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전장의 꽃이 피어난다의 모든 챕터: 챕터 261 - 챕터 270

571 챕터

제261화

괜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사여묵은 먼저 자리를 떴다.한참을 생각하던 송석석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는 듯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고민에 잠긴 그녀를 바라보던 양 마마가 망설이다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진복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더니 몰래 고개를 저었다.“도련님께 먹을 것 좀 가져다 드리십시오. 글씨 연습을 한 지 꽤 되셨으니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이에 살짝 한숨을 내쉰 양 마마가 말했다.“네.”주방으로 향하는 양 마마의 뒤를 진복이 따랐다.주방에 도착한 뒤에야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혼례를 올리고 나서 그때 얘기하시죠.”양 마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압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고민에 잠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그만.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양 마마는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왕야님께서 병권을 포기하셨다는 건 저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가씨를 위해 그렇게 하신 거겠죠. 폐하께서 저희 아가씨를 미끼로 왕야님을 낚으신 겁니다.”“그저 속으로만 알고 있으시오. 다른 사람들한테는 얘기하지 말고.”“그럼요. 이런 말을 어떻게 함부로 한답니까. 그저 왕야님의 마음을 아가씨께서는 전혀 모르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애초에 왕야님께서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부인께선 끝까지 알리지 않으셨으니.”이에 진복이 미간을 찌푸렸다.“부인께서도 두려우셨던 거죠. 북명왕이 남강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 혼사를 동의하셨을지도 모를 텐데... 결국 고르고 고르다 그런 사내를 골랐을 줄이야.”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까워 양 마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부인께서 사대부 집안과 문관 가문의 자식을 사위 후보로 삼지 않은 건 아가씨가 보통 양반댁 규수들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첩을 두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는 아가씨의 말에 전북망만 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히 첩을 들이지 않겠다 맹세했었죠. 부인께서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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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2화

송씨 가문 일원 중 대부분은 상인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이러한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송국공부는 그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 적은 거의 없지만 송국공부와 친척이라는 사실만으로 사업적으로 이득을 본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게다가 송씨 가문은 워낙 단합적인 분위기고 송국공부는 얼마 전 거의 멸문을 당하는 큰 사고를 겪었으니 딱히 그들을 질투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으므로 송태공의 말에 다른 뜻을 품은 이는 거의 없었다.그뒤로도 송태공은 연설을 이어갔고 서우는 곁에서 그의 말을 새겨들으려 애썼다.전에 열렸던 가문 회의에 어린 그가 참석할 기회는 없었으니 태공과 직접 대면하는 것도 거의 처음이었으며 저도 모르게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피어올랐다.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뇌리에 박혔다.10월이 되니 날씨는 점차 차가워졌다.공씨 가문 쪽에서는 서우가 입을 옷가지들에 최고로 좋은 가죽 옷감을 보내주었다. 요즘엔 가문에 무슨 좋은 물건만 들어오면 전부 서우에게로 돌리는 눈치였다.또한 공씨 가문에서 먼저 송석석의 혼례 준비를 돕겠다고 나섰다.이에 양 마마는 송석석에게 이렇게 말했다.“설령 도움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그 성의가 갸륵하니 받으십시오. 그래야 저쪽에서도 마음이 편할 것입니다.”송석석은 양 마마에게 알아서하라고 분부한 뒤 한 마디 덧붙였다.“작은 일에 도움을 주는 건 좋지만 은화는 쓰지 못하도록 하거라.”서우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곧 진성 곳곳에 퍼졌고 수많은 이들이 국공부를 찾아 서우에게 선물을 건넸다. 회왕비 역시 사람을 보내 서우에게 입힐 비단 옷감을 선물로 보내왔다.한편, 보주는 여전히 영안군주가 출가할 당시 송석석이 준비한 선물을 거절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입을 삐죽거렸다.“아가씨, 왜 굳이 이 옷감을 받으시는 겁니까. 저희한테 옷감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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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3화

