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된 거다.구승훈이 영원히 못 봐야 한다. 강하리가 완전히 마음을 돌릴 때까지.다른 한 당사자, 강하리는 더이상 구승훈 얘기는 하기 싫어진 모양이었다. 대신 연성 지사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두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룸 앞에 도착했다.두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심준호.다른 한 풍채 좋은 어르신을 강하리는 대양그룹 소개 자료에서 본 적이 있었다.대양그룹 회장, 정주현의 아버지, 정양철.강하리를 보는 순간, 정양철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색다른 감정이 눈가에 스쳐 지나갔다.“아버지. 강 부장님 모셔왔어요. 예쁘죠?”정주현이 씩 웃으며 불렀다.정양철의 위엄 섞인 눈길이 강하리를 향했다. 한참 뒤, 모든 걸 꿰뚫어볼 듯한 눈길을 거두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능력 뛰어난 건 진작에 알았디민, 미모 또한 뒤처지지 않는군.” 정주현이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었다.“안색도 전보다 많이 좋아보이네요.”심준호가 한 마디 거들었다.“기분이 좋아지니까 컨디션도 저절로 좋아지나 봐요.”강하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심준호의 눈길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둘이 아는 사이었나?”정양철이 심준호를 돌아보았다.“요즘 강하리 씨 사안 하나를 맡았거든요.”심준호가 짧게 대답했다.정 회장이라면 아마 눈치 챘을 거다.강하리, 그리고 행방불명된 심준호의 누나, 심미현.하지만 모든 게 불명확한 지금은 말을 아끼는 게 상책.정양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묻지 않았다.몇 마디 더 나눈 후, 심준호가 먼저 자리를 뜨려고 했다.찰나, 저만치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구승훈을 보았다.티 안 나게 고개를 돌려 강하리에게 물었다.“하리 씨는, 주현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좋은 분이시죠. 저 많이 도와주시고.”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강하리가 무심결에 대답하자, 심준호의 입가게 은근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두 사람 친해져 봐요.”그 말들이 고스란히, 구승재 송유라와 함께
”그러지요.”정양철의 대답에, 이 불편한 식사 자리가 성사되었다.일동의 표정들이 가관이었다.강하리는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무슨 심보로 저러는 거지?혹시 이직에 훼방 놓으려고?송유라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성형외과 의사선생님을 만나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인 건지.“오빠, 우리 다른 일 땜에 온 거잖아요.”초조하게 귀띔해 줬지만.“승재 네가 유라랑 의사 만나러 가.”무슨 짐짝 던지듯, 자신을 구승재에게 던져버리는 구승훈.“갑시다, 유라 씨.”야속하게도 구승재는 그걸 냉큼 받아들인다.“오빠! 나랑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송유라가 참다 못해 빼액 소리지르자 정주현이 피식 웃었다.“구 대표님, 약속 까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구승훈이 서늘한 눈길로 송유라를 돌아보았다.“전에 내가 했던 말, 잊었어?”그토록 매정한 말을 잊을 수 있을 리가.귀국한 이후로 매번 그녀가 필요할 때 와 준 구승훈이었지만.사실 너무 가깝게 지내진 않았었다.먼저 송유라에게 연락한 적이 도통 없었으니까.더군다나 그날 그 통화 이후로는 아예 대놓고 그녀를 멀찍이 밀어내고 있다.둘 사이에 그어진 선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그게 송유라는 원통하고 분하기 그지없었다.하지만.“그럼, 이따가 저 집에 데려다 주면 안 돼요?”한발 물러서는 수밖에 없다. 지금껏 가까워진 거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난동을 피워도 눈썹 한 번 까딱이지 않을 구승훈이란 걸 잘 알기에.구승훈은 대답 대신 강하리를 쳐다보았다.강하리가 그 눈길을 피했다.아니, 다투려면 둘이 조용히 다투든가. 보긴 뭘 봐.강하리가 나몰라라 하자, 구승훈은 또 짜증이 솟구쳤다.젠장, 역시나 거들떠보지도 않는군.“끝나면 그때 가서 보자.”승낙도 거절도 아닌 두루뭉술한 대답을 남기고, 구승훈이 정양철 일동과 함께 룸에 들어가 버렸다.쾅 닫히는 문.순간, 송유라의 얼굴에서 상심한 기색이 감쪽같이 사라졌다.차가운 얼굴로 송유라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기껏 갈라 놨더니 여
