 마트 쇼핑을 마치고 크고 작은 바구니를 들고 별장으로 돌아왔다.아이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고, 예나는 주방에서 야채를 다듬고 있었다. 설민준도 예나를 따라 주방에 들어갔다.“지원이를 내쫓았어.”민준이 콩나물을 다듬으며 말했다.“미안해, 예나야. 내가 너무 방심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그래도 지원이가 널 만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야.”“만나도 상관없어.”예나가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불필요한 다툼을 피하고 싶어서 만나지 않았던 거지. 굳이 날 찾아온다면 만나지 않을 이유도 없어…… 그런데 이지원 그 성격에 바로 강남천한테 연락했을 텐데…… 그 사람도 나한테 당한 게 있으니 아마 찾아올 것 같아.”민준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감히 여길 오기만 해봐. 우리도 함정 파 놓고 기다리자.”예나는 말없이 야채를 다듬었다. 그녀의 표정이 아주 착잡해 보였다.‘기억을 잃은 현석 씨가 자신과 똑 닮은 사람과 마주한다면 아마도 강남천을 죽이지 못할 거야.’‘설사 기억을 찾았다고 해도, 자기 형을 죽이지 못할 거고.’‘강남천…… 정말 처리하기 어려운 사람이야.’‘어쩔 수 없이 직진하는 수밖에.’그녀의 표정을 읽은 민준은 빠르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오늘은 어땠어?”예나가 바로 미소를 지었다.“순조로웠어. 스위프트 여왕에게 딸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여왕의 유일한 약점이었어. 그쪽을 공략하니까 바로 술술 풀리더라고.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아침에 현석 씨를 찾아가 여왕의 말을 전해주려고.”민준이 고개를 저었다.“H 지역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어. 대장로 쪽 사람들이 사방에 잠복해 있고, 넌 엘리자에게도 밉보인 상황이잖아. 네가 강현석 씨를 만나기도 전에 엘리자에게 잡힐까 봐 걱정돼. 차라리 전화를 걸어보는 게 어때?”“이런 기밀 사항은 전화로 하면 안 돼. 누가 도청할지 알고.”예나가 표정을 굳혔다.‘아무리 H 지역이 위험하다고 해도 꼭 한번은 가야 해.’“엄마, 제가 도청 장치를 차
예나가 고개를 들자, 네 아이와, 민준, 카엘, 피터 총 일곱 명이 컴퓨터를 둘러싸고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이 한순간에 빨개졌다.“그런 말 마요. 끊을 게요.”[오늘 저녁 보러 갈게요.]현석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예나 씨. 보고 싶어요. 만나면 안 될까요……?]이런 직설적인 작업 멘트에 예나는 가슴이 떨려왔다.그녀는 이러다가 심장에 무리가 갈까 봐 빠르게 전화를 끊어버렸다.“어, 왜 끊었어요?”“엄마, 아빠가 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왜 끊었어요?”아이들이 거실에서 소리쳤다.예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표정을 굳힌 뒤에 거실로 들어섰다.“앞으로 엄마 통화 내용 엿들으면 안 돼.”수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자신이 발견한 점을 말했다.“엄마 귀가 엄청 빨개요.”“어어, 진짜네. 엄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예요?”세윤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해서 엄마가 부끄러운 가봐.”“…….”‘이 녀석들 눈치가 왜 이렇게 빨라?”제훈이 얌전하게 앉아 물었다.“아빠가 저녁에 올 까요?”“맞아요! 아빠가 엄마 보러 온다고 했어요!”수아는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퐁퐁 뛰었다.“그러면 수아도 아빠 볼 수 있어요!”세윤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드디어 아빠를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너무 기뻐요!”세훈이 마른기침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까 아빠가 한 말 못 들었어? 아빠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올 거라고 했어. 우리는 끼지 말자.”수아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빠, 왜 끼면 안 되는 거야?”“우리가 엄마 아빠 연애에 방해가 되니까.”세훈이 설명했다.“근데 우리는 방해하지 않을 건데…….”수아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수아는 구석에서 아빠 얼굴만 봐도 좋은데.”수아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예나는 허리를 숙여 수아를 다독이며 말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우리 같이 아빠 기다릴까?”수아와 세윤이 다시 폴짝폴짝 뛰었다
안방은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도예나는 남성의 강한 호르몬 냄새를 맡았다.처음에는 현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너무 세서 그녀는 팔이 끊어질 것 같았다.기억을 잃기 전의 현석이든, 기억을 잃은 현석이든, 절대로 그녀에게 이렇게 거칠게 대한 적이 없었다.예나는 몰래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의자를 발로 찼지만, 그 사람은 쉽게 몸을 피했다.어둠 속 남자는 화가 많이 난 듯싶었는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바로 침대로 끌고 갔다.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내려앉았다.“도예나. 이곳에서 꽤 재밌게 지냈나 봐? 내 생각은 했었어?”낮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예나의 귓가에 울렸다. 예나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살폈다.그녀는 바로 팔꿈치로 남자의 목을 가격하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호신술 배운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고, 지금 나한테 함부로 대했다가는 당신이 크게 다칠 수가 있어.”“그래?”남천이 주머니에서 검은색 물체를 꺼내 예나의 이마를 노렸다.“지금도 내가 널 이기지 못할 거로 생각해?”검은색 차가운 물건,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도예나는 자기 이마를 노리는 물체가 무엇인지 빠르게 눈치를 챘다.미약한 달빛을 빌려 그녀는 남천의 차갑고 정교한 얼굴을 확인했다.“이 먼 곳까지 찾아와 내 시체를 거둬갈 생각은 아닐 텐데.”“당연히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아직 널 가지지 못했으니까.”남천은 천천히 총을 아래로 겨누며 그녀의 옷깃을 들쳤다. 검은색 총이 그녀의 쇄골로 향했다.“빨리 벗어!”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강남천, 당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아?”“당연하지.”남천이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넌 너에 대한 내 감정을 이용해 여태껏 날 속였어. 널 사랑하게 했으니 네 몸도 내 것이야.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났고, 셋 셀 테니 옷을 벗어. 안 그러면 옆방에 가서 아이들부터 죽일 테니까.”예나가 이를 악물었다.“결국 너희 가문 핏줄인데 어떻게 그런 미친 짓을 할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