이에 단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일단 해독 경과에 대해 얘기하마. 요며칠 치료를 한덕에 서우의 몸상태가 많이 좋아졌더구나. 오늘 맥을 짚어봤는데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더 빨라. 부은 목도 많이 종하졌고.”“정말요?”송석석이 눈을 반짝였다.비록 어제 이미 홍작에게서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단신의가 직접 맥을 짚은 뒤 이렇게 말하니 송석석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잘됐습니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홍작 의원님.”그동안 고생이 많았던 건 사실이었기에 홍작은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일 뿐 겸손의 말은 하지 않았다.차를 한 모금 마신 단신의가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두 번째는... 네가 방금 말했다시피 서우의 몸이 많이 좋아진 듯하니 이제 다리를 치료해도 될 듯 싶구나. 일전에 말했듯이 다리를 고치려면 뼈를 다시 부러트려야 해.”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많이 아프겠죠.”“고통은 피할 수 없을 거다.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도와주거라. 진통제가 있긴 하지만 뼈가 부러졌을 땐 진통제도 잘 듣질 않아. 혈을 봉하여 고통을 줄이는 게 더 좋을 것 같구나.”“봉혈로 진통이라니. 그게 가능한 겁니까?”송석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에는 이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혹시 후유증이라도 남는 건 아닐지.”“아주 정확한 시술이 필요하고 시간도 정확하게 제어해야 해. 혈을 너무 오래 봉인해 두면 혈맥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 설령 뼈를 제대로 붙인다 해도 거동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점혈은 저도 압니다만 정확이 어느 정도로 정확해야 할지 모르겠네요.”송석석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단신의는 고개를 저었다.“점혈과 금침봉혈은 같은 원리라 네가 직접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을 정확히 제어해야 한다는 거야. 어린 아이들은 성인과 달라 시간을 조금만 지체하면 큰 후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비록 의술에 대해선 잘 모르는 송석석이었지만 단신의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위험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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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4화

단신의가 자리를 뜬 뒤 송석석은 일단 서우와 대화를 나누었다.결국 본인이 직접 감당해야 할 고통이니 서우와도 상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송석석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우는 고모의 품에 안겨 피식 웃은 뒤 그녀의 손바닥 위에 한글자, 한글자 적어나갔다.“사실 홍작 의원님께서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일 거라고요. 애초에 다리를 다쳤을 때도 정말 아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손바닥에 쓴 글씨라 몇 글자는 알아보기 힘들어 다시 쓰라고 한 송석석은 두 번째에야 그뜻을 알아차리곤 물었다.“그래서 봉혈을 하고 싶은 것이냐?”하지만 서우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봉혈은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다리를 치료해도 자칫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고요. 그러면 안 되죠. 전 앞으로 가문을 이끌어나가야 할 사람입니다. 국공부의 장문인이 절름발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서우이 고개를 들어 송석석과 시선을 맞추었다.턱이 뾰족하던 얼굴에 꽤 살이 오른 모습이었다.서우는 손가락으로 글을 더 써내려갔다.“아버님도 전장에서 자주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저 간단한 외상부터 뼈까지 다치는 큰 부상까지... 하지만 아버님은 그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겠죠.”“이 세상에 고통이 두렵지 않은 인간은 없단다. 그저 어른이니 웬만한 고통은 참고 넘어가는 것뿐이지.”송석석의 말에 서우는 바로 또 글씨를 써내려갔다.“저도 압니다. 사내대장부라면 고통을 참을 줄도 알아야 하죠.”“그렇지.”‘서우는 봉혈을 하는 게 내키지 않나 보네. 물론 그래도 공씨 가문 쪽 사람들한테는 이 사실을 알려야겠지.’그날 밤, 송석석은 직접 공부로 향했다.공씨 가문 역시 이 사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모두가 모여 가족 회의를 시작했다. 몸이 안 좋은 태부인까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했다.하지만 공부에서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했다.서우이 고통스러운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행여나 봉혈의 시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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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5화