들키면 또 어때.구승훈이 어쩌지도 못할 건데.강하리의 사이버 폭격 사건과 유산 사건의 진상을 구승훈이 모를 리 없다.그런데도 자신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거기까지 생각한 송유라는 한 시름 놓았다.……룸 안.정주현이 아니꼬운 눈길로 구승훈을 바라보고 있었다.상석에 앉으라고 정양철이 손짓하는 구승훈을.하지만 구승훈은 보란 듯이 강하리의 곁에 다가가, 옆 자리에 털썩 앉았다.“정 회장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인데 당연히 회장님이 상석에 앉으셔야죠.”표정이 급 어두워지는 강하리.그녀의 다른 한 쪽 자리를 정주현이 질세라 차지했다.그 미묘한 구도를 본 정양철은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별 다른 말은 없었다.식사가 시작되었고, 정양철이 구승훈에게 구씨 가문 어르신의 근황을 물었다.그 사이에 낀 강하리는 뻘쭘해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먹고싶은 거 있으면 더 시켜요.”갑자기 정주현이 강하리의 귓가에 소근거렸다.“저 음식 안 가린다고 했죠.”웃으며 대답하는 강하리.낮은 목소리로 소근거리다 보니, 둘의 거리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거의 맞닿다시피 한 두 사람의 머리가 구승훈의 시야에 들어왔고, 구승훈의 눈빛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했다.탁!구승훈의 손에 들고있던 컵을 상에 내려놓았다.“우리 강 부장이 곧 대양과 계약한다고 들었습니다.”“연성 지사에서 영입할 예정이라더군요.”정양철이 대답했다.“정 회장님은 우리 에비뉴의 직원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그만큼 인재를 아끼시니까요. 막 다루는 누구랑은 다르게.”정주현의 깐족임에 구승훈의 눈메가 무섭게 가늘어졌다.“축하드립니다.”“별 말씀을요.”구승훈과 정주현의 술잔이 허공에서 매섭게 부딪쳤다.그 사이에 끼어있는 강하리는 당장 투명인간으로 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졍양철의 눈길이 그런 강하리에게 멈추더니 술잔을 들었다.“하리 씨, 대양 연성 지사 잘 부탁드립니다.”강하리가 웃으며 자신의 술잔을 드는 순간, 커다란 손 하나가 술잔을 채갔다.“지 몸 상태를 몰라서 술까지 마시려는 거야
강하리가 순간 뚝 멈췄다.작정하고 밉보이겠단 듯 비아냥으로 찬 저 말투.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휴지로 손을 깨끗이 닦은 뒤, 구승훈을 돌아보았다.“구 대표님 눈에는 내가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다른 가치도 보이거든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구승훈의 눈썹이 꿈틀했다.유유히 곁을 스쳐 지나려는 강하리의 손을 콱 잡았다.“대양이 네 실무능력만 보고 위약금까지 물어줄 호구로 보여?”“그러는 구 대표님은 내가 어떻게 대해도 안 도망갈 호구로 보이세요?”강하리가 구승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도대체 어쩌자는 건지.안 좋아한다면서 이제 와서 질척거리기나 하고.“그런 뜻이 아니잖아.”“아, 그래요? 송유라랑 붙어 다니더니 그새 옮으셨나 봐요? 오해 사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요.”“야! 강하리!”구승훈이 저도 모르게 꽥 소리질렀다.“정주현 그 새X가 나보다 나은 게 뭔데.”“나를 사람으로서 존중해 주는 거요. 부속물이 아니라.”“…….”구승훈이 할 말을 잃었다.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강하리를 향한 집착에 ‘존중’이란 태그는 없었으니까.그저 새장 속 카나리아 같은 존재로 여겼을 뿐.“아, 그리고.”강하리가 환하게 웃었다.“대양과는 협력 관계에 그칠 수 있었는데, 대표님 덕분에 이렇게 몸까지 팔려가는 신세가 됐네요. 고마워서 어쩌죠.”얼굴에 만개한 웃음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냉랭한 음성.얼어붙은 구승훈을 뒤로 한 채, 강하리가 멀어져갔다.구승훈은 한참을 꼼짝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전에 만났을 때까지 들먹였던 위약금.그건 단지 강하리를 잡아두기 위해 꺼낸 핑곗거리일 뿐이었다.그게 강하리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갈지는 관심 밖이었다.대양에서 그걸 물어주면 강하리는 대양에 뼈를 묻어야 할 터.그야말로 강하리를 꽁꽁 묶어 정주현의 품에 안겨준 셈.도끼로 제 발등 찍은 격이었다.한편으론 그걸 감수할지언정 자신 곁을 떠나겠다는 강하리가 야속하기만
구승훈이 집어준 요리가 앞접시에 수북이 쌓였다.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강하리는 꾹 참았다.정양철 회장 앞에서 구승훈을 깔 수 없었으니까.이쪽을 향한 정양철의 시선이 자신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이쯤하면 대양으로의 이적도 물 건너간 것 같았다.구승훈과 얽힌 여자를 대양에서 들이려고 할 턱이 없었으니.그런데 의외로, 한참 뒤 정양철 회장이 대양과의 계약 얘기를 꺼냈다. 구승훈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정 회장님은 아들을 극진히도 아끼시네요.”“허허, 우리 아들내미 잘 좀 부탁드립니다.”구승훈의 말 속에 숨겨진 뼈를 모른 척, 정양철이 사람 좋게 웃었다.여러모로 불편한 식사가 그렇게 끝났고, 일동이 룸에서 나왔다.정양철이 정주현에게 강하리를 데려다 주라고 지시했다.구승훈이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자진해 나섰지만.