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후 씨가 나타나면서 둘 사이의 갈등이 더 깊어졌죠. 그때 별장에서 김시후 씨를 따라가는 서유 씨를 놓아주려 했어요. 저 때문에 박하선에게 밉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대표님은 박하선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서유 씨가 혹시나 그 여자 손에 죽을까 봐 제 전화를 받고 바로 쇼핑몰로 달려갔어요. 그런 상황에서 서유 씨를 데리고 바로 떠나도 되지만 그러면 서유 씨의 존재가 드러나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서유 씨를 위해서라면 어머니와 맞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서유 씨를 복잡한 상황에 끌어들여 똑같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걸 싫어했어요. 그리고 그때 대표님은 서유 씨가 대표님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어떻게든 당신을 휘말리지 않게 지키려고 했어요...”“그 따귀 한대가 서유 씨의 목숨을 앗아갈 줄은 몰랐던 거죠...”주서희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약간 갈라져 있었다.“서유 씨가 죽기 전에 전화했을 때 대표님이 받지 않은 건 미국항공우주국에서 비밀회의를 진행 중이었어요.”“그리고 서유 씨 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어서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거죠...”“또 하나, 대표님은 연지유 씨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어요. 그건 연지유 씨가 몰래 대표님 휴스턴 별장에 들어간 거예요.”“서유 씨, 대표님은 지금까지 서유 씨를 누구 대용으로 생각한 적 없어요. 대표님이 사랑한 건 서유 씨뿐이에요.”“그만해요!”서유가 갑자기 주서희의 말을 끊었다. 맑디 맑은 눈동자는 어느새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녀는 무슨 자극이라도 받은 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그러더니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주서희가 쫓아와 다시 한번 그녀를 막아섰다.“서유 씨, 꼭 알려줘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어요.”“사실 서유 씨를 따라 죽으려고 했던 건 김시후뿐만이 아니에요. 대표님도 자살 시도를 했었어요...”“서유 씨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유 씨 묘지 앞에서
서유의 눈물 젖은 눈동자에 점차 내려놓은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주 선생님, 저는 이미 용서했다고 승하 씨한테 전해 주세요. 하지만 다시 그 사람 곁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주서희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송사월 씨 때문인가요?”서유는 지난날의 추억에 잠긴 듯 깊은 눈을 늘어뜨렸다.“제가 어떻게 컸는지 아세요? 사월이가 필사적으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약을 사줘서 겨우겨우 살 수 있었어요. 자그마치 거의 20년을요.”“어려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저를 버릴 때, 사월이와 가혜만 저를 버리지 않았어요. 제 심장을 치료하기 위해 두 사람 모두 검소하게 살아왔죠. 제가 평생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다시 저버릴 수 있겠어요?”서유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카페를 떠났다.하늘에는 어느새 폭우가 쏟아졌고 콩알만 한 빗물이 쏟아져 서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택시를 부르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빗물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주서희는 우산을 빌려 쫓아 나왔지만 이미 서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멀리서 한 코닉세그 차 안에 있는 남자는 서유가 카페를 떠나고 주서희가 쫓아 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는 주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유한테 무슨 말한 거야?”주서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 서유 씨가 모두 알았어요.”...서유는 길가에 서서 영혼 없이 손을 내흔들었지만 멈추는 차는 없고 오히려 몸에 빗물만 튀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내고 초라한 몸을 이끌고 계속 걸어갔다.얼마 가지 않아 하이힐이 길 틈에 끼었다.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하이힐을 뽑으려 했지만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몸 전체가 뒤로 넘어졌다.어쩔 수 없이 빗물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눈앞에는 차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고 머리 위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모두들 우산을 받쳐 들고 길을 재촉했지만 유독 서유만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얼굴에 떨어진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두 팔을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리고 온 하늘에서 퍼붓는 빗물은 남자에게 쏟아졌다.새까만 머리와 빳빳한 양복이 흠뻑 젖었다.흠잡을 데 없는 얼굴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목덜미까지 내려왔다.그는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지 못한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주서희는 이승하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급히 우산을 쓰고 그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죄송합니다.”그녀가 이승하의 동의도 없이 서유를 찾아온 것이다.서유가 사실을 알고 이승하의 곁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빗물이 이승하의 이마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을 타고 뚝뚝 떨어져 촘촘한 눈초리를 내리쳤다.그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얼굴로 주서희를 보며 말했다.“서유랑 완전히 끝났어. 앞으로 내 앞에서 서유 말 꺼내지 마.”주서희는 넋을 잃고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서유 씨는 대표님을 사랑했어요.”이승하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서희야, 서유가 사랑하는 건 송사월 한 명뿐이야.”주서희는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서유 씨가 직접 인정했다고요. 