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한 마디가 구승훈의 입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뭐, 됐어요. 다 지나간 일인걸요. 송유라가 그렇게 중요하면 걔랑 잘 지내요. 두 사람 다내 주위에 더이상 보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송유라 얘기에 구승훈의 얼굴이 다시 구겨졌다.이렇게 나를 혐오했던 건가?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송유라는 왜 여기서 나오고?내가 언제 송유라와 지내겠다고 했나?돌아서서 갈 길을 가려고 하는 강하리의 팔목을 붙잡았다.“또 왜요?”강하리가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조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줘. 연락 씹는 일 같은 거,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네 전화는 자다가도 받을께.”“만회할 기회라고 했나요?”강하리가 픽 웃었다.“뭐든 말만 해. 다 들어줄게.”“송유라가 나한테 했던 짓들, 그대로 돌려줘요.”“…….”구승훈이 뚝 멈췄다.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구승훈이 겨우 입을 뗐다.“유라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우리 둘 사이.”“아, 그래요?”강하리가 냉소를 지으며 팔목을 빼냈다.“그럼 내일 계약 해지 깔끔하게 끝내는 걸로 해요.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죠?”한 마디를 남기고, 강하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 버렸다.구승훈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참 달래기 힘들다, 강하리.……초인종을 누르자 우다다 달려나오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손연지.“구승훈이 아직 밖에 있어!”살 떨리는 듯한 손연지의 말투에, 강하리는 별 흥미가 없단 듯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주방에 들어가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오는 밥솥을 열었다.전복죽이었다.강하리는 죽 한 그릇을 떠서 식탁 앞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하리야, 괜찮아?”맞은 편에 앉은 손연지가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응.”“구승훈이랑 얘기 다 나눴고?”“내일 계약 해지 서류 확인하러 가. 그거 가져오면 우리 둘은 영영 끝인 거고.”“손해배상으로 받는 건 없고?”손연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그냥 끝내면 안 되지! 그
강하리는 창 밖에서 눈길을 떼고 돌아섰다.하지만 물컵을 쥔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다음날, 노을카페.심준호가 미리 와 있었다.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일찍 오셨네요. 잘 부탁드려요.”강하리가 웃으며 다가가 옆에 앉았다.그녀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심준호가 미간을 좁혔다.“정신 상태는 좋은 것 같은데 몸이 많이 말랐네요. 진짜 단식투쟁 한 거예요?”뻘쭘해진 강하리가 고개를 숙였다.“다신 안 그럴게요.”“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것만큼 큰 실책은 없는 법이에요.”심준호가 나무라듯 말했다.그 말을 마침 걸어오던 구승훈이 들었다.커피점에 들어설 때부터 구겨져 있던 인상이, 그 소리를 듣자 더 구겨졌다.“우리 심 변호사님은 업무 능력이 줄었나? 요즘 많이 한가해 보이던데.”“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해결해 드릴 자신 쯤은 있습니다. 특히나 계약 해지 같은 업무는요.”구승훈의 아픈 데를 골라 야무지게 꼬집는 듯한 말투.구승훈은 욕이 튀어나올 뻔 하다가, 강하리를 힐끗 보고는 애써 참았다.강하리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이 자리에 내 편은 없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변호사님, 전에 작성 부탁했던 계약해지 증명서는 어디 있나요? 어서 마무리짓고 싶네요.”“급한 용무 있어?”구승훈이 강하리를 노려보았다.“아니. 없는데.”강하리의 담담한 대답.구승훈의 표정이 또 구겨지기 전, 심준호가 웃으며 얼른 증명서를 꺼내들었다.“잘 살펴보시고, 문제 없으면 두분 다 사인해 주세요.”강하리가 대충 한 번 쓸어보고 사인했다.반대로 구승훈은 좀처럼 사인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아주 토씨 하나까지 샅샅이 확인하겠다는 듯, 한 자 한 자 느릿느릿 읽어나갔다.강하리는 재촉 대신 구승훈을 내버려 두었다.재촉하면 그걸로 또 태클 걸고 넘어질 게 뻔했으니까.느긋하게