“아닙니다. 대표님은 유라 씨를 데려다 줘야 하니까요.”강하리가 딱 잘라버렸다.마침 송유라가 복도 저 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걸 본 구승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강하리는 정주현과 함께 멀어져갔다.“주현 도련님은 남이 버린 장난감을 잘도 주우시네요.”송유라와 마주치자, 셋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송유라가 중얼거렸다.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춰섰고, 정주현이 픽 웃었다.“누가 누굴 버린 건지 잘 모르시네요. 장난감 구도에도 들어보지 못하셔서 그런가.”말빨로 밀릴 정주현이 아니었다. 송유라의 얼굴이 하얘졌다 새파래졌다를 반복했다.“……아무 여자나 들였다가 뒤통수 맞으실까 봐 귀띔해드리는 것 뿐이에요.”“그래서 기피하는 부류가 있죠. 예를 들면 송유라 씨 같은.”겨우 한 마디 뱉은 송유라를 또 가뿐히 눌러버린 정주현.“다신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그쪽 이마에 흉터, 좀 많이 징그러워서요.”결정타를 날리고는 강하리를 에스코트하며 유유히 걸어나갔다.남겨진 송유라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 자리에 굳어있다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어찌나 화가 났던지, 잇몸이 다 간질거렸다.태어나
어떤 새X면 어때서.정주현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그래도 구승훈보단 안전할 것 같았다.그리고 뭐, 쫄래쫄래 따라가?택시 잡아 집에 갈 거었거든?강하리는 제멋대로 넘겨짚는 구승훈 때문에 화가 났지만, 해명조차 귀찮았다.“주현 씨가 흑심 품고 있단 거 말하고 싶은 거였어요?”“알면서 따라가는 거야?”구승훈이 으르렁대듯 물었다.강하리가 고개를 들어 그와 마주 보았다.“흑심이라면 구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신 것 같은데요.”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강하리를 잡아끌고 엘리베이터를 나왔다.강하리는 안깐힘을 썼지만, 구승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강 부장?”구승훈이 차에 욱여넣다시피 강하리를 태우자, 운전석에 앉아있던 구승재가 놀란다.그제야 강하리가 저항을 멈췄다.구승재 앞에선 구승훈이 조금은 얌전해질 거니까.“형, 강 부장, 어디로 갈까요?”“아파트.”“로터스가든이요.”강하리가 대답한 곳은 손연지의 집 주소, 구승훈의 대답은 전에 둘이 같이 살던 그 아파트.엇갈리는 두 사람의 대답에 구승재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별 다른 말 없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도중에 정주현의 전화가 걸려왔다.강하리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바로 받았다.“하리 씨, 구 대표가 데려갔어요?”옆에서 똑똑히 들은 구승훈의 얼굴이 차가워졌다.저 새끼가.“강 부장님”에서 “하리 씨”로 바뀐 호칭이 그렇게 귀에 거슬릴 수가 없다.“네. 별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알겠어요. 집에 도착하는 대로 연락 줘요.”“네.”“정 걱정되면 운전해 쫓아오든가.”빈정대듯 끼어든 구승훈의 한 마디.정주현이 술을 마신 걸 뻔히 알면서 하는 소리다.강하리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춰섰고, 강하리가 흠칫했다.아파트 주차장.“난 일이 있어서 이만.”주차를 마친 구승재는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차 문을 열려는 강하리의 손목을 낚아챈 구승훈이
구승훈이 미간을 찌푸린 채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인정도 부정도 없었다.사실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강하리한테 남은 미련이 도대체 뭔지.“내가 어떻게 하면 속이 풀리시겠어요? 깨끗이 놔 주고, 다신 내 주위에 나타나지 않으시겠냐고요. 그럴 수만 있다면, 시키시는 건 다 할게요.”강하리의 팔목을 잡은 구승훈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너한테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인 거야?”묵직하고 차거운 음성이 구승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심술 난 거? 맞아. 왜? 네가 중도에서 계약 해지하려고 했으니까.““…….”“내가 네 몸이 망가지든 말든 신경도 안 썼더라면, 계약 해지가 그렇게 순조로울 수 있었을 것 같아?”겁이 났었다. 강하리가 잘못될까 봐.그래서 마음이 약해졌었다. 놔 주기로 했다.그래준 내 마음도 모르고.양심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강하리가 할 말을 잃었다.사실 계약 해지는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자신을 향한 구승훈의 최소한의 배려에 올인한 도박.하지만 그 배려는, 송유라의 만행을 커버하기엔 택도 없이 부족했다.“강하리, 그만 하고 우리 화해하자. 