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이른 아침, 온하나가 일어나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안영자의 제지를 받았다.“사모님, 아침 드세요. 대표님이 다 드시는 것까지 지켜보라고 하셨어요.”“고맙지만 됐어요.”온하나가 안영자를 지나쳐 가려는데 그녀가 다시 돌아와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삐죽거렸다.“대표님께서 다 드시고 가라고 하셨어요.”온하나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차씨 가문에서 주는 월급을 받으니 차우빈의 눈치를 보는 것까진 상관없었지만 그녀의 배려가 상대의 호감을 사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그녀를 아무 말도 못 하고 만만한 상대로 보이게 했다.전에는 무시했어도 이젠 이혼까지 앞둔 상황에서 더 신경 쓸 게 없었던 온하나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이모님, 아침에 제비집도 가져오시죠.”온하나는 그녀가 먹지 않으면 안영자에게만 좋은 일이란 걸 알았다.전에 안영자가 수작을 부려 온하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잊어버린 척 가져오지 않았다가 온하나가 가면 자신이 실컷 먹었다.안영자는 온하나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저 제비집은 제가 못 먹는 건가요?”온하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식탁으로 걸어가 앉으며 말했고 가만히 서 있던 안영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안영자 씨, 난 아직 이 집의 안주인이에요. 전에 했던 행동들은 굳이 따지지 않겠지만 오늘부터 나와 이 집에 하루라도 같이 있는 한 나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본인 주제 파악 똑바로 하세요. 안 그러면 나도 차우빈한테 다 얘기해요.”안영자는 그런 온하나가 낯설어서 완전히 어안이 벙벙했다.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뒤섞여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이따금 돌아보았다.아침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차우빈이 현관에서 온하나의 말을 듣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저 여자가 점점 솔직해지네.’다시 제비집을 들고나온 안영자가 목을 빼 들고 해명했다.“저는 오랜 세월 동안 차씨 가문에서 일하면서 뭘 탐낸 적이 없으니 사모님께선 억울한 누명 씌우지 말아 주세요. 오늘 객실에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몫을 빠르게 먹어 치운 온하나가 그릇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차 대표님, 만족하세요?”차우빈은 그녀가 내민 그릇을 흘깃 쳐다보며 진지하게 평가했다.“아직 국이 남았잖아. 샌드위치도 남기지 마. 원숭이처럼 말라서 차씨 가문에 너 먹일 돈이 없을까 봐? 아니면 기다렸다가 외할머니 생신에 일러 바치게?”김혜숙은 심명희와 차우빈이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참지 못해 만날 때마다 온하나를 위해 나서줬다.심지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전화를 걸어 온하나에게 자신의 집으로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하기도 했다.온하나는 차우빈의 비꼬는 말을 듣고는 그를 향해 경멸하는 눈빛을 보낸 뒤 그릇을 들고 남은 제비집마저 다 마셔버렸다.그리고는 눈앞에 남은 빵 반쪽을 집어 입에 넣고 일어나 가려는데 휴대폰 벨이 울렸다.발신자가 할머니인 것을 본 온하나는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심호흡을 한 후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고 환한 목소리로 불렀다.“할머니.”차우빈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표정이 어두워졌다.‘태도가 이렇게 확 바뀔 수가 있나.’“하나야, 내일 일찍 오는 거 잊지 마. 오랜만이라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으니까 꼭 와.”은근한 당부에는 따뜻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온하나는 김혜숙이 무슨 소식을 들었거나 뉴스를 봤기 때문에 그녀가 오지 않을까 봐 일부러 전화를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아직 이혼한 것도 아니고 설령 진짜 이혼을 한다고 해도 온하나는 갈 생각이었다. 김혜숙이 친손녀처럼 대해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해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온하나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가 더 깊어지며 부드럽게 상대를 다독였다.“할머니,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일찍 갈게요.”김혜숙은 그녀의 말에 기뻐서 몇 마디 당부를 덧붙였다.전화를 끊고 차우빈의 어두운 표정을 매섭게 흘겨본 온하나는 자리를 떠났다.병원에 도착한 온하나는 때마침 주차장에서 반은성과 마주쳤다.