서우의 방앞에 도착하자 명주가 모두를 맞이했다.침대에 누운 서우는 이미 결심을 내린 뒤였다.그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 온전히 고통을 견디기로 말이다.외가쪽 가족들까지 국공부로 와 그를 향해 걱정과 위로의 말을 건네니 서우는 그들을 향해 최대한 씩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하지만 그 모습에 어른들은 더 마음이 욱신거렸다.이제 겨우 7살인 아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징징대고 투정부릴 나이고 가족들의 사랑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나이인데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단신의가 치료를 시작하려던 그때, 사여묵 역시 국공부를 방문했다.공씨 가문 사람들은 북명왕이 서우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언제고 시간을 내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본인이 직접 등장하니 부랴부랴 다가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이에 사여묵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우연히 마주쳐 도운 것뿐이니 고맙다는 인사는 하지 마시게. 그리고 오늘은 서우가 치료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러 온 것뿐이니 다른 얘기는 차후에 천천히 나누도록 하세.”한편, 서우가 송석석과 함께 왕부에서 지낸다면 사여묵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하던 공부 사람들은 서우를 걱정하는 사여묵의 얼굴을 보곤 한시름 놓는 표정이었다.사여묵이 송석석과 공씨 가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서우의 곁에는 내가 있을 테니 다들 나가보시게. 사내들끼리 나눌 얘기가 많아.”사여묵이 싱긋 웃으며 서우를 바라보았다.“그렇지 않느냐, 서우야?”서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송석석과 외조부모가 곁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던 그였다. 아픈 와중에 괜히 걱정할까 씩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부담감이 컸지만 사여묵은 달랐다.‘왕야님은 할아버님, 아버님처럼 훌륭한 무장이시니 내게 힘을 주실 수 있을 거야.’사여묵의 깊은 뜻을 깨달은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서우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서우야, 잘 버텨야 한다.”고개를 끄덕인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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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6화

한편, 단신의는 방금 전 고통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던 서우의 모습을 떠올렸다.‘고통이 성대 회복에도 도움이 되나 보군... 좋은 현상이야.’접골은 홍작이 직접 해도 충분하나 서우는 보통 환자가 아니라 단신의가 직접 나섰다.접골은 그에게 숨 쉬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익숙한 일이었고 숙련된 손길로 조심스레 뼈를 맞춰가기 시작했다.고통으로 인한 식은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서우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여묵의 팔목을 꽉 부여잡았다.손톱이 파고 들어가며 핏자국이 났지만 사여묵은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서우임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았다.진통 효능이 있는 탕약을 먹었음에도 효과는 미미했다.다친 것은 다리뿐이지만 몸 전체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영겁같던 치료가 끝나고 단신의는 두 나무판으로 다리를 고정했다. 뼈가 완전히 붙기 전까진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단신의가 직접 만든 연고는 뼈가 다시 붙는데 도움을 주는 영험한 효능이 있었고 탕약까지 꾸준히 마셔주면 열흘 안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였다.다리를 묶은 뒤 단신의는 또 탕약 한 그릇을 건넸다. 수면 작용이 있는 약초가 든 약이라 먹으면 스르륵 잠이 드는 약이었다.‘한숨 자면 많이 좋아질 테지.’한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서우의 처참한 비명에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저 어린 아이가 저정도로 울부짖을 정도라면 얼마나 아플까 싶었다.송석석은 초조한 마음으로 마당을 서성대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고 공부인은 벌벌 떨며 부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얼마나 흘렀을까. 문이 열리고 사여묵이 먼저 방을 나섰다.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송석석은 홍작이 침대에 누운 서우에게 고통을 완화해 주는 침을 놔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단신의가 그녀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쉿하고 소리를 냈다.“나가거라. 한숨 푹 자게 내버려둬. 참 강한 아이로구나.”등 떠밀려 나간 송석석은 물론 다른 가족들도 서우를 만나는 것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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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7화