응?”강하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이쪽을 보지도 않는다.구승훈의 미간이 좁혀졌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아 얼굴을 이쪽으로 돌렸다.그리고 보았다. 강하리의 눈 속에 꽉 차 있는 고통을.구승훈은 가슴 한 켠이 찔린 듯 아파왔다.정주현과 있을 때는 웃음이 떠나질 않던 그녀가, 그와 마주하니 고통스러워한다.하지만 이대로 놔 주고 싶지는 않았다.강하리를 끌어당겨, 품 속에 안았다.강하리의 어깨에 코를 박고 탐욕스럽게 숨을 들이마셨다.여인의 향기가 술기운에 무뎌졌던 말초신경을 짜릿하게 자극한다.너무나도 그리웠던 체향.구승훈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걷잡을 수 없이 욕정이 치솟는다. 더불어 소유욕도.“대양과 계약하지 마.”“다른 회사도 안돼.”“계약하는 회사마다 작살내 버릴 거다.”술냄새가 섞인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우악스런 말을 뱉어내는 구
강하리는 가슴이 아려왔다.그걸 꾹 참고, 고개를 들어 꼿꼿하게 구승훈을 노려보았다.“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구승훈의 눈동자에 강하리의 모습이 비쳤다.일말의 감정의 일렁임이라도 캐치하고 싶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실망과 결연함만 그득 차 있을 뿐.“문 열어주시죠.”남자의 손가락이 강하리의 입술에 다가갔다. 강하리가 목을 틀어 피했다.허공에 손가락이 그대로 멈춰선 구승훈.한참 지나서야 헛웃음을 터트렸다.“마음고생 참 많았겠네, 강 부장. 일말의 감정도 없으면서 나와 3년을 잤으니.”“다 대표님이 잘 가르친 덕이죠.”강하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한 번 뿐이 아니었다. 그저 거래일 뿐이라고, 감정 따윈 섞지 않겠다고 구승훈이 일러준 게.그러고는 말로, 행동으로 그걸 지켜왔었다.홀대와 버림 속에서 강하리가 구승훈을 향한 감정은 조금씩 깎여갔고.마음이 점차 식어갔다.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더이상 좋아할 엄두가 안 날 만큼 말이다.강하리의 말이 구승훈의 심기를 건드렸다. 몹시 불편했다.얌전하고 말 잘 듣던 강하리는 어디 가고.온 몸에 가시를 꼿꼿이 세운 고슴도치 한 마리가 곁에서 캬르릉대고 있다.싫었다. 짜증이 났다.“꼬박꼬박 대드는 꼬라지 하고는.”“대표님과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말 시키시니까요. 우린 끝났다고요. 끝났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끝나면 다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 고분고분 내 곁에 돌아올 수밖에 없어.”강하리는 목이 꺽 막혔다. 고개를 푹 숙였다.저건 부인할 수가 없다.강력한 수단과 권세 앞에서 그녀는 그저 개미 같은 존재일 뿐.구승훈이 작정하고 앞길을 막는다면 그녀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몸부리칠 거다.그녀도, 그녀 주위 사람들도, 지옥을 맛보게 될 거다.강하리가 고개를 쳐들었다.눈가가 벌개진 채, 구승훈을 꼿꼿하게 노려보았다.“차라리 날 죽여요.”구승훈이 움찔했다.그 말에서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서였다.단식으로 저항하던 그 결연함이
준봉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대표님께서 마실 것 가져다드리래요.”말을 마친 준봉은 강하리에게 밀크티 한 잔을 건넸고 강하리는 눈앞에 놓인 밀크티를 보고 화를 내며 다시 한번 문을 닫았다.주해찬은 방에 앉아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안 가면 조금 있다가 또 올걸.”주해찬은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오늘 밤 모임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해요, 선배.”구승훈이 이러면 주해찬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난처했다.주해찬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문득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던 모습이 떠올라 결국 포기했다.준봉은 강하리의 방에서 나오는 주해찬을 바라보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문을 두드리러 갈 때 또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주해찬이 나오며 준봉을 보고 웃었다.“구 대표님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전해요. 하리가 원하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고 하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절대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요.”준봉은 주해찬을 바라보기만 했다.“안녕히 가세요, 주해찬 씨.”주해찬은 강하리를 힐끗 쳐다보며 작별 인사를 속삭인 뒤 곧장 돌아섰다.