말을 마친 강하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심준호가 구승훈의 휴대폰을 힐끗 바라보고는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 쳤다.“정말 잡고 싶으면 주위를 깨끗하게 잘 정돈하고 다시 오든가.”구승훈이 담배 한 대를 꺼내들었다.“네가 가로막지만 않으면 돼.”심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강 부장이 싱글로 컴백하면 가로막는 게 나뿐이 아닐 텐데.”그 말을 남기고 심준호도 서류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수박 겉 핥기.지금 구승훈이 하는 짓거리가 딱 그랬다.강하리를 붙잡는 태도부터가 영 글러먹었다.큰 상처를 입은 여인에게, 가지 말라고 우악스럽게 붙잡기만 하는 게 통할 리가.하지만 귀띔해줄 생각은 없었다.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말하든 소 귀에 경 읽기인 것들이 있으니까.……-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구승훈이 받지 않자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액정에 뜬 “송”자를 보며 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뒤,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이번에는 받았다.“응, 유라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이마가 너무 아파요.”구슬프게 지저귀는 듯한 송유라의 목소리.느닷없이 강하리가 생각났다.꿈 속에서마저 아프다고 중얼거리던.자면서까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그리고, 그날 이후로 아프단 소리 한 번 없던.“진통제 먹었어?”욱하고 치미는 뭔가를 가까스로 누르며, 구승훈이 애써 평온한 말투를 지어냈다.“먹었는데 효과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한참동안 말이 없어진 구승훈.던지듯 한 마디를 뱉었다.“의사 선생님을 찾는 게 날 찾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구승훈은 강하리가 사용했던 물컵을 집어들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가볍게 문질렀다.“용하다는 의사 찾아 놨으니까 이마에 흉터 안 남을 거야. 걱정 마.”“와서 나랑 같이 있어줘요, 오빠!”구승훈이 희미하게 웃었다.“유라야, 너도 이제 새로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어? 나만 싸고돌지 말고.”“……뭐, 뭘 새로 시작해요?”핸드폰 너머 송유라가
”하리 씨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싫어하는 건?”심준호가 물었다.“단 거 제일 좋아히긴 하는데, 견과류 알러지 있어서 그 쪽으로는 못 먹는 거 빼고 다 잘 먹어요.”심준호가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우리 어머니인 줄. 언어 천재에다가 단 것 마니아, 견과류 알러지까지 꼭 닮았네요.언제 한 번 어머니한테 하리 씨 소개시켜 줘야겠네.”“백 장관님 말씀인가요?”강하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밖에서나 백 장관님이지 집에서는 그냥 남편바라기 응석쟁이 아줌마예요.”엄마 흉 보는 심준호의 눈이 행복으로 빛났다.그게 강하리는 새삼 부러웠다.가족애란 건 어려서부터 사치였으니까.“다 좋아질 거예요. 하리 씨도. 모두가.”심준호가 강하리의 기분을 캐치한 듯 따뜻하게 말해주었다.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맛집을 찾아, 밥을 먹으면서 송유라 소송건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충분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야 할 거예요. 송유라의 유명세로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될 거고, 하리 씨가 유산했단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가급적 파급을 줄이는 쪽으로 제가 노력해 볼게요.”“잘 알겠습니다. 고마워요.”자신의 유산 사실이 알려지는 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언제든지 여론에 밝혀질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하지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는 심준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강하리를 바라보는 심준호의 마음이 일렁였다.정말이지, 너무 닮았다. 자신의 누나와.생김새나 표정, 몸짓 하나하나까지.“하리 씨, 부탁이 있는데.”뭔가에 홀린 듯 심준호가 입을 열었다.“언제 한 번 하리 씨 어머님을 뵐 수 있을까요?”강하리는 기꺼이 허락했다.그동안 도와준 게 있는데, 그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이틀 동안 푹 휴식한 강하리가 회사에 나갔다.“부장님! 이직하신다던데 사실이에요?”가장 먼저 마주친 건,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의 안예서였다.안예서의 입을 통해 강하리는, 자신의 이직 소식이 회사에 쫙 퍼졌단
