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강 부장의 은밀한 임신: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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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여기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고?”구승훈이 그를 바라보았다.“정말 도와줄 생각인가?”“당연한 거 아니야?”심준호가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미리 말해주는 거지만, 강하리는 그쪽 대리비를 감당하기 힘들 거야.”심준호가 맡는 사안들은 건당 억대 대리비용이 지급되는 명문가 경제적 갈등이나 이혼소송 건이었다.구승훈의 냉소에 심준호가 미소로 대답했다.“뭐, 가끔씩은 공짜로 재능기부 하기도 해.”그러자 구승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재능기부로 포장된 흑심이 아니라?”“너, 지금 아무나 막 물고 늘어지는 미친개 같은 거 알아?”심준호의 표정 역시 서늘해졌다.“그럴 시간 있으면, 왜 너를 떠났는지 잘 돌이켜보고 뉘우치는 게 어때?”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한참 뒤,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뭐 하든 내 자유고. 하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맞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든 말든, 그것도 내 자유지. 나 알잖아. 일할 때는 공과 사 철저하게 구분하는 거.”구승훈이 고개를 숙여 담배 한 대를 붙였다.한 모금 빨고 다시 입을 열었다.“성질 부리는 것 뿐이야. 좀 지나면 괜찮아져.”“성질 부린다고? 애 잃고 자기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게 고작 성질 부릴 일이라고?”심준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구승훈은 어두운 얼굴로 담배만 빨다가, 이윽고 한 마디 뱉었다.“아무튼 난 절대 안 놓아줄 거다.”그러고는 담배를 끄고 병실로 들어갔다.강하리가 여전히 침대맡에 몸을 걸치고 앉아있었다.옆에 놓인 음식들은 다치지도 않았다.구승훈은 점점 가슴이 더 답답해져 강하리를 바라만 보다가, 이윽고 픽 웃었다.“강하리, 3년이나 살 맞대고 지냈는데, 정말 아무 감정도 없어? 나한테?”강하리는 눈을 내리깐 채 대답이 없었다.하지만 눈 속에 복잡하고 씁쓸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참기 힘들었다. 막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겨우 웃음 한 줌을 짜냈다.“그냥 거래일 뿐이라고 한 건 그쪽 아닌가요?”그 말에 구승훈의 눈길에 고통스러움 한 결이 스쳤다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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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화

힘없이 화장실 문 손잡이에 몸을 지탱하며 강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아니에요. 음식 때문이 아니라 제가 컨디션이 좀…….”저쪽에 얼굴이 시커매진 구승훈이 보였다.“강하리, 언제까지 이러는지 두고 보자.”낮은 웃음소리로 화답하는 강하리.그제야 아줌마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의 불꽃이 튀고있단 걸 알아챘다.구승훈이 떠난 뒤, 아줌마가 강하리를 타이르기 시작했다.“아가씨. 이러시면 아가씨 몸만 망가지세요.”“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렇게 강하리는 사흘을 버텼다.구승훈의 강권에 저항하듯 단식 투쟁을 이어갔다.그동안 구승훈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고.그러면서도 갈 데까지 가보자는 듯 타협하지 않았다.총성 없는 사흘 간의 전쟁.“형, 강 부장은 요즘 좀 어때?”나흘째 되는 날, 얼굴색이 말이 아닌 형에게 구승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꾸준히 고얀 짓 중이시다.”구승훈의 냉랭한 말투에 구승재가 멈칫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뭐야. 형이 먼저 잘못했다고 수그려 보는 건 어때?”“안 한 줄 아냐?”정말이지,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굽실댄 건 처음이다.물론 어디까지나 구승훈의 기준에서.다른 의미로는, 강하리만큼 고집 센 여자가 구승훈에겐 처음이다.구승재가 속으로 욕을 뱉었다.형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어떤 식으로 수그렸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내 말은, 윽박지르지만 말고 차근차근 잘 좀 달래 보라고. 강압적 포스남 컨셉이 모든 여자한테 먹히는 건 아니니까.” 구승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그 고집불통이 좋은 말로 달랜다고 퍽이나 잘 듣겠다.”“그건 형 추측일 뿐이잖아.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승재의 말에 구승훈의 눈에 살짝 광채가 감돌았다.그날 퇴근 후.구승훈은 액세서리 매장에 와 있었다.어렴풋하게나마, 강하리가 귀걸이는 안 좋아한다던 기억이 떠올랐다.꼼꼼히 둘러보며 고르고 골라, 목걸이 하나를 정교하게 포장했다.지이잉-!휴대폰이 울렸다.“대표님! 어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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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3화

