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금융 전공이잖아. 투자해서 돈 버는 게 내 일인데 내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돈도 못 벌면 양진그룹에서 왜 나를 데려가겠어? 너 같은 멍청이만 걱정하면서 나한테 돈을 보내지.”정승호가 말하며 어릴 때처럼 그녀의 코를 꼬집으려 하는데 온하나가 슬쩍 피했다.어젯밤 이후 온하나는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며 어린 시절의 많은 행동이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내 코 꼬집지 마. 가짜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어렸을 때 무너졌을 거야.”정승호가 웃었다.“어렸을 땐 코가 좀 무너졌는데 내가 자주 꼬집어줘서 다행이지.”온하나의 코가 지금 오뚝한 건 자기 덕분이라는 소리다.어렸을 때를 떠올리자 온하나는 마음이 시큰했다. 보육원에서 일 년에 고깃국도 몇 끼 못 먹었지만 자신을 엄마처럼 사랑해 준 원장님이 있었고 매번 자신을 지켜주던 정승호가 있어서 행복했다.입양되지 않았다면 차우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많은 고충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두 사람의 오가는 작은 행동을 임다혜가 멀지 않은 곳에서 촬영했고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온하나가 남자에게 꼬리 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허, 온하나 씨 얌전해 보이는데 남편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남자한테 꼬리치네요?”마침 도착한 조수연이 그녀의 말을 들었고 그녀는 옆자리 동료와 함께 사진을 보며 수군거리기까지 했다.“어머, 남자 괜찮네. 엘리트 느낌이 나는데요.”호기심이 발동한 조수연이 조용히 다가가 목을 쭉 뻗어 들여다보았다. 정승호를 보는 순간 조수연은 문득 꼬신다는 말이 그다지 거슬리게 들리지 않았다.온하나가 정말 정승호와 사귄다면 두 손을 번쩍 들어 허락할 것이다.온하나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남자는 어디를 봐도 차우빈보다 백배는 나았다....오후가 되자 온하나는 어젯밤 인터넷에서 한참을 둘러보아도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한 김혜숙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조수연을 끌고 쇼핑몰로 향했다.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가격 때문에 기가
“손님, 선물하실 건가요? 예쁘긴 해도 젊은 사람한테는 어울리지 않아요. 은근히 푸른 빛도 띠고 있어서 나이 드신 분들이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아요.”온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선물하려고요.”“그럼 제가 꺼낼 테니 자세히 보실래요?”조수연은 옆에 있는 가격표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하나야, 몇천만 원이야. 선물 하나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우리 한 달 월급이 고작 얼마인데.”온하나는 팔찌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가 조수연의 말을 듣고서야 가격을 눈여겨봤다.몇천만 원은 온하나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이었다.온하나는 머쓱하게 직원을 향해 웃었다.“아니에요. 돌아보고 올게요.”조수연은 이혼할 때 그녀가 차우빈에게서 돈을 얼마나 받아낼지 의아했는데 지금 보니 괜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그녀가 조수연의 팔을 끌고 나가려는 찰나 밖에서 정승호가 걸어들어왔다.“마음에 드는 거 없어?”평소 사람들의 눈치를 잘 살피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손님께서 이 팔찌를 눈여겨보신 것 같은데 갑자기 뭐가 문제인지 됐다고 하시더라고요.”“포장하고 이 카드로 해요. 비밀번호 없어요.”정승호가 은행 카드를 건네자 온하나가 이를 막으려 했지만 정승호가 팔을 들어서 막았다.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네가 준 돈으로 투자했는데 수익률이 아주 높아. 내 첫 목돈은 네가 준 돈으로 마련한 셈이지. 이 팔찌는 그 20분의 1도 안 돼.”온하나는 직원의 활짝 핀 미소를 보고 제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오빠, 우린 절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잖아. 오빠가 힘들 때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혼자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돈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이러면 나 엄청나게 부담스러워.”“방금 네 입으로 가족이라고 했잖아. 넌 나한테 그냥 주면서 내가 내 가족에게 선물한다는 것도 거절하는 거야? 내 돈이 더러워?”조수연은 옆에서 정승호를 바라보며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승호 오빠, 이 기세 아주 마음에 들어
