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밥 한 끼 같이 하자. 하리 너한테 할 얘기도 있고.”주해찬이 거들었다.강하리가 시간을 확인했다.식사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사흘 동안이나 굶은 위장에 부담이라도 가지 않을까 걱정도 살짝 들었다.“네, 그러죠.”하지만 걱정과는 별개로 선뜻 응낙하고 차에 탔다.언제 또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과식만 하지 않으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세 사람은 소문난 근처 맛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찰나, 한 여인과 함께 나오는 안현우와 마주쳤다.강하리와 닮은 여인.강하리를 본 안현우가 멍해졌다.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는 강하리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왜인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안현우였다.그냥 노리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이 기분은 대체 뭘까.“강 부장, 잘 지냈어요?”예전 같으면 만나자마자 비아냥을 퍼부어댔을 안현우지만,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덕분에요.”짤막하게 대답하는 강하리의 표정이 어두웠다.눈빛 속에 혐오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그러고는 몹시 불편하다는 듯, 얼른 주해찬과 정주현을 따라 룸에 들어가 버렸다.닫히는 룸 문을 바라보며 안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빠, 왜 저 여자만 보는 거야.”옆에 여인이 뾰루퉁해 불렀다.“그래서?”안현우가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냉랭하게 대답했다.여인은 분했으나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웃다가도 다음 순간 천둥 번개가 치는 안현우의 괴랄한 성격을 잘 아니까.더군다나 지금 상태로 봐서는 기분 잡친 게 분명했다.역시 안현우는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 있었다.강하리의 냉담한 태도에 짜증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옆에 서 있는 여인이 순간 너무나도 성가시게 느껴졌다.“꺼져. 그리고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입금은 비서한테 시켜 놓을 테니까.”그 자리에 얼어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차에 타 잠시 고민하다가 구승훈에게 전화했다.……“대표님, 아가씨는요?”상다리 부러지게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아줌마가 홀로 집에 들어
구승훈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가 곧 냉소를 지었다.웃기는 여자네.계약 해지 서류를 받기도 전에 날 차단해?[보면 전화해.]톡을 보낸 뒤,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지만 회신이나 전화는 없었다.조용하기만 한 핸드폰. 대화창도 감감무소식 그 자체였다.구승훈은 또다시 열불이 치밀기 시작했다.누를래야 누를 길이 없었다.겨우 놓아주려고 마음먹었건만.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사실 강하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것 쯤은 너무 쉬웠다.당장 달려가고 싶었다.하지만 그게 강하리에게는 구질구질하게 보일 게 뻔했다.알량한 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참나, 그 여자 하나 없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그나저나 핸드폰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구승훈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그러나 여전히 조용하기만 한 핸드폰.구승훈은 강하리와의 톡 내역을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그제야 알 수 있었다.몇 줄 안되는 메시지들. 둘이 톡으로 나눈 대화가 거의 없었다.비서를 통해 찾거나, 집에서 바로 용건만 전달하곤 했으니까.일상 토크 같은 건 해본 기억조차 없다.구승훈은 갑자기 기분이 확 잡쳤다.나랑 나눌 얘기가 이렇게도 없었나?다른 사람들과도 이런 식인 건가?아마 아닐 거다.친구와는 너무나도 즐겁게 수다 떨던 강하리다.문득, 둘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하리가 한동안 톡을 자주 보내던 게 생각났다.외출했다가 귀엽게 생긴 구름 송이를 봤다고.맛있는 요리 조리법을 새로 배웠다고.이것저것 사진도 많이 보냈고, 그날 기분도 공유했었다.그때마다 자신은 어떻게 회신했던가?기억을 짜내 봤지만, 없었다.아마 안 했을 거다.구승훈의 시점에서 그것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잡담에 불과했으니까.심지어 이런 쓸데없는 건 보내지 말라고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구승훈은 깊은 주름이 만들어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꾹 집었다.그러다 벌떡 일어서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간 구승훈이 구승재에게 전화했다.“승혁이 쪽은 얼마나 알아
