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해지: 놔줘요 대표님의 모든 챕터: 챕터 281 - 챕터 290

1552 챕터

제281화

이승하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눈빛은 몽롱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다.그는 온 사람이 주서희임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말릴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와인만 마셨다.주서희는 와인잔을 앗아가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계속 이러면 위세척을 해도 죽을 수 있어요.”이승하는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아 보였고 긴 손가락을 뻗어 다른 술잔을 가져오려 했다.주서희는 고집스러운 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대표님, 서유 씨 아직 살아 있잖아요. 얼른 힘내서 다시 만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예전처럼 계속 술이나 마시고 있으면 어떡해요? 제가 아는 대표님은 이런 분이 아니었어요.”예전의 그는 하늘에 사는 신이라도 되는 듯 도도하고 고귀했다.하지만 지금 그는 삶의 의미를 완전히 잃었고 까마득한 눈은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주서희는 다시금 그의 손에 들린 와인잔을 앗아가며 말했다.“대표님, 대표님이 서유 씨 때문에 점점 시들어가도 서유 씨는 몰라요. 지금은 그저 전에 변덕스럽게 정신적 폭력을 가한 거랑 죽기 전에 연지유 씨와 밤을 보냈다는 거, 그렇게만 알고 있어요.”이승하가 멈칫하더니 충혈된 눈으로 주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연지유와 잔 적 없어.”이승하에게 이번 생에 여자란 서유뿐이었고 다른 여자는 건드리기도 역겨워했는데 잠자리를 가졌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주서희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저는 알죠. 근데 서유 씨는 몰라요. 아직 오해가 깊어요. 대표님이 설명하지 않는데 서유 씨가 어떻게 알겠어요. 용서는 어떻게 하고요.”이승하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콧방귀를 꼈다.“신경 쓰지도 않을걸...”이는 이승하가 이미 설명했는데도 서유가 여전히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하지만 아까 서유가 캐묻는 뉘앙스로 봐서는 아직 오해가 완전히 풀린 게 아닌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의 성격에 말을 제대로 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이내 한숨을 푹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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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2화

이승하의 충혈된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다시 덤덤해졌다.그는 한 손으로 와인잔을 움켜쥐고 아무것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주서희에게 말했다.“찾아가지도 말고, 귀찮게 하지도 마.”그는 서유와 송사월을 이어주기로 했으면 그녀가 힘들지 않게 깔끔하게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주서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설마 이대로 포기하는 거예요?”주서희는 이 나이 먹도록 한 여자를 이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이승하가 처음이었다. 서유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걸 바치려 했다.이런 이승하가 서유를 포기하겠다니.이승하는 주서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그저 와인만 들이부었다.너무 급하게 마쳤는지 아니면 어디가 불편한지 조각 같은 얼굴이 점점 핼쑥해지기 시작했다.그는 손에 든 와인잔을 내려놓더니 테이블을 짚고 허리를 숙여 아래에 놓인 쓰레기통에 피를 한 모금 토했다.새빨간 피가 입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바닥에 뚝뚝 떨어졌고 이내 쓰레기통과 바닥을 빨갛게 물들였다.주서희는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며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대표님, 위출혈인가 봅니다! 누구 없어요!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하지만 이승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더니 달려오는 도우미에게 말했다.“됐어.”도우미들은 그 말에 놀라 감히 다가갈 엄두를 못 냈다. 이승하는 그제야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와인을 들이부었다.주서희는 화를 이기지 못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고 바로 핸드폰을 꺼내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이승하를 끌고 병원 응급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근처에 있던 소수빈은 바로 도착했다.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빈 병과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고는 이내 주서희처럼 얼굴이 굳어졌다.소수빈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이승하를 부축하며 타일렀다.“대표님, 인제 그만 마셔요. 병원 가서 일단 치료부터...”이승하는 그런 소수빈을 밀쳐내며 한 손으로 찢어질 듯 아픈 위쪽을 부여잡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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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3화