고의적인 의도가 다분한 정주현의 말투.구승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정주현을 마주 향해 섰다.“주현 도련님께서 우리 강 부장과 이렇게 친했었나? 남 여자 눈독 들이지 말라던 경고는 귓등으로 들은 거고?”강하리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찰나.“남의 여자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에비뉴가 아닌, 우리 ‘대양 그룹’의 미모의 싱. 글, 강 부장님을 불렀을 뿐인데.”햇살처럼 환한 얼굴로 정주현이 또박또박 반박했다.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너님 여자가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 듯, 대양 그룹과 싱글에 특별히 더 악센트를 넣으면서.강하리가 입술을 짓씹었다.얼굴에 찬 서리가 쫙 깔린 구승훈이 강하리를 돌아보았다.“대양 그룹과 계약하려던 거였어?”차가운 음성이 잇새로 새어나왔다.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구승훈의 차가운 눈길을 마주 보았다.“제시한 조건이 꽤 좋아서요. 저 돈 필요한 거 아시잖아요. 안 갈 이유가 없죠.”“주현 도련님께서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구승훈의 눈길이 점점 더 서늘해졌다.“누가 에비뉴에서 강 부장의 이직을 허락한다 그랬지?”“지금 말씀 번복하시겠다는 건가요?”강하리가 구승훈을 노려보았다.구승훈의 입가가 느슨하게 위로 휘어졌다.“번복이라니. 내가 언제 승낙을 했다고.”“하지만 이직 신청은-.”“부장직 이상 이직은 대표이사 심의 절차가 있단 걸 잊은 모양이군.”그러고는 정주현을 돌아보았다.“아니면, 주현 도련님께서 위약금을 대신 물어주겠다는 건가?”“이게 에비뉴에서 사람 붙잡아 두는 방식인가요? 참 저질이네요.”정주현이 쯧, 혀를 찼다.“까짓 거, 대양이 물어줍니다. 저희 대양 그룹은 그 정도로 쪼잔하진 않아서요.”그러고는 구승훈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구승훈의 눈에서 분노의 불씨가 튀어올랐다.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저기, 두 분 먼저 들어가 보세요.”구승재가 급급히 두 사람 사이에 막아섰다.강하리는 정주현을 잡아끌어 밖으로 향했다.저만치 걸어
강하리: …….……약속 장소인 어느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강하리를 정주현이 붙잡았다.“뒤에 구승훈. 이따가 내려서 내 팔짱 껴요.”소근거리는 정주현의 말에 강하리가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뒤에 구승훈의 차가 따라붙어 있었다.“송유라 스토리 보니까 여기 있던데, 구승훈과 여기서 데이트하려나 봐요. 우리가 질 수는 없죠.”차 문을 열어주며 정주현이 강하리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강하리는 그런 연출은 필요없다고 말하려다가, 결국은 차에서 내려 정주현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그게 구승훈의 눈에 똑똑히 보였고.서리가 내린 듯하던 얼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앞 자리 구승재가 팔짱 낀 두 사람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형 앞에서 대놓고 팔짱을?형을 이렇게 도발하는 건 아마 정주현 뿐일 거다.슬쩍 구승훈을 돌아보니, 차갑게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이렇게 또 보네요. 구 대표님.”정주현의 말은 무시한 채, 구승훈이 저벅저벅 두 사람을 지나쳐갔다.구승재가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구승훈을 따라갔다.“오빠!”레스토랑에서 나온 송유라가 구승훈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나무라듯, 응석 부리듯 구승훈에게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강하리와 정주현을 보았다.눈길이 두 사람이 낀 팔짱에 멈춘 송유라가 픽 웃었다.“어머, 강 부장님.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쾌차하셨나 보네요. 남자랑 데이트를 즐기시는 걸 보니.”구승훈이 그 말에 미간을 확 구겼다.팔짱을 낀 강하리의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걸 감지한 정주현이 웃으면서 송유라를 마주 보았다.“많이 부러우신가 봐요? 하긴, 남자 뒤꽁무니나 쫓는 입장에선 강 부장님이 부러울 만도 하겠네요.”티 한 줌 없는 해맑은 얼굴로 거침없이 독설을 뿜어내는 정주현.하지만 강하리도 만만치 않았다.얼굴이 마구 구겨졌다가, 곧 평정심을 되찾고 활짝 웃었다.“강 부장님께 미안해서 그래요. 나 때문에 승훈 오빠한테 버려지고 여러 일도