강하리는 멍한 표정이었다.시종일관 한 마디도 없었다.소리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렸을 뿐.드디어 원하던 결말인가.하지만 하나도 안 기쁜 건 왜일까.온통 상처만 남긴 둘의 관계.아주 미약하게나마 섞여있는 달콤함도.이런 방식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구승훈이 질리면 조용히 사라져 주는 시나리오도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가 먼저 떠날 줄은 몰랐다.구승훈의 눈길이 그녀의 눈물에 멈췄다. 저도 모르게 닦아주려고 손이 올라갔다.하지만 강하리가 고개를 돌려 비켜버렸다.구승훈의 손이 허공에 얼어붙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손을 거둬들였다.“아줌마가 죽 보내왔으니까 조금이라도 먹어.”구승훈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 약은 안 먹어도 돼. 억지로 먹이지 않을게.”말을 마친 뒤, 뒤돌아 서서 아줌마가 가져온 죽을 그릇에 옯겨담았다.그릇을 든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올라와 있었다.다 뜨고 돌아서니, 강하리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구승훈이 급급히 그릇을 한쪽에 놓고 강하리를 부축해 일으켰다.강하리의 입술이 일 자로 꽉 다물어졌다. 소리 없이 옆에 놓인 그릇과 숟가락을 가져와, 조용히 죽을 떠 먹기 시작했다.1인분이 채 안 되는 죽을 강하리는 30분동안이나 먹었다.구승훈은 조용히 서서 강하리가 죽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그녀가 그릇을 놓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데?”“회사 다니면서 먹고 사는 거죠 뭐.”“회사는 다 나은 뒤에 나오는 걸로.”강하리가 멍해졌다가 곧 웃었다.“구 대표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저 에비뉴에서 이직하려고요.”“이유는?”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가급적 그쪽이랑 직장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싶어서요.”“지금 나랑 생판 남남이 되겠다는 건가, 강 부장?”구승훈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끝낼 거면 깨끗이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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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4화

구승훈의 급발진에 강하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심준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지만.적어도 자신한테 악의가 없단 건 보아낼 수 있었다.“대표님 속은 얼마나 깨끗하시길래.”“적어도 여자 여럿 농락하는 찌질한 사람은 아니야. 약혼자도 여친도 없고. 여자랑 잔 것도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유라도 건드린 적 없어.”강하리의 입가가 실룩였다.갑자기 무슨 고백 같은 대답을 들으니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이제 저 말의 진실 여부는 그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잘 알았으니까, 회사 나가는 대로 이직 신청할게요. 반려되면 법적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요.”감정적인 대화는 더이상 나누고 싶지 않았다.“아, 그리고 계약해지 확인 서류도 빠른 시일 내로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구승훈이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한 번 뱉은 말 번복이라도 할까 봐?”“꼭 그런 건 아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 정규 절차대로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구승훈은 심란했다. 너무나.위약금 얘기도 사실 보내주기 싫어서 놓는 으름장 같은 거였다.너무 강경하게 나오는 그녀를 일단 달랠 생각으로 감정 쪽으로는 타협했지만.어떤 식으로든 곁에 두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설득해 보려고 했다.하지만 강하리는 치밀했다.모든 요소를 다 고려한 빈틈 없는 계획으로 자신을 향해 가드를 올렸다.그게 구승훈을 미치게 만들었다.타협이고 뭐고 꽁꽁 묶어서 자신 곁에 붙들어 매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핼쓱한 얼굴을 보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계약 해지를 번복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자해를 서슴지 않을 그녀였다.구승훈의 가슴속에 말 못할 울화가 치밀었다.이 여자한테 나약해지는 자신 때문일까.아니면, 이 독한 여자 때문일까.“일단 몸부터 챙겨.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돌봐주게 해 줘.”꾹꾹 눌러 참으며 다시 협상을 시도했지만.“몸은 나 스스로 알아서 챙겨요. 내일 오전 9시에 노을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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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전 후회되는 일은 안 하거든요.”강하리의 결연한 대답이 돌아왔다.구승훈은 더 말 없이 강하리를 보고만 있다가, 강하리가 영양제를 다 맞은 후 그녀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죽도 먹고 영양제도 맞은 터라, 강하리는 힘이 좀 나기 시작했다.그래서 구승훈이 안아들려고 할 때 단 칼에 거절해 버렸다.돌아온 건 구승훈의 냉소.응급실을 나온 후, 구승훈이 지나치듯 한 마디 던졌다.“일단 집으로 가. 이 몸으로 밖에서 쓰러졌다가 나 탓하지 말고.”또 시작이다. 물고 늘어지기.이젠 웃기지도 않았다.“아니에요. 괜찮아요.”강하리는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택시 잡으러 가 버렸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구승훈은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기분이 들었다.젠장, 거름밭 돌멩이처럼 고약하고 딱딱한 여자 같으니라고.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자괴감까지 들었다.미간 팍 찌푸린 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그제야 옆 시트 위에 놔둔, 곱게 포장된 선물꾸러미가 보였다.내가 미쳤지. 저런 여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선물을 다 사고.구승훈은 거칠게 선물꾸러미를 콘솔박스에 던져넣고는 시동을 걸어 떠났다.같은 시각, 강하리는 길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기분이 착잡했다.후련한 느낌도 있었다. 다신 그 남자와 송유라와 엮일 일이 없었으니까.하지만 말 못할, 다른 무언가도 있었다.그게 뭔지 확인하기도 전, 손연지의 전화가 걸려왔다.“하리야, 어떻게 됐어?”손연지의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검진을 받을 때 강하리가 먹었던 약 성분이 모두 검출된 터였다.손연지는 강하리에게 약을 준 게 자신이란 걸 구승훈이 알게 될까 조마조마했다.화가 나면 구승훈에게 대들기도 하는 그녀지만.그렇다고 구승훈이 무섭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잘 마무리되어 가는 중이야.”강하리가 씁쓸하게 웃었다.그러자 핸드폰 너머, 손연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진짜? 계약 해지하기로 한 거야?”“응.”손연지가 기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너무 잘됐다! 이따가 축하 파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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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6화