“반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차우빈이 그녀를 특별하게 대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차우빈의 뼛속 깊이 남아있는 신사적인 면모로 여자에겐 손을 대지 않을 것이고 기껏해야 입으로만 모질고 독한 말을 내뱉는 것뿐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아래층 카페로 걸어갔고 온하나는 코에 시퍼렇게 멍이 든 정승호를 바라보며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오빠, 어제 오빠까지 끼어들게 해서 미안해. 근데 왜 갑자기 돌아왔어? 아직 방학하려면 한 달 남았잖아.”정승호는 3년 동안 보지 못했던 눈앞의 소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개 같은 시간이 매정하고 무정하게 흘러가서 그가 떠난 사이 많은 사람의 운명을 소리 없이 바꿔놓았다.그가 마음속에 소중히 여겼던 소녀는 그가 떠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소중한 그녀를 차우빈은 무시하고 하찮게 대한다는 점이었다.“오빠?”온하나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불렀고 정신을 차린 정승호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아, 이미 공부를 끝내서 일찍 돌아왔어. 하나야, 이제부터는 내가 있으니까 혼자 짊어지지 말고 기분 안 좋으면...”온하나는 그가 차우빈과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결혼에 대해서도 줄곧 그에게 말할 기회가 없었다. 자신이 행복해지면 그와 만났을 때 그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젠 더 얘기하기 싫었다.“오빠, 내 걱정은 하지 마. 힘든 시간도 이미 지나갔고 오빠 능력이면 좋은 일자리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 다 잘될 거야.”온하나의 담담한 미소에 정승호는 마음이 놓였다.“난 이미 양진그룹에 입사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아까 아저씨 뵈러 갔다가 반년 치 병원비 이미 냈어. 너무 너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정승호의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이제 막 귀국해서 돈이 필요할 때잖아. 엄마한테 돈 있어. 내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승호가 입을 열었다.“부담 갖지 마. 그 돈은 원래
“난 금융 전공이잖아. 투자해서 돈 버는 게 내 일인데 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돈도 못 벌면 양진그룹에서 왜 나를 데려가겠어? 너 같은 멍청이만 걱정하면서 나한테 돈을 보내지.”정승호가 말하며 어릴 때처럼 그녀의 코를 꼬집으려 하는데 온하나가 슬쩍 피했다.어젯밤 이후 온하나는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며 어린 시절의 많은 행동이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내 코 꼬집지 마. 가짜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어렸을 때 무너졌을 거야.”정승호가 웃었다.“어렸을 땐 코가 좀 무너졌는데 내가 자주 꼬집어줘서 다행이지.”온하나의 코가 지금 오뚝한 건 자기 덕분이라는 소리다.어렸을 때를 떠올리자 온하나는 마음이 시큰했다. 보육원에서 일 년에 고깃국도 몇 끼 못 먹었지만 자신을 엄마처럼 사랑해 준 원장님이 있었고 매번 자신을 지켜주던 정승호가 있어서 행복했다.입양되지 않았다면 차우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많은 고충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두 사람의 오가는 작은 행동을 임다혜가 멀지 않은 곳에서 촬영했고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온하나가 남자에게 꼬리 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허, 온하나 씨 얌전해 보이는데 남편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남자한테 꼬리치네요?”마침 도착한 조수연이 그녀의 말을 들었고 그녀는 옆자리 동료와 함께 사진을 보며 수군거리기까지 했다.“어머, 남자 괜찮네. 엘리트 느낌이 나는데요.”호기심이 발동한 조수연이 조용히 다가가 목을 쭉 뻗어 들여다보았다. 정승호를 보는 순간 조수연은 문득 꼬신다는 말이 그다지 거슬리게 들리지 않았다.온하나가 정말 정승호와 사귄다면 두 손을 번쩍 들어 허락할 것이다.온하나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남자는 어디를 봐도 차우빈보다 백배는 나았다....오후가 되자 온하나는 어젯밤 인터넷에서 한참을 둘러보아도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한 김혜숙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조수연을 끌고 쇼핑몰로 향했다.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가격 때문에 기가