“친한 사이니까 더 위험하지. 어젯밤에 우리가 안 갔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알겠어?”눈치 없는 차우연의 모습에 양지원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지원 언니, 사실인데 말도 못 해? 우리 오빠는 저 여자 좋아하지도 않고 내 마음속엔 언니가 내 새언니야.”멍청한 차우연은 차우빈의 굳어진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입을 놀렸다.“우연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 오빠는 나를 동생처럼 생각해.”“언니랑 오빠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잖아. 중간에 언니가 기안을 떠나지 않았으면 둘 사이가 더 가까워졌을 텐데 온하나가 끼어들 틈이 있었겠어?”“네 부모님은 너한테 뭘 가르치길래 입을 그딴 식으로 놀려? 주제 파악 하나 똑바로 못 해?”차우빈은 그녀를 노려보며 옆으로 밀쳐내고는 그대로 옆을 지나쳤다.“오빠, 난 진실을 말하고 있는데 왜 화를 내?” 납득할 수 없었던 차우연은 앞으로 다가가 따졌다.“오빠 아내 때문에 화난 걸 왜 나한테 화풀이 해? 그리고, 할아버지랑 큰엄마도 온하나가 차씨 가문 사람이란 걸 인정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안 해?”“우연아,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양지원이 뒤에서 바짝 따라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차우연을 말리면서 달랬다.“지원 언니, 언니가 너무 착하고 오빠한테 너무 잘해줘서 그래. 기안에서 언니랑 오빠 사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양지원의 불쌍한 표정에 차우연은 차우빈이 더욱 그녀에게 못되게 군다고 느꼈다.“그만해. 오빠가 나한테 잘해주는 건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오빠 난처하게 만들기 싫어. 부담 주기는 더 싫고. 이게 다 내 운명이지 뭐.”양지원의 목소리를 무척 작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 정말로 억울한 것 같았다.차우빈은 이미 성큼성큼 앞을 나섰지만 그래도 그녀의 무기력한 말이 들렸다.다급하던 발걸음이 느려졌고 얼굴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지만 말투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여기 사람 많으니까 빨리 돌아가. 팬들 알아보면 성가시잖
보육원부터 대학까지 정승호는 온하나의 곁에서 늘 오빠 같은 존재였다. 맛있는 음식은 그녀에게 먼저 챙겨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와 도와줬다.온하나는 여덟 살 때 온씨 집안으로 입양됐는데 당시 정승호는 이미 열 살이었고 입양이 어려워 보육원에서 자랐다.보육원의 형편이 좋지 않아 정승호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육원에서 키워야 할 아이들이 열댓 명이나 되어 그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그는 원장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선뜻 나서서 학업을 포기했고 2년 동안 보육원에서 원장을 도와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식당에서 설거지와 식재료 다듬기 등의 일을 도우며 돈을 모아 온하나에게 몰래 건네기도 했다.그가 17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한 친절한 분이 원장에게 연락해 그를 후원하겠다면서 온하나와 같은 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뤄주기도 했다.정승호는 후원해 준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며 후원해 준 그분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배불리 먹고 나니 온하나의 얼굴엔 무기력함이 드러났다.시간이 늦었는데 신비 캐슬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무슨 생각해? 조금 전까지 그렇게 잘 놀다가 왜 갑자기 우울해진 거야?”정승호는 온하나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함께 자랐으니 그보다 온하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온하나는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아무 생각도 안 해.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아.”“내가 마련한 집으로 갈래? 여기서 멀지도 않고 병원이랑도 가까워.”조수연은 정승호가 온하나를 위해 집을 준비했다는 말을 듣고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승호 오빠, 진짜 잘해준다. 우리 하나 지금 딱 집이 필요하거든.”정승호가 온하나를 바라보았지만 온하나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 보이지 않았다.온하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시선을 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야, 마음만 받을게.”