사여묵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른 사여묵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았다.고개를 숙여 보이는 건 속눈썹뿐이었지만 가끔씩 살짝 움직이는 속눈썹이 미풍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느껴졌다.송석석이 이토록 부드러운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터라 사여묵의 가슴이 살짝 설레어왔다.두 바퀴나 감은 붕대를 살펴보던 사여묵이 피식 웃었다.“상처에 비해 너무 과분한 처리 아닌가?”“과분하다뇨.”고개를 든 송석석이 눈이 동그래져선 말했다.“이런 상처야말로 덧나면 큰일납니다. 전에 다친 적 있었는데 고름도 나오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제 손등 좀 보십시오.”송석석이 손등을 보여주었다.손톱 정도 되는 작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그때 심하게 덧났었는데 사부님의 약 덕분에 나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흉터가 남고 말았죠. 이렇게 예쁜 왕야님 손에 흉터라도 남으면 곱지 않... 아니죠. 흉터가 있어도 고우십니다.”말하려다 방금 전 상처를 씻어낼 때 손에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던 걸 떠올린 송석석이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그 모습이 재밌어 사여묵은 그녀를 놀려대기 시작했다.“사내 손이 고운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곱지 않은 것보다야 낫지요.”송석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피식 웃던 사여묵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실망이 크겠구나. 내 몸엔 온통 크고 작은 상처뿐이라서 말이야.”“그건 승리의 상징이지요.”손을 씻은 송석석이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저도 있습니다. 그런 상처.”“전에 다친 데는 다 괜찮은 것이지?”전장에서 부상을 입었던 걸 떠올린 사여묵이 물었다.“그럼요. 오히려 지금은 자연스럽습니다.”치료에 필요했던 물건을 치우라고 말하고 차를 준비하라 분부한 송석석이 말했다.“공양 오라버니도 차 마시러 오시라고 전해라.”“진백님께서 정청으로 모셨습니다. 곧 저택으로 돌아가신다 합니다. 도련님께서 한동안 주무실 거라 단신의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괜히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셨다 내일 다시 오시라 하셨습니다.”“그래.”고개를 끄덕인 송석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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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8화

눈물이 잔뜩 묻은 얼굴로 고개를 든 송석석이 말했다.“어찌 되었든 이 은혜는 평생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 왕야님께서 제게 뭘 시키시든 양심에 위배되지만 않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이에 사여묵이 정색하며 말했다.“네가 날 위해 뭔가 할 필요는 없다. 너한테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건 그저 네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그것뿐이야. 그래야 하늘에 있는 네 부모도 기뻐할 게 아니냐.”그의 말에 감동을 받은 송석석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하지만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곧 의아함이 담겼다.“그런데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하지만 사여묵은 이토록 연약한 송석석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씩씩하게 전장을 누비던 모습을 떠올리다 지금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더 마음이 아파왔다.하지만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여묵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곧 혼인할 여인에게 잘해 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사이이니 말이다.”그의 말에 분명 감동해야 하거늘, 이미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는 송석석에겐 그저 의미없는 약속처럼 느껴졌다.어쩐지 재수없는 그 모습이 다시 떠올라 송석석은 괜히 뾰로통한 말투로 말했다.“한때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가 어땠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죠.”굳이 이런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깨지 않아도 되는데 왠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전에는 이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요즘따라 진짜 양반댁 규수들처럼 짜증도, 투정도 많아진 것이 정말 뭐에 씌였나 싶기도 했다.이에 사여묵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자와 날 비교하지 마라. 내 인생에 부인과의 이별은 사별뿐이야. 난 한 번 뱉은 말은 지키는 인간이니. 지금 못 믿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 남은 평생의 시간으로 너에게 증명할 테니.”“사별이요?”송석석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여묵이 대답했다.“내가 너 먼저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네가 나이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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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9화