별장으로 돌아온 서유는 거실이 엉망진창으로 깨져있는 걸 발견했다.메이드들은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떨며 한쪽에 선 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지현우는 소파에 앉아 과일칼을 만지작거렸다.서유는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조금 무서웠지만 용기 내어 그쪽으로 걸어갔다.“나... 왔어요...”지현우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그는 곧 포획할 사냥감을 보듯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서유는 그런 눈빛에 가슴이 떨렸고 움켜쥔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그녀는 진정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들어 지현우를 쳐다봤다.“현우 씨,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요.”“그래요.”지현우는 소파에 앉아 옆자리를 툭툭 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조금 전 그 눈빛에 이 웃음까지 섞이자 서유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서유는 그의 옆이 아닌 맞은편 일인용 소파에 앉는 걸 선택했다.“현우 씨, 당신과 함께 Y국으로 돌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그래요.”지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녀의 결정을 진작부터 알아챈 것처럼 말이다.서유는 이 세글자 뒤에 무조건 다른 조건이 따를 거라는 걸 알고 급하게 대꾸하지 않았다.그렇게 한참을 대치하고 있는데 지현우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전에 약속한 대로에요. Y국으로 가면 김초희로 살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 남으면 김초희로 살아야 해요. 마음 굳힌 거예요?”서유가 잠깐 고민하더니 용기 내어 물었다.“싫다면요?”사실 서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김초희로 살건 아니건 지현우에겐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지현우에게 서유는 그냥 김초희였고 어떻게 컨트롤할지는 생각하기 나름이었다.전에 이런 조건을 내건 것도 서유를 협박해 Y국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지금 이런 상황에 서유는 그와 함께 Y국으로 갈 수 없었고 그러면 김초희로 살아야 했다.서유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로 살기 싫었지만 어떤 약점으로 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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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4화

서유는 침묵을 지키며 대답하지 않았다. 덤덤한 눈동자에서 지현우가 읽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뭐 대답하기 싫으면 계속 내 곁에서 김초희로 살아요...”서유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고 되물었다.“지현우 씨, 우리 이혼하면 안 돼요?”이를 들은 지현우는 그녀가 여전히 이승하를 사랑하는 줄 알고 웃음을 터트렸다.“성격은 언니랑 하나도 안 닮았네요. 당신 언니는 상처받은 한 다시 돌아보지 않을 텐데 말이죠. 그 사람이 입에 발린 소리 좀 했다고 벌써 가서 안기고 싶은 거예요?”서유는 그저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맞아요. 난 언니와 아예 다르죠. 이건 현우 씨도 잘 알잖아요. 근데도 억지로 나를 언니로...”지현우는 이내 표정이 굳었고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유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지현우 씨, 사실 나도 다 알아요. 나를 언니로 생각하는 게 이 심장뿐만이 아니라 언니를 향한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걸요.”이를 들은 지현우가 갑자기 차갑게 콧방귀를 꼈다.“내가 왜 죄책감이 들어야 하죠?”“그런가요?”서유가 이렇게 되묻더니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언니는 당신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는 건 당신이 언니에게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줬다는 의미죠. 나를 언니로 생각하는 것도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보상일 뿐. 근데 지현우 씨, 당신이 지금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언니는 돌아오지 않아요. 왜 계속 환상 속에 살면서 자기를 속이려 드는 거예요?”이를 들은 지현우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분위기도 점점 험악해졌다.서유는 그런 지현우를 보며 방금 한 말이 그의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아챘다.지현우가 이성을 잃고 폭주할까 봐 두렵긴 했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원하는 방향으로 그를 인도했다.“지현우 씨, 언니가 죽기 전에 바란 건 나를 살리는 것이지 내가 언니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만약 진짜 언니에게 보상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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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서유가 칼을 가슴에 찔러넣으려는 순간 지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지현우는 과일칼을 앗아가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이렇게 작은 칼로 어떻게 심장을 도려내요...”그러더니 주방에서 식칼을 가져와 그녀에게 던져줬다.“이걸로 해요.”서유는 그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로 지현우를 바라봤다.“사실 도려내지 못할 거면서.”그는 전에 서유가 김초희의 심장을 갖고 있으니 절대 죽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 한 적이 있었다.지금 이러는 건 그냥 서유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다.마음을 들킨 지현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이혼 꼭 해야겠어요?”서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지현우 씨, 나도 내 요구가 너무하다는 거 알아요. 근데 애초에 결혼한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지 내가 아니잖아요. 언니 명의로 한 결혼이라고 해도 나는 언니가 될 수 없어요.”서유의 말에 칠흑같이 어둡던 지현우의 눈빛에 한 줄기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유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지현우 씨, 제발 나 좀 놓아주면 안 돼요?”지현우가 고개를 든 순간 소파에 앉은 서유와 김초희가 겹쳤다.“현우야, 부탁이야. 나 제발 좀 놓아줘...”김초희도 전에 지현우 앞에 꿇어앉아 똑같이 애원했다.하지만 그때 지현우는 아마 다리를 들어 그녀를 걷어찼을 것이다.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그렇게 걷어차는 바람에 김초희는 배 속에 있던 5달 남짓 된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김초희가 슬픔에 몸부림치던 모습이 떠올라 지현우는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 피가 나기 시작해서야 그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조금 억제할 수 있었다.그는 창백한 얼굴로 김초희와 어딘가 조금 닮아있는 서유를 바라보더니 결국 한발 물러섰다.“이혼해 줄게요, 근데 내 곁에 남겠다고 약속해요.”사실 서유 말이 맞다. 이런 방법으로 김초희와 결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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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6화