”그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언제든 강 부장님을 영입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정주현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렇다면 저야 고맙죠.”그렇게 몇 술 뜨지도 않은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났다.주해찬이 정주현을 호텔에 데려다준 후, 차 안.“요즘 좀 어때? 구승훈이랑은…….”강하리가 잠시 침묵에 빠졌다.솔직히 구승훈 얘기는 하고싶지 않았다.정작 떠날 때가 되니 왠지 가슴이 답답해났다.좋든 나쁘든, 너무 깊숙히 새겨진 기억들 때문일까.“잘 끝나가는 중이에요. 그나저나 선배.”강하리가 급히 말을 돌렸다.“박 교수님께 일 좀 더 달라고 부탁해 줄래요?”“걱정 마. 내가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둘 테니까.”운전대를 돌리던 주해찬이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사실 나는 네가 통역실에 올인했으면 하거든. 정식 입문이 잘 돼야 일거리도 많아질 거니까. 교수님 곧 퇴직하실 건데, 네가 사업 이어받길 바라고 계셔.”올인하기 싫은 게 아니었다.하지만 구승훈의 지원이 없어지면, 통역실 하나로는 엄마 약값도 모자랐다.송유라와의 소송 비용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심준호가 도와주겠다고 해서 넙적 공짜로 받아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네요. 돈 벌어야 해서요.”주해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내가 도와줄게, 가 입가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오진 못했다.강하리에게 급급히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그녀의 주위에, 그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었다.손연지네 아파트단지 앞에 도착하자 주해찬이 차를 세웠다.“하리야, 통역실 전담 말인데.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란다. 흔한 기회도 아니고, 박 교수님께서 여러 번 꺼낸 얘기기도 해.”강하리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때 마침 손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언제 와? 나 자금 맛있는 거 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와서 먹어. 아참, 과식은 안돼?”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알았어. 곧 도착해.”“맞다, 나
”미안하다.”한 마디가 구승훈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뭐,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송유라가 그렇게 중요하면 걔랑 잘 지내요. 두 사람 다내 주위에 더이상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송유라 얘기에 구승훈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이렇게 나를 혐오했던 건가?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송유라는 왜 여기서 나오고?내가 언제 송유라와 지내겠다고 했나?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강하리의 팔목을 붙잡았다.“또 왜요?”강하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줘. 연락 씹는 일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네 전화는 자다가도 받을께.”“만회할 기회라고 했나요?”강하리가 픽 웃었다.“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게.”“송유라가 나한테 했던 짓들, 그대로 돌려줘요.”“…….”구승훈이 뚝 멈췄다.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겨우 입을 뗐다.“유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 둘 사이.”“아,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팔목을 빼냈다.“그럼 내일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한 마디를 남기고,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참 달래기 힘들다, 강하리.……초인종을 누르자 우다다 달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손연지.“구승훈이 아직 밖에 있어!”살 떨리는 듯한 손연지의 말투에, 강하리는 별 흥미가 없단 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에 들어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밥솥을 열었다.전복죽이었다.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앞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하리야, 괜찮아?”맞은 편에 앉은 손연지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응.”“구승훈이랑 얘기 다 나눴고?”“내일 계약 해지 서류 확인하러 가. 그거 가져오면 우리 둘은 영영 끝인 거고.”“손해배상으로 받는 건 없고?”손연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그냥 끝내면 안 되지! 그