주해찬이 떠난 뒤에야 준봉은 다시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차는 경찰서를 향해 빠르게 달렸고 통화를 마친 그는 앞에서 운전하고 있는 구승재를 바라보았다.“목란정원 쪽 상황은 어때요?”“우리 쪽 사람들이 들어갔는데 안에 연정이가 없었대.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갈 때 꼭 큰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조롭게 들어갔대.”시선을 내려 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이 차갑게 웃었다.“역시.”구승재가 얼굴을 찡그렸다.“역시 뭐?”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빛만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어젯밤에 그녀는 일부러 그를 그곳으로 유인한 거다.연정이 사건은 여초연이 한 짓이다.염주를 만지작거리던 구승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뒤틀렸다.하지만 잠시 후 그는
정주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강하리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본인이 말하지 않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방금 강하리 씨 데려다줬어. 웬일로 아들이 보고 싶어서 그래?”연미숙이 잠시 멈칫했다.“이 자식, 누가 보면 내가 평소에 너한테 관심 없는 줄 알겠다.”정주현은 연미숙 앞에서 늘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그래, 관심 많은 거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래?”연미숙은 잠시 침묵했다.“강하리한테 같이 밥 먹자고 해.”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좋았을걸. 그 말을 꺼내니 정주현은 더 우울해졌다.“엄마, 강하리 씨 바빠.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친구들이나 만나지 강하리는 왜?”연미숙이 웃었다.“우리 아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여자를 내가 좀 만나면 안 돼?”정주현이 입을 삐죽거렸다.“영감탱이가 엄마처럼 정신 차렸으면 강하리가 며느리 됐을 텐데.”연미숙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지 말고 빨리 돌아와.”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후, 그녀의 눈에는 악의에 찬 눈빛만이 번쩍였다.강하리는 정주현을 배웅하고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주해찬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일부러 주현 씨랑 거리를 두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정신을 차린 강하리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선배,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주해찬은 그녀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보며 다소 무력하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만약 이 순간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이 구승훈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아니면 구승훈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분명 그가 구승훈보다 먼저 강하리를 좋아했는데.“하리야, 가능하면 나도 네가 기댈 곳이 되어주고 싶어.”강하리의 표정은 굳어졌고 말투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거리를 두는 게 느껴졌다.“선배, 정말 고맙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여초연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구승훈이 제일 잘 안다.정말 여초연이 연정이를 데려갔다면 그렇게 쉽게 꼬리를 드러내지 않았을 테고 초조했던 그는 계속해서 그녀가 먼저 빈틈을 보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소란을 일으킨 뒤 그녀의 움직임을 주시할 생각이었다.그녀의 수단으로 봤을 때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는 걸 모를 리 없었다.그런데도 오늘 대놓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유인한 걸까?그렇다면 연정이에게 일어난 일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더 분명해지지 않나?어쨌든 구승훈은 연정이를 먼저 생각해야 했다.연정이가 정말 그녀의 손에 있고 막다른 길에 이른 그녀가 무슨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그 시각 목란정원에서 여초연은 복도에서 누군가와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다. 