어젯밤 차우빈이 이미 모진 말을 들었는데 이혼을 앞두고 더 이상 오해를 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외롭고 쓸쓸한 밤을 그녀 홀로 조용히 바라보며 기다려 왔던가.찬바람이 목을 타고 들어와 온하나를 오들오들 떨게 했지만 온하나는 여전히 자신이 속해 있다고 느꼈던 유일한 장소인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이때 차우빈은 서재에 있지 않고 거실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마당에 멍하니 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온하나를 보고 손을 들어 발코니 문을 열어젖혔다.“머리가 흐릿한데 찬 바람 맞는다고 정신이 들겠어?”남자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어두운 밤에 산속 샘물처럼 흘러나왔다.온하나가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차우빈이 나른하게 창문에 기댄 채 담배를 끼운 손을 입술에 가져가고 있었다.온하나가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본 차우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집에 와서 날 보니까 그렇게 싫어? 오늘 그 자식이랑 있을 땐 아주 한심하게 웃던데?”말끝을 살짝 올리는 그가 한껏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온하나, 내가 얼마나 돈이 부족하면 선물 사는데 다른 사람이 돈까지 내줘?”차우빈의 질책에 온하나는 갑자기 고집을 부리는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차 대표님, 자기가 한심하다고 남들도 똑같게 못났다고 생각하지 마. 다 차 대표님처럼 마음에 둔 사람 따로, 같이 자는 사람 따로 있지는 않으니까.”“허!”차우빈은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온하나를 노려보더니 눈썹을 찡긋한 채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다 사모님께 배운 거지.”오랫동안 밖에 서 있던 온하나는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에 흠칫 떨고 있었다.“차우빈, 뻔뻔한 사람은 많이 봤어도 너처럼 뻔뻔한 건 처음이야.”차우빈은 그녀와 더 말을 섞지 않고 팔을 당기며 집안으로 끌어당겼다.그는 내일 김혜숙의 생일 파티가 있기 때문에 온하나가 오늘 밤에 돌아올 거라고 확신했다. 함께 참석해야 김혜숙의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다음 날, 그들이 집을 나서려는데 차우빈이 선물 상자를 건넸다.“그 쓸데없는 팔찌 버려.”온하나는 차우빈이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
“뭘 멍청하게 쳐다봐?”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온하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은 채 차는 한참을 달렸고 차우빈은 똑바로 앉아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계속 만지작거렸다.차가 교외로 들어서면서 요란하게 흔들렸고 온하나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꾸만 옆으로 몸이 쏠렸다.무의식적으로 몸을 지탱해 줄 무언가를 잡으려고 손으로 차 시트를 더듬거리는데 차우빈은 한심한 그녀의 모습에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안으며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다.옅은 담배 냄새와 상쾌한 풀냄새가 섞인 익숙한 체취였다.“멍청하긴.”차우빈의 나무라는 말에 온하나는 차우빈과 처음 차를 같이 탔을 때를 떠올렸다.작고 마른 몸이 차가 급정거하거나 방향을 틀면 온하나의 몸도 말을 듣지 않고 쓰러졌다.그때도 차우빈이 먼저 이렇게 안아줬는데 두 사람이 가까이 밀착한 것도 그게 처음이었다.온하나는 시선을 들어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그녀가 없었다.차우빈은 온하나가 집에 두고 온 결혼반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의 손에 끼워주었다.시선을 내려 손에 있는 반지를 보던 온하나는 심장이 저릿했다.온하나가 직접 그린 그림을 차우빈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다듬고 주문 제작한 결혼반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반지였고 가격도 당연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그녀의 반지는 라일락꽃 모양에 다이아몬드가 하트 모양으로 박혀 있었고 차우빈의 것은 라일락 매듭과 꽃이 얽혀 있는 형태였다.온하나는 손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눈시울이 촉촉해졌고 시선을 돌려 차우빈의 약지에 있는 반지를 보자 가슴이 무언가에 눌린 듯 답답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이때 그녀를 안고 있던 남자가 손을 놓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수술 받으시고 몸 안 좋으니까 자극받으면 안 돼. 말 가려서 해.”온하나는 입술을 깨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괜히 감동했지. 