“손님, 선물하실 건가요? 예쁘긴 해도 젊은 사람한테는 어울리지 않아요. 은근히 푸른 빛도 띠고 있어서 나이 드신 분들이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요.”온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선물하려고요.”“그럼 제가 꺼낼 테니 자세히 보실래요?”조수연은 옆에 있는 가격표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나야, 몇천만 원이야. 선물 하나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우리 한 달 월급이 고작 얼마인데.”온하나는 팔찌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가 조수연의 말을 듣고서야 가격을 눈여겨봤다.몇천만 원은 온하나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이었다.온하나는 머쓱하게 직원을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돌아보고 올게요.”조수연은 이혼할 때 그녀가 차우빈에게서 돈을 얼마나 받아낼지 의아했는데 지금 보니 괜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그녀가 조수연의 팔을 끌고 나가려는 찰나 밖에서 정승호가 걸어들어왔다.“마음에 드는 거 없어?”평소 사람들의 눈치를 잘 살피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손님께서 이 팔찌를 눈여겨보신 것 같은데 갑자기 뭐가 문제인지 됐다고 하시더라고요.”“포장하고 이 카드로 해요. 비밀번호 없어요.”정승호가 은행 카드를 건네자 온하나가 이를 막으려 했지만 정승호가 팔을 들어서 막았다.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네가 준 돈으로 투자했는데 수익률이 아주 높아. 내 첫 목돈은 네가 준 돈으로 마련한 셈이지. 이 팔찌는 그 20분의 1도 안 돼.”온하나는 직원의 활짝 핀 미소를 보고 제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오빠, 우린 절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잖아. 오빠가 힘들 때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혼자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돈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이러면 나 엄청나게 부담스러워.”“방금 네 입으로 가족이라고 했잖아. 넌 나한테 그냥 주면서 내가 내 가족에게 선물한다는 것도 거절하는 거야? 내 돈이 더러워?”조수연은 옆에서 정승호를 바라보며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승호 오빠, 이 기세 아주 마음에 들어
“친한 사이니까 더 위험하지. 어젯밤에 우리가 안 갔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알겠어?”눈치 없는 차우연의 모습에 양지원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 언니, 사실인데 말도 못 해? 우리 오빠는 저 여자 좋아하지도 않고 내 마음속엔 언니가 내 새언니야.”멍청한 차우연은 차우빈의 굳어진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입을 놀렸다.“우연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 오빠는 나를 동생처럼 생각해.”“언니랑 오빠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잖아. 중간에 언니가 기안을 떠나지 않았으면 둘 사이가 더 가까워졌을 텐데 온하나가 끼어들 틈이 있었겠어?”“네 부모님은 너한테 뭘 가르치길래 입을 그딴 식으로 놀려? 주제 파악 하나 똑바로 못 해?”차우빈은 그녀를 노려보며 옆으로 밀쳐내고는 그대로 옆을 지나쳤다.“오빠, 난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왜 화를 내?” 납득할 수 없었던 차우연은 앞으로 다가가 따졌다.“오빠 아내 때문에 화난 걸 왜 나한테 화풀이 해? 그리고, 할아버지랑 큰엄마도 온하나가 차씨 가문 사람이란 걸 인정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안 해?”“우연아,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양지원이 뒤에서 바짝 따라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차우연을 말리면서 달랬다.“지원 언니, 언니가 너무 착하고 오빠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래. 기안에서 언니랑 오빠 사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양지원의 불쌍한 표정에 차우연은 차우빈이 더욱 그녀에게 못되게 군다고 느꼈다.“그만해. 오빠가 나한테 잘해주는 건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오빠 난처하게 만들기 싫어. 부담 주기는 더 싫고. 이게 다 내 운명이지 뭐.”양지원의 목소리를 무척 작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 정말로 억울한 것 같았다.차우빈은 이미 성큼성큼 앞을 나섰지만 그래도 그녀의 무기력한 말이 들렸다.다급하던 발걸음이 느려졌고 얼굴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여기 사람 많으니까 빨리 돌아가. 팬들 알아보면 성가시잖