이쪽의 깊은 밤과 달리 저쪽은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강하리는 다음 날 주해찬과 함께 B시로 갔다.비행기에서 막 내린 두 사람은 입국 게이트에서 정주현이 신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다.“강하리 씨, 드디어 왔네요!”강하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았다.주해찬은 무기력하게 어깨를 으쓱했다.“어쩔 수 없었어. 계속 물어보니까 시간을 알려줄 수밖에.”정주현은 곧바로 불만을 터뜨렸다. “강하리 씨, B시로 오면 알려준다면서 이러는 건 아니죠!”강하리는 힘없이 웃었다.“가요.”그러던 중 정주현은 강하리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걸 다시 한번 언급했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정주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하리 씨, 그래도 우리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대양그룹에 불만이 있는 것 같잖아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정 회장님이 절 찾아오라고 시켰어요?”정주현은 부인하지 않았다.“영감탱이한테 불만 있는 건 아니죠? 지난번에 구정우 도와줘서 그래요?”강하리는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주현은 그
구승훈의 주변에 우중충한 공기가 감돌았고 차가운 시선은 올곧게 주해찬에게 향했다.가까이 다가온 주해찬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구승훈은 조금도 피할 생각 없이 그대로 얻어맞은 뒤 이윽고 주해찬의 손목에 주먹을 내리쳤다.그 손이 조금 전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 구승훈은 그의 뼈를 부러뜨릴 기세로 달려들었다.주해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구승훈, 하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병원에서 그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아? 네가 뭔데 계속해서 걔한테 상처를 줘, 네가 뭐라고 걔한테 그런 식으로 강요해!”강하리가 병원에서 지냈던 걸 언급하자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당연히 그는 그녀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매일 의사가 진정제를 놓아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심한 우울증이었다.노민준이 그날 했던 말을 그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이러면 언제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위험이 있어. 이젠 살아갈 의욕을 완전히 잃었어.”구승훈의 몸이 경직되었지만 꿋꿋하게 받아쳤다.“주해찬 당신이 뭔데 나랑 하리 사이에 끼어들어?”주해찬은 입가에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아무리 그냥 선배라도 걔가 너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정말 그냥 선배가 되고 싶은 거야? 주해찬, 네 개수작을 모를 것 같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잠시 멈칫하던 주해찬은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내가 아무리 이용하는 거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하는 너보다 나아. 구승훈, 사람 존중하는 방법부터 배우고 다시 하리 앞에 나타나. 그전까지 넌 자격 없으니까.”주해찬은 말을 마치고 곧장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비를 맞으며 서 있던 구승훈은 한참이 지나서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자격이 없다고...맞는 말이긴 한데 그럼 주해찬은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그는 입가를 가볍게 문지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강하리는 주방에 약을 먹으러 가다가 비속에 서 있는 구승훈을 보게 될 줄은 몰랐
