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밥 한 끼 같이 하자. 하리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주해찬이 거들었다.강하리가 시간을 확인했다.식사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사흘 동안이나 굶은 위장에 부담이라도 가지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었다.“네, 그러죠.”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선뜻 응낙하고 차에 탔다.언제 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과식만 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세 사람은 소문난 근처 맛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한 여인과 함께 나오는 안현우와 마주쳤다.강하리와 닮은 여인.강하리를 본 안현우가 멍해졌다.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왜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안현우였다.그냥 노리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 기분은 대체 뭘까.“강 부장, 잘 지냈어요?”예전 같으면 만나자마자 비아냥을 퍼부어댔을 안현우지만,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덕분에요.”짤막하게 대답하는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웠다.눈빛 속에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러고는 몹시 불편하다는 듯, 얼른 주해찬과 정주현을 따라 룸에 들어가 버렸다.닫히는 룸 문을 바라보며 안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 왜 저 여자만 보는 거야.”옆에 여인이 뾰루퉁해 불렀다.“그래서?”안현우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여인은 분했으나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웃다가도 다음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안현우의 괴랄한 성격을 잘 아니까.더군다나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분 잡친 게 분명했다.역시 안현우는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 있었다.강하리의 냉담한 태도에 짜증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순간 너무나도 성가시게 느껴졌다.“꺼져.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입금은 비서한테 시켜 놓을 테니까.”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차에 타 잠시 고민하다가 구승훈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아가씨는요?”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줌마가 홀로 집에 들어
구승훈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곧 냉소를 지었다.웃기는 여자네.계약 해지 서류를 받기도 전에 날 차단해?[보면 전화해.]톡을 보낸 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지만 회신이나 전화는 없었다.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대화창도 감감무소식 그 자체였다.구승훈은 또다시 열불이 치밀기 시작했다.누를래야 누를 길이 없었다.겨우 놓아주려고 마음먹었건만.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사실 강하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 쯤은 너무 쉬웠다.당장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그게 강하리에게는 구질구질하게 보일 게 뻔했다.알량한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참나, 그 여자 하나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그나저나 핸드폰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구승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그러나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구승훈은 강하리와의 톡 내역을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그제야 알 수 있었다.몇 줄 안되는 메시지들. 둘이 톡으로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비서를 통해 찾거나, 집에서 바로 용건만 전달하곤 했으니까.일상 토크 같은 건 해본 기억조차 없다.구승훈은 갑자기 기분이 확 잡쳤다.나랑 나눌 얘기가 이렇게도 없었나?다른 사람들과도 이런 식인 건가?아마 아닐 거다.친구와는 너무나도 즐겁게 수다 떨던 강하리다.문득,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하리가 한동안 톡을 자주 보내던 게 생각났다.외출했다가 귀엽게 생긴 구름 송이를 봤다고.맛있는 요리 조리법을 새로 배웠다고.이것저것 사진도 많이 보냈고, 그날 기분도 공유했었다.그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회신했던가?기억을 짜내 봤지만, 없었다.아마 안 했을 거다.구승훈의 시점에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잡담에 불과했으니까.심지어 이런 쓸데없는 건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구승훈은 깊은 주름이 만들어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었다.그러다 벌떡 일어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간 구승훈이 구승재에게 전화했다.“승혁이 쪽은 얼마나 알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언제든 강 부장님을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정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렇다면 저야 고맙죠.”그렇게 몇 술 뜨지도 않은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났다.주해찬이 정주현을 호텔에 데려다준 후, 차 안.“요즘 좀 어때? 구승훈이랑은…….”강하리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솔직히 구승훈 얘기는 하고싶지 않았다.정작 떠날 때가 되니 왠지 가슴이 답답해났다.좋든 나쁘든, 너무 깊숙히 새겨진 기억들 때문일까.