”그래. 밥 한 끼 같이 하자. 하리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주해찬이 거들었다.강하리가 시간을 확인했다.식사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사흘 동안이나 굶은 위장에 부담이라도 가지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었다.“네, 그러죠.”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선뜻 응낙하고 차에 탔다.언제 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과식만 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세 사람은 소문난 근처 맛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한 여인과 함께 나오는 안현우와 마주쳤다.강하리와 닮은 여인.강하리를 본 안현우가 멍해졌다.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왜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안현우였다.그냥 노리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 기분은 대체 뭘까.“강 부장, 잘 지냈어요?”예전 같으면 만나자마자 비아냥을 퍼부어댔을 안현우지만,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덕분에요.”짤막하게 대답하는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웠다.눈빛 속에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러고는 몹시 불편하다는 듯, 얼른 주해찬과 정주현을 따라 룸에 들어가 버렸다.닫히는 룸 문을 바라보며 안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 왜 저 여자만 보는 거야.”옆에 여인이 뾰루퉁해 불렀다.“그래서?”안현우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여인은 분했으나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웃다가도 다음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안현우의 괴랄한 성격을 잘 아니까.더군다나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분 잡친 게 분명했다.역시 안현우는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 있었다.강하리의 냉담한 태도에 짜증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순간 너무나도 성가시게 느껴졌다.“꺼져.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입금은 비서한테 시켜 놓을 테니까.”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차에 타 잠시 고민하다가 구승훈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아가씨는요?”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줌마가 홀로 집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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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7화

구승훈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곧 냉소를 지었다.웃기는 여자네.계약 해지 서류를 받기도 전에 날 차단해?[보면 전화해.]톡을 보낸 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지만 회신이나 전화는 없었다.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대화창도 감감무소식 그 자체였다.구승훈은 또다시 열불이 치밀기 시작했다.누를래야 누를 길이 없었다.겨우 놓아주려고 마음먹었건만.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사실 강하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 쯤은 너무 쉬웠다.당장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그게 강하리에게는 구질구질하게 보일 게 뻔했다.알량한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참나, 그 여자 하나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그나저나 핸드폰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구승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그러나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구승훈은 강하리와의 톡 내역을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그제야 알 수 있었다.몇 줄 안되는 메시지들. 둘이 톡으로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비서를 통해 찾거나, 집에서 바로 용건만 전달하곤 했으니까.일상 토크 같은 건 해본 기억조차 없다.구승훈은 갑자기 기분이 확 잡쳤다.나랑 나눌 얘기가 이렇게도 없었나?다른 사람들과도 이런 식인 건가?아마 아닐 거다.친구와는 너무나도 즐겁게 수다 떨던 강하리다.문득,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하리가 한동안 톡을 자주 보내던 게 생각났다.외출했다가 귀엽게 생긴 구름 송이를 봤다고.맛있는 요리 조리법을 새로 배웠다고.이것저것 사진도 많이 보냈고, 그날 기분도 공유했었다.그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회신했던가?기억을 짜내 봤지만, 없었다.아마 안 했을 거다.구승훈의 시점에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잡담에 불과했으니까.심지어 이런 쓸데없는 건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구승훈은 깊은 주름이 만들어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었다.그러다 벌떡 일어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간 구승훈이 구승재에게 전화했다.“승혁이 쪽은 얼마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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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8화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언제든 강 부장님을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정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렇다면 저야 고맙죠.”그렇게 몇 술 뜨지도 않은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났다.주해찬이 정주현을 호텔에 데려다준 후, 차 안.“요즘 좀 어때? 구승훈이랑은…….”강하리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솔직히 구승훈 얘기는 하고싶지 않았다.정작 떠날 때가 되니 왠지 가슴이 답답해났다.좋든 나쁘든, 너무 깊숙히 새겨진 기억들 때문일까.“잘 끝나가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선배.”강하리가 급히 말을 돌렸다.“박 교수님께 일 좀 더 달라고 부탁해 줄래요?”“걱정 마. 내가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둘 테니까.”운전대를 돌리던 주해찬이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사실 나는 네가 통역실에 올인했으면 하거든. 정식 입문이 잘 돼야 일거리도 많아질 거니까. 교수님 곧 퇴직하실 건데, 네가 사업 이어받길 바라고 계셔.”올인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의 지원이 없어지면, 통역실 하나로는 엄마 약값도 모자랐다.송유라와의 소송 비용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심준호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넙적 공짜로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돈 벌어야 해서요.”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도와줄게, 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오진 못했다.강하리에게 급급히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었다.손연지네 아파트단지 앞에 도착하자 주해찬이 차를 세웠다.“하리야, 통역실 전담 말인데.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흔한 기회도 아니고, 박 교수님께서 여러 번 꺼낸 얘기기도 해.”강하리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때 마침 손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제 와? 나 자금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와서 먹어. 아참, 과식은 안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알았어. 곧 도착해.”“맞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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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9화