그런 그가 남강 전장에서 송석석을 만났을 때 그 감정이란 복잡미묘 그 자체였다.넌지시 던진 전북망에 대한 질문을 애써 피하는 걸 보고 그와의 혼인이 행복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리고 한참 뒤에야 사여묵은 송석석이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송석석을 아끼지 않은 전북망의 이름을 원수처럼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어찌 보면 송석석에게 치욕스러운 경험을 안겨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자의 눈깔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분노가 가시니 곧 다른 감정이 깃들었다.어쩌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기대감에 몰래 기뻐하기 시작했다.그녀와 함께 싸우는 동안 애써 감정을 지우며 사여묵은 눈동자에 그 어떤 사적인 감정도 담으면 안 도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3년간 남강 전장에서 사여묵은 그렇게 수많은 감정을 감내해야 했었다.진성으로 돌아온 뒤 황제의 견제가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그가 원하는 건 애초에 병권 따위가 아니라 송석석이었으니 말이다.황제의 견제가 섭섭하지도 않았다. 황가에서 태어난 형제들이란 무릇 그런 사이니 말이다. 그래도 황제와 적어도 겉으로는 화목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하지만 정말 견제와 의심이 더 심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송석석과 서안과 함께 황제에게서 멀리 떨어진 조용한 땅에서 산다면 충분히 행복할 테니 말이다.이런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든 사여묵이 마침 송석석과 시선을 마주치고 순간 심장이 콩닥대기 시작했다.한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송석석은 마음이 무거워졌다.‘내가 왕야님을 연모하게 된 건가. 하지만 저분은 이미 마음에 다른 여인을 품고 계시는데. 왜 이런 어긋난 감정이 생기는 거지? 분명 그저 좋은 반려로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것뿐인데.’실패한 혼인을 끝낸 뒤 이렇게나 빨리 또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지 못한 송석석은 이 상황이 꽤 당황스러웠다.이때 보주가 잔뜩 빨개진 송석석의 얼굴을 살피며 의아한 듯 물었다.“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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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0화

다음 날, 눈을 뜬 서우는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고통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다 애써 웃으며 송석석과 공씨 가문 사람들을 위로했다.어린 아이가 강한 척을 하는 모습에 모두들 가슴이 찢어졌다.다리 치료를 마친 뒤에도 목 치료는 게속되어야 했다.홍작 말로는 어제 목침을 못 맞았으니 오늘 무조건 맞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게다가 어제 치료를 통해 비명을 지으며 본의 아니게 목청이 틔었으니 이 기세를 몰아 치료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단신의의 생각이었다.독소 해독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징조이기도 했고 새목단 금단 현상도 다시 일어나지 않아 단신의도 꽤 놀라울 따름이었다.성인도 끊으려면 적어도 반년은 걸리는데 이제 7살된 아이의 의지가 이토록 단단하다니 놀라울만도 했다.“송씨 가문에는 정말 강한 사람들뿐이구나. 대단한 집안이야.”단신의가 홍작에게 말했다.홍작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서우를 보살피여 정을 쌓은 그는 어느새 서우를 아들이자, 조카로 보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고초를 겪은 서우가 안쓰러우면서도 하루라도 빨리 아이가 건강을 회복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서우의 다리를 치료하는 동안 송석석은 단 한 번도 외출하지 않았다. 국공부를 찾는 손님은 꽤 많았지만 전부 진복에게 시켜 다음으로 미루라고 말한 송석석이 만난 사람이라곤 여동생 란이와 그의 부군 량소뿐이었다.잘생긴 얼굴의 량소는 어딘가 고고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은백부의 세자이자 군주를 부인으로 맞이했으니 그 신분이 한층 더 상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군주는 현명하고 착한 아내였으며 그를 오랫동안 흠모해 온 여인이었다. 23세의 나이에 량소는 누군가는 평생 이루지 못할 명예와 부귀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그래서일까. 량소는 송석석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물론 그녀 개인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집안 좋고 외모 좋고 무예 실력도 좋고 전공까지 세운 여인은 보기 드무니 말이다.하지만 명문가 여식 중에는 이혼을 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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