“잘 끝나가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선배.”강하리가 급히 말을 돌렸다.“박 교수님께 일 좀 더 달라고 부탁해 줄래요?”“걱정 마. 내가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둘 테니까.”운전대를 돌리던 주해찬이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사실 나는 네가 통역실에 올인했으면 하거든. 정식 입문이 잘 돼야 일거리도 많아질 거니까. 교수님 곧 퇴직하실 건데, 네가 사업 이어받길 바라고 계셔.”올인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의 지원이 없어지면, 통역실 하나로는 엄마 약값도 모자랐다.송유라와의 소송 비용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심준호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넙적 공짜로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돈 벌어야 해서요.”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도와줄게, 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오진 못했다.강하리에게 급급히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었다.손연지네 아파트단지 앞에 도착하자 주해찬이 차를 세웠다.“하리야, 통역실 전담 말인데.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흔한 기회도 아니고, 박 교수님께서 여러 번 꺼낸 얘기기도 해.”강하리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때 마침 손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제 와? 나 자금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와서 먹어. 아참, 과식은 안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알았어. 곧 도착해.”“맞다, 나
”미안하다.”한 마디가 구승훈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뭐,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송유라가 그렇게 중요하면 걔랑 잘 지내요. 두 사람 다내 주위에 더이상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송유라 얘기에 구승훈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이렇게 나를 혐오했던 건가?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송유라는 왜 여기서 나오고?내가 언제 송유라와 지내겠다고 했나?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강하리의 팔목을 붙잡았다.“또 왜요?”강하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줘. 연락 씹는 일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네 전화는 자다가도 받을께.”“만회할 기회라고 했나요?”강하리가 픽 웃었다.“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게.”“송유라가 나한테 했던 짓들, 그대로 돌려줘요.”“…….”구승훈이 뚝 멈췄다.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겨우 입을 뗐다.“유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 둘 사이.”“아,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팔목을 빼냈다.“그럼 내일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한 마디를 남기고,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참 달래기 힘들다, 강하리.……초인종을 누르자 우다다 달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손연지.“구승훈이 아직 밖에 있어!”살 떨리는 듯한 손연지의 말투에, 강하리는 별 흥미가 없단 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에 들어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밥솥을 열었다.전복죽이었다.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앞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하리야, 괜찮아?”맞은 편에 앉은 손연지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응.”“구승훈이랑 얘기 다 나눴고?”“내일 계약 해지 서류 확인하러 가. 그거 가져오면 우리 둘은 영영 끝인 거고.”“손해배상으로 받는 건 없고?”손연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그냥 끝내면 안 되지! 그
강하리는 창 밖에서 눈길을 떼고 돌아섰다.하지만 물컵을 쥔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다음날, 노을카페.심준호가 미리 와 있었다.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일찍 오셨네요. 잘 부탁드려요.”강하리가 웃으며 다가가 옆에 앉았다.그녀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심준호가 미간을 좁혔다.“정신 상태는 좋은 것 같은데 몸이 많이 말랐네요. 진짜 단식투쟁 한 거예요?”뻘쭘해진 강하리가 고개를 숙였다.“다신 안 그럴게요.”“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만큼 큰 실책은 없는 법이에요.”심준호가 나무라듯 말했다.그 말을 마침 걸어오던 구승훈이 들었다.커피점에 들어설 때부터 구겨져 있던 인상이, 그 소리를 듣자 더 구겨졌다.“우리 심 변호사님은 업무 능력이 줄었나? 요즘 많이 한가해 보이던데.”“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드릴 자신 쯤은 있습니다. 특히나 계약 해지 같은 업무는요.”구승훈의 아픈 데를 골라 야무지게 꼬집는 듯한 말투.구승훈은 욕이 튀어나올 뻔 하다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애써 참았다.강하리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이 자리에 내 편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변호사님, 전에 작성 부탁했던 계약해지 증명서는 어디 있나요? 어서 마무리짓고 싶네요.”“급한 용무 있어?”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았다.“아니. 없는데.”강하리의 담담한 대답.구승훈의 표정이 또 구겨지기 전, 심준호가 웃으며 얼른 증명서를 꺼내들었다.“잘 살펴보시고, 문제 없으면 두분 다 사인해 주세요.”강하리가 대충 한 번 쓸어보고 사인했다.반대로 구승훈은 좀처럼 사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아주 토씨 하나까지 샅샅이 확인하겠다는 듯, 한 자 한 자 느릿느릿 읽어나갔다.강하리는 재촉 대신 구승훈을 내버려 두었다.재촉하면 그걸로 또 태클 걸고 넘어질 게 뻔했으니까.느긋하게