구승재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송유라.폭발 직전의 얼굴인 구승훈.X발,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되냐.아까 그들 셋을 지나치는 강하리를 슬쩍 눈여겨 봤었다.너무나도 담담한 표정이었다.구승훈이 송유라와 데이트를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사실 그게 정확하게 지금 강하리의 심정이었다.강하리와 함께일 때부터 송유라를 끼고 다니던 구승훈인데.강하리가 물러나 준 지금은 정도가 더 심해지겠지.레스토랑이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 앞에서 마주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한편, 구승훈은 이를 꽉 악물고 있었다.어찌나 힘을 줬던지 아랫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그러지 않으면 분노의 불길이 뿜겨저 나와 온 몸을 뒤덮을 것만 같아서.당장 이성을 잃고 광란에 빠져들 것 같아서.자신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도 몰랐다.냉정함이란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자신의 모습.고작 계약으로 이어진 여자 하나 때문에.호주머니 속으로 꽉 쥔 주먹에도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아랫입술을 꽉 말아 올렸다.참아내야 했다. 눌러야 했다.여자 하나 때문에 미쳐 날뛰는 꼴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면.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허파가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가까스로 정신줄을 붙잡았다.그리고 후- 길게 내 뱉었다.“오, 오빠. 내가 뭐 잘못 말한 건 아니지? 난 그냥-.”“잘못 말했는지 아닌지는 네 스스로가 더 잘 알 텐데.”송유라의 말을 단 칼에 잘랐다.“아니 나는, 강 부장님이 화내실까 봐…….”송유라가 한 마디 더 하려다가, 구승훈의 눈길과 마주치자 다시 얼어붙었다.그건 성난 야수의 눈길이었다.“화는 충분히 냈을 거니까, 앞으로 저 여자 앞에 나타나지 마.”감정 없는 구승훈의 목소리에 송유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아, 알았어, 오빠.”하지만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한 순간이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꼈으니까.“들어가자. 의사선생님 기다리고 계셔.”뒤도 안 돌아보고 저벅저벅 레스
잘 된 거다.구승훈이 영원히 못 봐야 한다. 강하리가 완전히 마음을 돌릴 때까지.다른 한 당사자, 강하리는 더이상 구승훈 얘기는 하기 싫어진 모양이었다. 대신 연성 지사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두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룸 앞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심준호.다른 한 풍채 좋은 어르신을 강하리는 대양그룹 소개 자료에서 본 적이 있었다.대양그룹 회장, 정주현의 아버지, 정양철.강하리를 보는 순간, 정양철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색다른 감정이 눈가에 스쳐 지나갔다.“아버지. 강 부장님 모셔왔어요. 예쁘죠?”정주현이 씩 웃으며 불렀다.정양철의 위엄 섞인 눈길이 강하리를 향했다. 한참 뒤, 모든 걸 꿰뚫어볼 듯한 눈길을 거두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능력 뛰어난 건 진작에 알았디민, 미모 또한 뒤처지지 않는군.” 정주현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안색도 전보다 많이 좋아보이네요.”심준호가 한 마디 거들었다.“기분이 좋아지니까 컨디션도 저절로 좋아지나 봐요.”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심준호의 눈길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둘이 아는 사이었나?”정양철이 심준호를 돌아보았다.“요즘 강하리 씨 사안 하나를 맡았거든요.”심준호가 짧게 대답했다.정 회장이라면 아마 눈치 챘을 거다.강하리, 그리고 행방불명된 심준호의 누나, 심미현.하지만 모든 게 불명확한 지금은 말을 아끼는 게 상책.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몇 마디 더 나눈 후, 심준호가 먼저 자리를 뜨려고 했다.찰나, 저만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구승훈을 보았다.티 안 나게 고개를 돌려 강하리에게 물었다.“하리 씨는, 주현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좋은 분이시죠. 저 많이 도와주시고.”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강하리가 무심결에 대답하자, 심준호의 입가게 은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두 사람 친해져 봐요.”그 말들이 고스란히, 구승재 송유라와 함께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