가서 팔찌를 가지고 백아영의 생일을 보낸 후 출국할 생각이었고 그 외 일은 지금 당장 처리할 기분이 아니었다.구승훈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손연지의 집 밑에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주해찬이었다.비 오는 밤, 가로등에 반사된 남자의 모습은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무척 적극적이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렬한 불빛이 주해찬에게 비추자 뒤를 돌아본 그가 구승훈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하리를 발견했다.구승훈은 보지 못한 듯 강하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검은 우산이 머리 위로 드리워지며 주해찬의 낮은 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걱정돼서 보러 왔어.”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웃었다.“난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그때 주해찬이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리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 대표님.”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가벼운 웃음을 내뱉으며 주해찬을 향해 시선을 들어 올렸다.“주해찬 씨가 뭐라고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거죠?”주해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하리의 선배로서요.”그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집에 가서 쉬어.”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해찬이 우산을 들고 건물 쪽으로 따라나섰다.구승훈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서리가 낀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비를 맞으며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의 어깨는 단단히 맞닿은 것 같았다.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야 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했다.“선배, 나 혼자 올라가면 돼요.”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입술에 닿았다.입술이 어딘가 부딪힌 것처럼 살이 갈라져 있었다.갈 때는 괜찮았는데 돌아올 땐 입술이 찢어진 채로 왔다.구승훈에 대한 강하리의 쌀쌀맞은 태도는 다 지켜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요했어?”주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하리는 몸이 굳어지더
한편 여초연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도우미가 옆에서 옷을 걸쳐주었다.“사모님, 시간이 늦었는데 일찍 쉬세요.”여초연은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옷을 두른 채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승훈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도우미는 얼굴을 찡그렸다.“잘 지내지 못해요. 강하리라는 여자가 우리 집안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어르신까지 들여보냈는데 큰 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여자한테 홀딱 넘어간 게 틀림없어요.”여초연은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요. 승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며느리니까.”도우미가 입술을 달싹였다.“그래도 구씨 집안이 그 여자 때문에 이 모양이 됐잖아요!”SH그룹이 합병되면서 구씨 집안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도우미들의 일자리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작 여초연은 조금의 초조함도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큰 도련님도 그 여자 때문에 사모님께 화를 냈잖아요.”여초연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따라오지 마요.”그녀가 속삭이자 도우미는 즉시 발걸음을 멈췄다.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검은색 승용차가 구씨 집안 저택에서 시내 반대편 목란정원을 향해 유유히 달렸다.목란정원은 여초연이 소유한 정원인데 그녀는 때때로 며칠씩 이곳에 오곤 했다.구승재는 그녀를 따라 목란정원 입구까지 갔다가 차를 멈췄다.그는 목란정원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형의 지시로 구씨 저택에 머물면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여초연을 감시하는 것이었다.여초연의 차가 목란정원에 들어가는 것을 본 구승재는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고요한 밤, 구승훈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의 입술은 그녀의 귀에 닿은 상태였다.“전화 좀 받고 올게.”구승훈이 떠난 후 강하리 휴대폰도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하리야, 비행기표 샀으니까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요.