말을 마친 강하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심준호가 구승훈의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는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 쳤다.“정말 잡고 싶으면 주위를 깨끗하게 잘 정돈하고 다시 오든가.”구승훈이 담배 한 대를 꺼내들었다.“네가 가로막지만 않으면 돼.”심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이 싱글로 컴백하면 가로막는 게 나뿐이 아닐 텐데.”그 말을 남기고 심준호도 서류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수박 겉 핥기.지금 구승훈이 하는 짓거리가 딱 그랬다.강하리를 붙잡는 태도부터가 영 글러먹었다.큰 상처를 입은 여인에게, 가지 말라고 우악스럽게 붙잡기만 하는 게 통할 리가.하지만 귀띔해줄 생각은 없었다.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말하든 소 귀에 경 읽기인 것들이 있으니까.……-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구승훈이 받지 않자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액정에 뜬 “송”자를 보며 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뒤,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이번에는 받았다.“응, 유라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이마가 너무 아파요.”구슬프게 지저귀는 듯한 송유라의 목소리.느닷없이 강하리가 생각났다.꿈 속에서마저 아프다고 중얼거리던.자면서까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그리고, 그날 이후로 아프단 소리 한 번 없던.“진통제 먹었어?”욱하고 치미는 뭔가를 가까스로 누르며, 구승훈이 애써 평온한 말투를 지어냈다.“먹었는데 효과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한참동안 말이 없어진 구승훈.던지듯 한 마디를 뱉었다.“의사 선생님을 찾는 게 날 찾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가 사용했던 물컵을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가볍게 문질렀다.“용하다는 의사 찾아 놨으니까 이마에 흉터 안 남을 거야. 걱정 마.”“와서 나랑 같이 있어줘요, 오빠!”구승훈이 희미하게 웃었다.“유라야, 너도 이제 새로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어? 나만 싸고돌지 말고.”“……뭐, 뭘 새로 시작해요?”핸드폰 너머 송유라가
”하리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싫어하는 건?”심준호가 물었다.“단 거 제일 좋아히긴 하는데, 견과류 알러지 있어서 그 쪽으로는 못 먹는 거 빼고 다 잘 먹어요.”심준호가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우리 어머니인 줄. 언어 천재에다가 단 것 마니아, 견과류 알러지까지 꼭 닮았네요.언제 한 번 어머니한테 하리 씨 소개시켜 줘야겠네.”“백 장관님 말씀인가요?”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밖에서나 백 장관님이지 집에서는 그냥 남편바라기 응석쟁이 아줌마예요.”엄마 흉 보는 심준호의 눈이 행복으로 빛났다.그게 강하리는 새삼 부러웠다.가족애란 건 어려서부터 사치였으니까.“다 좋아질 거예요. 하리 씨도. 모두가.”심준호가 강하리의 기분을 캐치한 듯 따뜻하게 말해주었다.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맛집을 찾아, 밥을 먹으면서 송유라 소송건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충분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야 할 거예요. 송유라의 유명세로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될 거고, 하리 씨가 유산했단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가급적 파급을 줄이는 쪽으로 제가 노력해 볼게요.”“잘 알겠습니다. 고마워요.”자신의 유산 사실이 알려지는 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언제든지 여론에 밝혀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는 심준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강하리를 바라보는 심준호의 마음이 일렁였다.정말이지, 너무 닮았다. 자신의 누나와.생김새나 표정, 몸짓 하나하나까지.“하리 씨, 부탁이 있는데.”뭔가에 홀린 듯 심준호가 입을 열었다.“언제 한 번 하리 씨 어머님을 뵐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기꺼이 허락했다.그동안 도와준 게 있는데, 그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이틀 동안 푹 휴식한 강하리가 회사에 나갔다.“부장님! 이직하신다던데 사실이에요?”가장 먼저 마주친 건,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의 안예서였다.안예서의 입을 통해 강하리는, 자신의 이직 소식이 회사에 쫙 퍼졌단
고의적인 의도가 다분한 정주현의 말투.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주현을 마주 향해 섰다.“주현 도련님께서 우리 강 부장과 이렇게 친했었나? 남 여자 눈독 들이지 말라던 경고는 귓등으로 들은 거고?”강하리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찰나.“남의 여자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에비뉴가 아닌, 우리 ‘대양 그룹’의 미모의 싱. 글, 강 부장님을 불렀을 뿐인데.”햇살처럼 환한 얼굴로 정주현이 또박또박 반박했다.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너님 여자가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 듯, 대양 그룹과 싱글에 특별히 더 악센트를 넣으면서.강하리가 입술을 짓씹었다.얼굴에 찬 서리가 쫙 깔린 구승훈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대양 그룹과 계약하려던 거였어?”차가운 음성이 잇새로 새어나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차가운 눈길을 마주 보았다.“제시한 조건이 꽤 좋아서요. 저 돈 필요한 거 아시잖아요. 안 갈 이유가 없죠.”