강하리는 창 밖에서 눈길을 떼고 돌아섰다.하지만 물컵을 쥔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다음날, 노을카페.심준호가 미리 와 있었다.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일찍 오셨네요. 잘 부탁드려요.”강하리가 웃으며 다가가 옆에 앉았다.그녀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심준호가 미간을 좁혔다.“정신 상태는 좋은 것 같은데 몸이 많이 말랐네요. 진짜 단식투쟁 한 거예요?”뻘쭘해진 강하리가 고개를 숙였다.“다신 안 그럴게요.”“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만큼 큰 실책은 없는 법이에요.”심준호가 나무라듯 말했다.그 말을 마침 걸어오던 구승훈이 들었다.커피점에 들어설 때부터 구겨져 있던 인상이, 그 소리를 듣자 더 구겨졌다.“우리 심 변호사님은 업무 능력이 줄었나? 요즘 많이 한가해 보이던데.”“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드릴 자신 쯤은 있습니다. 특히나 계약 해지 같은 업무는요.”구승훈의 아픈 데를 골라 야무지게 꼬집는 듯한 말투.구승훈은 욕이 튀어나올 뻔 하다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애써 참았다.강하리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이 자리에 내 편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변호사님, 전에 작성 부탁했던 계약해지 증명서는 어디 있나요? 어서 마무리짓고 싶네요.”“급한 용무 있어?”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았다.“아니. 없는데.”강하리의 담담한 대답.구승훈의 표정이 또 구겨지기 전, 심준호가 웃으며 얼른 증명서를 꺼내들었다.“잘 살펴보시고, 문제 없으면 두분 다 사인해 주세요.”강하리가 대충 한 번 쓸어보고 사인했다.반대로 구승훈은 좀처럼 사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아주 토씨 하나까지 샅샅이 확인하겠다는 듯, 한 자 한 자 느릿느릿 읽어나갔다.강하리는 재촉 대신 구승훈을 내버려 두었다.재촉하면 그걸로 또 태클 걸고 넘어질 게 뻔했으니까.느긋하게
말을 마친 강하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심준호가 구승훈의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는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 쳤다.“정말 잡고 싶으면 주위를 깨끗하게 잘 정돈하고 다시 오든가.”구승훈이 담배 한 대를 꺼내들었다.“네가 가로막지만 않으면 돼.”심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이 싱글로 컴백하면 가로막는 게 나뿐이 아닐 텐데.”그 말을 남기고 심준호도 서류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수박 겉 핥기.지금 구승훈이 하는 짓거리가 딱 그랬다.강하리를 붙잡는 태도부터가 영 글러먹었다.큰 상처를 입은 여인에게, 가지 말라고 우악스럽게 붙잡기만 하는 게 통할 리가.하지만 귀띔해줄 생각은 없었다.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말하든 소 귀에 경 읽기인 것들이 있으니까.……-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구승훈이 받지 않자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액정에 뜬 “송”자를 보며 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뒤,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이번에는 받았다.“응, 유라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이마가 너무 아파요.”구슬프게 지저귀는 듯한 송유라의 목소리.느닷없이 강하리가 생각났다.꿈 속에서마저 아프다고 중얼거리던.자면서까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그리고, 그날 이후로 아프단 소리 한 번 없던.“진통제 먹었어?”욱하고 치미는 뭔가를 가까스로 누르며, 구승훈이 애써 평온한 말투를 지어냈다.“먹었는데 효과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한참동안 말이 없어진 구승훈.던지듯 한 마디를 뱉었다.“의사 선생님을 찾는 게 날 찾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가 사용했던 물컵을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가볍게 문질렀다.“용하다는 의사 찾아 놨으니까 이마에 흉터 안 남을 거야. 걱정 마.”“와서 나랑 같이 있어줘요, 오빠!”구승훈이 희미하게 웃었다.“유라야, 너도 이제 새로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어? 나만 싸고돌지 말고.”“……뭐, 뭘 새로 시작해요?”핸드폰 너머 송유라가