이튿날 아침.서유는 샤워하고 방에서 나와 다이닝룸으로 향했다.지현우는 느긋하게 식빵을 자르다가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차 가져왔어요.”서유는 잠깐 멈칫하더니 그제야 어제 클럽 지하에 두고 온 벤츠가 생각났다.“고마워요, 형부...”형부라는 말이 입에 착 달라붙는 서유였다.지현우도 별다른 표정 없이 핸드폰에 저장한 건축 도면을 넘겨봤다.그가 침묵을 지키자 서유도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프랑스식 조식을 먹었다.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은 서유는 지현우에게 인사하고 차키를 챙겨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서유는 어제 지현우 일만 처리되면 바로 정가혜를 데리고 가겠다고 송사월에게 약속했다.별장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려는데 하얀색 차 한 대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주서희가 차에서 내렸다.주서희는 예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서유에게 다가갔다.“서유 씨, 시간 되면 잠깐 얘기 좀 할까요?”서유는 주서희가 왜 찾아왔는지 대략 짐작이 갔기에 웃으며 거절했다.“주 선생님, 죄송해요. 지금은 좀 바빠서요. 다음에 봐요.”서유는 이렇게 말하고는 차에 올라타려 했지만 주서희가 이를 막았다.“서유 씨, 대표님 보기 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서유 씨도 꼭 알아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한 시간... 딱 한 시간이면 돼요.”서유는 주서희가 거의 애원하는 말투로 말하자 마음에 걸렸고 고개를 끄덕였다.주서희는 그제야 한시름 놓고 그녀를 자기 차로 데려가더니 근처에 유명한 카페로 향했다.환경은 조용한 편이었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귓가에 울리는 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둘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커피와 디저트를 시켰다. 주문한 메뉴가 올라오자 주서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유 씨,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10년 전 서울대 문 앞에 쓰러져있던 그 소년...”서유는 주서희가 바로 이승하 편을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래전 일을 꺼낼 줄은 몰랐다.그녀도 이를 기억했다. 그때 송사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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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7화

“그 소년은 서유 씨에 의해 발견되기 전에 그런 일을 당한 거였어요...”“사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대표님은 그런 환경에서 버텨낸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어머니가 돼서 대표님이 원하고 신경 쓰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망가트렸어요.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상관없이요...”“대표님도 그래서 어릴 적부터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웠어요. 절대 그 누구에게도 취미가 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았죠...”“그러다 10년 전에 서유 씨를 만나고 좋아하게 됐지만 어릴 적 소꿉친구를 잃었던 일로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어요.”“그러다 클럽 입구에서 서유 씨와 다시 마주쳤고 사랑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 거죠...”“사촌 오빠가 말하길 아무 망설임도 없이 서유 씨의 몸값을 지불한 것도 서울대 앞에서 반했기에 그렇게 한 거라고 했어요.‘“그게 아니라면 대표님처럼 차갑고 과묵한 성격에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동정할 일은 절대 없거든요...”“서유 씨는 대표님의 첫 여자이자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어요...”“연애를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니까 같이 있고 싶어 안달 나 하셨죠.”“사촌 오빠 말로는 서유 씨와 만나고 처음엔 되게 잘해줬다고 하더라고요.”“그러다 서유 씨가 꿈에서 계속 송사월 씨 이름을 불러서 그때부터 변덕스러워진 거라고 했어요.”“서유 씨, 대표님은 정신적으로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계속 참으면서 놓아주기 아쉬워했다는 건 그만큼 사랑한다는 의미죠.”주서희의 말은 서유의 귀청을 때렸고 그렇게 서유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둘 사이는 이미 끝났다. 근데 왜 이제 와서 그녀가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걸까.커피잔을 움켜준 손이 자꾸만 떨렸지만 그녀는 이내 진정했다.서유는 컵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선생님,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서 이쯤에서 일어날게요.”하지만 주서희가 서유를 불러세웠다.“서유 씨, 더는 도망가지 말고 현실과 마주해요. 그러면 해결될 거예요.”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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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8화