구승훈은 상처받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하리야, 넌 늘 그렇듯 매정하네.”강하리가 뒤돌아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구승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움켜잡았다.“딱 하룻밤만. 너 안 건드릴게, 응?”강하리의 몸이 굳어졌고 구승훈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하리야, 내 소원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 네가 이 집에서 아이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몇 번이나 상상했는지 몰라. 여기가 우리 집이야.”강하리의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결국 구승훈의 손을 뿌리쳤다.너무도 분명한 그녀의 거절에 구승훈은 답답한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고 쓴웃음을 짓던 그는 더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샤워하고 나오면 다시 데려다줄게.”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구승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강하리는 통화 중이었다.발걸음이 멈칫한 그는 통화 상대가 주해찬이란 것을 알아차렸다.“선배, 전 괜찮아요.”“알았어, 항공편 예약해. 나도 같이 갈게.”강하리가 전화를 끊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를 껴안고 고개를 숙여 입 맞추었다.“구승훈!” 강하리는 그의 키스에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구승훈은 점점 더 꽉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깊숙이 파고들며 조금의 부드러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마치 화풀이나 비난하듯 키스를 퍼부었다.강하리는 벽에 단단히 밀려서 몸부림을 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그녀가 다리를 들어 그의 아랫도리를 가격하려는데 구승훈이 먼저 그녀의 다리를 붙들었다.강하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구승훈의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는 반격할 방법이 없었다.강하리는 화가 나서 얼굴마저 하얗게 질렸고 구승훈은 실컷 헤집어놓은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강하리가 그의 뺨을 때렸고 이내 구승훈의 얼굴엔 손자국이 생겨났다.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키스로 인해 부어오른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리야, 나 생각이 바뀌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무
그리고는 강하리를 곧장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구승훈의 차는 굉장히 빨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내를 벗어나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구승훈은 주차가 끝나자마자 차에서 내려 강하리를 빌라 안으로 끌어당겼다.빌라는 강하리가 선호하는 스타일로 안팎을 의도적으로 꾸몄다.안으로 들어선 강하리는 몸이 굳어버렸다.“여긴 내가 준비한 신혼집이야.”구승훈이 문득 등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결혼하면 여기서 지내려고 했어. 하리야, 정말 이대로 날 버릴 거야?”강하리는 꾸며진 방을 둘러보며 마음이 씁쓸했지만 애써 두 눈에 담기는 감정을 감추었다.“구승훈,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어떻게 지켜보기만 했어?”말문이 막힌 구승훈은 갑자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미안해.” 남자의 목소리는 죄책감으로 가득했다.“다 내 잘못이야.”강하리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낮은 웃음을 지었다.너무 지쳤다.한때 열정적이었던 사랑이 이제는 고문처럼 느껴졌다.그날 구승훈이 아직도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강하리는 답을 알 수 없었다.어쩌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다.강하리는 구승훈이 진심으로 미웠다.그의 무자비함과 강압적인 성격이 싫었다.둘 사이에서 그는 항상 그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그래, 어쩌면 그는 그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랬을 수도 있다.하지만 자신이 해준 것들이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강하리가 발버둥쳤지만 구승훈은 더 꽉 끌어안았다.“구승훈, 그만하자.”구승훈의 목소리가 잠겼다.“그만하자니, 무슨 말이야? 하리야, 우리 사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아? 문씨 집안도, 구씨 집안도 망했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우리 아이가 죽었잖아!”뒤돌아선 강하리의 눈엔 온통 고통만이 가득한 채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구
“어떻게 알았어?”구승훈은 웃으며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아래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이상해?”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하리야,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당연히 네 일에 대해선 다 알고 있지.”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빼냈다.“그럴 필요 없어.”유난히 침착한 그 말이 구승훈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필요한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강하리, 내가 뭘 하든 그건 내 일이야.”강하리가 비웃었다.“하지만 난 이제 당신이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아.”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몇 마디 말로 두 사람 사이는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 강하리는 그제야 휴대폰을 꺼내 안예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는 최소한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승훈이 옆에 앉아있자 마치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두 사람의 목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그녀의 어머니와 아이...강하리가 가정에서 나오는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데 문득 연정이가 사고를 당한 날 밤도 비 오는 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날 밤이 어땠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연정이가 이렇게 비 오는 밤에 춥고 무서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하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비를 바라보다가 눈가에 차오르는 시큰함을 꾹 참고 빗속으로 걸어가는 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진 우산이 그녀를 덮었다.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주해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렇게 비속우로 달려가면 감기 걸리잖아.”강하리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산 챙기는 걸 깜빡해서.”“왜 전화 안 했어?”주해찬의 우산은 완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내가 마침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았으면 이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려고 했어?”주해찬의 눈에는 나무람과 관심이 가득했고 강하리는 웃으며 시선을 다른 곳