대표님을 사랑했고, 매번 대표님의 마음을 시험할 때마다 실망스러운 답을 얻어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요...”이승하의 싸늘한 눈동자가 점점 붉어졌다.그는 눈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방금 서유는 그의 손을 보고 울었다.이것은 서유가 처음으로 그를 위해 운 것이다.정말 사랑했던 걸까?그럼 왜 이승하는 그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까?이승하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의 자그마한 그림자를 묵묵히 쳐다보더니 주서희에게 말했다.“서유는 송사월을 더 사랑해.”어쩌면 이승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수없이 아프게 한 이승하는 송사월에 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주서희는 우산을 움켜쥐고 약간 초조해서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서유 씨는 송사월에 대한 감정이 사랑보다는 미안함이 더 큰 것 같아요. 대표님이 진작 마음을 표현했
소수빈은 경호원이 일정한 거리를 두며 서유의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서유 씨를 그렇게 사랑하시면서 포기하셨으니 대표님 속이 얼마나 아프실까.’소수빈은 담배 하나를 꺼내 이승하에게 건넸다.“대표님, 한 대 피우시죠.”이승하는 그 담뱃갑을 쓸어보더니 점차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버려.”이승하는 앞으로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숨겨두고 평생을 간직할 수 있었다...소수빈은 3년 동안 담배와 술에 의존해 살아온 이승하가 단박에 끊을 줄은 몰랐다.이승하는 한 손을 창문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예전 이승하의 모습을 돌아온 것 같았다.서유를 만나기 전에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차갑고 도도했으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사랑의 아픔과 시련을 겪은 지금의 이승하는 싸늘한 눈 밑에 우울함이 비쳤지만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소수빈은 약간 흥분하여 손에 든 담배를 거둬들이고 말했다.“대표님, 집에 돌아가시죠.”이승하는 냉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3개월 이내에 화진 그룹을 인수한다.”소수빈은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혹시 화진 그룹을 인수해 김시후 씨에게 돌려드릴 생각인가요?”이승하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서유가 평생 돌봐야 하는 사람이잖아. 너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소수빈은 이 말을 듣고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고귀하고 도도한 이승하가 서유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하지만 서유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달려갔다.소수빈은 이 생각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그는 이승하가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결정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인데 굳이 이렇게까지 도울 필요가 있을까?까놓고 말해 당시 서유가 몸을 팔았을 때, 이승하가 준 2억 원
말을 마친 정가혜는 서유의 손에 쥐어진 검은 우산을 발견했다.그리고 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서유를 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아주머니에게 수건을 갖다 달라고 한 후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닦아주었다.닦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가서 뜨거운 물에 샤워부터 해. 내가 생강차를 끓여 올 테니 씻고 나와서 마셔.”그녀가 서유를 욕실로 밀자, 서유는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고 자그마한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렸다.정가혜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서유야, 혹시 이승하 씨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그녀가 이승하한테 끌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의 서유는 아주 고통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정가혜는 두 팔을 벌리고 부드럽게 말했다.“서유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늘 네 곁에 있어. 힘들 때 나한테 기대도 돼.”이 말을 들은 서유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 안기듯, 서유는 모든 방비와 위장을 벗은 채 가슴이 찢어지도록 울었다.“가혜야, 그 사람이 나 사랑한다는 말, 진심이었어...”알고 보니 그는 어릴 때부터 불구덩이에서 자라왔다.알고 보니 그는 자기가 아끼는 것이 어머니에 의해 파괴될까 봐 두려워했다.알고 보니 그가 남들 앞에서 서유에게 냉담했던 것은 전부 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서였다.알고 보니 그는 서유의 전화번호를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었고, 연지유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도 없었다.알고 보니 그는 서유를 누군가의 대역으로 삼지 않았었다.알고 보니 그는 서유를 위해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고, 서유를 아주 사랑했다...이런 뒤늦은 진실 때문에 서유는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고 마치 돌에 짓눌린 듯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정가혜는 모두 알아들었다. 이승하가 그녀를 데리고 떠난 후, 정가혜는 이승하가 서유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서유에게 이 뒤늦은 진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정가혜는 손을 들어 서유의 등을 가