”미안하다.”한 마디가 구승훈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뭐,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송유라가 그렇게 중요하면 걔랑 잘 지내요. 두 사람 다내 주위에 더이상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송유라 얘기에 구승훈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이렇게 나를 혐오했던 건가?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송유라는 왜 여기서 나오고?내가 언제 송유라와 지내겠다고 했나?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강하리의 팔목을 붙잡았다.“또 왜요?”강하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줘. 연락 씹는 일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네 전화는 자다가도 받을께.”“만회할 기회라고 했나요?”강하리가 픽 웃었다.“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게.”“송유라가 나한테 했던 짓들, 그대로 돌려줘요.”“…….”구승훈이 뚝 멈췄다.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겨우 입을 뗐다.“유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 둘 사이.”“아,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팔목을 빼냈다.“그럼 내일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한 마디를 남기고,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참 달래기 힘들다, 강하리.……초인종을 누르자 우다다 달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손연지.“구승훈이 아직 밖에 있어!”살 떨리는 듯한 손연지의 말투에, 강하리는 별 흥미가 없단 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에 들어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밥솥을 열었다.전복죽이었다.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앞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하리야, 괜찮아?”맞은 편에 앉은 손연지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응.”“구승훈이랑 얘기 다 나눴고?”“내일 계약 해지 서류 확인하러 가. 그거 가져오면 우리 둘은 영영 끝인 거고.”“손해배상으로 받는 건 없고?”손연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그냥 끝내면 안 되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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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0화

강하리는 창 밖에서 눈길을 떼고 돌아섰다.하지만 물컵을 쥔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다음날, 노을카페.심준호가 미리 와 있었다.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일찍 오셨네요. 잘 부탁드려요.”강하리가 웃으며 다가가 옆에 앉았다.그녀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심준호가 미간을 좁혔다.“정신 상태는 좋은 것 같은데 몸이 많이 말랐네요. 진짜 단식투쟁 한 거예요?”뻘쭘해진 강하리가 고개를 숙였다.“다신 안 그럴게요.”“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만큼 큰 실책은 없는 법이에요.”심준호가 나무라듯 말했다.그 말을 마침 걸어오던 구승훈이 들었다.커피점에 들어설 때부터 구겨져 있던 인상이, 그 소리를 듣자 더 구겨졌다.“우리 심 변호사님은 업무 능력이 줄었나? 요즘 많이 한가해 보이던데.”“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드릴 자신 쯤은 있습니다. 특히나 계약 해지 같은 업무는요.”구승훈의 아픈 데를 골라 야무지게 꼬집는 듯한 말투.구승훈은 욕이 튀어나올 뻔 하다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애써 참았다.강하리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이 자리에 내 편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변호사님, 전에 작성 부탁했던 계약해지 증명서는 어디 있나요? 어서 마무리짓고 싶네요.”“급한 용무 있어?”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았다.“아니. 없는데.”강하리의 담담한 대답.구승훈의 표정이 또 구겨지기 전, 심준호가 웃으며 얼른 증명서를 꺼내들었다.“잘 살펴보시고, 문제 없으면 두분 다 사인해 주세요.”강하리가 대충 한 번 쓸어보고 사인했다.반대로 구승훈은 좀처럼 사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아주 토씨 하나까지 샅샅이 확인하겠다는 듯, 한 자 한 자 느릿느릿 읽어나갔다.강하리는 재촉 대신 구승훈을 내버려 두었다.재촉하면 그걸로 또 태클 걸고 넘어질 게 뻔했으니까.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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