그는 여전히 그녀를 미워하고 증오했고 2년이 지나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특히 온하나가 차우빈의 귀에 대고 말할 때 차우빈이 살짝 몸을 기울이는 모습은 배려가 넘쳤고 평소 팽팽하게 맞서던 두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네 사람이 마주치자 차우연이 싫은 기색을 보였다.“재수 없어. 나오자마자 원수랑 만나네.”양지원이 부드럽게 달랬다.“우연아, 그런 말 하지 마. 오늘 할머니 생신인데 다들 기분 좋게 보내면 좋잖아.”차우빈이 경고했다.“왔으면 말조심해. 할머니 기분 언짢게 하면 너부터 쫓아낼 거야.”“오빠, 그래도 내가 사촌 동생이고 큰엄마가 날 데리고 왔는데 나한테 왜 이래?”온하나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귀띔했다.“말 가려서 해요, 아가씨. 자꾸 못된 소리만 하는 그 입이 할머니 미움 사기 충분한데 진짜 쫓겨나면 창피하잖아요.”화가 난 차우연은 발을 굴렀고 오늘 김혜숙 생일만 아니었으면 온하나와 대판 싸웠을 것이다.차우연이 온하나에게 못되게 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온하나가 이번에는 나서서 반격할 줄은 몰랐다.온하나를 돌아보던 차우빈의 눈가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아내가 만만한 사람은 아닌가 보다.양지원은 떠나는 차우빈과 온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몰래 이를 갈았고 차우빈의 놀라워하는 기색도 알아차렸다.온하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잡것이 어떻게 차우빈 같은 훌륭한 남자를 얻었을까.성큼성큼 걸어온 도기영은 양지원의 억울한 표정을 보고는 손등을 두드렸다.물론 차우빈과 온하나를 본 그녀의 마음도 양지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엄마.” 나지막이 부르는 양지원의 목소리엔 억울함이 가득했고 도기영이 눈치를 주었다.“일단 들어가. 심씨 가문에서 크게 파티를 열지는 않았어도 언론에서 냄새 맡고 왔을지도 몰라. 넌 공인이니까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지.”양지원은 도기영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감정을 추슬렀다.온하나와 차우빈이 거실에 들어서자 도우미는 곧바로 반갑게 소리쳤다.“여사님, 도련님이랑 작은 사모님 오셨어요.”거실은 양가 가족과 지인들로 가득 찼
직장에서 그녀는 능력도 뛰어나고 지식도 차고 넘치는 에이스였기에 이금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정작 이금주는 오래된 경력만 빼면 엉망이었다.거실에 앉아있던 세 사람은 온하나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자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많은 친척 앞에서 늘 다소곳한 태도를 보이던 사람이 오늘은 단번에 무시하자 기분이 여간 언짢은 게 아니었기에 더더욱 온하나가 못마땅했다.온하나가 가만히 있자 차우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봤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평소와 다름없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뒤뜰에서 들어오는 김혜숙에게 시선을 돌렸다.“할머니.”온하나는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며 웃으면서 달려가 김혜숙을 부축했다.말 없는 차별에 거실에 있던 세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했다.그전까지 김혜숙은 건강했지만 얼마 전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아 몇 달 동안 요양 중이었기에 이번 생일 파티도 크게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일이 상대할 수 없을뿐더러 그다지 시끄럽게 일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김혜숙은 소중한 사람이 생일을 챙겨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온하나를 본 순간 얼굴이 활짝 피었다.“하나야, 얼마 만에 할머니 보러 오는 거야. 할머니가 죽으면 널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봐 그러는 거야?”말하며 눈을 부릅뜬 채 차우빈을 노려보는 김혜숙의 뜻은 분명했다.“할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몸이 이렇게 좋으신데. 젊은 사람도 이렇게 빨리 회복하지 못해요.”김혜숙을 부축해 거실에 앉은 온하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을 향한 못마땅한 눈빛을 무시했다.3년 동안 참았는데 결국엔 죽 쒀서 개를 준 꼴이 되었다. 이젠 더 참을 필요도, 그들에게 밉보일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할머니 몸이 좋아졌어. 요즘 많이 먹어서 살도 쪘는데 우리 하나는 왜 이렇게 말랐어?”김혜숙이 말하며 고개를 들어 차우빈을 노려보았고 두 눈에 담긴 질책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다이어트한다고 저녁에 밥을 안 먹어요.”웃고 있던 온하나의 얼굴이 굳어졌다.‘남 탓하는 데는 일등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