보육원부터 대학까지 정승호는 온하나의 곁에서 늘 오빠 같은 존재였다. 맛있는 음식은 그녀에게 먼저 챙겨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와 도와줬다.온하나는 여덟 살 때 온씨 집안으로 입양됐는데 당시 정승호는 이미 열 살이었고 입양이 어려워 보육원에서 자랐다.보육원의 형편이 좋지 않아 정승호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육원에서 키워야 할 아이들이 열댓 명이나 되어 그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는 원장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선뜻 나서서 학업을 포기했고 2년 동안 보육원에서 원장을 도와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식당에서 설거지와 식재료 다듬기 등의 일을 도우며 돈을 모아 온하나에게 몰래 건네기도 했다.그가 17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한 친절한 분이 원장에게 연락해 그를 후원하겠다면서 온하나와 같은 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뤄주기도 했다.정승호는 후원해 준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며 후원해 준 그분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배불리 먹고 나니 온하나의 얼굴엔 무기력함이 드러났다.시간이 늦었는데 신비 캐슬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무슨 생각해? 조금 전까지 그렇게 잘 놀다가 왜 갑자기 우울해진 거야?”정승호는 온하나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함께 자랐으니 그보다 온하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온하나는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아무 생각도 안 해.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내가 마련한 집으로 갈래? 여기서 멀지도 않고 병원이랑도 가까워.”조수연은 정승호가 온하나를 위해 집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승호 오빠, 진짜 잘해준다. 우리 하나 지금 딱 집이 필요하거든.”정승호가 온하나를 바라보았지만 온하나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 보이지 않았다.온하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시선을 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야, 마음만 받을게.”어젯밤 차우빈이 이미 모진 말을 들었는데 이혼을 앞두고 더 이상 오해를 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외롭고 쓸쓸한 밤을 그녀 홀로 조용히 바라보며 기다려 왔던가.찬바람이 목을 타고 들어와 온하나를 오들오들 떨게 했지만 온하나는 여전히 자신이 속해 있다고 느꼈던 유일한 장소인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이때 차우빈은 서재에 있지 않고 거실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마당에 멍하니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온하나를 보고 손을 들어 발코니 문을 열어젖혔다.“머리가 흐릿한데 찬 바람 맞는다고 정신이 들겠어?”남자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어두운 밤에 산속 샘물처럼 흘러나왔다.온하나가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차우빈이 나른하게 창문에 기댄 채 담배를 끼운 손을 입술에 가져가고 있었다.온하나가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본 차우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집에 와서 날 보니까 그렇게 싫어? 오늘 그 자식이랑 있을 땐 아주 한심하게 웃던데?”말끝을 살짝 올리는 그가 한껏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온하나, 내가 얼마나 돈이 부족하면 선물 사는데 다른 사람이 돈까지 내줘?”차우빈의 질책에 온하나는 갑자기 고집을 부리는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차 대표님, 자기가 한심하다고 남들도 똑같게 못났다고 생각하지 마. 다 차 대표님처럼 마음에 둔 사람 따로, 같이 자는 사람 따로 있지는 않으니까.”“허!”차우빈은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온하나를 노려보더니 눈썹을 찡긋한 채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다 사모님께 배운 거지.”오랫동안 밖에 서 있던 온하나는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에 흠칫 떨고 있었다.“차우빈, 뻔뻔한 사람은 많이 봤어도 너처럼 뻔뻔한 건 처음이야.”차우빈은 그녀와 더 말을 섞지 않고 팔을 당기며 집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내일 김혜숙의 생일 파티가 있기 때문에 온하나가 오늘 밤에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다. 함께 참석해야 김혜숙의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다음 날, 그들이 집을 나서려는데 차우빈이 선물 상자를 건넸다.“그 쓸데없는 팔찌 버려.”온하나는 차우빈이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