”하리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싫어하는 건?”심준호가 물었다.“단 거 제일 좋아히긴 하는데, 견과류 알러지 있어서 그 쪽으로는 못 먹는 거 빼고 다 잘 먹어요.”심준호가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우리 어머니인 줄. 언어 천재에다가 단 것 마니아, 견과류 알러지까지 꼭 닮았네요.언제 한 번 어머니한테 하리 씨 소개시켜 줘야겠네.”“백 장관님 말씀인가요?”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밖에서나 백 장관님이지 집에서는 그냥 남편바라기 응석쟁이 아줌마예요.”엄마 흉 보는 심준호의 눈이 행복으로 빛났다.그게 강하리는 새삼 부러웠다.가족애란 건 어려서부터 사치였으니까.“다 좋아질 거예요. 하리 씨도. 모두가.”심준호가 강하리의 기분을 캐치한 듯 따뜻하게 말해주었다.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맛집을 찾아, 밥을 먹으면서 송유라 소송건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충분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야 할 거예요. 송유라의 유명세로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될 거고, 하리 씨가 유산했단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가급적 파급을 줄이는 쪽으로 제가 노력해 볼게요.”“잘 알겠습니다. 고마워요.”자신의 유산 사실이 알려지는 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언제든지 여론에 밝혀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는 심준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강하리를 바라보는 심준호의 마음이 일렁였다.정말이지, 너무 닮았다. 자신의 누나와.생김새나 표정, 몸짓 하나하나까지.“하리 씨, 부탁이 있는데.”뭔가에 홀린 듯 심준호가 입을 열었다.“언제 한 번 하리 씨 어머님을 뵐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기꺼이 허락했다.그동안 도와준 게 있는데, 그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이틀 동안 푹 휴식한 강하리가 회사에 나갔다.“부장님! 이직하신다던데 사실이에요?”가장 먼저 마주친 건,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의 안예서였다.안예서의 입을 통해 강하리는, 자신의 이직 소식이 회사에 쫙 퍼졌단
고의적인 의도가 다분한 정주현의 말투.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주현을 마주 향해 섰다.“주현 도련님께서 우리 강 부장과 이렇게 친했었나? 남 여자 눈독 들이지 말라던 경고는 귓등으로 들은 거고?”강하리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찰나.“남의 여자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에비뉴가 아닌, 우리 ‘대양 그룹’의 미모의 싱. 글, 강 부장님을 불렀을 뿐인데.”햇살처럼 환한 얼굴로 정주현이 또박또박 반박했다.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너님 여자가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 듯, 대양 그룹과 싱글에 특별히 더 악센트를 넣으면서.강하리가 입술을 짓씹었다.얼굴에 찬 서리가 쫙 깔린 구승훈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대양 그룹과 계약하려던 거였어?”차가운 음성이 잇새로 새어나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차가운 눈길을 마주 보았다.“제시한 조건이 꽤 좋아서요. 저 돈 필요한 거 아시잖아요. 안 갈 이유가 없죠.”“주현 도련님께서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구승훈의 눈길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누가 에비뉴에서 강 부장의 이직을 허락한다 그랬지?”“지금 말씀 번복하시겠다는 건가요?”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의 입가가 느슨하게 위로 휘어졌다.“번복이라니. 내가 언제 승낙을 했다고.”“하지만 이직 신청은-.”“부장직 이상 이직은 대표이사 심의 절차가 있단 걸 잊은 모양이군.”그러고는 정주현을 돌아보았다.“아니면, 주현 도련님께서 위약금을 대신 물어주겠다는 건가?”“이게 에비뉴에서 사람 붙잡아 두는 방식인가요? 참 저질이네요.”정주현이 쯧, 혀를 찼다.“까짓 거, 대양이 물어줍니다. 저희 대양 그룹은 그 정도로 쪼잔하진 않아서요.”그러고는 구승훈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구승훈의 눈에서 분노의 불씨가 튀어올랐다.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저기, 두 분 먼저 들어가 보세요.”구승재가 급급히 두 사람 사이에 막아섰다.강하리는 정주현을 잡아끌어 밖으로 향했다.저만치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