“주현 도련님께서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구승훈의 눈길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누가 에비뉴에서 강 부장의 이직을 허락한다 그랬지?”“지금 말씀 번복하시겠다는 건가요?”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의 입가가 느슨하게 위로 휘어졌다.“번복이라니. 내가 언제 승낙을 했다고.”“하지만 이직 신청은-.”“부장직 이상 이직은 대표이사 심의 절차가 있단 걸 잊은 모양이군.”그러고는 정주현을 돌아보았다.“아니면, 주현 도련님께서 위약금을 대신 물어주겠다는 건가?”“이게 에비뉴에서 사람 붙잡아 두는 방식인가요? 참 저질이네요.”정주현이 쯧, 혀를 찼다.“까짓 거, 대양이 물어줍니다. 저희 대양 그룹은 그 정도로 쪼잔하진 않아서요.”그러고는 구승훈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구승훈의 눈에서 분노의 불씨가 튀어올랐다.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저기, 두 분 먼저 들어가 보세요.”구승재가 급급히 두 사람 사이에 막아섰다.강하리는 정주현을 잡아끌어 밖으로 향했다.저만치 걸어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
구승훈의 눈빛이 순간 가늘어졌다.바의 어둡고 밝은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깊게 가라앉았다.“최하영 씨에게 전화해서, 연성시에 있는 형수님을 잘 돌봐주라고 해. 필요하면 안현우에게 직접 손을 써도 돼. 문제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구승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임희주 씨는 어떻게 할 거야?”구승훈은 비웃음을 띠며 눈을 내리깔았다.“임희주는 아직 시험하고 있어. 하지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여초연이 임희주에게 그렇게 긴 시간을 주진 않을 거니까.”구승재는 잠시 형을 바라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왜?”구승훈이 시선을 돌렸다.구승재는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방금 형수님이 이혼 서류를 서산 퍼스트 빌리지로 보냈어.”구승훈은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정말 빠르네.”그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폭탄을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봐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구승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시 다물었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의 정원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구승훈은 이곳에 리시안셔스를 가득 심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이 정원에서 강하리와 함께 늙어갈 거라 믿었다.하지만 텅 빈 지금의 주택은 그의 마음처럼 공허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약속을 상징하는 결혼반지도 그 위에 놓여 있었다.구승훈은 반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자기야, 나 이혼하고 싶지 않아. 괜찮을까?”그러나 텅 빈 주택에는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다음 날, 드물게 햇살이 쨍쨍했다.강하리는 붉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화장을 했다.가정 법원에는 사람들이 북적였고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도로 건너편에서 구승훈은 묵묵히 강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휴대폰은 계속 울렸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준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는 여전히 활기 넘쳤지만 구승훈이 앉아 있는 바 카운터 앞에는 텅 빈 술잔이 열 개도 넘게 쌓여 있었다.천아름은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식을 취소한 건 분명 구 대표님이면서 강하리보다 더 힘들어 보이네요.”구승훈은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가볍게 웃으며 술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천아름은 바 카운터에서 술잔을 집어 들고 따라 마시며 말했다.“남자들에게 여자는 그저 부르면 오고 가라면 가는 존재인가 봐요?”구승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어 구승훈에게 내밀었다.“결혼식 날, 우리 하리 사진이에요.”구승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메이크업실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다.강하리는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옆에는 천아름과 손연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사진 속 강하리는 이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구승훈은 가볍게 두 번 숨을 내쉬었다.“그날, 하리는...”천아름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말했다.“그날 하리는 구 대표님을 찾으러 갔어요. 우리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죠.”구승훈은 이마를 짚으며 힘없이 몸을 기울였다.천아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유라고 물어봅시다. 구 대표님이 여태 사랑했던 여자는 강하리뿐이었잖아요. 분명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구승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깊게 빨아들인 후에야 대답했다.“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갑자기 재미없어져서, 결혼하기 싫어졌어요.”천아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어요. 지금이 재밌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하리 같은 여자는 아이가 있어도 구혼자가 줄을 설 걸요? 구 대표님, 후회하지나 말아요.”그녀는 의자에 걸쳐 둔 헬멧을 들고 구승훈의 어깨를 툭 치며 돌아섰다.때마침 구승재가 구승훈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헬멧을 안은 채 나오는 천아름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