서유는 고분고분 알겠다고 말하고는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뜨거운 물을 넣은 후 자리에 누웠다. 따뜻한 물이 살갗에 출렁이면서 그녀의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정가혜는 깨끗한 수건과 잠옷을 챙긴 후 부엌으로 가서 생강차 한 그릇을 직접 끓여주었다.서유가 건강한 심장을 이식받긴 했지만 큰 수술을 받은 사람이라 몸이 누구보다 허약했다.이렇게 오랫동안 비를 맞았으니 감기에 걸려 열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감기약을 사 오라고 했다.씻고 나온 서유는 테이블에 놓인 생강차와 감기약을 보고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녀는 소파에 앉아 생강차를 마시고 감기약을 먹은 후에야 정가혜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이 집은 내가 살 때 일부러 안방을 두 개 만들었어. 그때는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어. 안방 하나를 남겨놓으면 네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서유는 이부자리를 펴고 있는 정가혜를 바라보며 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전반생은 정가혜와 송사월의 보살핌으로 어렵게 살아왔으니 후반생은 서유가 그 두 사람을 돌볼 차례였다...정가혜는 이불을 펴고 나서 부드러운 잠자리를 두드렸다.“이리 와서 푹 쉬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알겠어?”서유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 누웠다.지금 이 순간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온몸에 긴장이 풀리더니 곧바로 잠이 들었다.서유가 잠든 것을 본 정가혜는 조심조심 방을 나갔다.도우미에게 서유의 옷을 세탁하고 말리게 한 다음 카드 한 장을 꺼내어 옷 주머니에 넣었다.이것은 서유가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남긴 5천만 원이었다.서유가 목숨 바쳐 번 돈이었으니 그녀는 한 푼도 쓸 수가 없었다.이제 서유가 돌아왔으니 카드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했다.정가혜는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SNS를 확인했다.첫 번째는 이연석이 올린 사진 한 장과 글 한 줄이었다.그는 나이트 레일의 호화로운 룸에 앉아 예쁜 얼굴의
이연석은 블랙리스트 작업을 마친 후 휴대폰을 내동댕이쳤다.장원 밖에서 들어오던 이승하가 마침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보고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형, 돌아왔어요?”이연석은 소파에서 일어나 온몸이 흠뻑 젖은 이승하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비를 왜 이렇게 맞았어요?”이승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고 있던 양복 외투를 벗고 하인이 건네주는 수건을 받았다.그제야 머리를 닦으며 이연석에게 물었다.“넌 왜 우리 집에 있어?”이연석은 한숨을 쉬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주말이잖아. 너무 심심해서 형이랑 한잔하려고 왔죠.”이승하는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심심하면 연준이 대신 아프리카에 가서 일하든가.”아프리카라는 말을 들은 이연석은 두피가 저렸다.“그 형은 피부가 거칠고 살이 두꺼워서 햇볕에 타도 되지만 난 아니에요. 이 얼굴이 인생의 자본인데 내 살길을 막고 싶어요?”무엇보다 이연석은 아프리카의 여자가 취향이 아니었다.게다가 아프리카 쪽은 일이 너무 까다로워서 이연준이 돌아올 때마다 머리숱이 점점 적어지니 이연석은 절대 대머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이연준: “너야말로 대머리다!”이승하는 이연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머리를 깨끗이 닦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그 도도하고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이연석은 안도하면서도 또 어쩔 수 없다는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몇 년 동안 이승하는 줄곧 우울하게 지냈고 웃지도 않았다. ‘대체 언제쯤이면 그 여자를 잊을 건데.’이연석은 시선을 거두고 바닥에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니 마침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그는 코웃음을 쳤다. 분명 정가혜가 삭제당한 것을 발견하고 따져 물으려고 전화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전화가 거의 끊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휴대폰을 주워들고 말했다.“정가혜, 당신...”이연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혹시 집 필요하신가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대체 누가 내 번호를 유출한 거야? 왜 광고 전화가 걸려오냐고!
서유가 자고 일어났더니 이미 밤이었다. 너무 울어서 눈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손을 들어 눈을 비비고 다시 떴을 때, 갑자기 눈앞이 약간 흐릿해졌다.서유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다시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조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생님, 제 눈이 또 흐릿한 증상이 나타났어요.]조지 쪽에서 빨리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불을 젖히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방문을 열고 내려갔더니 거실에서는 지현우가 정가혜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서유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벽시계를 보니 이미 밤 10시였다.‘어쩐지 저 사람이 여기 있더라니.’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정가혜를 데리고 송사월을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늦어서 못 갈 것 같았다.정가혜는 서유가 깨어난 것을 보고 얼른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깼어? 배 안 고파? 내가 밥 데워 올게.”서유가 대답하려는데 지현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이제 집에 가야죠.”정가혜는 고개를 돌려 지현우를 쏘아보았다.“이봐요. 서유가 애도 아니고. 이렇게 자유를 제한하는 건 곤란하죠.”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지현우는 코웃음을 쳤다.“제가 만약 자유를 제한했다면 다시는 그쪽을 보지 못했겠죠.”자기 손아귀에 있는 서유를 충분히 쥐락펴락할 수 있는 지현우였다. 다만 서유 언니의 체면을 봐서 어느 정도 참고 있는 것이었다.정가혜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굳어졌다.왠지 서유가 지현우 옆에 있으면 점점 더 위험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어떻게 서유를 도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서유는 정가혜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나지막이 위로했다.“가혜야, 우리 이미 이혼했어. 걱정하지 마.”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말을 들은 정가혜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이혼했다면 더더욱 돌아갈 필요 없잖아?”못 들은 척하는 지현우를 보며 서유는 입꼬리를 올리고 씁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