“김시후 씨가 나타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이 더 깊어졌죠. 그때 별장에서 김시후 씨를 따라가는 서유 씨를 놓아주려 했어요. 저 때문에 박하선에게 밉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대표님은 박하선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서유 씨가 혹시나 그 여자 손에 죽을까 봐 제 전화를 받고 바로 쇼핑몰로 달려갔어요. 그런 상황에서 서유 씨를 데리고 바로 떠나도 되지만 그러면 서유 씨의 존재가 드러나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서유 씨를 위해서라면 어머니와 맞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서유 씨를 복잡한 상황에 끌어들여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걸 싫어했어요. 그리고 그때 대표님은 서유 씨가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어떻게든 당신을 휘말리지 않게 지키려고 했어요...”“그 따귀 한대가 서유 씨의 목숨을 앗아갈 줄은 몰랐던 거죠...”주서희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서유 씨가 죽기 전에 전화했을 때 대표님이 받지 않은 건 미국항공우주국에서 비밀회의를 진행 중이었어요.”“그리고 서유 씨 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어서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거죠...”“또 하나, 대표님은 연지유 씨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어요. 그건 연지유 씨가 몰래 대표님 휴스턴 별장에 들어간 거예요.”“서유 씨, 대표님은 지금까지 서유 씨를 누구 대용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대표님이 사랑한 건 서유 씨뿐이에요.”“그만해요!”서유가 갑자기 주서희의 말을 끊었다. 맑디 맑은 눈동자는 어느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녀는 무슨 자극이라도 받은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그러더니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주서희가 쫓아와 다시 한번 그녀를 막아섰다.“서유 씨, 꼭 알려줘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사실 서유 씨를 따라 죽으려고 했던 건 김시후뿐만이 아니에요. 대표님도 자살 시도를 했었어요...”“서유 씨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 씨 묘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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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화

서유의 눈물 젖은 눈동자에 점차 내려놓은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주 선생님, 저는 이미 용서했다고 승하 씨한테 전해 주세요. 하지만 다시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주서희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송사월 씨 때문인가요?”서유는 지난날의 추억에 잠긴 듯 깊은 눈을 늘어뜨렸다.“제가 어떻게 컸는지 아세요? 사월이가 필사적으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약을 사줘서 겨우겨우 살 수 있었어요. 자그마치 거의 20년을요.”“어려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저를 버릴 때, 사월이와 가혜만 저를 버리지 않았어요. 제 심장을 치료하기 위해 두 사람 모두 검소하게 살아왔죠. 제가 평생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다시 저버릴 수 있겠어요?”서유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카페를 떠났다.하늘에는 어느새 폭우가 쏟아졌고 콩알만 한 빗물이 쏟아져 서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택시를 부르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빗물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주서희는 우산을 빌려 쫓아 나왔지만 이미 서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멀리서 한 코닉세그 차 안에 있는 남자는 서유가 카페를 떠나고 주서희가 쫓아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는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유한테 무슨 말한 거야?”주서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 서유 씨가 모두 알았어요.”...서유는 길가에 서서 영혼 없이 손을 내흔들었지만 멈추는 차는 없고 오히려 몸에 빗물만 튀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내고 초라한 몸을 이끌고 계속 걸어갔다.얼마 가지 않아 하이힐이 길 틈에 끼었다.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하이힐을 뽑으려 했지만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몸 전체가 뒤로 넘어졌다.어쩔 수 없이 빗물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눈앞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고 머리 위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모두들 우산을 받쳐 들고 길을 재촉했지만 유독 서유만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얼굴에 떨어진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두 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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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0화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리고 온 하늘에서 퍼붓는 빗물은 남자에게 쏟아졌다.새까만 머리와 빳빳한 양복이 흠뻑 젖었다.흠잡을 데 없는 얼굴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목덜미까지 내려왔다.그는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지 못한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주서희는 이승하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급히 우산을 쓰고 그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죄송합니다.”그녀가 이승하의 동의도 없이 서유를 찾아온 것이다.서유가 사실을 알고 이승하의 곁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빗물이 이승하의 이마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을 타고 뚝뚝 떨어져 촘촘한 눈초리를 내리쳤다.그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얼굴로 주서희를 보며 말했다.“서유랑 완전히 끝났어. 앞으로 내 앞에서 서유 말 꺼내지 마.”주서희는 넋을 잃고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서유 씨는 대표님을 사랑했어요.”이승하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서희야, 서유가 사랑하는 건 송사월 한 명뿐이야.”주서희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서유 씨가 직접 인정했다고요. 대표님을 사랑했고, 매번 대표님의 마음을 시험할 때마다 실망스러운 답을 얻어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요...”이승하의 싸늘한 눈동자가 점점 붉어졌다.그는 눈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방금 서유는 그의 손을 보고 울었다.이것은 서유가 처음으로 그를 위해 운 것이다.정말 사랑했던 걸까?그럼 왜 이승하는 그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의 자그마한 그림자를 묵묵히 쳐다보더니 주서희에게 말했다.“서유는 송사월을 더 사랑해.”어쩌면 이승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수없이 아프게 한 이승하는 송사월에 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주서희는 우산을 움켜쥐고 약간 초조해서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서유 씨는 송사월에 대한 감정이 사랑보다는 미안함이 더 큰 것 같아요. 대표님이 진작 마음을 표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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